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100화 (100/102)

제 100화. 새 길이 보일 테니까

성운그룹 본사. 로비를 서성거리던 우리가 카페에 들어갔다. 빠른 퇴근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도 출입 게이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건우가 금방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멀리 고개를 뺐다. 아직 얼굴에 남은 열감도 까끌까끌한 목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절실한 우리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건우가 다른 직원들과 다 같이 로비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무리에는 문규와 소희도 섞여 있었다.

“그냥 갈까.”

건우를 만날 때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냥 가면…….”

중얼거리던 우리의 말이 사그라들었다. 이대로 가면 영영 용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네 맘이 시키는 대로 살아.’

미순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장 쉽지만 하기 힘든 일이었다.

머그컵을 그러쥔 우리는 제 마음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을 놓쳐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머그컵에서 손을 뗀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굳세게 건우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야!”

하지만 우리를 먼저 반긴 건 문규였다. 문규의 얼굴빛이 환해졌다.

“우리 지금 회식 가는데.”

“심하네. 아무나 로비에 들이면 어쩌자는 거야.”

벙긋거리는 문규와는 달리 소희는 온갖 짜증을 부려댔다.

“팀장님. 혹시 저 빠져도…….”

“어디 갑니까.”

“갑자기 고우리씨가 절 보겠다고 와서요.”

코를 쓱 닦으면서 문규는 와하하 웃었다. 승리자의 여유마저 돌았다.

우리를 본 건우는 아무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허락 못 합니다.”

“두 분 사이에 있던 일 때문이라면…….”

“단체 회식을 빠지겠다는 겁니까.”

“북적거려서 한 명 빠진다고 티나지 않을 것 같은데.”

문규의 말에 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를 향해 싱글벙글거리는 모습조차 꼴보기 싫었다.

“성주임님은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우리가 문규의 착각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강차장님하고 할 말이 있어서요.”

“나는 없습니다.”

“아뇨. 제가 있어요. 그러니까 요앞에 있는 카페에서 봬요.”

“들었잖습니까. 회식 있다고.”

건우와 우리 중에서 누구 하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팽팽한 충돌에 건우의 팀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 다들 난감한 얼굴이었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못 갑니다.”

“저는 기다릴게요. 그게 제 결정이니까.”

상한 목 때문에 정갈한 우리의 말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단정하게 목 인사를 한 우리가 로비를 나섰다.

“우리야. 고우리! 나는?”

문규의 공허한 외침만 로비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건우를 돌아보지 않았다.

굳건히 앞만 보면서 걸어갈 뿐이었다. 우리의 발길에는 건우를 기다리겠다는 단호한 다짐만 풍겼다.

본사를 나온 우리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차 한 잔을 시킨 채로 창밖만 바라봤다.

새 팀원들과 회식 장소로 가는 건우의 모습이 보였다. 시야에서 사라지는 건우의 모습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그 때문인지 내려갔던 열이 다시 올라온 듯 얼굴이 뜨거웠다.

‘못 갑니다.’

단호했던 말처럼 건우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우리도 고집을 부릴 참이었다. 얼마나 용기를 내고 달려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가 턱을 괴고 창밖을 봤다. 한없이 그를 기다렸다.

“고객님 죄송한데. 저희가 마감 시간이어서요.”

“아, 네.”

하지만 우리를 찾아온 건 아르바이트생뿐이었다. 우리는 빈 컵을 정리하고는 카페를 나섰다.

따가운 낮볕과는 달리 밤공기는 찼다. 서늘한 기운이 우리를 적셨다.

우리가 팔짱을 끼고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하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밤새 건우를 기다리게 될 것이었다.

차라리 24시간 열려 있는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할 걸. 내심 후회도 됐다.

금세 다리도 뻐근해졌다. 카페에서 떨어질 수도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제자리만 뱅글뱅글 돌던 우리는 닫힌 카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럽게만 보였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우리의 뺨에 빗방울이 톡, 떨어졌다. 손톱만한 빗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산도 없는데.”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소낙비에 우리가 카페 앞에 바짝 섰다.

바닥에 튄 빗방울이 운동화 앞코를 적셨다. 추위와 본격적인 사투를 벌일 때였다.

