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화. 봄날은 간다, 무심하게도
우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건우에게 들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생각한 것과 직접 듣는 건 달랐다.
날 선 말이 거칠게 우리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울컥 솟는 마음 때문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우리는 굳세게 다리에 힘을 주었다.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주먹을 쥔 우리가 힘겹게 침을 삼켰다.
“진심이세요?”
“예.”
모진 말이 건우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조금의 주춤거림도 없었다.
오직 지금 상황을 끝내겠다는 굳건한 의지만 느껴질 뿐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헤어질 타이밍만 생각하셨겠네요?”
“미안합니다.”
“정말로 그러셨구나.”
표정 하나 없는 건우의 모습에 우리는 그저 헛웃음만 지었다.
슬픔이 온몸을 휘돌아 손끝까지 삼켜버렸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려 우리는 제 팔짱을 꼈다.
“왜요? 저희 잘 지내고 있었잖아요.”
“그랬습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건가요?”
“그럴지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침이 우리의 목구멍을 헤집었다. 까끌까끌한 모래를 한 움큼 삼킨 것만 같았다.
침이 훑고 지나간 자리마다 따끔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온몸이 부스러지는 기분이었다.
건우 없이 살 수 있을까. 사무실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온갖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머릿속은 복작거렸다.
하지만 모든 상상의 끝은 하나였다. 우습게도 건우를 막고 싶다는 것이었다.
바짓가랑이라도 애달프게 붙잡고는 그가 떠날 수 없도록.
“차장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말해요.”
“저요. 솔직히 이해가 안 가서요. 지겹다는 이유 하나로 헤어질 수 있는 건가요?”
“못 할 이유도 없죠.”
“아뇨. 노력 한 번도 안 해봤잖아요. 그런데 다짜고짜 혼자 마음 정리 다하시고는 헤어지자고요?”
쉼 없이 말을 쏟아내는 우리의 목소리가 커졌다. 숨소리마저 가빠졌다.
“적어도 같이 노력은 해봐야 하는 거잖아요.”
“미안합니다.”
“아뇨. 아뇨. 그 말 말고요. 저는 노력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라고요.”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방 안을 휘돌았다. 우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새빨개진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잔뜩 상기된 우리의 얼굴에 건우는 움찔했다.
우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건우는 우리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우리에게 손을 내뻗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었다.
이별조차 꺼내지 못한 채로 영원히 거짓말 속에 갇힐 것이었다.
그리고는 매일을 가슴 졸이면서 살아갈 거였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괴로워할까, 슬퍼할까.
“그러니까 말해요.”
“…….”
“노력하겠다고.”
그 걱정 속에서.
“제발. 네? 어려운 말도 아니잖아요. 이건 그냥 권태기예요.”
“……권태기.”
“네. 권태기요. 잠깐 터널을 지나는 것뿐이에요.”
건우는 한없이 흔들거리는 마음을 추슬렀다. 우리의 말이 맞았다.
잠깐 어둠을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모두가 행복해질 거였다. 지금만 잘 견뎌내면.
“미안합니다.”
어둠만 벗어나면 빛이 보일 것이었다.
“나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줘.
“자신이 없어요.”
금방 행복해질 거야, 우리야.
정말 눈 깜짝할 새에.
“고우리씨 때문에 다치고 싶지도 않고.”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그게 싫습니다. 매일을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 하는 거. 언제 나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
“같이 고치면 되잖아요. 그깟 운명이 뭐라고.”
“해결할 수 없다면?”
두 사람은 끝없이 평행선을 달렸다. 갈라진 두 말은 절대로 붙을 틈이 없어보였다.
우리는 미칠 것만 같았다. 해답 없는 문제를 붙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감정 하나 담겨 있지 않은 건우의 눈빛을 견디는 것조차 힘들었다. 착 가라앉은 공기가 두 사람의 다리만 감돌았다.
“생각이 바뀔 확률은요?”
“없습니다.”
단단한 목소리가 방에 번졌다. 우리는 버퍼링이 걸린 영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같은 부분만 끝없이 반복해 보는 기분이었다. 갑갑하지만 자칫 잘못 건드리면 꺼질 것만 같은 불안함마저 흘렀다.
