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102화 (에필로그 2) (102/102)

?에필로그 2. 우리 보통의 일상

굳게 닫힌 문은 조용히 열렸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문규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고우리. 우리야.”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던 문규는 금세 멈춰버렸다. 건우가 그녀 앞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아련히 손을 내뻗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초대는 고우리씨 아니고 내가 한 것 같은데.”

“아. 팀장님.”

“이제야 내가 보입니까.”

“죄송합니다. 우리가 너무 예뻐서.”

“생각은 하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질투가 많아서.”

건우는 뒷말에 힘을 담았다. 자기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조차 못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넘실거렸다.

강력한 아우라에 문규는 맥을 추지 못했다.

“왜요. 이 결혼 반대라고 외치고 싶습니까.”

“그냥 우리한테 축하한다고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내가 전하겠습니다.”

그는 단단한 경계의 벽을 허물지 않았다.

그 견고한 벽에 가려져 문규는 발꿈치를 들어도 그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아니. 얼굴만 살짝 보고…….”

“바쁘면 밥만 먹고 가도 되고.”

건우가 큼지막한 손으로 문규의 어깨를 잡았다. 손아귀 힘이 절로 느껴졌다.

“그럼 그만 나가보시죠. 우리랑 내가 아직 못 한 게 많아서.”

“뭘 하시는데요?”

직설적인 말에 건우가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다.

“키스.”

하지만 그는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에 도리어 당황한 건, 문규와 우리였다.

“그러니까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

“키스 하는 걸 굳이 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건우에게서는 묘한 여유마저 흘러넘쳤다. 문규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가는 것만 봐도 통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마지막 한 방을 날리듯 우리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있던 우리의 얼굴을 감쌌다.

당장 키스를 할 포즈였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문규가 대기실을 나섰다.

죽어도 전 여자친구가 새 남자와 키스하는 모습은 보지 못하겠다는 모양새였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건우만을 바라봤다.

곧 모두의 앞에서 맹세를 하게 될 거였다. 서로를 아끼는 부부가 되겠다고.

그런데 평생 곁에 있을 건우의 손짓 하나에도 아직도 두근거리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얼굴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그녀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어디 아픕니까.”

“아뇨.”

“얼굴이 빨개서.”

그가 그녀의 뺨에 살포시 손등을 올렸다. 후끈한 열기가 손등을 적셨다.

“건우씨 때문에 그래요.”

“내가 왜요.”

“심장이 벌렁거려서 그래요. 방금 도발했잖아요. 성주임 앞에서 키스해버리겠다고.”

“예고 없이 해버릴 걸 그랬습니다.”

“진정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냉큼 부케를 들었다. 가깝던 그와의 거리가 조금 벌어졌다.

하지만 향긋한 꽃잎 사이로 그의 숨결이 또렷하게 전해졌다.

“우리 키스는요.”

유혹적인 목소리가 꽃 위로 넘실거렸다.

“나중에요.”

“나중이면…….”

“피날레로.”

그녀는 그를 진정시키기에 돌입했다. 넘실대는 적막을 깨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는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을 확인했다.

난데없는 단식 투쟁에 조금 살이 빠진 선영과 성민이 다정히 들어왔다.

“대리님! 저희 왔어요.”

명랑한 목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차장님도 계셨네요.”

“밖에서 다들 너 찾더라. 손님 맞아야지. 여기서 작가님만 붙잡고 있음 되겠냐.”

“대리님이 너무 예쁘시잖아요. 제가 차장님이라도 절대 못 나갈 것 같아요.”

“그래도 손님맞이는 제대로 해야죠. 일단 나가자.”

성민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작가님. 저희 이따 뵙겠습니다.”

걱정 말라는 듯 성민이 우리를 향해 인사를 날렸다.

“그럼 고우리씨 말만 믿죠.”

“무슨 말이요.”

“피날레, 그것만 기대하는 걸로.”

마지막까지 우리만을 보던 건우가 대기실을 나섰다. 정말 못 말리는 남자였다.

우리와 건우는 각자의 자리에서 손님을 맞기에 바빴다.

하객들로 복작거리던 로비는 금세 조용해졌다. 대부분 식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장 내부는 돔 형태였다. 패션쇼를 보듯 하객들은 양쪽 자리를 모두 채웠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날리는 영상이 높은 천장을 적셨다.

“오늘 사회를 맡은 한성민입니다.”

