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화. 매리골드의 꽃말
우리는 우팀장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주눅이 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우팀장이 가장 바라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단단한 우리의 눈빛을 바라보던 우팀장은 거친 욕설을 내뱉고는 자리에 앉았다.
“다들 얼빠졌네. 30분 전부터 앉아있어야지.”
우팀장은 책상을 내려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징계위원회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사실이 우팀장의 목을 죄여왔다. 넥타이를 끌어내린 우팀장은 허리춤에 손을 대고는 씩씩거렸다.
“괜찮을까요.”
먹잇감을 찾듯 눈을 부라리고 있는 우팀장을 보면서 선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팀장은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선영씨는 무조건 모른 척해.”
“그래도 아빠한테는 제가 말한…….”
“할 만큼 한 거야.”
우리는 걱정 말라는 듯 선영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선영까지 이번 일에 말리면 꼼짝없이 우팀장의 눈총을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 탐탁찮은 눈빛이 번지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잔뜩 열이 받은 얼굴로 주위를 보던 우팀장은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우팀장은 난데없이 나타난 우리가 일부러 상황을 키웠다고 생각했다.
건우까지 꼬드겨서 자기를 골탕 먹일 속셈이라고.
‘원하는 대로 죽어줄 수는 없지.’
우리와 눈이 마주친 우팀장은 조소를 날렸다. 우팀장은 고작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 명확한 판결이 난 것도 아니고 수진의 말밖에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CCTV조차 없는데 어쩌겠다고.
“강수진씨.”
출근을 하는 수진을 발견한 우팀장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드디어 먹잇감을 잡았다는 눈빛이었다.
가방 끈을 잡은 수진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뭘 그리 바보 같이 있어.”
“그냥. 방금 출근을 해서…….”
“면담 조금 해야겠는데.”
“갑자기 무슨 면담을…….”
수진은 우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우팀장에게는 묘한 여유마저 흘렀다.
우팀장의 앞에서 수진은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우리가 의자를 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건우가 말릴 새도 없이 단박에 수진에게 걸어갔다.
“수진씨.”
우리의 목소리가 우팀장에게 반쯤 끌려가던 수진의 발목을 잡았다.
“매장 반응. 출근하면 그거 말해주기로 했잖아.”
바삐 머리를 굴리던 우리가 거짓말을 내뱉었다. 수진을 잡기 위해서는 그 어떤 거짓말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우팀장님 죄송한데…….”
“죄송할 짓은 하지 말아야 하잖아. 고대리.”
회의실로 향하던 우팀장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봤다.
“급한 건도 아닌데 자리에 가서 조용히 있어요.”
“당장 매장 반응을 체크하고 싶어서요. 저도 주말 내내 기다렸던 거라서.”
“우리 면담해야 된다잖아. 왜 자꾸 길을 막아.”
우팀장은 온갖 짜증을 꾹 누르고는 말했다. 터지려는 화를 식히는 듯 자못 단정했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잘못 소란스러우면 골치만 아프니 징계위원회 회부 전까지는 조용히 하라는 본부장의 말을 상기했다.
우리와 대차게 싸우다가는 잘못 우리의 일까지 뛰쳐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팀장은 최대한 은밀하게 스스로 일을 끝낼 작정이었다.
우리만 없다면 수진을 구워삶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그래. 고우리만 없다면.
“매장 반응 건은 내가 정리해서 줄 테니까 걱정 말고 가요.”
“지금 당장 주실 수 있나요.”
“아직 업무 시작도 아닌데 당장이라니. 고대리 너무 막무가내네.”
“바로 업무 시작하시는 줄 알았는데.”
제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던 우리는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는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따갑게 몰아치는 우팀장의 눈빛을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면담까지 시작하셨잖아요.”
우리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는 말했다.
“고대리는 그게 문제라니까.”
“무슨 문제요.”
“두서없이 껴드는 거. 설치는 거.”
“제가 그런 적이…….”
“웬만하면 그러지 마. 괜히 다치고 속만 쓰려.”
우팀장이 날리는 일종의 경고였다. 더는 이번 일에 상관하지 말라는 갸륵한 경고.
우팀장은 수진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그 손짓 하나에도 수진은 상기된 얼굴로 움찔거렸다.
“수진씨. 뭐해. 들어오지 않고.”