끝일까. 이게 정말 끝인가.
비밀스럽던 연애의 끝치고는 너무도 처량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언제부터였어요?”
“미안합니다.”
“그 말이면 단가요? 사람 바보 만들어놓고.”
단조로운 건우의 말에 결국 우리는 폭발해버렸다.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감정이 솟구쳤다.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우리의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원망과 슬픔에 잠긴 눈동자는 갈피를 잃고 방황했다.
“저는 잘 지내보겠다고 여행 계획도 짜고, 선글라스도 샀고요.”
“…….”
“바보처럼 여기저기 다 뛰어다녔어요. 그냥 잘 지내고 싶어서요. 차장님, 웃게 해주고 싶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근데 차장님은 계속 헤어질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네요?”
활기찼던 순간들이 무참히 구겨졌다. 도무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모든 것들이 엉망진창이 됐다.
우리는 사위를 둘러봤다. 고요히 스미는 훈훈한 공기마저 얄밉게 느껴졌다.
솟구치는 감정을 누르듯 우리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재밌으셨죠.”
자기도 모르게 우리는 빈정대듯 말해버렸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드니까. 재밌으셨을 거야.”
“미안합니다.”
“그 말, 그만해요. 듣기 싫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 미안합니다.”
“누가 사과하래요? 사과 받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누가 하래요.”
우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담아둘 수 있는 눈물이 모두 차버린 것만 같았다.
감춘 울음이 그대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저도 됐어요.”
우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캐리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물건들을 욱여넣었다.
건우의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무른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좋아하지도 않았을 거니까.”
캐리어의 지퍼를 닫는 소리가 유달리도 날카롭게 들렸다. 눕혀진 캐리어를 세우는 우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울컥 솟는 마음을 힘겹게 달래면서 우리는 멀찍이 천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디 갑니까.”
“어디든요. 차장님하고 같이 있기도 싫어서요.”
건우가 방을 나서려던 우리의 손목을 황급히 잡았다.
바닥을 구르려던 캐리어 바퀴가 덜렁 멈췄다. 두 사람이 눈길이 맞닿았다.
냉기와 온기가 뒤섞여 미지근한 기운이 돌았다.
“내가 가겠습니다.”
“차장님이 왜요?”
“그게 맞을 것 같아서.”
마지막까지 사과는 없었다.
거짓말이라는 말도.
“그러네요. 제가 굳이 갈 필요는 없겠네요.”
“예.”
“가세요.”
깜짝 이벤트의 일부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이었다.
건우는 제 캐리어를 세웠다.
“돌아갈 때도 우리, 보지 말아요.”
“그러겠습니다.”
“좋네요. 깔끔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이 우리의 입술을 비집고 뛰쳐나왔다.
“차장님 말대로 해요.”
“…….”
“우리, 헤어져요.”
혀끝을 돌던 말이 결국 흘러나왔다.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알이 떨어지는 말들이 은연히 우리를 맴돌았다. 도대체 주울 수가 없었다.
맹랑한 엄포였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헤어지자는 말은 잘게 부서져 두 사람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가기 전에 한 대만 맞아주세요.”
우리가 힘껏 건우의 정강이를 찼다. 아린 기운이 건우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목에 퍼런 핏대가 섰다. 무지막지하게 몰아치는 고통을 참아냈다.
그게 건우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럼.”
단정하게 끝인사를 한 건우는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섰다. 방 한 구석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했던 단출한 짐이 눈앞에서 멀어졌다.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침묵이 방을 집어삼켰다.
“나쁜 새끼.”
우리가 거칠게 반지를 뺐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문을 향해 반지를 던졌다.
하지만 반지는 얼마가지 못하고 우리의 근처에서 뱅글뱅글 맴돌다가 픽, 쓰러졌다.
“개자식. 누군 다시 보고 싶은 줄 알고. 누구는…….”
형광등에 부딪힌 반지가 반짝거렸다. 그 모습에 울먹대던 우리는 그대로 무너졌다.