“차장님.”

건우가 우산을 든 채로 우리에게 달려왔다.

“여기서 뭐하고 있습니까.”

“차장님 기다리죠.”

“말했잖습니까. 못 온다고.”

우리는 건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말끔하던 정장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비에 젖어 재킷의 빛깔이 더 진해졌다.

건우가 가쁜 숨을 조용히 삼켰다. 하지만 정신없이 달려온 것을 모두 지울 수는 없었다.

“저는 말했잖아요. 기다리겠다고.”

“고집 부려도…….”

“더 부리려고요. 덕분에 차장님도 왔잖아요.”

우리가 건우의 말허리를 가볍게 잘랐다.

“그냥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거짓말.”

“아뇨. 사실입니다.”

“걱정돼서 온 거잖아요. 제가 정말 여기 계속 있을까봐.”

그 말 하나에 건우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아닙니다.”

건우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속내는 숨기려고 발버둥을 친 것이었다.

“받아요.”

건우는 우리의 눈을 피하면서 우산을 내밀었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어디 가시게요.”

“보고 할 필요 없다고 보는데.”

“저도 굳이 차장님 우산 받을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우리는 우산을 받아들지 않았다. 우산을 건넨 건우가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은 아니잖습니까.”

건우가 우리를 설득하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눈빛은 단호하기만 했다. 고집을 꺾을 생각이 조금도 없어보였다.

“있을 수도 있죠.”

“고집 그만 부려요.”

얼굴빛도 창백한데.

건우는 목구멍을 맴도는 말을 힘겹게 삼켰다.

“고우리 대리하곤 할 말도 없고…….”

“제가 있어요.”

“아니. 들을 말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가요.”

건우가 우산을 접었다. 차가운 비가 건우를 적셨다. 건우는 말없이 우리의 옆에 우산을 놔주었다.

그러고는 무표정에 감정을 숨기면서 발길을 돌렸다. 건우가 무심히 돌아섰다.

“차장님. 건우씨!”

우리는 우산을 펴고는 건우를 향해 달렸다.

“가지 마요.”

하지만 건우는 계속 멀어졌다.

“봤단 말이에요!”

힘껏 외친 말이 빗줄기를 갈랐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말에 건우는 제자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원망과 미움이 뒤섞인 눈빛을 마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용서를 빌 때가 온 거라고.

꼿꼿하게 앞만 보던 건우가 몸을 돌렸다. 건우에게 달려온 우리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힘껏 내뻗어 건우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빗줄기가 우산살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전부 다 봤어요.”

건우는 우리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봤습니까?”

“차장님.”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묵직한 말이 우산 속을 적셨다.

“내 잘못이었습니다.”

“그건…….”

“나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고우리씨 아버진. 내 욕심 때문에.”

홀로 감당하던 죄책감을 쏟아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내뱉고 싶지 않은 진실이기도 했다.

구태여 힘든 기억을 헤집어 우리가 상처를 받을까. 그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아뇨. 차장님이 아니래도 들어가셨을 거예요.”

“고우리씨.”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거든요.”

우리는 여전히 건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리의 기억 속 성원은 항상 현장에 있었다.

출근하는 성원을 볼 때면 매일 마음을 졸였다.

성원이 제일 먼저 화재 현장에 들어갔다가 가장 늦게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봤잖습니까.”

“차장님은 부탁만 하셨죠.”

“하지만…….”

“들어갈지 말지는 아빠가 선택한 거예요.”

단호한 말에 건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었을 테니까.”

“…….”

“그러니까 그날 일은 차장님 잘못 아니에요.”

따뜻한 말이 우산 속을 적셨다. 차갑던 공기가 훗훗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빠도 차장님이 힘들길 원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에게서 다정한 눈빛이 쏟아졌다.

“그냥 타이밍이 나빴던 거니까.”

어쩌면 천국에 자리가 비어버려 성원을 빨리 부른 걸지도.

빗줄기가 우산살을 때리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짙게 번진 적막 속에서 건우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까만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상기된 얼굴에 떨어졌다.

“차장님.”

“……예.”

“저는 못 헤어지겠어요. 아니. 못 헤어져요.”

나쁜 운명에 골몰해 무너질 수 없었다.