성민이 마이크를 잡았다. 하객 모두 그를 봤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선영이 가장 빛나는 눈빛을 날려댔다. 그녀는 DSLR 카메라까지 들고는 그를 찍는데 집중했다.

“예식은 주례 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는 센스 있는 농담까지 날리면서 장내 분위기를 돋웠다.

“그럼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아버님과 입장하는 신랑에게 큰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건우는 아버지와 주례단상까지 힘차게 걸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법 긴장한 얼굴이었다.

사방에서 터지는 박수에 민망한 것처럼 보였다.

서로 다가서지 못하는 건우와 아버지를 위해 우리가 만든 자리였다.

주례단상 앞에 선 건우와 아버지는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좋은 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리고는 따뜻한 손길로 등을 다독여주었다.

고생했다고. 이제는 힘들지 말고 행복하자고.

그 손길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잘하고.”

그의 아버지는 빙긋 웃어보였다. 짤막한 말에는 온기마저 묻어나왔다.

“……예.”

그 조그마한 말에 미움도 원망도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어깨를 다독이던 아버지는 단상을 내려갔다.

그가 다시 하얀 천이 길게 뻗은 길을 볼 때까지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오늘 진짜 주인공은 신부님이 아닐까 싶은데요.”

일순 조용해진 식장에 다시 성민의 목소리가 퍼졌다.

“정말 스마트하고 강단도 있고 아름다우시고 지혜로운데다가 멋지기까지 한.”

끝없이 수식어가 쏟아졌다. 토끼 작가에 대한 존경심마저 묻어나왔다.

어둑한 장내를 뚫고 길 끝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쏟아졌다.

하얀 드레스가 눈부시게 빛났다. 길 양 쪽을 채운 꽃향기가 향긋하게 우리를 감쌌다.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그 빛에 홀린 것처럼 건우는 우리를 향해 걸어갔다. 하얀 꽃에 푸릇한 꽃이 뒤섞인 부케를 든 채로.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그를 기다리던 그녀가 빙글 웃었다.

뚜벅뚜벅.

힘차게 걷던 그가 그녀의 앞에 멈췄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부케를 내밀었다.

놀란 기운을 감추지 못한 그녀의 눈이 커졌다.

본래 도우미가 건네는 부케를 받고 동시 입장을 하기로 말을 끝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부케를 건네다니…….

꼭 프러포즈를 받는 것만 같았다.

“계속 여기 있을까요.”

달달한 노래 사이로 그의 말이 스며들었다.

“아뇨. 아뇨, 아뇨.”

우리가 황급히 부케를 받았다. 그가 계속 무릎만 꿇고 있게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이 갑시다.”

“……네.”

“준비 됐습니까.”

“그럼요. 됐어요.”

서로를 다정히 보던 우리와 건우가 주례단상을 봤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만이 작게 들렸다.

“준비가 끝난 것 같은데요. 그럼 신랑과 신부가 동시 입장하겠습니다.”

상황을 정리한 성민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신랑, 신부. 입장.”

그리고 마침내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양 쪽에 펼쳐진 꽃길을 따라서 우리는 천천히 발을 내딛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건우와 나란히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길은 돌아보지 않았다. 널찍이 펼쳐진 새 길에만 집중했다.

그 후로 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선영이 열심히 준비한 유쾌한 축가가 식장을 채웠다.

모두 가뿐하게 박수를 쳐대다가 양가 부모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부부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두 사람에게 축복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끝없이 고생하면서 준비한 예식이 끝을 향해 갔다.

두 사람은 하객들의 박수를 받고는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예쁘다!”

“팀장님, 멋있어요.”

“잘 어울려요!”

곳곳에서 여러 말들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을 이렇게 쉽게 보내줄 수는 없겠죠.”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말은 딱 하나였다.

“뜨거운 키스 정도는 보여줘야죠. 신랑, 신부님.”

키스를 외치게 만든 성민의 마지막 멘트. 그 말에 박수 소리가 커졌다.

‘키스해’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기까지 했다.

쏟아지는 호응에 반응한 듯, 건우가 단숨에 우리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어쩌면 본능이 풀어진 걸지도 몰랐다.

건우의 손길에 우리는 그의 쪽으로 한껏 붙었다.

뜨거운 조명 때문일까. 우리는 온몸이 타는 듯 달아올랐다.

