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화. 대리님, 저는 못할 것 같아요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책상에 있든 꽃을 봤다. 자기 전에 바삐 움직여 주스 병으로 간단하게 꽃병을 만들었다.
맑은 물을 머금은 꽃이 아침 햇볕을 받고는 흐드러지게 피었다.
초록 빛깔의 꽃봉오리가 하얗게 핀 모양새가 우리는 마냥 신기했다.
“양배추 같았는데…….”
우리의 손은 꽃을 매만지지도 못하고 주위만 맴돌았다. 손이 타면 금방이라도 죽을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조심하게 됐다.
건우가 준 꽃을 오래오래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빙긋 웃던 우리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건우와 나란히 향하는 출근길이 우리는 익숙해졌다. 건우가 없다면 도리어 허하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사무실로 향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제보다는 더 활기차보였다.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흔들거리던 마음을 단단히 붙잡은 것이었다.
“좋은 아침.”
우리가 일찍 나와 앉아있던 선영에게 인사를 날렸다.
“오늘 무슨 날은 아니시죠.”
“아닌데. 그건 왜.”
“얼굴빛이 환해지셔서. 무슨 좋은 일 있나 하고요.”
“좋은 일, 만들어야지. 차차.”
우리는 빈 우팀장의 자리를 보고는 말했다. 우팀장이 수진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꼭 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대로 질 수 없다는 것처럼 우팀장도 바삐 반격을 준비했다.
징계 소명서를 작성하고 노무사와 끝없이 전화를 해댔다.
“대리님. 그대로 괜찮을까요.”
빈틈없는 우팀장의 모습에 선영은 걱정돼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저희도 변호사 확, 고용할까요.”
“지금은 그냥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그지만 우팀장님이 자꾸 수진씨를 끌고 나간다는 소리가 있어서요.”
선영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말에 우리의 눈길은 수진의 자리로 향했다.
수진은 기운 없는 얼굴로 키보드만 열심히 두드려대고 있었다.
“외근이나 미팅 때문이라고 하기는 하는데…….”
“아닌 것 같다는 말이지.”
“네. 저러다가 갑자기 수진씨 맘 바뀌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괜찮을 거야. 믿자. 지금은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우리는 걱정 말라는 것처럼 선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수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든 일은 결국 수진에게 달려있었다.
수진이 포기하는 순간. 그 누구의 증언도 필요 없게 될 것이었고 징계위원회가 열릴 일도 없어질 것이었다.
“하긴. 수진씬데. 설마 그러겠어요.”
짙은 걱정을 선영은 단숨에 떨쳐냈다. 전적으로 수진을 믿겠다는 다짐마저 태웠다.
모니터를 빤히 보던 선영이 다시 우리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 맞다. 대리님. 혹시 오늘 바쁘시죠.”
“갑자기 그건 왜.”
“영화 어떠세요. 제가 기가 막힌 거 하나 발견했거든요!”
수진 걱정으로 침울하던 선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선영은 두 눈을 반짝이면서 모니터를 가리켰다. 기가 막힌 정체를 확인한 우리의 얼굴이 굳었다.
포스터만으로도 무서운 기운을 뿜어내는 호러 영화가 눈앞에 딱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어떤 영화도 좋아했다. 공포 영화만 빼면.
깜짝 놀라는 것도 그랬고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 찝찝한 기운이 도는 것도 그랬다.
게다가 자칫 영화 속 귀신이나 살인마가 나타날까. 우리는 제대로 자지도 못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호러 영화라니!
“어…… 선영씨 재밌게 보고 와.”
우리는 달아나듯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선영은 우리를 놔줄 수 없다는 것처럼 우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 손길에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꼭 귀신에게 손목을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놀란 우리 때문에 선영도 덩달아 화들짝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대리님.”
선영은 놀란 속을 달래면서 말했다.
“너무 갑자기 잡아서.”
“죄송해요. 근데 대리님 도움이 꼭 필요해서요.”
“갑자기 무슨 도움.”
“데이트 하자고 해봤는데…… 완전 까였거든요.”
선영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변주가 많은 곡만큼 선영의 기분은 올랐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또 무서운 영화만큼 자연스럽게 스킨십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데.”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
“영화가 가장 쉽고 잘 통한대서요.”