“제가 선택한 거예요.”

옅은 미소가 우리의 얼굴에 돌았다.

“차장님 없인 못 살 것 같거든요.”

“…….”

“제 인생에서 차장님을 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따뜻한 손길로 건우의 뺨을 쓸어내렸다.

“너무 깊이 박혀버려서.”

얼굴에 녹아드는 온기에 얼어붙었던 건우가 무너졌다. 건우의 눈이 한없이 빨개졌다.

굵직한 눈물이 눈동자에 차올랐다. 붉어진 건우의 입술도 끝없이 떨렸다.

솟구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무표정도 전부 무너졌다.

사고가 일어난 이후. 줄곧 건우를 짓눌렀던 돌덩이가 사라져갔다.

그 속에 눌렀던 슬픔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묵직한 눈물이 툭, 그리고 또 툭 떨어졌다.

무거운 숨을 내뱉어 봐도 한 번 터진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고우리씨. 정말…….”

솟구치는 감정에 건우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온몸이 떨렸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건우를 집어삼켰다.

“……미안합니다.”

속에 담았던 사과가 구슬프게 흘러내렸다. 너무 늦은 말이었다.

합동장례식장에서도. 동네만 뱅글뱅글 맴돌면서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 말이 끝없이 쏟아졌다.

“미안합니다.”

메아리처럼 몰아치는 나직한 말이 우산 속을 적셨다. 건우가 우리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우산을 붙잡은 우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안해요.”

그 무거운 말에 우리는 건우를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토닥토닥. 우산 속을 맴도는 그 소리가 건우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정말, 다 괜찮아.

***

차가운 빗속에 있던 우리는 앓아누웠다. 꼼짝없이 병가까지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건우는 정성들여 죽을 끓여서는 우리의 집에 나타났다.

미순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건우를 대했다.

“강서방 밖에 없네. 호호.”

도리어 종일 우리의 곁에 있는 걸 적극 장려했다. 이미 미순에게 건우는 하나뿐인 사위로 자리 잡았다.

그런 미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 건우는 밤새 우리를 간호했다.

“내일 출근은 어쩌시게요.”

“그러게.”

“걱정 말고 가셔도 돼요. 집도 머시잖아요.”

“싫다면.”

“잘 곳도 없어요. 차장님. 바닥은 딱딱해서…….”

우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건우는 냉큼 바닥에 누웠다.

“좋습니다.”

맨바닥도 상관없다는 모양새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덜렁 누운 건우는 퍽 이상해 보였다.

“내일 일어나면 절로 곡소리 나실 걸요.”

“괜찮습니다.”

“차라리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침대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모습에 건우의 눈이 커졌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건우가 우리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를 눕혔다.

“무조건 쉬어요. 바닥은 금집니다.”

“아뇨. 차장님도 자는데 제가…….”

“눈도 감고. 푹 쉬는 걸로.”

“아니. 저는 아직 잘 생각이 없다니까요.”

“자요. 자야 내일 더 건강해지죠.”

건우가 우리의 눈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온기가 기분 좋게 눈두덩을 녹아들었다.

“자요. 저 진짜 잡니다.”

“예. 자요.”

“손 조금 떼어주시면…….”

우리의 말에 건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형광등 빛이 눈두덩을 환하게 비췄다. 우리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다정한 눈길에 자지 못할 것만 같았다.

“차장님. 가시기는 하는 거죠.”

“가기 싫은데.”

“그러니까 이사는 왜 가셔서.”

“그러게. 다시 근처로 찾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아서.”

“아니. 뭐…… 이사만이 방법은 아닐 것 같은데.”

우리는 꿍얼거리듯 말했다. 작아지는 소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건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알려줘요. 그 방법.”

“아니. 세상에 공짜가…….”

우리의 말이 멈췄다. 건우와의 거리가 한 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입술을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러다가 감기 옮아요. 차장님.”

“괜찮습니다.”

건우의 향기가 짙게 코끝을 돌았다. 그 향기에 우리는 열감이 다시 뻗치는 것만 같았다.

뜨거운 두 뺨이 금세 옅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공짜부터 해결해야 하니까.”

“아니. 어떻게 해결을…….”

