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화. 네가 슬프면 나도 슬퍼져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잡은 채로 건우에게 손짓했다. 계속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있다가는 경비 아저씨에게 한소리를 들을 지도 몰랐다.
조급한 우리의 손짓에도 건우는 다른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건우의 눈동자에는 조그마한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차장님.”
우리는 팔을 쫙 내뻗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건우에게 다가섰다. 하도 팔을 뻗은 통에 근육이 뻑적지근할 지경이었다.
최면에 걸린 건우를 구하듯 우리는 핑거 스냅을 해댔다. 엄지와 중지가 튕기면서 딱, 소리를 냈다.
제법 청량하고도 큰 소리에 건우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상기됐던 얼굴도 한결 정상으로 돌아왔다. 얼빠진 건우의 모습은 꼭 마법에 걸렸다가 깨어난 왕자처럼 보였다.
그 왕자를 쟁취하고 말겠다는 듯 우리는 빙긋 웃고는 건우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계속 거기 서 있을 생각은 아니셨죠.”
“미안합니다.”
“아뇨. 팔이 조금 아팠던 것 빼고는 괜찮았어요.”
우리는 제 팔을 주무르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의 과장된 마사지를 지켜보던 건우가 픽 웃었다.
“줘요. 내 잘못은 내가 수습하죠.”
건우가 우리의 팔을 부드럽게 당겼다.
“아뇨. 제가 처리할게요.”
“싫습니다.”
“아니. 진짜 제가 해도 돼요. 제가 할게요.”
우리의 말에도 건우는 열정적으로 우리의 팔을 주무르는데 집중했다.
강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에 뭉쳤던 우리의 근육이 조금씩 풀려갔다.
팔을 타고 번지는 시원한 기운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건우의 손길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아…… 되게 좋은데요. 차장님.”
우리는 프로페셔널한 마사지사에게 정식으로 마사지를 받는 것만 같았다.
온몸을 적셨던 취기마저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와…….”
묵직한 숨이 우리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건우의 손길에 팔은 한결 가뿐해졌다.
햇발에 녹아버린 사탕처럼 흐늘거릴 만큼.
“그만하셔도…… 아.”
마사지에 빠졌던 우리가 눈을 떴을 때였다. 굳게 닫혀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바깥에 있던 아주머니와 우리는 눈이 딱 마주쳤다. 삽시간에 우리의 눈이 커졌다. 아주머니의 정체를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반상회 날. 건우에게 유난히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주고 싶어 하던 502호 아주머니였다.
동네 주민 커플이 탄생했다는 소식은 곧 빠르게 아파트를 떠돌 것이었다.
502호 아주머니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탕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세스럽네. 남사스러버. 엘리베이터에서…….”
502호 아주머니는 우리와 건우를 힐끗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우리는 변명을 하려다가 말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부정하는 것이 더 수상하게 보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슬그머니 건우의 손에서 제 팔을 빼냈다.
“버튼은 누르지도 않고.”
아주머니의 말에 우리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빤히 쳐다봤다. 빨간 빛이 뿜어져 나오는 5층 말고는 아무 버튼도 눌려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시원한 마사지에 취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엘리베이터는 계속 1층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었다.
누군가 버튼을 눌러주길 기다리면서.
차마 아래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우리는 아주머니를 향해 민망한 미소만 지었다.
“15층 누르면 될까요.”
적막을 뚫고 502호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와 건우가 누군지 훤히 꿰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몇 층에 살고 있는지조차.
“아뇨. 제가 깜빡하고 차에 두고 온 게 있어서.”
“나는 또 올라가는 건 줄 알고 탔네.”
“괜찮아요. 제가 팔이 아파서 버튼 누르는 것도 깜빡해가지고.”
우리는 열심히 너스레를 떨었다.
“아…….”
그 말에 아주머니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지만 우리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시금 침묵이 엘리베이터에 스몄다.
우리는 고작 5층까지 가는 길이 수백 만리처럼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손목시계까지 힐끗거렸다. 하지만 시간은 우뚝 멈춘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마른 침만 넘기면서 빨리 5층에 도착하길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하마터면 기쁨의 함성까지 내지를 뻔했다.
“먼저 내릴게요.”
