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화. 애틋한 우리 사이
선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황주임을 봤다. 씩, 미소를 짓던 황주임은 제 핸드폰을 꺼냈다.
“그게 누군데요?”
“차장님.”
“하지만 대리님하고 차장님은…….”
“그래도 차장님이 낫지 않겠어? 아니, 그게 나아.”
더듬거리던 황주임은 이내 확신에 차서는 말했다. 설핏 건우의 눈동자에 돌던 애달픈 기운을 잘못 본 것이 아니길 바랐다.
황주임은 스피커폰을 켰다. 건우에게 가는 전화가 유난히도 떨렸다.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은 테이블에 있던 핸드폰을 봤다.
-무슨 일입니까.
건우가 전화를 받았다. 딱딱한 목소리에 무심한 건우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네. 차장님. 저 황주임인데요.”
-말씀하세요.
“대리님이 너무 취하셔서요. 혹시…… 데리러 와주실 수 있으세요?”
황주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번에 건우가 부탁을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 어디…… 아니. 고대리님 주소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럼.
“잠깐만요!”
갑작스러운 거절에 황주임은 소리를 내질러버렸다.
그 목소리가 전화를 끊으려던 건우를 간신히 막아섰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어찌 뒷말을 이을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황주임은 도움을 갈구하는 눈빛을 선영에게 쏘아댔다.
“그러니까…… 저희도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무책임하게 갈 생각은 아니겠죠.
“아니. 저희가 무책임하지는 않는데. 밤길이 위험하니까요. 저는 어…… 남친이 오기로 했고요.”
-그럼 두 분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뇨. 차장님이 와주시면 안 될까요?”
황주임은 열심히 말끝을 늘여댔다. 땀을 삐질삐질 쏟아내던 황주임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대로 전화가 끊길지도 몰랐다.
-저는…….
“그럼 택시 태워 보내드릴게요!”
선영이 건우의 말허리를 자르고는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근데 요새 세상이 험해서. 괜찮겠죠?”
-…….
“막 나쁜 일이 생길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확률은 절반이니까요. 그죠, 차장님?”
생글거리는 미소와는 달리 무시무시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건우는 딱히 대답이 없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럼 바로 택시에…….”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건우가 결국 선영의 말을 막아섰다. 우리가 걱정돼 미치겠다는 목소리였다.
다급한 심정을 알려주듯 건우는 순식간에 노래방에 나타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모양새였다.
흐트러진 건우의 모습이 두 사람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회사에서는 조금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마셨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계속 드셨거든요.”
“말렸어야죠.”
“못 말릴 것 같아서요. 대리님이 너무 힘들어하셔서.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는데 제멋대로 말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선영의 말에 건우는 할 말을 잃었다. 테이블에 뻗어버린 우리의 뒷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차장님.”
“저희 가보겠습니다.”
우리와 건우만 남겨둔 채로 두 사람은 노래방을 나섰다.
난감한 얼굴로 서 있던 건우가 허리를 숙였다. 곤히 잠든 우리의 모습에 마음이 일렁거렸다.
여전히 예뻤다. 잠든 모습조차.
“고우리씨.”
차마 뱉지 못했던 우리의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얼굴에 스민 온기에 우리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웠던 우리에게 홀린 듯 건우는 눈을 떼지 못했다.
얼굴에 스미는 숨조차 건우를 흔들었다.
우리에 대한 갈망이 깊어졌다. 건우는 우리의 눈을 피했다. 애꿎은 희망이 마음을 갉아댔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는 노래방을 나섰다.
우리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건우는 제대로 부축을 하지 못했다.
우리와 가깝게 붙을 자신이 없었다. 온몸에 남을 우리의 잔향에 한참을 괴로워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우리의 팔만 잡은 채로 북적거리는 골목을 벗어났다.
하지만 비틀거리는 우리를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
순간 우리의 발이 꼬였다. 바닥에 고꾸라지려던 우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얼굴을 적셨다. 우리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졌다.
“아, 나쁜 새끼. 나왔네.”
분노를 품은 목소리가 흘렀다.
