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화. 그녀의 손이 품은 비밀
낮볕은 따가웠다. 여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날이 맑았다.
훗훗한 열기만이 우리를 감쌌다. 결국 더위를 이기지 못한 우리가 체크무늬 재킷 단추를 풀었다.
“덥다. 더워.”
손부채질도 소용이 없었다. 뜨거운 열기에 화장마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외근을 마친 우리가 서둘러 사무실로 복귀했다. 에어컨 바람을 잔뜩 즐길 생각이었다.
“대리님, 대리님.”
선영이 다급하게 우리를 불러댔다.
“무슨 일이야?”
“드디어 오셨대요. 새 팀장님.”
“아…… 벌써?”
우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건우의 자리를 봤다.
벌써 몇 주 째, 건우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누군가 그 자리를 채울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이 온다니. 기분이 묘했다.
조그맣게 남은 건우의 흔적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넵. 그래서 본부장님이 가볍게 저녁하자고 하셨어요.”
“오늘?”
“오늘이요. 어려우시면…….”
“아냐. 해야지. 새 팀장님도 오셨는데.”
예정된 수순이었다. 빈자리를 마냥 놔둘 수도 없었을 테니까.
우리는 건우의 자리에서 눈길을 거뒀다. 계속 보면 속만 쓰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알고 있을게. 일 봐.”
우리가 제자리에 앉았다. 떠나간 사람은 잊고 일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크게 울려 퍼졌다.
[신제품 기획안…… 아…… 뭐라고 쓰려고 했더라.]
쓸모없는 글자들이 화면을 꽉 채웠다. 집중력이 한없이 흐트러졌다.
“선영씨, 새 팀장님은 어때?”
황주임이 속닥거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거렸다.
새 팀장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경계를 하는 걸지도.
새로운 사람이 건우의 흔적을 너무 빨리 지울까봐.
“인상은 좋아 보였어요.”
“웬만하면 인상은 다 좋잖아.”
“말투도 다정하셨어요. 인사밖에 못했지만.”
“이게 얼굴하고 성격은 별개인 거거든. 얼굴에 속지 말라. 몰라?”
“그래도 나쁜 분은 아니실 것 같아요.”
선영의 얼굴에 순진무구한 미소가 걸렸다.
“어우. 무섭게 긍정적인데? 설마 연애해?”
“아직은 아닌데. 곧 할 것 같아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맹렬하게 타자를 치던 우리의 손이 멈췄다.
“누군데.”
“나중에 말해드릴게요. 아직 고백도 못 했고…….”
“뭐야. 설마. 선영씨가 좋아하던 사람이야?”
“당근이죠. 제가 얼마나 맘에 담아뒀는데요. 드디어 타이밍이 온 것 같아요.”
선영의 말에 황주임의 동공이 흔들렸다. 고백 상대가 건우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황주임은 슬그머니 우리를 곁눈질했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라더니. 진짜 치정이야? 대박.’
자지러지게 웃는 선영과 어둑한 우리의 낯빛이 또렷하게 차이가 났다.
황주임은 조용히 혀를 차대고는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치정에 휘말려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선영씨.”
“넵. 대리님.”
“잠깐 나 좀 볼래?”
황주임은 우리가 선영에게 선전포고를 날렸다고 착각했다. 탕비실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황주임은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았다.
더 이상의 분열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황주임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은 탕비실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세요?”
우리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말하기 힘드신 거예요?”
“아니. 아냐. 그건 아닌데.”
“차장님이요. 얼마 전에 스카우트 제의 받았다고 그러더라고요.”
제 팔짱을 낀 우리가 빙긋 웃어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빛까지는 제대로 막을 수가 없었다.
“백화점에서 일하실 것 같대요.”
“어디 백화점?”
우리가 고개까지 길게 빼고는 물었다.
“성운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의 마음이 철렁 주저앉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우리의 손이 풀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왜 하필 거기에.
“내가 물어봤다는 거. 성민씨한테는 비밀로 해줘.”
“그럼요. 혹시 또 궁금하시면…….”
“아냐. 괜찮아. 더 묻기도 웃기고.”
우리가 선영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나는 조금 더 있다가 나갈게.”
선영에게 전해 받은 소식에 우리의 마음은 뒤숭숭했다. 모든 상황이 빠르게 변해갔다.
자신만을 제자리에 남겨둔 채로.