수진을 부르는 우팀장의 눈썹이 꼼지락거렸다. 우리가 고개를 돌려 수진을 봤다.
“……네.”
수진은 바닥만 바라본 채로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우팀장의 얼굴에 승리자의 미소가 흘렀다.
우리는 회의실로 향하는 수진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리님!”
얼이 빠진 얼굴로 수진이 사라진 곳을 보던 우리에게 선영이 달려왔다.
“차장님이 부르셔서요.”
우리는 파티션 너머로 설핏 보이는 건우를 보고는 말했다.
수진이 회의실로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다는 듯 건우는 담담한 얼굴로 일만 하고 있었다.
“저 커피 사러 갈 건데 대리님 것도 사올까요.”
“번거롭게.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그럼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사올까요. 컵케이크에는 아아가 딱이거든요.”
“그럼 부탁할게.”
“넵! 후딱 사올게요.”
우리는 커피를 사러 내려가는 선영에게 제 사원증을 건넸다. 심부름도 시키는 마당에 커피까지 얻어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 사원증으로 결제를 하라는 우리의 손짓에도 선영은 두 손을 엇갈리고는 엑스 표시를 날렸다.
“제 걸로 살게요.”
“아냐. 내 걸로 결제해.”
“커피까지 제가 쏩니다. 컵케이크랑 세트잖아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단칼에 우리의 사원증을 거절한 선영은 냉큼 사무실을 나섰다.
출근 시간에 정확히 맞춰 자리에 앉아있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도대체 말릴 수 없는 선영을 보던 우리가 건우에게로 향했다.
건우는 외부 프로젝트 진행 업체의 견적을 확인하느라 바빠 보였다. 우리는 낡은 수첩을 들고는 건우의 책상 옆에 섰다.
무슨 오더가 내려지든 바로 준비하겠다는 것처럼 우리는 볼펜까지 꽉 쥐었다.
“차장님. 부르셨다고.”
“예.”
견적을 살피던 건우가 우리를 봤다.
“금요일에 한소민이 있는 그룹 쇼케이스가 있다고 해서.”
“꽃다발이나 케이크 정도 준비할까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점심 때 같이 나가서 보죠.”
“아뇨. 제가 보고 올게요.”
우리는 꽃다발과 케이크를 수첩에 적었다. 모델과의 관계를 위해 우리는 제법 정성 있는 선물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쇼케이스에 올 팬과 기자를 위해 출시될 신제품을 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방법이었다. 소속사와 대화만 잘 끝난다면.
“에이전시 윤실장님하고도 논의해볼게요. 저희 신제품 뿌려도 될지.”
“예. 그것만 부탁하죠.”
“그것만이라면…….”
“역시 꽃다발하고 케이크는 같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우리는 건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네. 그럼 괜찮은 가게 찾아볼게요.”
“나도 찾아보겠습니다.”
수첩을 닫은 우리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월요일 아침부터 할 일이 넘쳐났다.
꼭 회의실에 갇힌 수진에게 신경을 끄라는 것처럼.
일을 시작한 우리는 정말로 바빴다. 주말 판매량을 체크하면서도 우리는 회의실 쪽을 힐끗거렸다.
게다가 쇼케이스 논의를 하기 위해 윤실장과 대화에도 열을 올렸다. 우리의 온 신경은 사방으로 흩뿌려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선영이 사다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로 바쁘게 일을 처리해나갔다.
“네. 실장님. 잘 부탁드릴게요.”
-그쪽에서도 반길 것 같기는 한데. 소속사 이사님하고 오늘 만나니까 논의하고…….
윤실장과 통화를 하던 우리의 집중력이 깨졌다.
“그럼 잘 해보자고. 수진씨.”
우팀장의 목소리 하나에.
정말, 와장창.
-고대리님.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윤실장의 목소리는 우리의 관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어느 샌가 파티션 너머로 고개까지 빼고는 영업팀으로 돌아가는 수진과 우팀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진은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보다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대리님! 대리니임?
“아…… 네. 실장님. 죄송해요. 급하게 디자인 하나를 받아서.”
-그럼 저도 논의 끝내는 대로 전화 드릴게요.
바쁜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윤실장은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우리의 눈길은 축 쳐진 수진의 어깨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팀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대강 가늠할 수는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얼마나 수진에게 상처를 줬는지도.