502호 아주머니가 끝인사를 날리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예. 들어가세요.”
“1601호 총각 여자 친구 있다더니 가까이에 있을 줄은 감쪽같이 몰랐네.”
“그때는 사정이 있어서.”
“무튼 축하해요. 잘 어울리네. 담에 반상회 때 같이 나와요. 예비부부라고 생각하지 뭐.”
부부라는 말에 우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훅, 두 뺨으로 몰린 열기에 우리는 제 얼굴만 쓸어내렸다.
“내가 너무 주책이죠. 호호. 근데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래요.”
502호 아주머니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습격하고는 건우의 다부진 팔을 찰싹 때렸다.
“그래도 때와 장소는 가려서.”
“…….”
“밝고 건강한 아파트를 위해서. 알죠.”
눈썹까지 들썩거리는 아주머니를 보던 건우의 표정에는 일체 변화가 없었다.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요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네. 그죠. 그래야죠.”
아주머니의 말을 대강 파악한 우리가 어색한 미소를 날리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우리는 민망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이 강렬했다.
“그럼 들어가세요.”
“예. 조심히들 가요.”
우리는 담담한 얼굴로 아주머니의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닫힘 버튼을 누르고 있는 손길만은 빨랐다.
어색한 웃음만 터지는 상황을 막아주듯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제야 우리의 얼굴에 어색하게 돌던 미소가 사라졌다.
“아…… 진짜 하루하루 스펙터클이네요.”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있습니까.”
“방금 완전 오해 받았다니까요.”
열변을 토하는 우리의 모습에도 건우는 별 반응이 없었다.
도통 무슨 오해를 받았다는 건지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서로 탐구하는 줄 아셨을 거예요.”
우리는 탐구라는 말에 힘을 잔뜩 줬다.
“무슨 탐구 말입니까.”
“자아 탐구랄까. 그니까 차장님하고 저하고…….”
두 주먹까지 들었던 우리는 설명을 포기했다. 주먹을 맞닿게 해도, 떼어도 묘하게 야릇하게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황망한 얼굴로 주먹을 보던 우리의 손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암튼 확실히 찍혔어요.”
우리는 의미심장한 말만 남기고는 지하 주차장 버튼만 꾹 눌렀다.
아주머니가 오해한 상황을 설명할 장황하고도 상세한 설명을 삼키듯.
아주, 꾹.
***
조수석에 앉은 우리는 룸미러를 봤다. 트렁크를 뒤적거리는 건우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건우를 주시했다.
두고 온 것을 찾는데 조금 걸릴 것 같다는 말에 떠밀리듯 조수석에 앉았지만 건우는 차 쪽만 힐끗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꼭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에 보이는 수였지만 우리는 모르는 척 제 가방만 뒤적거리는 시늉을 해댔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하루가 다 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한 눈을 파는 것을 확인한 건우가 조수석에 다가왔다.
“조금 심하게 걸렸죠.”
그리고는 조수석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못 찾아서.”
가방을 보던 우리가 건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옅은 꽃향기가 건우에게서 풍겼다.
꽃다발을 들고 있는 건우가 우리를 향해 빙글 웃었다. 우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건우가 건넨 꽃다발을 받았다.
깜짝 이벤트를 우리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꽃다발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우리가 여태껏 꽃다발을 받은 적은 졸업식 때가 전부였다.
거기다가 오늘은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그런데 꽃이라니.
“차장님. 무슨 날은 아니죠.”
머릿속을 떠도는 온갖 날짜를 계산해보던 우리가 말했다.
100일, 200일, 300일……. 그 기념일도 아니었고 꽃을 주고받는다는 로즈데이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건우를 보던 우리의 표정은 심각했다.
“예. 아무 날도 아닙니다.”
“근데 꽃은 왜…….”
심각하던 우리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하지만 도통 건우가 꽃을 준 이유를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냥.”
건우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기분 좋아졌으면 해서.”
건우의 말에 우리는 달리 반박하지 않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반복된 우팀장 사태에 우리는 심란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꽃을 봤다. 아이보리와 노란 빛이 섞인 포장지가 바스락거렸다.
꽃집에서 봤던 꽃이 어우러져 짙은 향기를 흩뿌렸다.
