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86화 (86/102)

제 86화. 들키지 않는 영원한 비밀은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징계위원들은 우리를 쳐다봤다. 쏟아지는 차가운 눈빛들을 우리는 담담히 받아냈다.

여전히 수진은 우리를 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고대리 진짜.”

우팀장이 우리의 팔을 툭 쳤다. 승리자의 여유가 짙게 돌았다.

“죄송합니다. 고대리가 가끔 절 시기하는 일이 있어서.”

“…….”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은 심했어. 다들 바쁘신 분들인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우팀장은 우리를 다그쳤다. 쏟아지는 우팀장의 말에도 우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징계위원석에 있던 본부장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대리. 진짜 고대리가 벌인 짓이야?”

본부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번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아는 거냐고!”

흥분한 본부장의 얼굴은 터질듯 빨개졌다. 내부 징계위원뿐만 아니라 외부 위원들까지 모셔온 상태였다.

회장님이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거짓말이었다니.

부하 직원들 하나 관리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받을 것이 뻔했다.

뒷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본부장의 머릿속은 복작거렸다. 갑갑하다는 듯 제 뒷덜미를 긁던 본부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떤 식으로 일을 마무리해야 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본부장은 지금 당장 우리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다 같은 가족인데. 내가 그리 강조를 해도…….”

“가족인데 추행을 하나요.”

본부장이 대회의실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우리가 본부장의 말을 가로챘다.

“고대리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가족끼리 시기하고 질투하고. 무슨 꼴이야.”

“그래서 이번에도 눈감아주실 건가요.”

“무슨 소리야. 고대리.”

“그때도 조용히 넘어가주셨잖아요.”

우리의 말에 본부장은 괜한 헛기침만 해댔다. 조용히 덮었던 우리 사건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래서 시켰습니다.”

우리가 본부장의 말허리를 부드럽게 잘랐다.

“저처럼 당하지 말라고.”

우리의 말에도 우팀장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수진의 배신에 우리가 마지막 객기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우팀장은 곁눈질로 우리를 훑고는 이죽거렸다.

잘난 척하더니. 쌤통이네.

“고대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방법이 없어서요.”

“수진씨는 무슨 죄야. 고대리가 시켜서 고생만하고.”

“그죠. 고생 많았을 거예요. 우팀장님 속이느라.”

우리는 우팀장만 들리도록 속삭이듯 말했다. 우팀장이 수진에게로 급히 눈을 돌렸다. 바닥만 바라보던 수진이 얼굴을 들었다.

“우팀장님이 시킨 일보단 어렵기는 했어요.”

무너질 것 같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진의 눈빛은 한없이 단단해졌다.

“매일 슬퍼하는 척 하는 게 생각보다 진짜 힘들더라고요.”

“강수진씨. 그게 무슨…….”

“팀장님은 하나만 시키셨잖아요.”

“내가 뭘 시켰다고 그래!”

우팀장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도 모르게 당황해 목소리가 높아진 줄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 고대리님이 한 거다.”

“……!”

“징계위원회에서 그렇게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당돌한 수진의 말에 우팀장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만 내뱉었다.

우팀장의 등줄기를 타고 죽죽 땀이 흘러내렸다. 우팀장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달리 묘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증거가 없다는 것에 희망을 걸 수밖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우팀장은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했다.

“그러실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수진은 일렬로 앉아있는 징계위원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놨다. 수진을 빤히 쳐다보던 본부장이 슬그머니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음성 001]

수진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문을 닫는 소리가 회의실을 적셨다.

모두 말도 없이 핸드폰만을 바라봤다.

“팀장님. 무슨 일로…….”

“모르는 척 하네. 강수진씨. 아니. 수진아.”

우팀장의 목소리와 한숨이 핸드폰을 타고 흘렀다.

“회사 그만 다니고 싶은가봐.”

“아뇨. 팀장님. 저는 그냥 그날 팀장님이 제 몸을 더듬어서…….”

“내 동생 같고 예뻐서 그랬지. 내가 괜히 그랬겠어.”