건우는 목이 빠져라 수진을 쳐다보는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답지 않은 날이었다.
무던히도 일에만 집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우리는 그저 부산스럽기만 했다.
그런 우리를 건우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고우리. 정말 괜찮은 건가.’
수진만큼 우리에게 남은 상처도 다시 곪기 시작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끔찍하게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
점심을 먹은 우리는 양재역 근처에 있던 꽃집으로 향했다. 친절한 서비스와 남다른 손재주로 높은 별점을 자랑하는 꽃집이었다.
꽃향기가 짙게 밴 것처럼 꽃집 근처에서는 향긋한 향기가 돌았다.
우리는 꽃집을 봤다.
‘리멤버 플라워’.
꽃집의 간판이 환하게 빛났다. 통유리로 된 꽃집은 가게 내부가 밖에서도 훤히 잘 보였다.
긴 머리칼을 넘기던 여자가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가냘픈 여자의 모습이 우리는 묘하게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무슨 생각합니까.”
“어디서 본 것 같아서요.”
여자를 보는 우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기는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생각났습니까.”
“아뇨. 아뇨. 날 것 같은데…… 그냥 착각인 것 같아요.”
복작거리는 기억을 헤집던 우리가 벙긋 웃었다. 지나가다가 봤을지도 모르고 예쁜 얼굴을 봤다고 그냥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던 순간을 떨쳐내면서 조심스럽게 가게 문을 열었다.
조용한 종이 유리문에 부딪혀 경쾌하게 울렸다. 꽃다발을 만들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테이블에 꽃다발을 두고는 우리에게 걸어왔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목소리마저도 낯설지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꽃다발 주문을 하고 싶어서요.”
“원하시는 꽃이 따로 있으실까요.”
“아는 꽃이 없어서 추천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꽃집을 살피면서 말했다. 사방에서 풍기는 꽃향기는 좋았지만 무슨 꽃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는 꽃다발의 목적을 열심히 설명했다. 회사 모델인 한소민을 위해 준비하는 꽃다발이고 한소민의 이미지에 잘 맞는 꽃다발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혹여 한소민 얼굴을 떠올리지 못할까. 우리는 한소민의 사진까지 열심히 검색해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여자는 꽤 진지한 얼굴로 사진과 꽃을 번갈아 쳐다봤다.
여자가 몇 가지 꽃을 우리에게 추천해주었다.
“유카리도 섞고 셔먼트도 덧대주면 좋을 것 같고요.”
여자는 여러 꽃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조용히 여자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우리의 눈이 빛났다.
녹색 빛깔과 하얀 빛깔이 묘하게 어우러진 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우리가 가리키는 꽃을 빤히 바라봤다.
“저건요.”
“리시안셔스예요. 꽃말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로맨틱해서 부케에도 많이 쓰이고요.”
“저것까지 섞어서 풍성하게 만들면 단가가 어느 정도 될까요.”
우리의 사심이 바짝 들어간 조합이었다. 우리는 꽃다발의 가격과 완성 가능한 시기까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여자가 만들고 있던 꽃다발을 보던 우리는 거의 여자의 꽃집으로 마음이 기운 것처럼 보였다.
꽃다발도 예뻤고 가격도 꽤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사근사근하게 설명을 해주는 여자의 목소리에 묘하게 신뢰가 갔다.
예정된 기한에 맞춰 예쁜 꽃다발을 만들어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여자를 향해 빙긋 웃어보였다.
“혹시 명함 받을 수 있을까요. 정해지면 바로 연락드리고 싶은데.”
“명함이…… 잠시 만요.”
카운터에 있던 명함 케이스가 비어있었다. 여자는 카운터 아래를 열심히 살폈다.
“근데 진짜 꽃, 예쁘기는 하네요.”
여자를 기다리던 우리가 말을 꺼냈다.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만 같았다.
“꽃 좋아합니까.”
“그럼요.”
“그럼…….”
“아뇨. 근데 사주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는 건우를 향해 두 손을 내뻗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반지까지 사준 건우였다.
그런 건우에게 꽃다발까지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잘못하다가 한없이 퍼주는 건우에게 길들여질지도 몰랐다.
“회사 일이니 결재 올리면 될 겁니다.”
“아…….”
건우가 꽃다발을 사주기라도 할까. 한껏 걱정하던 우리는 괜스레 민망해졌다.
