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화. 야구 경기의 묘미, 키스타임
우팀장은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건우에게 다가섰다.
그 자신만만한 우팀장의 모습에 우리는 수진이 재빨리 사라진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고대리도 있었네.”
우팀장은 우리에게도 아는 체를 해댔다.
“점심은 거의 끝난 것 같은데. 마케팅은 역시 여유가 있어.”
우팀장의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누구 하나는 상처 받게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우리도 건우도 우팀장의 말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우팀장님도 일하러 돌아가시죠.”
“나는 돌아다니는 게 일이니까.”
“복도를 돌아다니는 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건우는 우팀장과 더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사무실로 들어갔다. 냉큼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우팀장은 맥 빠진 표정이었다.
건우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복도에 덜렁 남은 우팀장을 힐끗 보던 우리도 건우에게 바짝 다가섰다.
“수진씨한테 한소리 했을까요.”
“정황상 그런 것 같습니다.”
“가볼까요.”
“원하면.”
건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가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는 경보라도 하듯 사무실을 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우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살폈다.
하지만 양치질을 하는 직원들의 모습만 보일 뿐 수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빼고 사위를 살피던 우리는 비상계단을 빤히 쳐다봤다. 수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지 않았다면 남은 곳은 여기뿐이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묵직한 문을 열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대리가 먼저 꼬셨잖아.’
너무도 당당하던 우팀장의 목소리가 설핏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계단에 앉아있는 수진의 뒷모습을 봤다. 수진의 몸집이 유달리 작게만 보였다.
“수진씨. 앉아도 될까.”
“아…… 네.”
수진의 목소리는 눅진히 젖어있었다. 하지만 수진은 구태여 괜찮은 척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밥은.”
“열심히 먹었어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제법 힘을 내보려는 수진의 목소리는 조금씩 작아졌다. 우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로 수진을 봤다.
우팀장을 신고하는 것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었다.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얼굴을 봐야만 하니까.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수백 만 가지의 말 속에서 본질이 흐려질 수도 있었고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었다.
더러는 수진이 상처를 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대로 묻어두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수진도 잘 알고 있었다.
“선영씨한테는 전달 받았어요.”
수진은 단단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오늘 할게요. 신고.”
“서두르지 않아도 돼.”
“제가 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그래야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러자.”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것처럼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송은 차장님이 맡겠다고 하셨으니까 걱정 말고.”
“제가 따로 나가거나 하는 건…….”
“가끔 변호사하고만 대화하면 될 거야. 증인보호프로그램도 있고 증인소환장도 그쪽 사무실로 갈 거고.”
“고맙습니다. 대리님.”
수진은 울컥하는 맘을 누르면서 힘겹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우리는 수진의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왜 참니.”
“…….”
“조금 운다고 지는 것도 아닌데.”
다정한 우리의 말에 수진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묵직한 소리가 비상계단을 타고 흘렀다.
우팀장은 수진을 데리고 온갖 협박을 해댔다고 했다.
조용히 회사를 다니는 것이 좋을 거라고. 우리는 아무 힘도 없다고.
끝없는 월세와 학자금 대출, 매일 나가는 생활비……. 통장을 스쳐지나갈 수많은 항목에 수진의 머릿속도 복작거리기만 했다.
그 때문이었다. 우리의 말 하나에도 펑펑 눈물이 쏟아졌던 건.
우리는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수진을 다독였다.
“괜찮아.”
“그래도 혹시 잘못되면…….”
“마케팅팀은 별론가. 꽤 재밌는 부서인데.”
수진은 우리를 빤히 쳐다봤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을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반 진담이었는데.”
우리는 민망한지 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그 말에 코를 훌쩍거리던 수진은 자기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울다 웃으면 큰일 나는데.”
“그래서 내가 큰일 났나봐.”
“대리님.”
“아…… 이것도 반 진담.”
도통 통하지 않는 유머 코드에 우리는 눈만 깜빡거렸다. 건우처럼 변하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도 진지해보여서 농담조차 농담 같지 않은 상사.
어쩌면 아재 개그만 날려대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랐다.
“대리니임.”