제 두 손을 맞잡은 선영의 눈빛이 번뜩였다.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는 성민도 절친한 건우의 말이라면 들어주지 않을까. 선영의 눈동자에는 기대가 일렁거렸다.
“대리님하고 차장님이 같이 봐주시면 왠지 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말끝을 끄는 선영은 간절한 눈빛만 쏘아댔다.
“팍팍 밀어주시면 진짜 잘될 것도 같은데.”
“일단 말은 해볼게.”
“대리니이임! 역시 저는 대리님 밖에 없다니까요.”
우리는 제게 달려들려던 선영을 겨우 피했다. 사무실에서 서로를 얼싸안은 모습은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종의 거래는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이뤄져야만 했다.
“일단 예매는 하지 말아봐. 혹시 모르니까.”
“또 까일까요.”
우리를 보던 선영이 급격하게 우울해진 기운을 흩뿌렸다.
“아니. 그것보다 정말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하긴. 회사 운영이 원래 바쁘니까. 그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영화는 내가 차장님한테 여쭤볼게.”
“저 완전 기다릴게요. 조용히 기다리겠습니다. 대리님!”
선영은 결의에 찬 얼굴로 냉큼 우리의 손을 잡았다. 그저 우리는 갑작스러운 선영의 손길에 나풀거리고 있는 제 손만 빤히 쳐다봤다.
우리는 정말로 성민이 중요한 일이 있기만을 바랐다. 그게 선영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만약 성민이 영화를 보겠다고 한다면 선영은 정말 성민에게 거절당한 꼴이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선영의 그린 라이트도 저멀리 날아가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무서운 영화를 볼 용기도 없었다.
난데없이 놀라 관객석을 향해 마시고 있던 탄산을 뿜어댈지도 몰랐다.
“좋은 아침이기는 한데…… 저희 설마 단체 영화 보는 건 아니죠.”
출근 시간에 정확히 맞춰 사무실로 들어온 황주임이 기겁하듯 말했다.
단합을 빌미로 단체 영화 관람을 기획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단체 영화는 무슨. 일도 바쁜데.”
우리가 제일 먼저 황주임의 말을 부정했다.
“방금 차장님한테 영화 여쭤본다고 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건…… 그니까, CF 톤앤매너에 참고할 만한 영화가 있어서. 혹시 보셨는지 여쭤보려고.”
우리는 눈 깜짝할 새에 변명을 내뱉었다.
“외부 행사 때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것이었다.
빤히 우리를 보던 황주임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와. 저 진짜 놀랐잖아요.”
“왜 놀라.”
“단체 영화라도 보는 줄 알았거든요.”
“걱정 말고 일 봐.”
우리의 목소리에 한결 여유가 돌았다. 황주임이 눈치 하나 없는 것이 유일하게 고마운 순간이었다.
“어우. 완전 놀랬네.”
황주임은 호들갑을 떨면서 자리에 앉았다.
“온라인팀 단합 볼링 대회 한다고 위로까지 했는데.”
노트북 로그인을 하는 황주임이 중얼거렸다. 아직도 단체 영화 관람을 하는 잔혹한 상상을 떨치지 못한 모양새였다.
영화, 차장님……. 그 두 단어가 주는 무시무시한 파급력이었다.
“선영씨도 놀랬지.”
“아…… 넵!”
고개만 열심히 끄덕이고 있던 선영이 느지막이 꺼낸 첫 마디였다.
조잘대는 황주임의 말에도 선영의 관심은 온통 우리에게 향해있었다.
건우가 힐끗 선영을 봤다. 그 눈빛에 선영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건우가 거절하면 성민을 만날 수 있는 조그마한 가능성도 사라지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진급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선영은 긴장한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제발. 성민씨하고 영화 하나만 보게 해주소서!
***
한없이 진지한 선영의 기도는 통했다.
건우는 우리가 영화 시사회에 당첨됐다는 미끼를 던졌다.
그리고 성민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뛸 듯 기뻐하는 선영을 보면서 우리는 조금 더 적극적이게 선영을 밀어줄 작정이었다.