“그죠. 한소민씨 꽃다발이니까.”
“예. 더 추가할 꽃은 없습니까. 보는 눈이 있는 것 같아서.”
“더 있을 걸요. 조금 더 볼게요. 차장님.”
우리는 재빨리 꽃을 쳐다봤다. 착각을 한 제 모습이 민망해 우리의 얼굴에는 바짝 열이 올랐다.
꽃을 보고 열을 식히려는 듯 우리는 꽃을 살폈다. 싱싱한 꽃들은 제 향기를 힘껏 뿜어내고 있었다.
“저것도 괜찮은 것 같네.”
건우는 샛노란 꽃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카운터 아래에서 명함을 가지고 나온 우리가 건우의 손끝을 따라갔다.
“메리골드인데. 여름에 주로 핫한 품종이거든요. 근데 꽃말이 조금 그래서…….”
“인기가 없습니까.”
“가끔 꽃말 때문에 꺼리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무슨 꽃말이길래.”
“실망이거든요. 이별의 의미도 있고.”
여자의 말에 건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손을 거뒀다.
실망, 비탄, 이별…….
메리골드가 가진 꽃말에 건우의 눈동자는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냥 겉만 보고 고른 겁니다.”
건우는 변명하듯 우리에게 말했다.
“꽃말은 들은 적도 없습니다.”
“사실 저도 몰랐어요. 방금 저도 저거 고를 뻔했거든요.”
우리는 건우가 민망할까봐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메리골드와 멀찍이 멀어졌다.
건우와의 이별은 상상조차 하기도 싫었다. 차장님을 얼마나 꽉 붙잡고 있을 건데!
우리만큼 건우도 슬금슬금 메리골드에서 멀어졌다.
“혹시 더 준비하면 좋을 꽃 있을까요.”
“아뇨. 괜찮을 것 같아요.”
꽃을 보던 우리가 여자를 향해 빙글 웃었다.
“그럼 제 명함…….”
여자는 두 손으로 제 명함을 내밀었다. 꽃집만큼이나 수수하면서도 달큰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은 명함이었다.
우리는 대강 꽃집 이름만 보고는 명함을 지갑에 넣었다.
“잘 생각해보고 하게 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네.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근데 꽃이 너무 예뻐서 여기서 하게 될 것 같기는 하네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여자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면서 짙은 미소를 흘렸다.
“그럼 수고하세요.”
우리는 단정한 인사를 날리고는 꽃집을 나섰다.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예쁘게만 들렸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건우와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찬 기운을 몰아낸 바람만큼 회사로 돌아가는 길도 초록 빛깔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던 겨울만큼 쥐도 새도 모르게 봄이 왔는지도 몰랐다. 코끝을 스치는 봄 향기가 우리는 마냥 달달하게만 느껴졌다.
건우와 나란히 걷던 우리는 근무 시간인 것도 싹 잊은 것처럼 보였다.
“고우리씨. 꽃집 명함, 내가 가지고 있죠.”
꽃집을 계속 돌아보던 건우가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우리는 수상하다는 얼굴로 건우를 쳐다봤다.
설마. 꽃집 주인한테 반한 건 아니시죠.
“명함은 왜요.”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건우가 꽃집 주인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웃기지도 않는 상상이라는 걸 아는데도 우리는 묘하게 질투가 났다.
아니. 선영씨도 한 번에 반했잖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왜요.”
“곧 전화할 수도 있으니 생각해보려고.”
“전화는 제가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래서 못 주겠다는 겁니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릴 뻔했다.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건가.”
능글스러운 건우에게 먹이를 던져줄 뻔한 것이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설마요. 다 비즈니스인데.”
“그럼.”
건우는 제 의견을 고수하겠다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질투를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명함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는 지갑에 뒀던 명함을 건우의 손바닥에 놓아주었다.
“드리죠. 드려야죠. 하하.”
정말로 어색한 웃음을 맘껏 터뜨리면서.
왼발과 왼손이 동시에 올라가는 부자연스러운 걷기를 보여주면서.
건우는 손에 있던 명함을 살폈다.
[리멤버 플라워
플로리스트 주혜원]
명함에는 꽃집 주인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어서 가요. 차장님.”
“예.”
우리의 손짓에 건우는 지갑에 명함을 두고는 우리에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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