단단히 버티고 서 있던 다리에서 대번에 힘이 빠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우리는 꺼이꺼이 울어댔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눈초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독한 현실을 인정하려고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떠났다.
이별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숱한 말들을 감당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머릿속을 떠도는 건우를 말끔히 털어낼 수가 없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우리의 조그마한 어깨가 들썩였다.
악몽이다.
찬란한 모든 순간에 당신이 있다는 건.
진짜, 저주일까.
***
캐리어를 끌고 숙소를 나선 건우는 갈 길을 잃었다. 칠흑 같은 어둠만이 건우를 뒤덮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까마득한 거리만을 바라보던 건우가 뒤를 돌았다. 우리가 있는 숙소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숙소로 달려가 우리를 붙잡고만 싶었다.
떠나지 말라고.
제발, 곁에 있어 달라고. 끝없이 애원하면서.
하지만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다는 걸 건우는 잘 알고 있었다.
끝이다. 모두, 끝나버렸다.
“하아.”
공허한 얼굴로 캐리어 손잡이만 꽉 잡았다. 우리와 멀어져야만 했다.
다시 제 발길이 우리에게 향할 수 없도록.
간신히 마음을 붙잡은 건우가 발길을 돌렸다.
한참을 걷다가 마을 어귀에 있던 숙소에 들어갔다.
숙소는 크지 않았다. 한 사람이 사용하기에 적당한 크기였다. 건우는 캐리어를 풀지도 않은 채로 어둠에 잠긴 바깥을 바라봤다.
바람에 흔들려 간간히 창을 두드리는 나뭇잎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깥 풍경을 보는 건우의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우리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만 하면서 차가운 반지만 만지작거렸다.
선득한 기운이 마음을 적셨다.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낼 수가 없었다.
완벽히 끝이 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망설였다. 겁쟁이처럼.
‘돌아갈 때도 우리, 보지 말아요.’
울음을 머금은 우리의 목소리만 넘실거렸다.
‘우리, 헤어져요.’
그 말들이 살아남아 끝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끝이 없는 절벽을 계속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심장을 움켜쥔 말들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거친 숨을 뱉던 건우는 제 목을 쓸어내렸다. 울컥 솟는 마음을 누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차오른 눈물을 모두 삼키진 못했다. 굵직한 눈물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죽을 만큼 아팠다. 목을 조여 오는 슬픔에 무너지면서도 우리가 걱정됐다.
괜찮을까. 어둠처럼 스미는 적막을 잘 견디고 있을까.
자꾸 건우의 눈길은 현관문을 향했다.
‘참아. 참아야 돼.’
건우가 두 주먹을 힘껏 쥐었다. 이제야 어울리는 세상에 왔다.
진한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한 세계.
아스라이 멀어지는 소리들에 안정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건우는 모든 것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아마 빛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게 얼마나 따뜻하고 욕심나는 건지 알아버려서.
영원히 이곳에 있었으면 몰랐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누구든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다.
우리를 사랑하게 된 건.
“하…….”
창에 비친 제 모습에 건우는 실소를 터뜨렸다. 긴 한숨에 끝자락에서 묶어뒀던 눈물이 한없이 터져 흘렀다.
암흑에 젖은 세상이 건우를 파괴해갔다.
아주 잔혹하게.
***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우리는 얼이 빠진 얼굴로 회사에 출근했다.
여행에 대해 묻는 선영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반면에 건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만 처리했다.
마케팅팀을 감싸는 공기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설마 헤어지셨나.”
탕비실에서 나온 선영과 황주임은 낮게 속삭였다.
“말도 안돼요. 두 분이 얼마나 뜨거웠는데요. 그때 보셨잖아요.”
선영이 손을 드는 시늉을 했다. 그 말에 황주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깃집에서 반지 낀 손을 들던 건우의 표정이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별이라니. 믿을 수 없는 가정이기는 했다.
“하긴. 내가 그 눈빛을 잊질 못하지.”
“저도요.”
“거의 꿀이, 자연산 꿀이었다니까.”
“그냥 잠깐 싸우신 걸까요.”
선영은 발꿈치를 들고는 우리를 살폈다.
“헤어진 게 아니면 그러겠지. 원래 여행가면 다 싸우고 그래.”