우리를 빤히 보던 수진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꽉 우리를 안은 수진은 코만 훌쩍거렸다.
비상계단에는 메아리처럼 조그마한 미소가 맴돌았다.
***
거대한 폭풍우를 머금은 회사는 조용하기만 했다. 최후의 만찬처럼 외출하기 좋은 주말만 바짝 다가왔다.
토요일 아침부터 우리는 바빴다. 야구장을 갈 생각에 우리는 제법 들떠있었다.
우리는 집에 있던 낡은 글러브까지 가방에 꽉 눌러 담았다.
홈런으로 날아드는 야구공을 모두 잡아버리고 말겠다는 의지까지 활활 타올랐다. 미리 주문한 유니폼까지 들고 우리는 건우의 집으로 향했다.
예정보다 빠르게 우리는 건우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건우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차장님. 좋은 아침이요.”
가방끈을 잡고 있는 우리는 잔뜩 들떠있었다. 성민과 선영을 잇는 임무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 출발해야합니까.”
“아뇨. 일찍 내려왔어요. 유니폼도 미리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우리는 손에 있던 유니폼을 힘껏 내밀었다. 구단 로고가 박힌 남청색 유니폼의 뒷면에는 선수 백넘버까지 적혀있었다.
건우는 얼결에 우리가 내민 유니폼을 받아들었다.
“무슨 유니폼입니까.”
“디자인도 예쁘고. 그냥 맞춰 입으면 좋을 것 같아서. 별로면 두고 가셔도 돼요.”
“직접 보니까 꽤 탐나기는 하네.”
“그죠. 색깔도 예쁘고.”
우리는 제 유니폼 티셔츠를 살짝 당기면서 말했다. 건우의 긍정적인 반응에 덩달아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건우는 팔짱을 낀 채로 온갖 유니폼 장점을 말하는 우리를 가만히 쳐다봤다. 점점 유니폼이 탐나지는 것만 같았다.
“끝났습니까.”
우리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건우가 입을 열었다.
“네.”
“그럼 일단 들어와요.”
“갑자기 집은 왜요.”
“여기서 갈아입을 수는 없으니까. 원하면…….”
“아뇨. 방에 가서요. 여기서는 아니죠.”
두 팔을 엇갈려서는 윗옷을 벗을 준비를 하는 건우의 모습에 우리가 화들짝 놀라서는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설핏 봤던 섹시한 장골을 보여줄 수 없다는 다부진 손길이었다.
우리의 손에 떠밀려 건우는 거실까지 들어와 버렸다.
“성민씨는 바로 야구장으로 오는 거죠.”
“예.”
“왜 제가 떨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제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콩콩거리는 심장 소리가 손바닥에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곧 벗을 거라.”
낮은 건우의 목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갔다. 건우를 보던 우리의 눈동자가 커졌다.
짤막한 예고를 끝으로 건우가 윗옷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건우가 움직일 때마다 탄탄한 근육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건우는 제 셔츠를 소파에 두고는 유니폼을 들었다.
유니폼이 건우의 완벽한 몸매를 가릴 때까지도 우리는 건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유니폼도 멋지게 소화하면 어떡하나요. 차장님.
“갑시다.”
준비를 끝낸 건우가 말했다.
“네. 가요.”
“가방 줘요. 들어줄 테니까.”
“괜찮아요. 가뿐해요.”
“내 손이 너무 심심해서.”
건우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가방을 가져갔다. 우리의 가방은 제법 무게가 나갔다.
“생각만큼 가볍지는 않네.”
“주세요. 제가 들면 돼요. 혹시 몰라서 우산도 챙기고 글러브도 챙겨서 그럴지도 몰라요.”
“글러브는 왜 챙겼습니까.”
“홈런 맞을지도 모르잖아요.”
집을 나서던 우리는 야무지게 야구공을 잡는 시늉을 해댔다. 하지만 엉성한 폼을 숨길 수는 없었다.
건우는 구단 부스에서 글러브를 빌릴 수도 있다는 말은 생략하기로 했다.
그저 즐거워 보이는 우리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을 못했네.”