“괜찮습니까.”
“아뇨. 완전 별로예요. 나쁜 남자는 진짜 내 취향 아닌데.”
짜증스럽게 목을 긁적대던 우리가 길가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
“쓸데없이 잘생겨서.”
“…….”
“그래서 그런가. 꿈에도 나오는 게. 그런가 봐요. 보고 싶었나 봐.”
우리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축 쳐진 어깨가 슬퍼 보였다.
사위에서는 바람 하나 불지 않았다. 소란스럽던 거리도 조용하기만 했다.
진짜 꿈인 것처럼.
“그래서, 그러니까…… 계속 있으면 안 돼요?”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우의 소매를 잡은 채로 간절히 말했다.
“어디 가지 말고.”
그건 건우가 우리에게 하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가지 말라는 말, 떠나지 말라는 말.
그 말 때문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일렁대는 물결처럼 건우는 휘청거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장 말하고 싶었다.
“계속 있어요. 응?”
네 곁에 있겠다고.
그러고 싶다고.
“나도 그러고……!”
하지만 그 말은 건우의 입 밖을 나오지 못했다. 밝은 빛을 쏟아내는 오토바이가 우리를 향해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황급히 우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질주하던 오토바이가 짙은 회색빛 연기를 내뿜고는 사라졌다.
‘억지로 붙은 인연인데 궁합이 나올 수가 있나.’
욕심 내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다시금 침묵이 젖어들었다.
건우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누군가 소리쳐대는 건지도 몰랐다.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까.
‘설령 나온다고 해도 흉이야.’
하지만 그 벌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할 수는 없었다.
‘서로 나쁜 일만 생긴다고.’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건 네가 아니다.
***
말없이 흐르는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우리와 건우의 간극만 넓혔을 뿐이었다. 건우는 사표를 제출했다.
정해진 회사는 없었다. 그저 당분간은 아무 생각 없이 쉴 생각이었다. 미뤄뒀던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면서.
본부장은 끈질기게 건우를 잡았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건우를 이길 수는 없었다.
우리가 기획한 외부 행사를 끝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말을 끝냈다.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던 건우의 귓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집을 보러 온다는 사람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건우가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굿 부동산인데요. 실례 좀 하겠습니다.”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면서 중개업자가 들어왔다. 갓 결혼을 앞둔 커플이 건우의 집을 둘러봤다.
“집이 너무 예뻐요. 방도 넓고. 빛은 잘 드나요?”
“남향이라 빛도 잘 들고 좋죠.”
중개업자는 장점만을 설명하는 데 열을 올렸다.
여자는 모던한 집 분위기에 푹 빠진 얼굴이었다.
“이사는 언제쯤 가실 예정이세요?”
“집만 빠지면 최대한 빨리 이사할 예정입니다.”
“그러시구나. 혹시 죄송한데 침실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예.”
여자는 남자를 끌고는 열심히 집을 살폈다. 침실부터 주방까지 살피는 동안. 두 사람에게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건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와 꿈꾸던 미래였다.
어떤 가구를 살지. 집은 어떻게 꾸밀지. 어디를 침실로 쓸지.
끝없는 대화 속에서 둘만의 아득한 공간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이젠 한낱 꿈으로 변해버렸지만.
건우는 바닥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사를 가면 우리를 만나는 우연조차 사라질 것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뚫린 것만 같았다. 찬바람이 드나들 만큼 큼지막하게.
“잘 봤습니다. 감사해요.”
“괜찮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러셔야죠.”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사람들은 집을 나섰다. 일순간 집이 조용해졌다.
묵직한 기운을 털어내면서 건우는 주방으로 들어섰다. 늦은 저녁 식사를 할 참이었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저녁을 해먹자면서 성민이 사들고 왔던 바지락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건우가 봉지에 든 바지락을 들었다. 상하기 전에 해치울 생각이었다.
딱히 해먹을 만한 음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간단하게 봉골레 파스타를 해먹기로 했다.
찬장을 연 건우의 표정이 굳었다. 스파게티면이 전부 부스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야.’