음흉스러운 목소리가 번졌다. 본부장이 당황한 얼굴로 우팀장을 봤다. 무슨 일인지 해명하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해명을 하기에는 너무도 또렷한 증거에 우팀장은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너도 잘 즐겼잖아.”

“저는 싫다고 했어요.”

“내가 다 느꼈어. 좋다고 한 거.”

“팀장님.”

“그니까 이번 일. 고대리가 시킨 걸로 하고 넘어가자고.”

수진의 등을 다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모두 숨을 죽인 채로 핸드폰만을 쳐다봤다.

“누구한테 붙을지 잘 생각해.”

“…….”

“고대리한테 가면 내가 딱 보여줄게. 회사 생활이 어디까지 끔찍해질 수 있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녹음된 파일은 끝났다. 묵직한 정적이 대회의실을 떠돌았다.

난데없는 증거의 등장에 얼어붙은 우팀장은 수진을 향해 걸어갔다.

당장이라도 증거를 회수하겠다는 발길이었다.

“강수진씨.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파일 하나를 가져와서는.”

“하나가 아니면 달라지는 건가요.”

수진은 다른 녹음 파일을 재생하겠다는 듯 핸드폰을 들었다. 수진에게 돌진하던 우팀장이 험상궂은 얼굴로 손을 내뻗었다.

수진의 핸드폰을 부서 버릴 기세였다. 우팀장이 수진의 핸드폰을 가져가려 했을 때였다.

“그만하시죠.”

건우가 우팀장의 손길을 막았다.

“보기에 별로니까.”

“비켜요. 그건 강차장이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증거에 손을 대는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건우는 수진의 핸드폰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놨다.

건우의 말에는 강력한 단어 하나 섞여 있지 않았지만 묘한 아우라가 풍겼다.

“증인으로써.”

건우가 여유로운 미소를 날렸다.

“하지만…….”

“그만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네. 우팀장.”

본부장은 손을 들고는 반박하려는 우팀장을 막았다.

핸드폰을 손에 쥐지 못한 우팀장의 표정은 경직됐다.

“나가봐.”

본부장의 손짓에 우팀장은 어쩔 수 없이 대회의실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팀장은 화를 넘기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수진을 흘겨봤다. 하지만 이내 그 눈길조차 우리에게 막혀버렸다.

“처음부터 고대리한테 붙어먹은 거지.”

우팀장이 수진을 쏘아붙였다.

“글쎄요. 맘대로 생각하세요.”

“고대리. 너…….”

“아직 회의실 앞인데. 괜찮겠죠.”

우리는 대회의실 문을 보고는 말했다. 우팀장은 끓는 화에 몸만 바르르 떨었다.

강력한 한방이 우팀장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우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우팀장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단단해 보였던 우팀장의 세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

몇 주 전.

산책을 즐기고 돌아온 우리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선영에게 계획을 전달받은 수진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오늘 할게요. 신고.”

“서두르지 않아도 돼.”

우리는 감정이 폭발한 수진을 다독거렸다. 어설프지만 우리는 진심을 다해 수진을 위로했다.

수진이 얼마나 힘들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담한 척 굳게 먹었던 마음도 따가운 말에 금세 무너져 내리니까.

“마케팅팀은 별론가. 꽤 재밌는 부서인데.”

우리의 농담에 수진은 코를 훌쩍대면서 피식 웃었다. 우리는 빨개진 수진의 눈을 봤다.

“수진씨.”

묵직한 우리의 목소리가 비상계단을 돌았다.

“수진씨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무슨 일이요.”

“나하고 멀어졌으면 해.”

“……대리님.”

수진은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더는 깊숙이 관여할 수 없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수진은 홀로 이번 일을 헤쳐 나갈 용기가 없었다.

우팀장의 으름장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도 가늠 할 수 없었다.

“대리님 없으면 저 못해요. 저 버리시면…….”

“버리는 거 아냐.”

“하지만 방금 멀어졌으면 한다고 하셨잖아요.”

수진은 자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듯 애절하게 우리의 팔을 잡았다.