“차장님한테 오면 제가 잡아드릴게요.”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누가 봐도 날아든 볼에 손이 다칠 것처럼 엉성해보였다.
“일단 차는 타고.”
건우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날리면서 우리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뒷자리에 우리의 가방을 두고는 건우는 시동을 걸었다.
건우의 차는 빠르게 도로를 내달렸다. 우리는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차창을 열었다.
한결 훗훗해진 바람이 우리의 뺨을 적시면서 지나갔다. 푸릇한 향기를 헤집고 달리던 차는 빠르게 야구장에 도착했다.
큼지막한 가방을 메고 있는 우리는 단번에 선영을 발견했다. 자기만큼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리님!”
가방끈을 바투 잡은 선영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꾸벅 인사를 해댔다.
“일찍 왔네.”
“넵. 너무 설레서요. 근데 성민씨는.”
선영은 고개를 쭉 빼고는 성민을 찾는데 열중했다.
“여기로 바로 온다고 하더라고.”
“다행이다. 제가 아직 연습을 못했거든요.”
“무슨 연습.”
“무진장 반갑지만 반갑지 않지만 그래도 반가워 보이는 인사요.”
선영의 긴 호흡을 따라가던 우리는 하마터면 숨이 막힐 뻔했다.
목까지 빼고 선영의 말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려댔지만 우리는 손톱만큼도 선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되게 이율배반적인 것 같은데.”
“그게 포인트거든요.”
포인트라는 말에 강하게 힘을 주는 선영의 말에도 우리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게 대체 무슨 포인트인데.
“쿨하게 대하고 싶다는 것 같습니다.”
“넵! 맞아요. 차장님.”
“그래도 자연스러운 것만 못하죠.”
선영은 꽤 진지한 얼굴로 건우의 충고를 머릿속에 새겼다. 대화가 통하는 선영과 건우의 모습이 우리는 마냥 대단하게만 보였다.
자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선영의 말을 해석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제일 늦은 것 같네.”
성민의 목소리에 선영은 단박에 얼어붙었다. 완벽한 인사 연습도 끝내지 못했는데 성민을 마주하게 됐다는 얼굴이었다.
“일찍 다녀라.”
건우는 무심한 얼굴로 성민에게 뼈 있는 말을 날렸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강건우. 내가 보고 있는 게 실화냐.”
“그만 봐라. 닳는다.”
“내가 유니폼 입자고 할 때는 그렇게 거절하곤.”
성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건우의 윗옷을 바투 잡았다.
“구겨진다. 놔라.”
건우는 우리가 사온 유니폼에 흠집이라도 날까.
거미처럼 딱 달라붙은 성민의 손을 건우는 단박에 떼어냈다.
“와. 배신자.”
“지극히 네 관점에서지.”
건우의 말은 성민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대차게 반박을 날릴 만큼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유니폼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꺼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성민은 두 손을 들었다.
“지금 인사하면 되는 거죠.”
그제야 우리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작가…… 아니. 고우리 대리님. 반갑습니다.”
“네. 간만에 뵙네요.”
“그러니까요. 제가 그날 자는 모습만 보여드려서.”
성민은 민망하다는 듯 목덜미만 긁적거렸다. 건우가 다친 지도 모르고 코까지 골고 자는 친구로 기억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여기는 저번에 보셨죠.”
우리가 쉽사리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있던 선영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저희 회사 막내인데. 강선영씨예요.”
우리는 본격적으로 선영에게 멍석을 깔아주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선영은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는 성민에게 다가섰다.
성민과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선영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강…… 선영이라고 합니다.”
“한성민입니다.”
“저번에 회사에서 뵀는데. 또 뵙네요.”
“그랬나요. 제가 기억력이 좋질 않아서.”
“차차 기억하면 되는 거죠.”
우렁찬 선영의 말은 조금씩 식어갔다. 성민과 선영 사이로 번져나가는 어색한 기운에 우리마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일단은 저희 들어갈까요.”
우리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냥 놔뒀다가는 누구 한 명이 집에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뒤를 쫓아 모두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누구보다 신중하게 자리를 배치했다.
