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94화 (94/102)

제 94화. 우리 그만 헤어집시다

신치토세 공항.

캐리어를 끌고 우리와 건우가 나란히 입구장을 나왔다. 간간히 보이는 한국어가 눈에 띄었다.

사방에 흩어진 뭉게구름이 새파란 하늘을 적셨다. 조금 쌀쌀한 공기에 우리는 얇은 재킷을 여몄다.

우리는 한국에서 예약한 렌트카를 찾았다. 남색의 매끈한 세단이었다.

꼼꼼하게 차를 확인한 건우가 캐리어를 실었다. 우리의 짐은 큼지막한 크기만큼 무겁지는 않았다.

출발할 준비를 마치고, 우리가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

“운전은 내가 하죠.”

“아뇨. 제가 먼저 할게요. 왠지 폼나게 달려보고 싶어서요.”

우리가 선글라스를 매만졌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모양새가 꽤 거만해보였다.

빛에 반사된 선글라스가 반짝 빛났다.

운전석의 문을 잡고 있던 건우가 바람 빠지듯 픽, 웃었다.

“그럼 숙소에 도착하고부터는 내가 맡겠습니다.”

“것도 고려해볼게요.”

“피곤할 텐데.”

“지금 끝내주게 힘이 넘쳐서요.”

걱정 말라는 듯 우리가 조수석을 두드렸다.

“얼른 타시죠. 강건우씨.”

자신만만한 손길로 운전석의 문을 당겼다. 끙끙거리는 우리의 애절한 손길에 건우가 문에서 손을 뗐다.

운전석의 문은 다시 열리지 않을 만큼 굳게 닫혔다.

모든 것을 포기한 건우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한껏 거드름을 피우면서 우리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부드럽게 도로를 내달리던 차가 시골길로 들어섰다.

우리가 차창을 열었다. 초록빛 잎사귀가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따뜻한 햇살이 우리의 두 뺨 위로 부서졌다. 봄 향기가 차안에 짙게 녹아들어갔다.

“거의 도착한 것 같아요.”

네비게이션을 힐끗거리던 우리가 말했다. 아이보리와 회색 톤으로 깔끔한 맛을 더한 숙소가 보였다.

곳곳에 나뭇결을 살린 목조 건물이었다. 하늘거리는 바람에 따라 나뭇잎이 흔들렸다.

그 움직임에 아스팔트 위에 녹아든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어때요.”

주차를 끝내고 차에서 내린 우리가 한껏 기대한 얼굴로 물었다.

“좋은 것 같습니다. 공기도 좋고.”

“그죠. 여기가 조금 시골이라 한적하기도 하고요.”

“잘 골랐네.”

“감탄은 아껴두셔도 돼요. 사실 여기는 안쪽이 더 끝내주거든요.”

우리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기운이 돌았다.

체크인을 끝내고, 객실에 들어섰을 때. 건우는 우리가 기세등등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별장형으로 된 숙소 내부는 널찍했다. 일본 전통과 현대적인 방식을 섞여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커다란 창을 열면 넓은 호수가 보였다. 잔잔한 수면 위로 햇살만 반짝거렸다.

거실 한 쪽에 있는 나무 욕조에서도 고요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객실 내부를 도는 갈색 빛이 건우를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

“끝내주죠.”

“예. 너무 멋있습니다.”

“제가 열심히 찾았거든요. 일본에 사는 친구한테도 물어보고.”

우리는 거실에 선 건우의 허리를 감았다. 너른 호수를 보던 건우가 우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성마르게 흐르던 시간이 우뚝 멈춘 것만 같았다.

아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고요한 시간 속에 갇혀 온전히 우리만을 느낄 수 있기를.

마지막 욕심이었다.

이번 여행도 결국 우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변명으로 욕심을 부린 것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까.

손을 적시던 빛이 희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건우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휘청거렸다.

“큰일이긴 하네.”

“왜요.”

“나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건우는 우리의 어깨를 감싸지도 못한 채로 호수만 바라봤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건우의 허리를 더 꽉 감싼 우리가 고개를 들었다.

“동네 산책도 하고, 온천도 하고. 바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첫날부터 쉬기는 아까우니까.”

“저는 괜찮은데.”

수줍은 얼굴로 우리가 건우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방에만 있어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을 거라는 유혹적인 손길이었다.

건우는 차마 우리를 보지도 못했다. 그 매혹적인 유혹에 손을 내뻗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우리의 두 뺨을 보지도 않은 채로 건우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의 손은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점심부터 먹을까요.”

일순간 조용해진 분위기에 건우가 화제를 돌렸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괜찮은 캐주얼 레스토랑 알아봤거든요.”

“잘됐네.”

“밥 먹고, 후라노로 바로 넘어가면 될 것 같아요. 날이 좋아서 산책하기도 좋을 것 같고.”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내색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여행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분 탓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럼 바로 출발할까요.”

“예.”

서로의 마음을 숨긴 채로 두 사람은 숙소를 나섰다.

우리가 계획한대로 레스토랑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끝내고 후라노로 향했다.