“우팀장님이 방심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우리의 말이 곧게 퍼져나갔다. 우팀장은 증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었다.

블랙박스 영상도, CCTV도 없는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수진의 말뿐이었다. 우리는 조금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팀장의 말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우팀장은 수진이 우리에게 넘어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경계를 풀게 해야만 했다. 그래야 우팀장이 수진에게 제가 한 일을 맘껏 떠들어댈 것이었다.

제 성과를 말하고 싶어 하는 우팀장이라면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다.

그 실수가 나올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수진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운이 돌았다.

“그럼.”

“어쨌든 제가 대리님을 배반하면 되는 거죠.”

우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듯 수진은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잘할게요.”

“나도 잘해볼게.”

“제가 혹시 너무 격해져도 너무 놀라지 마시고요.”

“얼마나 격할지. 벌써 긴장되는데.”

우리는 두 주먹까지 쥐었다가 폈다. 수진의 말은 금세 현실이 됐다.

부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을 만들기 위해 우리와 수진이 사무실에서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대리님처럼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노트북을 끄고 일어난 수진의 말에 우리는 한방을 맞은 것만 같았다.

모두 가짜라는 걸 아는데도.

얼떨떨한 얼굴로 수진의 뒷모습을 보던 우리가 주변을 살폈다.

모두들 우리가 수진과 말다툼을 한 것을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눈치들이었다.

우리는 확실히 그 소문을 키울 작정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수진을 따라 엘리베이터까지 쫓았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영업팀 직원들이 보였다.

내일 아침이면 우팀장의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갈 것이었다.

풍선처럼. 아주 크게 부풀어서는.

“대리님, 저는 못할 것 같아요.”

수진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우리는 최대한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땅이 꺼질 듯 크게 한숨까지 내뱉었다. 건우가 봤다면 어색한 한숨이라는 평을 내놨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고똘하고 수진씨하고 완전 깨진 것 같은데.”

속닥거리는 소리가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을 타고 들려왔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뿐하게 웃었다.

멀찍이 헤드라이트를 반짝이는 건우의 차가 보였다. 우리는 단숨에 조수석에 올라탔다.

“잘하고 왔습니까.”

“어우. 수진씨가 장난 아니던데요. 저 진짜 상처받았다니까요.”

“못 봐서 아쉽네.”

“왜요. 전 차장님이 못 봐서 다행인데.”

우리는 얼빠진 표정을 건우에게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건우에게는 예쁜 표정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못난이 표정 말고.

“암튼 얼른 끝났으면 좋겠어요. 해보니까 연기는 제 적성이…… 잠시만요.”

우리는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대리님. 오늘 죄송해요.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끝없이 날아든 수진의 메시지에 우리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출발할 준비를 한 건우가 웃음을 참아대는 우리를 힐끗 쳐다봤다.

“뭡니까.”

“뭐가요.”

“지금 좋아보여서.”

우리는 자랑하듯 건우를 향해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까는 상처받았다면서.”

“다 풀어졌어요.”

빙긋 웃는 우리를 보던 건우도 피식 웃었다. 우리는 우팀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랐다.

소문에 상처를 받는 자기처럼. 수진도 포악한 우팀장의 말에 상처를 받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다.

우팀장이 해고를 받았을 때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질렀던 건.

본부장을 빼곤 징계위원 전부가 징계 내용에 찬성했다.

해고 사유와 해고 날짜까지 우팀장에게 전해졌다.

그야말로 확실한 증거에 걸맞는 말끔한 마무리였다.

***

우팀장의 마지막 날. 우팀장은 큼지막한 박스를 들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제가 얼마나 회사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일을 했는지 보여주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다들 우팀장을 외면한 채로 제 할 일만 해댔다.

“가져갈 것도 많네.”

우팀장은 누구라도 듣길 바라면서 크게 말했다.

“얼마나 열심히 일했으면.”

중얼대던 우팀장의 박스는 금세 찼다. 우팀장은 말끔해진 책상을 봤다. 좁아보였던 책상이 유난히도 크게만 보였다.

씁쓸한 얼굴로 박스를 보던 우팀장이 본부장실로 향했다.