건우와 성민이 같이 붙어있으면 선영이 말을 붙이기가 힘들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름 고도의 계략이 들어간 자리배치였다. 그 거대한 계획에 건우는 우리와 선영 사이에 끼인 꼴이 돼버렸다.
“내가 바깥쪽에 앉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선영씨가 저한테 기댈 거예요.”
우리의 단호한 말투에 건우는 자리 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 먹을 것 좀 사올까요.”
벌떡 일어난 우리가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그 모습이 꼭 유치원생들을 이끄는 선생님처럼 보였다.
“그럼 저는 건우하고 저쪽…….”
“차장님은 저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는 성민의 말을 대번에 가로막았다.
“그러죠.”
건우도 나름대로 격하게 우리의 말에 동조했다. 먹을거리를 사려는 사람들로 야구장은 북적거렸다.
우리는 각자 적당히 먹을 만한 것을 사고 돌아가기로 했다.
성민을 따라 인파 속으로 사라지던 선영이 고개를 돌렸다. 선영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괜찮을까요.”
우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선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 먼저 걱정하죠.”
“저희는 왜요.”
“단둘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으니까.”
건우는 손목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적어도 경기 시작 전에는 들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말은 고로 우리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럼 피자 먼저 살까요. 냄새 좋은데.”
“그러죠.”
“치킨도 필수인데. 선영씨가 사겠죠. 하긴 중간에 나와서 사면 되는 거니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문자답을 해댔다. 우리는 냄새에 끌리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무궁무진하게 많은 먹을거리에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마 천국이 있다면 바로 야구장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야구장 자주 올 걸 그랬어요.”
피자를 받아든 우리의 눈이 빛났다. 우리의 손은 금세 먹을거리로 가득 찼다.
당장 야구장에 있는 먹을거리를 쓸어 담을 기세였다.
“먹을 거. 진짜 많네요.”
“자주 옵시다.”
“약속하셨어요. 제가 기억력 하나는 좋으니까 차장님도 잘 기억하고 있으세요.”
“예.”
건우는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고는 우리가 들고 있던 먹을거리를 가져갔다. 자리로 돌아온 우리가 힐끗 선영을 쳐다봤다.
“대리님. 닭 샀어요.”
전보다 긴장이 풀어졌는지. 선영이 노릇하게 잘 튀겨진 치킨을 들고는 벙긋 웃었다.
아니. 성민씨한테 말하라고.
“맥주도 시킬까.”
선영이 목을 빼고 우리에게 말을 하듯. 성민도 괜스레 몸을 빼고는 건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맘대로.”
“그럼 네 잔 시키면 되나.”
“직접 물어봐.”
우리는 묻지 않아도 먹겠다는 듯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우리를 보던 성민의 눈길이 자연스레 선영에게로 향했다.
“……드시겠습니까.”
제법 단정한 목소리가 흘렀다.
“넵. 한 잔만.”
수줍은 선영의 목소리도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조금씩 빨개지는 선영과 성민의 두 뺨에 우리는 제 맘까지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설렘을 품은 채로 야구경기가 시작됐다. 컵 홀더에 맥주잔을 내려놓은 우리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건우는 이해하기 쉽게 간간히 설명을 해주었다. 경기 규칙을 우리는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샌가 야구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가슴에 품은 글러브를 끼고는 홈런 볼을 잡을 생각에 잔뜩 빠진 채로.
“넘어간다. 넘어가…… 으악!”
펜스를 넘지 못한 볼에 우리는 제 두 뺨을 쓸어내렸다.
“고우리씨. 편의점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네. 다녀오세요.”
우리는 건우를 보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저도 갈게요. 차장님.”
야구 경기에 빠져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우리와 성민을 두고 선영도 좌석을 빠져나왔다.
떨어진 생수와 주전부리를 사들고 건우와 선영이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6회 초로 넘어가려는 클리닝 타임이 시작됐다.
나쁜 기운이 건우의 등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건우의 촉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커다란 전광판 속. 키스 타임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큼지막한 하트 속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느 샌가 바짝 붙어 앉아있는 우리와 성민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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