공개된 장소에서 키스라니. 민망하다는 생각과 달리 그녀의 입술은 꼼지락거렸다.

“건우씨. 일단 대충하고 나중에…….”

“계속 나중은 아니겠죠.”

“아뇨. 진짜 호텔에서. 그때 해요. 지금은 가볍게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속사포 랩을 하듯 우리가 끝없이 말을 쏟아냈다. 모두의 눈길이 고스란히 느껴져 쑥스럽기만 했다.

“그건 그때 가서 하죠.”

“건우씨.”

“나는 지금 해야겠습니다.”

“다들 보고 있는데요.”

“고우리가 내 여자라고 자랑하고 싶거든.”

건우에게 후퇴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직진만 존재할 뿐.

그는 더 바짝 우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더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맘껏.”

“하지만…….”

“격렬하면 더 좋고.”

그는 거침없이 우리의 입술을 삼켰다. 말릴 새도 없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소리가 삽시간에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잇속에 짙게 녹아드는 그의 향기만이 똑똑히 풍겨왔다.

우리는 희미해질 것만 같은 향기를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목을 빼고는 그를 갈망했다.

목구멍을 타고 끈적끈적한 타액이 넘어갔다. 조금 벌어진 두 사람의 입술은 거칠게 맞닿았다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어우. 빨리 정리해야겠네요. 그럼 완벽하게 끝까지 행진하겠습니다.”

성민이 던진 말에 뜨겁게 몰아치던 키스가 잠잠해졌다.

우리와 건우는 이마를 댄 채로 거칠어진 숨을 정리했다.

두 사람 얼굴에 피식 웃음이 돌았다. 조명에 부딪힌 드레스가 반짝거렸다.

수면 위로 햇빛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반짝반짝.

“신랑, 신부 행진!”

짐짓 멈췄던 두 사람이 다시 앞을 향해 움직였다.

첫 발이었다.

새로운 길로 내딛은 첫 발.

***

땅거미가 졌다. 바깥 풍경을 보던 우리가 의자에 한껏 몸을 기댔다.

배도 부르고 노곤한 기운이 몰려왔다. 호텔에서 피로를 풀고 우리와 건우는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내일 바로 하와이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배도 부르고 진짜 졸린 것 같아요.”

“고생 많았습니다.”

“건우씨도요. 진짜 어른들 말씀이 맞네요. 결혼 두 번은 못 하겠어요.”

“생각도 말아요. 고우리씨 아무 데도 보낼 생각 없으니까.”

고개를 돌려 건우를 보던 우리가 피식 웃었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여기서도 질투라니!

“저도 갈 생각 없어요. 절대로.”

“좋은 생각입니다.”

만족스럽다는 듯 건우가 빙긋거렸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어날 기운도 없던 우리는 퀭한 얼굴로 그가 사라진 곳을 봤다.

그는 시원한 매실차 하나를 그녀 앞에 내려놨다.

“한 모금 마셔요.”

“저 진짜 배부른데요. 건우씨.”

“그래도 매실차만큼 소화에 좋은 것도 없다고 하니까.”

완고한 거절에 건우가 컵을 들었다. 그러고는 컵을 기울여 매실차를 먹여주었다.

그 손길에 우리는 매실차를 한 모금 듬뿍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배 나온 거 보이시죠.”

“예. 보입니다.”

그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처럼 단숨에 대답했다.

아니, 건우씨. 세상에는 하얀 거짓말도 있는데.

너무 모르는 거 아니냐고요.

“정말 보이시는 거죠.”

“예.”

“보이는구나.”

체념하듯 말을 던진 우리가 슬그머니 두 손으로 배를 가렸다.

“예쁜 건, 눈에 잘 들어오니까.”

“아니. 뭐. 예쁜 건 아닌데…….”

탁, 솟구친 화가 눈 녹듯 사라졌다.

“예쁩니다.”

확고한 말에 그녀의 두 뺨이 붉어졌다. 예쁘다는 말에 적응하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이 모든 것을 무장해제 시키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까 그만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요.”

“우리 방에.”

“갑자기 목이 마른 것 같아서. 저는…….”

우리가 컵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날밤.

그 세 글자가 묘하게 우리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놓아줄 수 없다는 듯, 건우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덜컥 잡힌 손에 그녀는 옴짝달싹 못했다.

“어디 갑니까.”

“매실차라도 한 번 더 마시려고요.”

“어쩌지. 못 보낼 것 같은데.”

