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77화 (77/102)

제 77화. 남 탓을 하는 순간

일요일 아침. 밤새 글을 쓰느라 늦게 일어난 우리는 아침부터 폭탄처럼 날아드는 메시지에 기겁할 뻔했다.

-대리님. 대리님! 컵케이크 조금 구웠는데 예쁘죠.

-그러니까 저 성민씨 출판사 놀러가거든요. 지금요.

-월요일에 감사 컵케이크 들고 갈게요. 자축 케이크!!!!!

선영이 보내온 사진을 확인하던 우리의 눈이 커졌다.

6단 도시락은 가뿐히 넘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양의 컵케이크가 선영의 차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컵케이크를 먹다가 배가 터져 죽을 지도 몰랐다.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 눈을 비볐다. 하지만 현실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컵케이크 개수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선영씨. 설마 컵케이크 증식하고 있는 거냐고.

-그럼 다녀올게요. 대리님.

우리는 새빨갛게 상기된 선영의 얼굴이 눈앞에 또렷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쩌다 선영이 성민의 출판사까지 가게 됐는지 궁금했지만 우리는 모두 나중에 묻기로 했다.

성민을 만날 생각만으로도 선영의 머릿속은 복작거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컵케이크 보니까 나도 배고프네.”

우리는 홀쭉한 배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캄캄하게 닫아놓았던 암막 커튼을 젖혔다.

해가 중천에 떴는지. 햇빛이 눈부시게 밀려와 우리의 눈두덩을 찔렀다. 환기라도 시키듯 우리는 창문을 열었다.

창을 타고 밀려드는 바깥 공기가 꽤 청량했다. 간간이 흘러내리는 훈훈한 바람이 우리의 두 뺨을 스쳐지나갔다.

꽃향기까지 코끝을 간질이는 것을 보니 봄이 온 것 같기도 했다.

바깥 풍경을 보던 우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감성이 메말랐나. 배만 고프냐.”

눈만 깜빡거리던 우리는 책상에 있던 빵을 먹었다. 눅눅한 빵도 제법 먹을 만한 것 같았다.

멍한 눈빛으로 빵을 씹던 우리는 서랍장에 있던 어깨 마사지기를 꺼냈다.

묵직한 어깨 마사지기를 목에 걸고는 시작 버튼을 눌렀다.

“아…… 좋네.”

걸쭉한 목소리가 우리에게서 터져 나왔다. 단단해지던 승모근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빵을 씹어대면서 근육을 풀어주는 마사지기에 감탄했다. 눈을 감고 양 손으로 마사지기를 잡았다.

시원스러운 기운이 목을 타고 전해졌다. 방금 일어났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온몸이 다시 노곤해졌다.

마사지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방을 가득 채웠다.

특히 강하게 뭉친 곳을 누르는 힘에 우리가 깊은 숨을 내뱉었다.

“하아…… 아!”

우리가 한창 마사지에 홀딱 빠져있을 때였다.

“아니. 가만히 있어요. 오렌지 주스 좋아하나 모르겠네.”

부산스러운 미순의 목소리가 방문을 타고 들려왔다. 손님을 맞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였다.

급한 발소리, 냉장고를 여는 소리, 삐걱대는 노쇠한 찬장…….

모든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가 아득해지기를 반복했다.

“우리 일어나려면 조금 더 있어야 돼요.”

미순의 말이 끝나고 웅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눈을 감은 채로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지만 누군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어제 늦게 자는 것 같더라고.”

우리의 본래 성향은 부지런하다고 미순은 열심히 포장을 하고 있었다.

방문을 타고 들리는 목소리에 우리가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악! 아아…….”

마사지기의 난데없는 근육 습격에 우리의 목구멍을 타고 묵직한 목소리가 터졌다. 그 소리에 놀란 미순이 방문을 열었다.

활짝 열리는 방문에 놀란 우리가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방문 근처에 있던 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묘하게 민망한 기운이 우리의 얼굴에 돌았다.

“차장님이 왜…….”

우리는 말을 채 잇지도 못했다. 터지지 못한 말이 우리의 목구멍만 맴돌았다.

대체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예요. 차장님.