셔먼트부터 리시안셔스까지. 꽃다발은 우리가 유심히 봤던 꽃들로만 가득했다.
꽃다발보단 실속 있는 것이 제일이라던 생각조차 수그러드는 것만 같았다.
“기분 좋아진 것 같아요.”
“정말입니까.”
“네. 진짜예요. 근데 꽃다발 사실 시간도 없었을 텐데…….”
우리는 빡빡하기만 한 건우의 일정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우리의 걱정처럼 건우는 종일 바빴다.
꽃집에서는 우리를 졸졸 쫓으면서 좋아하는 꽃을 몰래 메모했다.
그리곤 능청스럽게 명함을 가져가 우리 몰래 꽃다발을 주문했다.
제법 어려운 꽃 이름을 부르면서 꽃에 맞는 포장지 색깔까지 직접 골랐다.
건우는 일을 핑계로 꽃다발을 찾아와 조그마한 생수통에 꽃대를 담가 놨다.
꽃이 시들기라도 할까. 광고 미팅을 빠르게 끝낸 건우는 무조건 우리에게 내달렸다.
우리가 기뻐하면 좋겠다는 조그마한 꿈을 품고.
“진짜 예뻐요.”
빙긋 웃는 우리의 모습에 건우는 고생한 순간조차 보상받는 것 같았다.
“감사해요. 차장님.”
“내가 더 고맙습니다.”
“저는 한 것도 없는데요. 꽃 하나 드리지도 못하고…….”
“좋아해주면. 난 그걸로 충분합니다.”
건우가 우리의 말을 부드럽게 가져갔다. 우리가 웃는 모습만 봐도 그저 행복하다는 얼굴이었다.
눈이 부시게 웃던 건우가 우리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그 손길이 꼭 우리를 다독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걱정 말라고.
그 어떤 순간이 와도 네 곁에 있을 테니까.
“맘에 든다니까 다행이네.”
건우의 말에 우리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바스락대는 포장지소리만이 주차장을 옅게 적셨다.
건우를 보던 우리가 침만 꼴깍 넘겼다. 향긋한 꽃향기가 달큰한 키스를 하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엔딩은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지금 굉장히…… 거시기한 타이밍이죠. 차장님.”
우리는 돌려 말하려다가 실패했다.
누가 봐도 우리의 눈빛은 건우의 붉은 입술을 뚫어버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키스다.
지금 딱, 키스 타임이라고.
“가능하겠습니까.”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맞는 말이네.”
“까짓것 거시기 확 할까요.”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변 눈치를 살피고는 말했다. 엘리베이터에서처럼 누군가와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도 본능을 완벽히 막아주진 못했다.
“거절 할 생각은…….”
건우가 우리에게 다가섰다.
“……역시,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우리의 얼굴을 감쌌다. 건우는 꽃다발만 붙잡고 있던 우리의 입술을 삼켰다.
말캉한 감촉이 우리의 입술을 타고 번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녹아드는 건우의 숨결에 꽃대를 잡은 우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열된 주전자의 겉면처럼 우리의 입술은 뜨거웠다.
그 열기에 맞닿은 입술은 금세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은은한 건우의 향기는 열기를 타고 우리에게 짙게 젖어들었다.
눅진해진 우리와 건우의 숨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차장님.”
솟구치는 열기가 우리의 얼굴을 적셨다. 발그스름한 우리의 두 뺨을 건우는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스칠 때마다 우리는 온몸이 예민해졌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마저 우리는 아찔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우리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가 된 것만 같았다. 그대로 철로를 질주하다가 멀리 날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우리는 속으로 그만하자고 열심히 소리쳐댔지만 건우의 향기를 놓을 수가 없었다.
너무 달달하잖아.
“……!”
하지만 격렬한 키스도 주차장 끝에서 밀려오는 빛에 살아남지 못했다.
진한 키스의 현장을 들킬까. 우리가 다급하게 시트를 젖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벌러덩 누운 채로 의자에 찰싹 붙어있었다.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누구 지나갔죠.”
우리가 눈만 굴리고는 말했다.
“예. 그냥 지나갔습니다.”
“또 누구 마주칠 것 같아서요.”
우리는 변명하듯 말을 덧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끝까지 벌러덩 넘어가버린 의자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이상하네요. 아까는 잘 넘어갔는데…….”