“지금 눈빛이 굉장히 음흉하시네요. 건우씨.”

“예. 속도 음탕합니다.”

그녀가 손을 빼려고 할수록 그는 집요해졌다. 탈출구는 없었다.

“그러니까 순순히 가죠.”

“그러는 게 좋겠죠?”

“아마도.”

“그럼 제가 앞장설게요.”

결국 우리는 백기를 들었다.

어차피 다가올 첫날밤이면 당돌하게 맞이할 생각이었다.

뜨거운 침을 삼키면서 그녀는 그의 손을 당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까지 향하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다부진 손길로 객실 문을 열었다. 방 구조를 다시 살필 새도 없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건우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가볍게 그녀를 안아 올리고는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달뜬 숨결이 눅진히 젖어들었다.

건우에게 매달린 그녀는 그의 두 뺨에 손을 댔다. 그러고는 고삐를 풀어버린 듯 달아올라버린 그를 받아들였다.

거친 숨이 잇새를 넘나들었다. 달큰하게 녹아드는 숨소리에 그녀는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짜 조용하네요.”

조용히 말을 내뱉는 우리의 얼굴은 빨갰다. 넘치는 열기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우리뿐이니까.”

“그러니까 단단히 준비하세요. 건우씨.”

용기를 붙든 우리가 건우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야무진 손길로 단추를 풀었다.

하나씩 톡, 열리는 단추 소리가 크게만 들렸다.

“종일 단추만 열 생각은 아니죠.”

우리를 향해 씩 웃던 건우가 침대로 걸어갔다.

킹사이즈 침대는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정돈된 향기가 나는 침대 위로 그녀를 내려놨다.

“내가 굉장히 급해서.”

건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는 단숨에 눈치 챘다.

어설프게 내려온 넥타이를 내던진 그가 단추를 모조리 풀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탄탄한 근육이 단번에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미끄러지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온전히 집중할 때기도 하고.”

우리와 건우의 코끝이 맞닿았다. 말캉대는 느낌조차 그녀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고우리한테.”

그의 선전포고가 귓가에 녹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끈적끈적한 눈빛이 서로를 휘감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원초적인 욕망에 굴복해갔다.

그녀를 미끄러지는 손길이 한없이 부드럽고 대담했다.

달뜬 숨이 그의 귓속에 흐무러지기도 하고 가슴팍에 젖어들기도 했다.

갸륵한 소리가 끝없이 침대를 맴돌았다. 그녀는 단단한 이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가빠지는 숨소리를 막을 길을 찾지 못했다.

“고우리.”

낮은 목소리가 우리의 쇄골 위에 짙게 번져나갔다.

“우리야.”

“……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건우의 힘에 우리는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가느다란 두 팔로 그를 끌어안은 그녀가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온몸을 지배한 강렬한 그 때문에 온 감각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찌릿거리는 기운만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뜨겁게 흘러내리는 땀에 손바닥마저 뜨거웠다.

단단한 그의 팔과 목에는 퍼런 핏대가 섰다. 마지막 정점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그 찰나의 순간.

그의 향기가 그녀에게 녹아들었다.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

“그건 제가 하려던 말이었는데.”

“무슨 말 말입니까.”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는 말이요.”

그 사랑스러운 말에 건우는 피식 바람 빠지듯 웃었다. 더 깊게 우리에게 빠져들 것만 같았다.

어쩌면 영원히 그녀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그래도 그는 마냥 좋았다.

“……사랑해.”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건우가 다정히 말했다.

“저도요.”

“…….”

“저도 진짜 사랑해요. 건우씨.”

우리는 부드러이 그 손을 잡았다.

“그게 끝은 아니겠죠.”

“그럼 뭘 더 원하시는데요.”

“글쎄. 같이 눕고 싶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고.”

“지금부터 계속 하면 되죠. 질릴 때까지 쭉.”

우리와 건우의 목소리가 방을 조용히 맴돌았다.

“우리 닮은 예쁜 아기도 가지고 싶고.”

“아. 그럼 진짜 예쁠 텐데.”

건우는 해맑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손을 꽉 그러쥐었다. 열기가 뒤섞여 누구 체온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은은한 조명만이 넘실대던 그 날. 두 사람은 온전히 하나가 됐다.

두 사람이 아닌, 진짜 하나.