해맑은 선영의 매력을 성민이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굳은 다짐을 하면서 우리는 일에 열중했다. 바짝 다가온 외부 행사 일정을 타이트하게 관리했다.
타임 테이블에서 조금도 어긋나는 구석이 없도록 우리는 업체들을 핸들링해나갔다.
“고대리님. 가수 라인업은 보내준 대로 픽스하죠.”
“바뀔 부분은 없을까요.”
“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우리는 행사 피날레를 장식할 콘서트 라인업까지 확정했다.
완연한 봄과 어울리면서도 한소윤이 있는 걸그룹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가수들로 라인업이 짜여있었다.
그야말로 강약이 완벽하게 조절된 라인업이었다.
우리가 마지막 부킹까지 끝냈을 때였다.
“먼저 퇴근합니다.”
가죽 가방 하나 없는 우팀장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코앞에 닥친 징계위원회를 준비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양새였다.
“예. 사무장님. 지금 가고 있습니다.”
우팀장은 한껏 격식까지 차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금방 갑니다.”
우리에게 들릴 만큼 우팀장의 목소리는 컸다.
징계위원회에서 쏟아질 예상 질문까지 뽑아 연습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는 절대 질 일이 없다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가자미눈으로 우리를 힐끗 노려보던 우팀장은 사무실을 나섰다.
“수진씨 요새 죽을 맛일 것 같던데.”
목을 빼고 우팀장을 보던 황주임이 선영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는 황주임의 말을 못한 것처럼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수진씨가 왜요.”
“우내시가 일을 죄다 가져갔나봐. 일 주지도 않고. 그냥 앉아만 있게 하는 거지 뭐. 사람 피 말리게.”
“와…… 진짜 우팀장님.”
선영은 우팀장이 사라진 곳을 째려봤다.
“무슨 씨 발린 수박처럼 생기셔서는!”
격양된 선영의 목소리에 놀란 황주임의 눈이 커졌다. 거침없이 쏟아질 욕설만큼은 막겠다는 듯 황주임은 선영의 입을 재빨리 막았다.
황주임의 손가락 마디 사이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뼈도 추리지 못할 만큼의 험악한 말들이 듬성듬성 잘려 쏟아져 내렸다.
“진정해. 선영씨. 여기 회사야.”
우리의 눈치를 살피던 황주임이 조용히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경고는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열 그만 내고 얼른 퇴근해.”
한없이 웅얼대던 선영은 퇴근이라는 말에 바로 잠잠해졌다.
“그럼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주임님.”
“정말 가는 거니.”
“넵. 주임님 말이니 바로 들어야죠.”
“무슨 감정이 확 바뀌어. 퇴근 매직이냐고.”
황주임은 발랄하게 퇴근 준비를 하는 선영을 그저 신기하게 쳐다봤다.
열을 내다가 바로 식다니. 황주임은 선영이 미지의 종족처럼 느껴졌다.
얼빠진 황주임을 향해 끝인사를 날린 선영은 퇴근을 했다.
선영을 시작으로 건우도 퇴근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려면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건우는 곧장 퇴근하라는 눈빛을 우리에게 쏘아대면서 사무실을 나섰다.
그 눈빛을 받은 우리도 바로 사무실 문을 향해 걷다가 방향을 틀었다.
“수진씨.”
그리고는 바로 수진에게 걸어갔다.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영업1팀 직원들의 눈빛이 일제히 우리에게 쏟아졌다.
“내일 점심 어때.”
우리의 말에도 수진은 모니터만 바라볼 뿐이었다.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대서 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괜찮아요.”
수진은 단숨에 우리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리고는 한 번의 고민도 없이 우리의 말을 거절했다.
수진은 우리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영업1팀 직원들은 가방을 챙기던 것도 잊은 채로 우리와 수진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다들 같이 가는 게 그러면 나하고만 먹어도 괜찮고.”
“대리님. 저 정말 죄송한데요. 저 그냥…… 그냥 두셔도 될 것 같아요.”
말을 맺을 때까지도 수진은 우리를 보지 않았다.
그저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로 아무 창도 켜 있지 않은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커피만 하자.”