‘소리는 무슨. 아, 그냥 시켜먹자. 뭐 만들기도 귀찮다.’
성민이 주방에 들어선 자신을 떠밀던 이유를 그제야 눈치 챘다.
한숨을 내뱉은 건우가 카디건을 입었다. 그리고는 장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산책 겸 외출을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건우가 우산을 펼쳤다.
차가운 빗방울이 우산살을 때렸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내렸다. 우산살을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바지 밑단을 적셨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빗속에 울려 퍼졌다. 건우는 멀지 않은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리된 매대를 살피던 순간이었다.
“아…….”
건우의 걸음이 단박에 멈췄다. 세상 진지한 얼굴로 컵라면을 훑던 우리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컵라면 사시는 건가요.”
어색한 분위기를 뚫고 우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허공을 맴도는 우리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아닙니다.”
“그럼 저는 계속 골라도 될까요.”
“예.”
“차장님도 계속 일 보세요.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자칫하다가는 멍하니 건우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 두 손만 만지작대던 우리는 컵라면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온 신경은 등 뒤를 지나가는 건우만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 컵라면이나 들면서 곁눈질로 건우를 살폈다. 건우의 얼굴은 여전히 핏기 없이 파리했다.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걸까. 불쑥 걱정이 치솟았다. 이제 더는 아무 관계도 아닌데.
우리는 슬쩍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컵라면 고르기에 열중했다.
“그럼 회사에서 보죠.”
파스타면을 고른 건우가 카운터로 걸어갔다. 묘한 여운이 우리를 휘돌았다. 건우를 바라본 채로 우리는 아무 컵라면이나 더듬거렸다.
“그럼 조만간 이사 가시는 건가요?”
“예.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아쉽네요. 저희 어머님도 그러실 것 같고.”
우리의 몸은 자꾸만 카운터로 기울었다. 쫑긋 귀를 세웠지만 건우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무작정 아무 컵라면이나 집은 우리가 카운터로 향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네. 또 오세요.”
하지만 대화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우리는 은근슬쩍 대화 내용을 캐물었지만 쓸 만한 정보는 없었다.
편의점 우산꽂이에 있던 우산을 펼쳐들었다. 편의점에서 쏟아지는 빛이 우리를 감쌌다. 깊은 한숨이 우리에게서 번져나갔다.
“정말로 다 정리하셨네.”
건우의 뒷모습이 저만치 멀어져갔다.
“진짜, 전부.”
짙은 암흑이 건우를 조금씩 갉았다. 맹렬하게 쏟아지는 빗속으로 우리도 발을 내딛었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낡은 운동화 앞코가 진하게 젖어갔다.
느릿하게 떨어지는 발길은 어느 샌가 건우의 뒤를 따랐다.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건우를 제대로 잊지 못한 채로 졸졸 쫓아다니는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에 바짓단이 젖는지도 모르고 건우만을 쫓았다.
천천히 좁혀지던 거리가 마침내 사라졌다. 우리는 건우와 나란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두 사람은 말없이 엘리베이터만 바라봤다. 멈춘 엘리베이터는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어색한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바닥에 댄 우산 꼭대기에서 빗물만 번져나갔다. 곁눈질로 건우를 보던 우리가 헛기침만 연거푸 쏟아냈다.
“저녁 드시나 봐요.”
우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 고대리님은.”
“저도 간단히.”
머리칼을 넘기던 우리가 컵라면을 들었다. 다시금 대화가 끊겼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바랐고 그대로 멈추길 바랐다.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생각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날이 궂네요. 비도 오고.”
“예.”
“갑자기 무슨 비인지.”
우리는 고개를 돌려 밖을 봤다. 몰아치는 비에 나뭇잎들이 바르르 흔들렸다.
사리살짝 고개를 내밀었던 봄이 다시 물러갔다. 옷깃을 여민 우리를 반기듯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건우는 말없이 엘리베이터를 잡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고요한 공기만이 두 사람을 옥죄였다. 우산만 매만지던 우리가 옆을 힐끗거렸다.