?특별 외전. 아내 바보, 딸 바보

강우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내걸렸다. 운동회가 시작된 운동장은 응원하는 소리와 여러 시합을 하는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따가운 가을볕을 피해 건우는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펼쳤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만든 도시락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정성스레 과일까지 준비한 건우가 우리는 그저 대단하게만 보였다.

그는 보온병에 있던 따뜻한 차를 따라서 그녀에게 건넸다. 향긋한 차 향기가 피어올랐다.

“차까지 준비했을지는 몰랐는데.”

“날이 조금 차서.”

“설마. 외투도 준비한 건 아니죠.”

“벌써 들켰네.”

건우가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냈다. 설핏 가방 사이로 담요까지 보였다.

“무슨 마법 가방 같네요. 말만 하면 다 나오고.”

“그러니까 말만 해요. 다 꺼내줄 테니까.”

우리는 건우에게 팔짱을 꼈다. 그에게 다정히 붙은 채로 운동장을 봤다.

달리기를 하는 아이들에게서는 활력이 넘쳤다.

학부모와 섞여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건우는 목을 빼고 딸을 찾았다.

제멋대로 흐트러진 줄에 서 있는 딸 주결이 보였다.

주결의 첫 운동회였다. 우리와 건우에게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유치원을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두 사람은 들뜬 맘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곧 단거리 달리기 시합을 할 모양새였다.

“주결이 찾았습니다.”

“어디 있는데요?”

“달리기 하려나 봅니다.”

“그럼 바로 가야죠. 가요.”

“캠코더는 들고.”

캠코더를 챙긴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위한 조그마한 배려였다. 그녀는 손을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손을 맞잡은 채, 두 사람은 주결에게로 향했다.

주결은 운동장 한쪽에 앉은 채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기도 하고 더운지 손부채질을 해대기도 했다.

머리에 두른 빨간색 띠가 바람에 팔락거렸다.

붉을 주에, 실 한 오라기 결.

강주결.

그 이름 때문인지 빨간색 띠가 퍽 잘 어울렸다.

“주결아.”

“엄마!”

반가운 듯 제자리에서 일어난 주결이 팔짝 뛰었다.

“아빠도 있는데.”

주결은 건우에게 달려들었다. 캠코더를 든 그는 한 손으로 주결을 번쩍 안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주결은 싱글벙글거렸다.

“우리 아빠 진짜 멋있지.”

주결이 자리에 앉은 친구들을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키도 디게 크고. 나 막 들어주구.”

“진짜 완전 커.”

“우리 아빠도 나 열 배만큼 큰데.”

“우리 아빠는 배만 나왔는데. 이따만큼 나왔어.”

친구들은 제 부모님 자랑을 하면서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뒹구는 낙엽만 봐도 배꼽이 빠질 만큼 웃어댈 것처럼 보였다.

순수한 말들에 건우도 피식 웃었다. 아이들이 떠들 때도 그는 주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볕에 탈까. 아니면 너무 더우면 어쩌나. 한껏 걱정에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주결은 괜찮다는 듯 조막만 한 손으로 이마에 있던 땀을 훔쳤다.

활기찬 운동회 분위기에 더운 것도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야아아! 우리 엄마 건드리지 마.”

친구 하나가 우리를 톡, 건드리는 걸 본 주결이 힘껏 외쳤다.

“우리 엄마는 아빠만 만질 수 있단 말이야.”

“강주결.”

“그죠. 아빠. 주결이하고 아빠 말고 다른 사람은 안 되는 거죠.”

주결을 말리는 우리의 목소리도 소용이 없었다. 주결은 아예 눈에 힘까지 주고는 단단히 말했다.

“큰일 나지.”

부녀가 던지는 아우라에 밀려 남자 아이는 우리를 건드리던 손길을 거뒀다.

“그대로 주결이랑 달릴 생각은 아니죠.”

“그래도 됩니까.”

“건우씨. 참아요. 주결이 시합인데 자기가 더 흥분한 것 같아.”

우리는 그의 품을 파고든 주결을 내려놨다. 정말 주결과 같이 달렸을 지도 몰랐다.

모든 초등학생들 사이를 질주했을지도.

것도 아주 무심한 얼굴로.

“열심히 달리고 와. 주결아.”

“응. 1등할 거예요.”

“다치지 말고.”

“응응!”

주결은 친구들만 힐끗거렸다. 우리가 던진 당부의 말에는 관심조차 없어보였다.