우리가 수진의 어깨를 잡았을 때였다. 수진이 우리를 쏘아봤다.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는지 수진의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섰다.
“저 그냥 놔두셔도 돼요. 대리님.”
“하지만…….”
“걱정은 감사한데. 동정은 그만해주셔도 될 것 같아요.”
차가운 수진의 말이 우리의 귓가에 단단히 박혔다. 모두 드러나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당황한 눈치였다.
“동정이라고 생각하니.”
“그게 아니면 동질감인가요.”
수진의 말에 우리의 눈빛이 심히 흔들렸다. 곰살맞은 목소리조차 금세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근데 대리님. 동질감 가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수진은 노트북을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우리와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대리님처럼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마지막 한 방이 우리를 강타했다. 우리는 침도 넘기지 못하고 멍한 눈길로 퇴근을 하는 수진을 봤다.
조그마한 인사조차 없었다. 우팀장이 봤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박수라도 쳐댔을지도 몰랐다.
‘나도 어리바리한 직원 구워삶는 법은 잘 아니까.’
여유만만하게 쿠키를 씹어대던 우팀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급속히 냉각된 분위기에 모두 집에 가지도 못하고 우리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당장 오늘 일을 떠들고 싶어 다들 근질거리는 모양새였다.
“수진씨가 요새 조금 예민한 것 같아서. 그럼 저도 들어갈게요.”
우리는 주변만 대강 쳐다보면서 말했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헛기침만 하는 모두를 등지고 우리도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수진의 모습이 보였다.
바닥만 보고 있던 수진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은색 빛깔을 내뿜는 엘리베이터 문에 영업1팀 직원들의 모습이 비쳤다.
모두 우리와 수진의 눈치만 살살 보는 모양새였다. 수진은 우리에게로 눈을 돌렸다.
다른 곳만 돌던 수진과 우리의 눈이 딱 마주쳤다.
“우팀장님한테 무슨 말을 들었어도…….”
“아뇨. 아무 것도 들은 거 없어요.”
“설마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는 수진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우리와 거리를 유지하듯 멀찍이 떨어질 뿐이었다.
“힘든 건 아는데. 월요일에는 나와야 끝낼 수 있어.”
“제가 끝이면요.”
“그럴 일 없어.”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게 나았을 수도 있어요.”
수진의 목소리에는 절망이 묻어나왔다.
“아니. 그게 맞았던 것 같아요.”
“…….”
“조용히 회사 다니고 싶어요. 취준 생활도 힘들게 버텨서 얻은 직장인데……. 견디는 게 맞는지도 몰라요.”
수진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끝없이 나가는 월세, 학자금 대출 이자, 부모님께 보내드리는 돈…….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침묵만큼 좋은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팀장이 수진에게 건넸던 말처럼.
짙은 적막이 우리와 수진의 거리를 끝없이 벌렸다.
“대리님이 얼마나 힘드셨고 대단하신지는 충분히 느꼈는데요.”
수진이 조용한 기운을 뚫고 말을 꺼냈다.
“대리님, 저는 못할 것 같아요.”
“수진씨.”
“정말 죄송해요.”
수진은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를 봤다.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수진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는 퇴근을 하는 직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탄 수진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꼭 대화를 하듯.
만원 엘리베이터에서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탈 자리도 없는 것 같고.”
수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향해 손을 내뻗고는 말했다.
“먼저 내려갈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대리님.”
우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수진은 닫힘 버튼을 눌렀다.
우리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지 않다는 굳은 손길이었다. 북적거리던 엘리베이터 문은 단칼에 닫혔다.
“하아.”
묵직한 숨이 우리에게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마른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짐짓 도는 진한 고요 속에 서 있던 우리는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고똘하고 수진씨하고 완전 깨진 것 같은데.”
“확실히 우내시하고 무슨 일 있었다니까.”
“그냥. 고똘이 꼬드긴 거 아닐까요. 예전에도 괜히 떠들썩하게 만들었잖아요.”
“복수면 진짜 소름인데.”
조금씩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 새로 쑥덕거리는 소리가 끝없이 새어들었다.
우리는 주먹을 꽉 쥐고는 힘겹게 견뎌냈다.
누군가 툭, 던진 말이 남기는 상처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