멀찍이 보이는 활화산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연기조차 풍성한 구름에 묻혔다.

차는 자작나무로 둘러싸인 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맑은 공기가 두 사람의 얼굴을 적셨다.

긴 도로의 끝에 표지판이 보였다. 청의 호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운 호수라고 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좁은 산길을 걸었다.

“저거 같아요.”

숲이 품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들뜬 얼굴로 호수를 가리켰다.

청록색과 하늘빛이 맞물려 묘한 빛깔을 자아냈다.

물에 잠긴 고목나무와 호수에 비친 나무가 황홀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와……. 지구 밖에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진 찍어요.”

“내가 찍어주겠습니다.”

“아뇨. 같이 찍어야 제 맛이죠. 혼자 찍으면 쓸쓸하잖아요.”

“여길 다 담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준비했죠. 짜잔!”

우리가 빙긋 웃고는 셀카봉을 꺼냈다. 철저한 준비성이었다. 건우의 손목까지 잡아끈 우리는 한껏 다정한 포즈를 취했다.

건우는 무덤덤한 얼굴로 우리를 따라 어색하게 포즈를 취했다.

꽃받침부터 손가락 하트까지. 온갖 포즈가 우리의 핸드폰에 담겼다.

“그럼 좀 더 보고 이동할까요.”

“그러죠.”

“꽃밭이 하이라이트거든요.”

“가기 전에 부탁하나만 해도 됩니까.”

우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건우를 봤다. 무엇 하나 제대로 부탁해본 적 없던 건우였기 때문이었다.

주머니를 뒤적대던 건우가 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켰다.

“제 핸드폰에도 담고 싶어서.”

“사진요? 제가 밤에 전달…….”

“미리 담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큰 부탁은 아니었다. 고개를 주억대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마지막 순간을 모두 간직하고 싶은 건우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모든 것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도.

“지금 방금 되게 잘 나온 것 같죠.”

흥분한 우리가 건우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예. 예쁩니다.”

“호수 진짜 예쁘죠.”

“고우리씨 말입니다.”

우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어우. 자꾸 띄워주면 저 날아갈지도 몰라요.”

“사실인데 어쩝니까.”

온몸을 적시는 민망한 기운에 우리는 제 얼굴만 쓸어내렸다. 순식간에 솟은 열기에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우리가 새파란 하늘을 쳐다봤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지구 밖까지 날아가기 전에.”

달콤한 칭찬에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우리는 도망치듯 호수를 나섰다.

뽀얀 흙먼지가 일어났다. 건우는 조금씩 멀어지는 우리를 바라봤다.

‘같이 갑시다.’

간단한 말이 목구멍만 따갑게 맴돌았다. 까끌까끌한 모래라도 통째로 집어삼킨 기분이었다.

우리는 끝없이 멀어져갔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큼.

‘고우리씨.’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청량한 빛 속으로 사라졌다. 허망한 미소가 건우의 입가를 돌았다.

산바람이 불어왔다. 적막한 호수의 향기를 품은 바람에 이파리가 흔들거렸다.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만 짙어졌다. 칠흑 같은 침묵만 건우를 휘돌았다.

우리가 없는 세상이었다. 아주, 조용하고도 건조한 세상.

건우는 우리가 사라진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가끔은 적막한 세상을 바란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오만한 착각이었다.

지금 그 세계에서 지금 죽도록 벗어나고 싶으니까.

“건우씨.”

빼꼼 고개를 내민 우리만 봐도 이토록 행복한데.

“계속 거기 계실 생각은 아니죠.”

“……예.”

“하도 안 오셔서 다시 되돌아왔다니까요.”

투덜대던 우리가 건우의 손목을 잡았다.

“압송이라도 해야겠어요.”

손목을 당기는 힘에 멈췄던 건우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사방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이파리가 사각거리면서 흔들대는 소리도 경쾌해졌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숨소리도 적막하던 공간을 채웠다.

우리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고작 그 하나에 삭막해지던 세상에 활기가 돌았다.

건우는 곰살가운 손길을 조용히 바라봤다.

짧은 순간.

가늠할 수도 없는 그 찰나의 순간. 확실히 깨달아버렸다.

이만큼 변할 수 있구나.

네가 없는 내 세상이.

***

여행 일정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호수부터 유람선까지. 우리의 차는 끝없이 도로를 내달렸다.

보랏빛으로 물든 꽃밭을 구경하기도 했고,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 숙소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자리에 뻗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우리는 마지막 날만큼은 오붓한 시간을 즐길 생각이었다.

프라이빗 노천 온천으로 몸을 녹이고 코스 요리를 먹을 계획이었다.

유카타(일본 전통의상)를 들고 있던 우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물 좀 사오겠습니다.”

가방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려던 우리의 손이 멈췄다.

“같이 갈까요.”

“아뇨. 바로 앞인데요.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저는 바로 유카타 입고 있을게요.”

남색 유카타를 입은 건우가 방을 나섰다. 건우를 향해 우리는 아련한 눈빛을 날렸다.

어쩜. 무슨 옷을 입어도 잘생긴 거야.

“아…… 누구 남친인지.”