몸통까지 달리기 시합장을 향해 돌린 채로 제 차례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한한 체력이었다.

“조심히…….”

“바이바이.”

제 차례가 다가왔을 때. 주결은 열심히 끝인사를 날렸다.

“걱정됩니까.”

“괜히 넘어질까 봐서요. 주결이가 조금 덤벙대잖아요.”

“넘어지면 내가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그럼 믿을 만하네요.”

우리가 가느다란 팔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반쯤 그에게 기댄 채로 장난을 치고 있는 주결을 바라봤다.

허니문 베이비. 파란 물빛이 예쁜 하와이에서 생긴 아이였다.

그날 이후. ‘퇴근 귀신’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건우는 일이 끝나면 집에만 달려왔다.

아마 아이가 생기지 않았어도 그녀가 보고파 끝없이 집을 향해 내달렸을 것이었지만.

주결이 태어났을 때. 건우는 우리의 커리어를 지켜줄 요량으로 육아 휴직을 냈다.

그녀를 닮은 주결을 보기만 해도 실없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여기서 구경하고 있어요. 뛰기 힘드니까. 잘 찍어올게요.”

건우는 준비 라인 근처에 섰다. 주결이 달리는 모습을 캠코더에 가득 담을 생각이었다.

1등을 거머쥐겠다는 승부욕을 태우면서 주결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아빠!”

주결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파이팅.”

“아빠 파이팅!”

건우는 검지로 앞을 가리켰다. 곧 달리기를 진행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결승점 상황을 체크하던 선생님이 곧, 호각을 힘껏 불었다.

삑!

우렁찬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곧게 그려진 하얀 라인 속을 달렸다.

주결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건우도 달렸다. 열심히 준비한 결과가 무색하게 선두권 아이들과 격차가 벌어졌다.

그 아이들을 따르다가 주결은 그만 발이 꼬였다.

바닥에 엎어진 주결 주변에 흙먼지가 일었다.

“주결아.”

건우가 뽀얗게 날리는 흙먼지를 헤치고 주결에게 달려가려던 때였다.

주결이 터지려는 울음을 꾹 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야무지게 달렸다.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했을 때. 주결은 누르고 있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출발선에 있던 우리도 놀라 주결에게 달려갔다. 그도 캠코더를 끄고 주결을 달래는데 온힘을 쏟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노력에도 주결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8년 인생.

난생 처음 겪는 쓰라린 패배였다.

***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주결은 시무룩했다. 다리에 붙어 있는 밴드마저 밉다는 표정이었다.

“주결이 오늘 되게 잘했는데. 기분이 왜 그럴까.”

짙은 적막을 깨고 우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빠가 만든 김밥 먹고 기분 풀까.”

“1등도 못 하구…….”

“1등하고 꼴등이 어디 있어. 다 잘한 건데.”

우리가 주결의 손등을 톡, 가리키면서 말했다. 손등에는 ‘참 잘했다’는 말이 적힌 보랏빛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래도 나는 꼴찌 했잖아요.”

하지만 그 도장도 주결을 달래주지 못했다.

주결은 김밥에 손을 대지도 않은 채로 입만 쌜쭉거렸다.

“그래서 김밥도 안 먹는 거야?”

“응.”

“아빠가 주결이 주려고 새벽부터 만든 건데.”

그녀가 주결에게 김밥을 내밀었다. 속이 꽉 찬 김밥이었다.

치즈부터 우엉까지 든 영양 김밥이었다.

하지만 주결은 제 손등을 보면서 점심을 먹을 기색도 없었다. 졌다는 실망감에 한숨만 푹푹 내뱉었다.

“주결이가 싫다니까 아빠가 슬퍼하는데.”

그녀는 팔꿈치로 건우의 옆구리를 슬쩍 쳤다. 건우는 하늘을 보고는 우는 시늉을 했다.

“흑흑.”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정체를 할 수 없이 흑흑대면서.

어설퍼도 너무 어설퍼!

“흑흑.”

“아빠 운다.”

하지만 주결은 흑흑대는 소리에 반응했다.

“아빠 김밥 좋아해요. 그니까 울지 마요.”

주결은 냉큼 김밥을 먹었다. 조그마한 입 속에 김밥이 꽉 찼다.

우리는 주결이 체할까. 매실차를 따라주었다.

“김밥 먹고 주결이도 힘내.”

“근데 자꾸 슬퍼요. 1등도 못 하구.”