“늦게 잤다니까 걱정 돼서.”

다정스러운 건우의 목소리가 방을 달게 적셨다.

“너 생각해서 흑마늘즙도 가져왔는데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지.”

“괜찮습니다.”

“괜찮기는요. 내 홍삼도 가져다줬는데.”

“큰 것도 아닌데요.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정말 고마워서.”

자기까지 챙겨주는 씀씀이가 고맙다는 듯 미순은 건우의 두 손을 잡았다.

빙긋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건우도 미순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우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건우와 미순을 번갈아 쳐다봤다. 모녀 관계보다 더 짙은 모자 관계처럼 보였다.

극구 건우를 반대하던 미순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미순은 지구에서 가장 따뜻한 눈빛을 날리면서 건우를 반기는데 열을 올렸다.

미순은 갓 일어나 어깨 마사지기만 열심히 해대고 있던 우리의 곁으로 건우를 밀어주었다.

“우리하고 앉아있어요. 바나나라도 가져올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미순은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건우의 어깨를 꾹 눌렀다. 그 손길에 건우는 우리의 옆에 꼭 붙어 앉은 모양새가 됐다.

“천천히 올 테니까 대화도 조금 하고.”

찡긋 윙크까지 날린 미순은 우리의 방문을 살짝 닫았다. 덩그러니 건우와 방에 남은 우리는 목에 있던 마사지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한없이 바삐 몰아닥친 상황에 우리는 제 눈썹만 긁적거렸다.

한바탕 폭풍이라도 밀려든 것만 같았다. 후다닥 벌어진 상황의 결과는 딱 하나였다.

세수조차 하지 못한 제 바로 옆에 건우가 있다는 것. 그것도 자기 침대에!

우리는 건우를 바로 보지도 못한 채로 방문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니. 정말 무슨 일이세요.”

“밤새 글만 쓰느라 기력이 상했을 것 같아서.”

“저 정말 괜찮은데……. 영양제 수혈도 잘 받고 있어요.”

우리는 영양제를 보여주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우와 침대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온갖 음란마귀가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비타민도 있고 오메가도 있고.”

우리가 책상 서랍에 있던 온갖 영양제를 꺼냈다.

한창 챙겨먹다가 말고를 반복한 것을 알려주듯 영양제 상자에는 옅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건우가 우리의 손에 있던 영양제를 가져갔다.

“고우리가 보고 싶기도 하고.”

“전화 주시지. 그럼 제가 바로 나갔을 텐데.”

“잘 자고 있는데 깨우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서 흑마늘즙 들고 오신 거예요?”

“일석이조잖습니까. 내 여친 영양도 챙겨주고 조용히 기다릴 수도 있고.”

온기를 품은 옅은 미소가 건우의 얼굴을 적셨다. 방밖에서는 부스럭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건우를 위해 미순이 온 냉장고와 찬장을 뒤적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어머님만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네.”

“차장님 와서 그래요. 남친 사랑이 넘치시거든요.”

미순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건우는 우리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집에 있는 게 변변찮아서.”

변변찮게 준비한 과일의 스케일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바나나부터 열대과일까지. 우리의 집에 있는 온갖 과일이 접시에 예쁘게 담겨 있었다. 포크 하나도 신경을 쓴 티가 팍팍 났다.

포크의 손잡이에 하트가 귀엽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더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해주고. 바로 가서 사다줄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도 넉넉한데요. 같이 드시죠.”

“나는 곧 친구 만나러 나가서.”

미순은 갑작스럽게 없는 약속도 만드는 스킬까지 선보였다.

“천천히 먹고 가요.”

미순은 과일 접시를 건우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우리에게 날리는 미순의 눈짓에 건우는 미순이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부러 약속을 만들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저도 남은 일이 있어서.”

“아니.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요.”

“회사 일을 다 끝내질 못해서. 잘 먹고 금방 올라가보겠습니다.”

건우는 미순의 호의에 적당히 선을 그었다. 자기가 미순을 집밖으로 떠미는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미순의 표정에는 아쉬운 기색이 잔뜩 묻어났다. 미순은 건우와 우리의 다정한 시간을 만들어주고만 싶었다.