“근데요. 주임님. 대리님 손에 반지가 없어요.”
“뭐? 뭐!”
순식간에 황주임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별일이 아니라는 듯 황주임은 수줍게 두 손을 들었다.
“진짜 나쁜 소식인데. 혹시 모르니까 차장님도 염탐해봐.”
은밀하게 속닥거리는 두 사람을 향해 우리가 걸어왔다. 누가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눈치였다.
우리는 공항에서 사온 일본 과자를 빌미로 두 사람을 끌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염탐 안 해도 돼.”
“대리님. 그게 무슨…….”
“황주임 말대로 헤어졌으니까.”
우리의 말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육갑커플의 탄생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러니까 일이나 하자.”
별일 아니라는 듯 우리는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입꼬리를 잡아끌면서 억지로 웃던 우리가 탕비실을 나섰다.
이별 선포에 선영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연히 마주친 우리와 건우는 사무적인 목 인사만 하고는 각자의 길로 멀어졌다.
“헐. 대박…… 폭풍이다.”
황주임의 말처럼 마케팅팀은 고요했다. 폭풍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제가 출동해야겠어요.”
“뭐. 어쩌려고.”
“기분 풀어드리려고요. 일만 하면 스트레스만 쌓인다니까요.”
두 주먹을 그러쥔 선영이 우리에게로 돌진했다.
“대리님. 오늘 끝나고 여자들끼리 뭉칠 건데. 시간 되세요?”
“나는 좀…….”
“대리님 없으면 금가루 없는 케이크인데. 가요. 네? 대리니이임.”
선영의 간절한 눈빛이 쏟아졌다. 청승맞게 집에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일찍 퇴근한 세 사람은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볼링장으로 향했다.
회사 근처에 있던 락 볼링장이었다.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우리는 열심히 볼링공을 굴려댔다.
연속으로 쏟아진 스트라이크에 우리는 잔뜩 흥분한 얼굴이었다.
휘슬까지 불고는 테이블에 있던 맥주를 마셨다. 맥주가 고소하지 않고, 조금 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끝없이 맥주가 넘어갔다.
“오늘 술 제대로…….”
“아, 대리님. 저 잠깐 전화 좀 받아도 될까요.”
핸드폰을 보던 선영의 얼굴에 밝아졌다.
[한성민]
핸드폰에 뜬 이름만 봐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헤벌쭉 미소를 지은 선영이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싱글벙글거리는 얼굴이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 모습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매만졌다.
“……강건우. 강건우.”
연락처에 있는 건우의 번호를 빤히 쳐다봤다. 거침없이 연락처 삭제 버튼을 눌렀다.
확인 버튼만 누르면 연락처가 말끔히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손은 확인 버튼 위만 맴돌았다.
“망설이기는. 누가 망설인데.”
“…….”
“나중에 지우자. 나중에. 퇴사하면. 지금 일해야 되잖아.”
쓸모없는 합리화를 하면서 우리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멀찍이 핸드폰을 밀었다. 다시 손을 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전화가 와서.”
“괜찮아. 슬슬 팔도 아프고. 우리 노래방이나 갈까?”
“무조건 좋아요!”
선영의 눈짓에 볼링공을 내려놓던 황주임도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라도 새울 것처럼 세 사람은 노래방으로 향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우리의 독주가 이어졌다.
“강건우, 닥쳐! 닥치고 내말 들어.”
온종일 꺼내지 않았던 건우의 이름을 목이 쉴 정도로 외쳐댔다. 온몸까지 흔들어재끼면서.
한풀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우리는 꽃향기가 나는 술까지 들이켰다.
쉬지 않고 술을 홀짝이던 우리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성민씨라도 부를까요. 아니면 기사님이라도…….”
난감한 얼굴로 우리를 보던 선영이 핸드폰을 꺼냈다. 집에 있는 기사님이라도 부를 기세였다.
팔짱을 낀 채로 물끄러미 우리를 보던 황주임이 고개를 돌렸다.
“아냐. 이럴 때 전화할 사람이 하나 있지.”
그리고는 어디든 전화를 걸려던 선영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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