김비서가 본부장실로 들어가려던 우팀장을 황급히 막았다.

“죄송한데 지금 본부장님 급한 용무 중이셔서.”

“무슨 용무.”

“저도 잘 모르지만 오늘은 본부장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나는 예외겠지.”

우팀장은 본부장만큼은 꼭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본부장의 인맥이면 괜찮은 회사를 추천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우팀장님도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요.”

우팀장의 눈치를 보던 김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본부장님이…… 내가 전화 드리는 게 더 빠르겠네.”

우팀장이 단정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본부장실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본부장은 우팀장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팀장을 보기 데면데면하다는 듯.

“하…….”

전화를 끊은 우팀장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본부장실을 빤히 쳐다봤다.

차마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버려진 것이었다.

“다시 약속 잡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러는 게 낫겠네.”

우팀장은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면서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제자리로 돌아온 우팀장은 박스를 들었다.

절벽 끝에 내몰린 것만 같았다. 우팀장이 지나갈 때마다 모두 힐끗거렸다.

경멸에 찬 눈빛을 머금은 채로.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러니까 말이야. 초범도 아니라며.”

“무슨 동생 같았다고. 세상에 개똥같은 소리나 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우팀장을 파고들었다. 그 누구에게도 인사조차 받지 못한 채 우팀장이 사무실을 나왔다.

들고 있는 박스가 유난히 무거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우팀장은 자꾸만 미끄러지는 박스를 꽉 잡았다.

“성가시게 하네.”

우팀장이 박스 밖으로 떨어지려는 슬리퍼와 사투를 벌이던 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우리와 건우가 내렸다.

환하게 웃는 우리의 모습에 우팀장은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사무실로 가던 건우가 우팀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개인 소지품이 상당해 보이는데.”

“개인 소지품 없는 직원도 있습니까.”

우팀장은 쏘아대듯 말했다. 건우가 약을 올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탄산처럼 톡 쏘는 우팀장의 말에도 건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도움의 손길을 거절한 우팀장을 향해 건우가 정갈하게 인사를 했다. 우팀장의 구겨진 얼굴을 펴질 줄 몰랐다.

그 인사가 우팀장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남겼다.

차라리 본부장처럼 무시하는 게 더 나을 것만 같았다.

완벽한 패배감이 우팀장에게 손을 내뻗었다. 우팀장은 멀어지는 건우와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모든 것이 우리와 건우 탓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만 없었어도 징계 해고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잘됐네. 앞으론 HJ그룹에서 만드는 건 전부 사지 말아야겠습니다.”

우팀장이 소리치듯 말했다. 굵직한 핏대가 우팀장의 목에 섰다가 가라앉았다.

“맘대로 하시죠.”

“회장님 아드님은 역시 다르시네.”

우팀장은 건우를 향해 빈정댔다. 해고된 마당에 더는 무서울 것도 없었다. 사무실로 향하던 건우가 고개를 돌려 우팀장을 봤다.

건우의 눈길을 피하면서 우팀장이 내려가는 상자만 추켜올리고 있었다.

“갑질도 대단하고.”

우팀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나가던 직원들은 건우를 힐끗 쳐다봤다.

“마지막이니 비밀 하나 말해드리죠.”

“무슨 비밀이요.”

“잘못 아셨습니다.”

“뭘요.”

옅은 미소가 건우의 얼굴에 돌았다.

“저는 HJ그룹하고 상관없다는 소립니다.”

“그러면 무슨 강선영씨가…… 진짭니까.”

놀란 우팀장은 박스를 놓쳐버렸다. 온갖 소지품이 데굴데굴 복도 바닥을 뒹굴었다.

“그럼 남은 소송도 잘 해결해보시죠.”

건우와 우리의 얼굴에는 승자의 여유가 돌았다.

강제 추행으로 소송당한 우팀장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완전히 졌다는 사실에 우팀장은 화가 치밀었다.

“아이씨!”

우팀장이 벽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아린 기운이 발끝을 타고 번졌다.

우팀장은 아픈 발을 붙잡은 채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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