주책맞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조금 도와주면 되겠네.”

미순은 재빨리 우리에게 다가가 우리의 등을 건우의 쪽으로 떠밀었다.

그 손길에 우리와 건우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우리가 보기보다는 야무지게 일을 잘하거든요.”

“예. 맞습니다. 그럼 잘 먹고 고우리씨 잘 데려가겠습니다.”

“그럼 고맙죠.”

우리는 중간에 끼인 채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건우와 미순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봤다.

당사자 의사는 왜 물어보지도 않는 건데!

“가끔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가 매일 붙어 있으니까.”

힐끗 우리를 보던 미순이 고상한 웃음을 날려댔다. 남들 앞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웃음이었다.

“무튼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있어요.”

“예. 감사합니다.”

누가 와도 내 집이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불편한 현장이었다. 우리의 방을 습격했던 미순이 엉큼한 미소를 날리면서 방을 나갔다.

급히 방문에 붙어 미순이 멀찍이 거실로 나갔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우리는 건우에게 다가섰다.

“죄송해요. 차장님.”

“뭐가요.”

“너무 과하죠.”

“왜요. 난 좋은데.”

건우가 귀한 망고스틴을 집고는 우리에게 내밀었다.

“너무 잘 챙겨주셔서 죄송하기도 하고.”

건우는 과일이 담긴 접시를 봤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만큼 푸짐한 접시에 건우는 그저 죄송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한 눈에 봐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고우리, 잘 챙겨야지.”

건우는 눈만 깜빡대는 우리의 입에 망고스틴을 넣어주었다. 얼결에 과일을 받아먹은 우리의 입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말캉한 망고스틴의 과즙이 우리를 달게 적셨다. 우리를 바라보는 건우의 눈길에서는 단 기운이 흘러내렸다.

“어머님이 잘해주시는 만큼.”

우리를 보던 건우의 미소가 진해졌다.

“하나 더 먹겠습니까.”

“아뇨. 괜찮아요. 차장님 드세요.”

우리는 슬쩍 과일이 담긴 접시를 건우의 쪽으로 밀어주었다. 하지만 건우는 포크를 내려놓은 채로 우리만 바라봤다.

건우의 눈빛에 담긴 말을 우리는 잘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과일 하나만 달라는 듯한 간절한 눈빛.

“차장님. 여기 포크…….”

우리는 그 눈빛을 외면하면서 건우에게 포크를 내밀었다. 우리의 단호한 손길에도 건우는 요지부동이었다.

누구보다 잘 받아먹을 수 있다는 눈빛만 꼿꼿하게 날려댔다.

“진짜 한 번만 드리는 거예요.”

“두 번은 어렵겠습니까.”

“네. 딱 한 번 만이에요. 싫으시면…….”

“아니.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건우가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입을 벌렸다. 마치 어미 새가 모이를 주길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건우는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기대에 가득 차 반짝거렸다.

우리가 두 손으로 포크를 잡고는 바나나를 꼭 집었다. 포크 끝에 있는 바나나가 꽤 다부져보였다.

우리는 제법 비장한 얼굴로 건우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포크를 쥔 손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바나나는 곧게 건우의 입으로 골인했다. 하얀 바나나 속살이 건우의 입을 가득 적셨다.

바나나를 씹는 건우의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어도 이보다 더 맛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바나나였다.

***

월요일 아침. 월요병마저 이길 만큼 우리는 건우와 출근을 하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적당한 시간차를 두고 우리가 먼저 사무실로 들어섰다. 우리를 발견한 선영이 반갑게 우리에게 다가섰다.

“대리님!”

선영은 한껏 광분한 얼굴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어 죽을 것처럼 보였다.

“일단은 컵케이크 먼저 받으세요. 제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구웠거든요.”

우리는 선영이 내민 상자를 받고는 놀란 기운을 감추지 못했다.

두 손으로 들기에도 힘든 상자 속에서는 컵케이크가 잔뜩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이 큰 선영의 큰손을 우리는 다시금 깨달았다.

“고마운데 너무 많아서. 다 같이 먹으면…….”

“이미 같은 걸로 다 드렸어요!”