“아빠랑 2인 3각 경기에서 1등 하자. 그럼 됐지?”

“응!”

기운이 빠졌던 주결은 금세 씩씩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주결이 걱정됐다.

방금 다친 마당에 2인 3각 경기라니.

“진짜 나가게요?”

“예.”

“그래도 주결이 방금 다쳤는데…….”

“내가 잘 보호하고 달리겠습니다. 걱정 말고 김밥 먹어요.”

건우가 김밥 하나를 내밀면서 말했다. 주결이 조금만 다쳐도 크게 걱정하는 건우였다.

그런 그가 주결과 2인 3각에 굳이 나가겠다는 건.

그게 진짜 주결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우리는 그 선택을 믿기로 했다.

“고우리 먹이려고 열심히 만든 거니까.”

“아. 그래서 양이 상당한 거구나.”

“좋아하는 걸로 전부 준비하고 싶어서.”

걱정만 하던 우리가 그제야 도시락 통을 제대로 봤다.

김밥 속에는 제가 좋아하는 재료들이 듬뿍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많이 먹어요.”

그녀가 김밥을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밥은 담백하지만 풍성한 재료 때문에 각양각색 여러 맛을 뽐냈다.

그녀는 김밥 하나를 건우의 입에 넣어주었다.

“진짜 맛있어요.”

“다행이네.”

“아침부터 만드느라 고생 많았죠.”

“예. 힘들었습니다.”

“제가 밤에 마사지라도…….”

“그때도 해주고 지금도 해주면 더 좋고.”

건우가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유혹적인 말에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진짜, 응큼하다니까.”

저돌적인 말에 건우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서로를 보는 두 사람에게는 달달한 기운만 넘실거렸다.

빙긋 웃던 그가 우리에게 깍지를 꼈다.

“아마 주결이도 동생 원할 걸요.”

그녀가 맞잡은 손을 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도리어 건우는 더 적극적이게 그녀에게 다가설 뿐이었다.

아니, 건우씨.

지금 여긴 순수한 운동횐데요.

“아니. 동생 얘길 갑자기 꺼내면 주결이가 걱정할 수 있다니까요.”

“무슨 걱정이요.”

“동생을 더 예뻐할까 봐. 그게 진짜 스트레스가 상당하대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건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결을 봤다.

“동생 가지고 싶어요!”

주결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좋아했다. 우리가 걱정하는 스트레스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 맞다. 동생 생기려면 일찍 자야 된대요.”

“누가 그랬어.”

“우리 반, 지후가요.”

완벽히 맞는 말이 아니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오늘 일찍 잘 거예요!”

주결은 잔뜩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동생이 생긴다는 말 때문인 것 같았다.

당장 동생을 만들어달라는 재촉의 눈빛까지 쏟아냈다.

갑작스러운 눈길에 우리는 난감한 얼굴로 목만 매만졌다.

허니문 베이비는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그래서 만약 둘째를 가지게 된다면 완벽하게 계획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그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동생 카드를 들이밀다니.

우리가 건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 지후다. 지후야. 한지후!”

주결이 반갑게 지후에게 손을 흔들었다. 묘하게 도는 핑크빛 기류가 심상찮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푹 빠진 건우는 그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만약 눈치 챘다면 8살짜리 꼬마에게 으르렁댔을지도 몰랐다.

“나 지후하고 놀래요.”

“김밥은?”

우리의 말에 주결은 볼록한 배만 내밀었다.

“그래도 김밥 몇 개만 더…….”

“괜찮을 것 같은데.”

“혹시 나중에 배고프다고 할 것 같아서요.”

우리는 지후에게 달려가는 주결을 빤히 쳐다봤다.

다친 다리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주결은 마냥 좋아보였다.

“그때 또 먹이면 되죠.”

직진하는 성격은 아마 건우를 닮은 것이 분명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건우도 그녀를 바라보는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우리한테만 집중합시다.”

“또 주결이 동생 말하는 건 아니죠.”

“왜요. 난 오늘밤에 만들고 싶은데.”

건우가 매혹적인 눈길로 우리의 팔을 쓸어내렸다.

색기 어린 손끝에 솜솜이 돋은 솜털이 바짝 설 것만 같았다.

묘하게 찌릿대는 감각에 우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예스를 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질퍽대는 그의 늪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앉은 채로 우리를 올려다봤다.