아무도 없는 탕비실.
그 조용한 공간에 희미하게 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민우는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이제 다…… 끝났어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탕비실을 물들였다. 몸이 부서져라 힘껏 인연의 끈을 잡은 민우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모두 끝나버렸다. 이별이라는 간단한 말로.
균열이 생긴 우리의 일상은 제멋대로 아물어갔다.
그 어떤 규칙도 없이.
제멋대로.
***
주말 아침. 우리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대청소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가올 여름을 맞아 가구 배치를 바꿀 생각이었다. 온온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방 안을 적셨다.
“갑자기 무슨 배치를 바꾼대. 지금도 좋구만.”
우리에게 끌려온 미순이 투덜거렸다.
“분위기도 달라 보이고 좋잖아.”
“좋기는 뭐가 좋아. 지금도 좋다니까.”
“기분전환도 되고.”
“이 엄만 기분전환 할 일이 없다니까 그러네.”
하지만 우리는 간절하게 미순의 팔을 잡았다. 미순을 놓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손길이었다.
혼자서는 책장 하나 겨우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삭신 쑤시네.”
미순이 힘껏 어깨를 두드려댔다.
“가구 옮길 때만 도와줘.”
“으이구. 개딸이야. 주말에도 못 쉬게.”
“대신 그때 말한 안마기 사드릴게.”
순식간에 미순의 눈빛이 번뜩였다. 온갖 불평이 쏟아지던 눈빛조차 온화해졌다. 미순이 삽시간에 침대로 걸어갔다.
“우리 딸. 침대라도 옮겨줄까?”
곧바로 침대를 들어버릴 기세였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안마기의 위력이었다.
“책상부터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옮기려고.”
“창가 쪽에. 거기가 나을 것 같아. 바깥 보면서 비타민D라도 얻게.”
우리가 쭉 손을 내뻗었다. 창을 타고 미끄러진 햇살이 손바닥을 적셨다.
제법 따스한 빛이 우리에게 깊숙이 스며들었다.
“일단 들어.”
굳센 미순의 말에 우리가 모서리를 잡았다. 있는 힘껏 붙잡은 통에 손뼈가 울긋불긋 솟았다.
손톱 끝이 새하얘졌다. 이를 악물고 우리는 책상을 들었다.
번쩍 든 미순의 힘에 책상은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엄마, 엄마. 나 죽어.”
“안 죽어. 들어.”
“잠깐. 잠깐!”
“내린다. 천천히 내려.”
책상의 무게에 우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얼굴로 책상을 든 것처럼.
미순의 말에 따라 우리는 살포시 책상을 내려놨다.
손바닥에 번진 뻐근한 기운에 우리는 두 손을 비볐다.
“어이고. 먼지 보소.”
미순이 혀를 차면서 책상이 있던 곳을 봤다. 책상 넓이만큼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건 무슨 명함이야?”
“무슨 명함?”
미순이 대답 대신 먼지 속에 있던 명함을 내밀었다. 수수한 명함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명함을 받아든 우리가 작은 입김을 불었다. 끈덕지게 달라붙은 까만 먼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명함을 살폈다.
[리멤버 플라워
플로리스트 주혜원]
건우에게서 반쯤 빼앗은 명함이었다.
“무슨 명함인데?”
“꽃집.”
“웬 꽃? 엄만 꽃은 됐어.”
설레발을 치면서 미순이 손을 내저었다. 꽃다발 대신 안마기로도 충분하다는 표정이었다.
능청스러운 손짓에 피식 웃던 우리가 명함을 빤히 쳐다봤다.
주혜원.
그 세 글자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플로리스트의 이름을 보던 우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봤더라.”
혜원의 이름을 살피던 우리의 눈동자가 멈췄다.
“……주혜원.”
생각났다. 주혜원.
‘민우야. 살려줘.’
노파의 기억 속에 있던 이름이었다.
울먹거리면서 민우를 붙잡은 혜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왜 몰라봤을까.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혜원아.’
‘나…… 나 버리고 가는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애달팠던 목소리조차 선명했다.
“개딸. 계속 그러고 있을 거면 엄만 가고.”
미순이 사악한 미소를 날리면서 방문을 가리켰다.
“아냐. 해.”
우리가 후다닥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혼자 침대를 옮겨야 할지도 몰랐다.
“옮겨야지. 침대도 옮겨야 돼.”