건우가 우리의 뒷머리를 눌렀다. 조그마한 손길에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놀란 우리는 눈도 감지 못했다. 따뜻한 숨이 입술에 무르녹았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달달한 향기가 우리의 입술에 돌았다.

건우의 숨결을 따라 굳게 닫힌 입술이 벌어졌다. 깊숙이 파고드는 건우에게 우리는 꼼짝도 못했다.

감기가 옮을까. 떠밀어 봐도 건우는 더 저돌적이게 달려들 뿐이었다. 목을 타고 올라온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차장님, 차장님! 진짜 옮아요.”

우리는 끈덕지게 달라붙은 건우를 겨우 떼어냈다.

“그래야 빨리 나을 것 같아서.”

“스톱이요.”

우리가 다시금 제게 달려들려는 건우를 막았다.

“그냥 말해드릴게요. 방법.”

“사심만 더 채우고 들어도 됩니까.”

“아뇨.”

단호한 거절에 건우는 시무룩해졌다. 잔뜩 실망한 모습에 우리는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했다.

그 모습이 꼭 토라진 강아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법은 관심 없는 건가요. 차장님.”

“관심, 많습니다.”

하지만 서로 가깝게 붙을 수 있는 방법만큼은 놓칠 수 없다는 다부진 눈빛이었다.

“단순한데 복잡하기도 하고. 그런 방법이긴 한데요.”

“무슨 방법입니까.”

“그러니까…… 누구 한 명이 이동하면 바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굳이 이사 비용 쓸 일도 없고. 집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되고. 또…….”

“그 말은 같이 살자는 말로 들리는데.”

구질구질하게 온갖 이유를 덧붙이던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

건우가 핵심을 콕 찔렀기 때문이었다.

“맞습니까.”

재차 묻는 질문에 우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차장님 보내기가 싫어서요.”

“나돈데.”

“그래서 궁리를 해봤는데요. 아무래도 같이 사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프러포즈하는 겁니까.”

“어쩌다 보니까 하고 있네요. 프러포즈.”

화려한 프러포즈는 아니었다. 꽃다발도 노래도 없었다. 누구 하나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날린 프러포즈였다.

그야말로, 상상도 못 한 침대 프러포즈였다.

“반지는.”

우리의 말에 건우가 손을 들었다. 약지에 있는 반지가 반짝 빛났다.

“저는 없는데.”

“커플링은 어디다 뒀습니까.”

“책상 서랍에 있어요. 잘 뒀거든요. 저쪽에…….”

우리의 손짓에 건우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고이 모셔뒀던 반지가 보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우리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프러포즈 반지만큼은 직접 끼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우리씨.”

“네. 차장님. 아니. 건우씨.”

우리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건우의 과거를 봐도 울지 말자고.

기분 좋은 날을 얼룩지게 만들지 않겠다는 굳건한 다짐이었다.

“나하고 같이 살래요?”

“무조건이요.”

단숨에 대답이 뛰쳐나왔다. 건우가 조심스럽게 약지에 반지를 껴주었다. 맞닿은 손이 그대로 느껴졌다.

우리는 사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봤다.

분명 건우와 손이 닿았다. 보드라운 감촉도 느껴졌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우리는 용기 내 건우의 손을 잡았다. 깍지 낀 손이 마냥 놀랍게 느껴졌다.

풀려버렸다. 지독한 저주가.

‘그기야 기스 난 맴이 나으면 잘 무까질지도 모른다 카이.’

노파의 말이 우리의 귓전을 맴돌았다.

끔찍한 능력이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우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왜요. 또 봤습니까. 내가…….”

“괜찮아요.”

우리가 건우에게 달려들었다. 두 팔로 건우를 꽉 안았다.

“손잡아도 이젠 진짜 괜찮아요.”

우리는 제 말을 증명하듯 건우의 손을 꼭 잡았다. 얼마나 잡고 싶었던 손인지 몰랐다.

역시나 아무 변화도 없었다. 건우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바보처럼 실웃음을 뱉었다.

혜원의 말이 맞았다. 길을 잃어도 괜찮았다.

지금처럼 새 길이 나타날 테니까.

향긋한 꽃내음이 나는 따뜻한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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