우리가 운전석에 꽃다발까지 놔두고는 의자를 올리는데 열중했다.
“본래 닥치면 못하던 것도 하게 되는 법이죠.”
“그런가요.”
“예. 오늘 보니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살포시 내려앉은 건우의 미소가 묘하게 청량해보였다.
봄이 젖어든 것만 같았다.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따뜻한 봄.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건우는 젖혀진 의자를 올렸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의자만큼 건우와 우리 사이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올라갈까요.”
딱 한 마디였다. 나지막이 퍼지던 건우의 말은. 그런데 그 한 마디에 우리는 건우에게 홀딱 홀려버린 것만 같았다.
별말 아닌 그 말이 꽤 유혹적이게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여기 말고 올라가자는 거죠.”
우리는 소심하게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예.”
“어디로요.”
“각자 집으로.”
건우의 말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 그대로 건우에게 내보인 것이었다.
“네네. 가야죠. 집에.”
우리가 냉큼 운전석에 있던 꽃다발을 들었다. 그리고는 부산하게 손목시계를 봤다.
“시간도 늦었네요. 가요. 내일 출근해야죠.”
조수석에서 내린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질주하듯 빨리 걸었다. 야릇한 상상을 들킨 것만 같아 우리는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잡은 우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농도로 몰아치던 키스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꽃향기에 현혹된 걸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그런 상상만 골라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애꿎은 엘리베이터 버튼만 열심히 쪼아댔다.
그 뒷모습을 보던 건우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우리는 건우와 나란히 집 앞까지 올라왔다.
“차장님. 그럼 먼저 가볼게요.”
“조심히 가요.”
“차장님도요. 오늘 꽃은 정말 감사해요. 매일 저만 받는 것 같아서 죄송하기도 하고.”
슬쩍 꽃을 내미는 우리의 얼굴은 밝았다.
“고우리씨만 즐거우면 됐습니다.”
따뜻한 건우의 말이 꽃 속에 녹아들었다. 그 온기에 피지 못한 꽃까지 금방이라도 흐드러지게 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우리가 슬프면, 나도 슬퍼지니까.”
다정한 목소리는 과거에 집착하면서 무너지던 우리를 붙잡았다.
조금 남았던 우둔한 미련조차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 지금 차장님 기분은 좋으시겠데요. 저 지금 정말 좋거든요.”
“예. 좋습니다.”
“진짜 저하고 똑 닮나 봐요.”
“그럼요. 일심동쳅니다.”
“동체는 조금……. 일심이체로 가시죠.”
우리는 농담까지 던지고는 벙글거렸다.
“일심동체가 완벽한데.”
매혹적인 눈빛을 날리는 섹시한 건우의 눈빛에 우리는 뜨악했다.
잊고 있었다. 이 남자가 요물이라는 걸.
“저 가볼게요. 차장님. 내일 봬요.”
“일심동체는 거절인 겁니까.”
“그건 조금 생각해볼게요. 일단 꽃집 명함만 돌려받고요.”
우리는 건우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빙긋 웃는 모양새가 묘하게 악독해보였다.
건우는 재킷 깊숙이 있던 명함을 꺼내 우리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먹잇감을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재빨리 명함을 가져갔다.
“그럼 정말 내일 봬요. 차장님.”
끝인사를 날린 우리가 냉큼 집으로 들어갔다. 일심동체의 유혹에 빠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세 건우가 궁금해져 빼꼼 현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떠난 엘리베이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괜스레 번지는 아쉬운 기운을 털어내면서 우리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꽃다발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바보처럼 웃음이 나왔다.
꽃다발에 코를 박고 꽃향기를 크게 들이마시기도 했다.
“향기도 진짜 좋네. 차장님 진짜…… 감동 받게.”
우리는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그리고는 괜한 질투에 받아온 명함을 살폈다. 익숙한 이름에 우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원…… 주혜원. 어디서 들었더라.”
하지만 번뜩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스쳐가는 이름이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명함을 책상에 두고는 욕실로 향했다.
조용한 우리의 방.
열린 창문을 타고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조금 찬바람에 들썩거리던 명함은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잔혹한 비밀을 조용히 덮으려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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