“저것만 옮기면 되는 거지?”
“응. 나머지는 내가 다 할게. 엄마.”
“그럼 이동.”
거대한 프로젝트를 앞둔 것처럼 미순이 양손을 맞부딪쳤다.
찰싹거리는 소리가 가벼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끙끙거리면서 침대를 옮겼다.
한참 고생한 끝에 방 구조가 싹 바뀌었다. 다른 곳에 온 것처럼 색다른 느낌이었다.
“난 다신 못 해. 삭신이야. 허리야.”
허리를 두드리던 미순이 방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굳건하게 안마기를 외치면서.
“우리 엄마, 진짜 못 말린다니까.”
미순을 보던 우리도 침대에 누웠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던 우리가 명함을 꺼냈다.
그냥 버릴 수도 있었다. 민우도 더는 관계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냉정하게 굴 수가 없었다.
우리가 몸을 일으켰다. 명함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굼떴다.
입술을 잘근 깨물던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는 단순했다. 꽃을 사야겠다는 핑계였다.
물씬 풍기는 봄기운에 달달한 장면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
그 방패막이를 붙잡고 우리는 방을 나섰다.
“어디 가?”
거실 소파에 누운 미순이 물었다.
“꽃 사러.”
“꽃은 괜찮다니까.”
“아니. 방에 두려고.”
“어디 방에?”
미순의 말에 우리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내 방.”
“갑자기 무슨 꽃이야. 그때도 다 시들어서 버렸잖아.”
맥없이 시름시름 시들어간 꽃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건우에게 선물 받았던 꽃은 누렇게 변해갔다. 뽀얗던 하얀 꽃잎은 갈변한 채로 떨어져 내렸다.
퀴퀴한 죽음의 냄새만 흩뿌리면서.
“이번에는 잘 살려보고 싶어서.”
우리는 애써 벙긋 미소를 지었다.
“금방 갔다 올게.”
“천천히 와. 괜히 빨리빨리 하다가 어디 다치지 말고.”
“알았어. 걱정 말고 쉬고 있어요.”
우리를 보던 미순이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는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단단히 끈까지 졸라맸다. 혜원에게로 향하는 걸음이 제법 무거웠다.
혜원을 만나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원을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혜원에게 향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운명에 끌리듯.
***
한참을 움직이던 우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지하철까지 타고 와버렸다. 혜원이 있는 꽃가게로.
리멤버 플라워
햇볕에 부딪힌 간판이 반짝거렸다. 명함을 보던 우리가 길게 날숨을 내뱉었다.
가게 앞에서 자꾸만 주춤하게 됐다. 우리가 가게 앞만 한없이 맴돌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가게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활기찬 혜원의 목소리가 우리를 맞았다.
“날도 더운데 들어오세요.”
“아뇨. 저는…….”
“물이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온화한 말투에 우리는 혜원의 뒤를 쫓았다. 가게는 여전히 깔끔하고 생기가 넘쳤다.
사방에서 번지는 꽃향기에 마음이 들썩였다.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것만 같았다.
카운터 뒤로 들어간 혜원이 포도 주스를 내밀었다.
“주스라도 괜찮을까요?”
“아, 네네. 괜찮아요.”
우리는 포도 주스를 건네받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던 우리가 혜원의 손을 봤다.
손이 맞닿을까. 조심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우리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조금이라도 손이 스치면 혜원의 과거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민우가 살아 있는 과거를.
“감사하다고 꼭 인사드리고 싶었거든요.”
“무슨 인사를?”
“한소민씨가 SNS에 사진 올려주셔서 매출이 많이 올랐거든요.”
해사한 미소가 혜원의 얼굴에 돌았다.
“덕분이죠. 꽃다발이 워낙 예뻐서.”
“말씀이라도 너무 감사드려요. 그런 의미로 제가 꽃다발 하나 선물 드리고 싶은데.”
“아뇨. 괜찮아요.”
“사양하지 말아주세요. 정말 제가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럼 조그맣게 부탁드릴게요.”
걱정 말라는 듯 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보던 혜원은 거침없이 꽃을 골랐다.
뭉근한 잎이 풍성하게 피어난 초록빛 유카리와 하얀 리시안셔스가 섞였다.
매혹적인 핑크빛 라넌큘러스가 색감을 더했다.