선영의 말에 우리는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결혼 답례품이라도 되는 듯 모두의 자리에 조그마한 상자가 놓여있었다.

“같이 먹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게. 그럼 좋지. 어제는 어땠어.”

“좋았어요. 컵케이크도 먹고 출판사 구경도 했거든요. 책도 몇 권 받고.”

선영은 제 책상에 있는 소설을 가리켰다. 19세 미만 구독 불가 딱지가 붙은 소설 몇 개가 강렬하게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숱한 책들 속에서 제 책을 찾는 일은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쉬웠다.

“책을 왜 회사에…….”

우리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왜 내 책이 여기에 있는 건데. 왜!

“심심할 때마다 읽으려고요.”

방황하는 우리의 눈동자를 눈치 채지 못한 선영은 우리의 책을 두 손으로 들고는 빙긋 웃었다.

“다 독파해버릴 거예요.”

“책은 집에서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제가 조금 시끄러워야 집중이 잘 돼서요.”

너무도 당당한 선영의 말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발견한 제 책을 바라보는 것도 괜히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19세 금지 딱지는 오늘따라 왜 더 도드라지게 보일까.

정말 미쳤나봐.

“얼른 읽어서 감상문이라도 보내려고요.”

“그건 왜.”

“감상문으로 이어지는 인연. 낭만적이죠. 대리님!”

“그걸로 낭만을 찾기는 조금…….”

“책이 만들어준 사랑. 그게 또 제 빅 픽처거든요.”

제 생각을 말하는 선영은 우리의 말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얼마나 뜨거운 감상문을 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차장님! 차장님도 컵케이크 드세요.”

선영은 냉큼 책을 책상에 두고는 컵케이크를 건우에게 내밀었다.

선영의 컵케이크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건우는 무심한 얼굴로 제자리로 걸어갔다.

하지만 선영은 컵케이크만큼은 꼭 주고 말겠다는 것처럼 건우에게 바짝 붙었다.

“컵케이크요.”

“단 건 좋아하지 않아서.”

단단한 철옹성처럼 건우는 선영의 컵케이크를 막았다.

“그래도 축하의 컵케이크니까 하나만 받아주세요.”

“거기 놔두고 가요.”

“넵! 두고 가겠습니다. 차장님!”

“예. 뭘 축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건우가 무감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켰다. 조심스럽게 건우의 책상에 컵케이크를 놓던 선영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도 아주 눈에 띌 정도로 표가 나게.

“제가 차장님 친구 분하고 어제 만났거든요. 그래서…….”

선영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들떴던 어제의 일을 끝없이 뱉어내려고 했다. 누구에게든 자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건우는 선영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살짝 손을 들었다.

그 손길 하나에 선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들었습니다.”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책도 받고…….”

“잘했겠죠. 그럼 컵케이크는 잘 구경하겠습니다.”

“아…… 넵!”

건우는 딱히 성민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 힐끗 제 책상에 놓인 컵케이크만 쳐다볼 뿐이었다.

컵케이크는 외형부터 화려했다. 초코 시트에 하얀 크림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웨딩 케이크라도 되는 것처럼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본떠 만든 초콜릿이 놓여있었다.

컵케이크만 봐도 선영이 꿈꾸는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선영만큼 성민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가 만든 컵케이크를 보던 선영이 은밀하게 건우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또 축하할 소식이 하나 더 있거든요.”

선영의 말에 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선영은 본부장실을 향해 눈짓을 날렸다.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온 우팀장이 본부장실에서 나왔다. 우팀장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징계위원회 회부 날짜. 바로 받으셨을 거예요. 아빠가 빨리 처리하시겠다고 하셨거든요.”

“고맙습니다.”

“제가 한 것도 없는데요. 그럼 저는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기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선영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선영의 말대로 아침부터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회사로 들어온 사내 성추행 전말을 확실히 밝히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나온 본부장은 우팀장을 호출했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본부장에게 깨지고 나온 우팀장은 큼지막한 상자를 들고 있는 우리를 노려봤다. 핸드폰을 쥔 우팀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친. 같잖은 게 아주 빅엿을 먹이네.’

우리를 보는 우팀장의 눈빛에는 살기마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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