“이사…… 가세요?”
“아직 확정된 건 없습니다.”
“집은 구하신 거예요?”
“당분간은 고향에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그 질문까지가 끝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무심히 열렸다.
건우의 눈빛에 등을 떠밀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정말 내일 뵙겠습니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건우는 가벼운 목 인사로 끝인사를 대신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조용히 올라가버린 엘리베이터를 가만히 쳐다봤다.
16층. 그곳에 멈춘 엘리베이터는 다시 내려오지 않았다.
***
성운백화점 앞. 우리가 기획한 플레이레드 행사가 시작됐다. 각 이벤트 존마다 사람들이 몰렸다.
신제품을 시음하기도 하고, 물총을 쏴서 표적물을 넘기는 이벤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저녁에 있을 공연 무대를 최종 체크한 우리가 주변을 둘러봤다.
바람을 따라 꽃비를 흩뿌리던 벚꽃이 완전히 졌다. 거리를 물들이던 분홍 빛깔이 사라졌다.
시간은 그 자리를 초록빛으로 물들였다. 고층 건물을 둘러싼 녹음이 짙어졌다.
그 속에 있는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어머. 고우리 대리님. 안녕하세요.”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원색의 컬러로 잔뜩 힘을 준 소희가 우리에게 걸어왔다.
“대리님을 여기서 다 뵙네요.”
“성운백화점 바로 앞이니까요.”
“어머, 그 말도 맞네요. 진짜 오랜만에 봬요. 대리님.”
“그러게요.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우리의 말에 소희가 한껏 예쁜 척을 하면서 두 뺨에 손을 댔다.
“고생 다이어트가 최고라고 하던데. 어우, 사실이긴 하네요.”
강력한 펀치에 소희의 인상이 금세 구겨졌다. 소희는 구두 앞코로 바닥을 콕, 찍고는 화를 달랬다.
쉽게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육두문자까지 웅얼거렸다.
깊게 숨을 내쉰 소희는 이벤트 존을 둘러보고는 이죽거렸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더니. 옛말이 맞기는 하네요.”
제품을 DP한 것조차 촌스럽다는 듯 소희는 손까지 내저었다.
“아마도 잔치에 가보지 못하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설마요. 제가 명품 브랜드 파티도…….”
“그럼 첫 잔치, 맘껏 즐기고 가세요.”
우리는 소희의 말을 단숨에 자르고는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볼품없는 적수였다.
타임 테이블을 살피던 우리에게 선영이 달려왔다.
“대리님. 큰일 났어요.”
“무슨 큰일인데.”
“인형탈 알바생이 갑자기 배가 아프대서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선영을 따라 우리가 벤치에 앉아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걸어갔다.
우리는 침착하게 아르바이트생의 상태를 살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배를 움켜잡았다. 더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바로 병원에…….”
“내가 데리고 가죠.”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 온 건우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차장님.”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대리님, 저요. 이거 제가 써도 될까요?”
선영이 벤치에 놓인 인형탈을 가리켰다.
“힘들 텐데.”
“한번은 꼭 써보고 싶었거든요. 귀엽잖아요.”
“그럼 부탁 좀 할게.”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사로잡아버릴게요!”
사뭇 비장한 얼굴로 선영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인형탈을 썼다.
해맑은 토끼 캐릭터였다. 신제품 음료 병에 새겨진 유명 캐릭터기도 했다.
마냥 해맑은 모습이 퍽 선영과 닮았다. 선영이 뒤뚱거리면서 이벤트 존으로 돌아갔다.
“그럼 나도 가보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걱정 마요. 다 잘될 거니까.”
어그러진 상황을 다독이면서 건우가 아르바이트생을 부축했다.
그녀를 끌고 차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건우를 스치면서 문규가 지나갔다.
건우는 본능적으로 문규를 경계하면서 뒤를 돌았다. 우리의 앞에서 쭈뼛거리는 문규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했다.
“잘 지냈어?”
문규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하지만 귓전을 맴도는 말에도 건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정히 잠겨 있던 재킷 단추를 푸는 것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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