수수하지만 콕, 들어간 포인트가 꽃다발의 매력을 살렸다. 우리는 능숙하게 꽃다발을 만드는 혜원을 빤히 쳐다봤다.
희미하게 나타났던 민우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혜원의 과거를 보면 뭔가 달라지기는 할까.
확률은 절반이었다.
“다 됐네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혜원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맘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굳게 마음을 다잡은 우리가 꽃다발을 받았다. 꽃다발 밑동을 잡은 두 사람의 손가락이 스쳤다.
우리의 까만 눈동자에 푸른빛이 돌았다. 은하수를 품기라도 한 듯 우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우리는 고개를 돌려 가게를 봤다. 꽃이 품은 수많은 색깔들이 흘러내렸다.
꽃향기는 진한 여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매캐한 연기가 우리의 콧속을 쑤셨다.
혜원의 과거로 들어온 것이었다.
교복을 입은 혜원이 울음을 쏟아냈다. 희뿌연 연기에 민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우야. 너 거기 있지? 나 버리고 간 거 아니지.”
울먹이는 혜원의 목소리가 불길에 묻혔다.
“괜찮니?”
낯익은 목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적셨다. 순간 입을 가리고 있던 우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매운 연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우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매순간 그리워했던 목소리였다.
단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목소리.
“다친 곳은.”
“다리가…….”
혜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린 기운이 온몸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상태를 살피던 소방관이 혜원을 부축했다.
“괜찮아. 걱정 말고 아저씨만 따라와.”
소방관이 울먹대는 혜원을 다독거렸다. 우리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뒤를 돌았다.
아버지 성원이었다.
분명했다.
“……아빠.”
울먹거리는 우리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살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힘껏 성원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과거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나가요. 아빠, 제발.”
우리가 바삐 사방을 쳐다봤다. 온갖 위험이 성원을 위협했다. 커다란 불꽃이 사위에서 넘실댔다.
건물은 곧 폭발할 것이었다. 이기적이게도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성원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괜찮을 거야.”
“아냐. 얼른 나가야 돼요. 다 폭발할 거라고요.”
“네 친구도 꼭 구해주마.”
“다른 사람은 생각 마요. 나는 아빠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 계속 보고 싶어.”
혜원을 다독거리는 성원의 목소리와 초조한 우리의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뒤범벅됐다.
“아빠 없이 살기 싫어요.”
훌쩍대는 우리의 소리가 커졌다.
“아빠가 필요해요. 엄마도, 나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혜원을 건물 밖으로 내보낸 성원의 숨이 가빴다. 계속 불길을 뚫느라 모든 기운을 쏟아버린 것처럼 보였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성원은 불길에 휩싸인 건물을 바라봤다.
“아저씨, 민우가 있어요. 저기 안에 있단 말이에요.”
“그 애 형이 부탁했거든. 구해 달라고.”
“…….”
“그러니까 꼭 데리고 올게.”
성원이 다시 불길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의 눈이 커졌다.
다급히 성원의 팔을 잡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운명은 굴러갔다. 정해진 대로.
“다시 가지 마요. 아빠. 가면 죽어요.”
성원은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건물을 헤집고 들어갔다. 불길과 연기가 뒤섞여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건물로 성원이 사라져갔다.
손을 내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찍이.
우리의 두 뺨을 타고 굵직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 돼. 아냐. 아니잖아.”
“…….”
“가지마. 아빠! 죽지 마요. 제발, 가지 마요.”
우리는 넘실대는 불길에 막혀버렸다. 커다란 굉음은 건물을 집어삼켰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재만 남아 우리의 눈앞에 떨어져 내렸다.
우리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차가운 냉기가 우리의 온몸을 얼렸다.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슬픔이 우악스럽게 목을 졸랐기 때문이었다.
“아니잖아. 아냐.”
우리가 고개를 돌렸다. 얼이 빠진 채로 건물로 걸어오는 건우가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가만히 쳐다봤다.
회색빛 재가 날렸다. 온몸에서 힘이 빠진 우리가 축 늘어졌다.
불안정한 숨이 우리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
건우가 헤어짐을 고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성원의 사진을 본 건우가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것도.
두 주먹을 그러쥔 우리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성원이 죽었다.
민우를 구해달라는 부탁에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정말 차장님이 그랬어요?”
벅차오른 숨을 누르면서 우리가 물었다.
원망의 말만이 혜원의 과거 속을 공허하게 떠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