도망가지 말라는 절절한 눈빛까지 날리면서.

“도망가는 겁니까.”

“아뇨. 도망은요.”

“그럼 왜 일어났어요.”

“그냥…….”

괜찮은 변명이 생각나질 않았다. 우리의 눈동자가 심히 방황했다.

외설적인 글은 담담히 쓰면서 아직도 손길 하나 견디지 못하다니.

하지만 까딱하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더운 것 같아서요.”

그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건우가 우리 손목을 당겼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을 꼴이 됐다.

“낮에는 더울 것 같았습니다.”

낮은 목소리에는 자부심까지 넘쳤다. 그는 가방에서 미니 선풍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선풍기를 틀어주었다. 제법 시원한 바람이 쏟아졌다.

“조금 괜찮습니까.”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뜨거웠던 뺨을 꽉 잡은 열기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건우는 열기를 식히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미니 선풍기가 없었다면 종일 부채를 들고 따라다녔을지도 몰랐다.

왕을 지키는 시종처럼.

“주결 엄마. 너무 보기 좋아요.”

“그러게요. 아빠까지 오시고.”

“너무 잘생기셨네. 선남선녀네요.”

“그니까요. 거기다가 손수 도시락까지.”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돌아온 같은 반 몇 학부모들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

점점 올라가는 온도가 무색하게 우리와 건우가 딱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를 보는 건우 눈빛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우리만 보인다는 듯.

하지만 우리는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아마 잘생긴 건우가 이목을 끄는데 한몫했을 것이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두를 향해 어색하게 웃던 우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선영이 보낸 메시지였다.

-과장님. 드레스 괜찮죠. 과장님한테 괜히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메시지에서도 들뜬 기운이 느껴졌다.

HJ그룹 막내가 일반인과 결혼을 한다는 소식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온갖 투쟁을 겪고 얻은 달콤한 결실이었다.

-예쁘네.

짤막한 메시지를 고작 하나 날렸을 때였다. 건우는 날름 핸드폰을 가져갔다.

“오늘은 우리한테만 집중해요.”

핸드폰을 돌려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하긴. 곧 2인 3각 경기도 나갈 건데.”

우리가 운동장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2인 3각 경기가 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럼 1등하고 올게요.”

“다치지만 마요.”

“1등하면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걸로.”

“아니. 건우…….”

우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건우는 주결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꽤 비장한 기운마저 흘러넘쳤다. 아마도 소원을 위해서 죽기 살기로 내달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하나, 둘. 하나, 둘.”

구령까지 맞추면서 건우와 주결이 열심히 달렸다.

건우는 소원을 향해, 주결은 1등을 향해.

“우리 주결이 잘한다!”

우리는 어느 샌가 발 맞춰 뛰는 두 사람을 응원했다. 소원 걱정은 이미 기억 날려 버린 지 오래였다.

흙먼지를 뚫고 달리는 건우와 주결이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토록 바랐던 1등이었다.

건우는 주결을 안아 올렸다. 어째 주결보다 더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승리에 감격하고 있는 부녀를 향해 다가갔다.

헉헉대던 숨소리조차 정상적이게 돌아가기 전. 건우가 환하게 웃었다.

“소원, 들어주는 거죠?”

“왠지 무슨 소원인지 짐작은 가는데…….”

“그겁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시잖아요.”

“그럼 똑바로 말해줘야 하나.”

건우가 우리 어깨를 감쌌다. 단단한 힘에 우리는 그에게 다시금 바짝 붙어버렸다.

“내 소원.”

꿀꺽.

짐작한 생각이 맞을까. 우리는 내심 긴장이 됐다.

“주결이 동생 갖는 거.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

그리고 혹시나는 역시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럼 쉬러 갈까요.”

“왜, 왜요.”

“오늘밤이 꽤 길 테니까.”

우리의 눈이 커졌다. 빙긋거리는 미소가 건우의 입가에 짙게 번졌다.

“빨리 동생 만들러 가요!”

“여기서는 못 만들어, 주결아.”

“그럼 집에 가서 만들어요! 나는 바로 잘래요. 멋진 동생 생기라고.”

주결은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부녀에게 떠밀려 우리는 돗자리로 향했다.

뜨거운 햇볕이 세 사람을 향해 넘실거렸다.

따뜻한 가을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파란 하늘만 가득한, 가을.

그 가을 하늘 아래, 행복한 웃음만이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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