감탄을 흘리면서 우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건우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사진을 찍을 기세였다.

싱글벙글대면서 우리는 날아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딸. 강서방 이사 간다는데. 사실이야?

미순의 메시지였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우리의 얼굴에서 조금씩 미소가 사라졌다.

유카타를 내려놓은 채로 우리는 미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조차 길게 느껴졌다.

제자리를 돌던 우리는 아랫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어. 엄마. 나, 우리.”

-어. 바쁘지? 일은…….

“끝나고 쉬고 있어.”

우리가 대강 말을 둘러댔다. 급한 출장 일정이 잡혔다고 미순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게 무슨 소리야. 차장님이 이사를 간다니.”

-그렇지. 가는 거 아니지. 가는 거 아니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미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1601호 총각 집 내놓은 거 봤는데. 부동산도 들락날락했다니까.

-설마. 우리 딸도 모르게 이사를 가겠어?

-그러니까 내가 물어보는 거 아냐.

수화기 너머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잡은 우리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사라니……. 기가 막힌 말들이 귓전을 때렸다.

“아니. 무슨 갑자기 이사야. 잘못 아셨나보다.”

-그러니까.

제 말을 하면 나타나는 호랑이처럼 건우가 나타났다.

“엄마. 미안한데, 나 이제 씻으려고. 내일 다시 전화할게.”

-그래. 푹 쉬고 내일 보자.

전화가 끊어졌다. 귓가를 때리던 떠들썩한 소리가 일순간 사라졌다.

우리는 얼이 빠진 얼굴로 건우를 봤다. 건우가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물과 주전부리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어머님이셨습니까.”

“네.”

“걱정되셨나보네.”

우리가 목이라도 마를까. 건우는 우리에게 물을 내밀었다.

제법 심각한 얼굴로 우리는 건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다.

잘못 봤겠지.

딱, 그 한 마디로.

“차장님, 혹시 어디 가세요?”

하지만 우리는 도무지 그 말을 그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글쎄요. 여기 딱히 갈 만한 곳이…….”

“여기 말고요. 집이요. 정말로 집 내놓으셨어요?”

우리의 질문이 곧게 날아갔다.

“아니죠. 누가 잘못 본 거죠.”

우리가 갈망하는 대답을 건우도 잘 알고 있었다. 예, 잘못 봤을 겁니다. 그 말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생각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그러나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건우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통이 유난히도 무겁게만 느껴졌다.

건우는 우리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애꿎은 물통만 만지작거렸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별 타이밍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건우는 짙은 한숨을 느릿하게 삼켰다.

“……아뇨. 집, 내놨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방안에 빠르게 번져갔다.

“왜요.”

“고우리씨한테 설명해야합니까.”

“그럼 말없이 가실 생각이셨어요?”

반문하는 우리의 톤이 조금 높아졌다. 화가 난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는 우리와는 달리 건우는 무감한 눈길만 날렸다.

“아마도.”

건우의 말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사는 갑자기 왜 가시는 건데요.”

“지겨워서.”

“대체 뭐가요.”

“직장, 동네, 관계…… 전부.”

건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시금 욕심에 휘둘려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단어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마음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상처 받은 우리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설마…… 일도 관두려고 하시는 건 아니죠?”

힘겹게 말을 꺼낸 우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느닷없이 맞닥뜨린 현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말 이직을 알아보고 계시거나…….”

“몇몇 회사하고 논의하고 있습니다.”

허탈한 웃음이 우리의 입가에 돌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대로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꺼낼 말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의 관계도 정리하고 있었냐고.

그게, 마지막으로 나와야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만은 꺼낼 수가 없었다. 건우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을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굳은 침만 삼키면서 목을 매만졌다. 숨이 막혀왔다.

속눈썹은 바르르 떨렸고, 싸해진 코는 자꾸만 벌름거렸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당황스러워서요.”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사과 받기가 싫어서요.”

우리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저 물 좀 마실게요.”

건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우리는 테이블에 있던 물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무너지는 정신을 잡으려는 듯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의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우리가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러니까 차장님. 지금 두 개는 정리하신 거네요?”

“아마도.”

“직장하고 동네는 정리하셨으니까. 그니까, 이제 하나만 남았네요.”

울컥거리는 기운이 솟구쳤다. 깊게 들숨을 마시면서 우리는 눈가를 적시는 눈물을 삼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건우가 뱉을 말을 지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요.”

“…….”

“그게 저인가요?”

우리가 화끈거리는 눈에 힘을 줬다. 새하얗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팔짱을 낀 우리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바짝 힘을 주는 통에 뭉툭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아니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을 품은 채.

“……예.”

하지만 희망은 거침없이 무너졌다.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래성처럼.

건우와의 모든 순간들이 순식간에 떠밀려가는 기분이었다.

“고대리님.”

사무적인 목소리만 방안을 적셨다. 건우의 말에 우리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온몸을 견뎌내는 것조차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고우리씨, 우리야.

그 다정했던 목소리조차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우리 대리.”

“…….”

“우리 그만 헤어집시다.”

잔인한 말이 우리를 우악스럽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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