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화. 계획은 시작됐다
커플 사진을 사수하는 일은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났다. 아침부터 선영이 홍보팀에서 원본을 잔뜩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선영은 포토샵까지 열고는 사진을 최대한 확대해 보정을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포토샵을…….”
아침 일찍 출근한 황주임이 선영에게 바짝 붙었다.
“차장님하고 대리님 사진이요. 기념으로 드리려고 수정하고 있었어요.”
“포토샵도 할 줄 아는 거야?”
“대학교 때 사진 동아리도 들었었거든요. 그때 조금 배웠어요.”
“나중에 쉴 때 나도 부탁하나만 하자. 별 거는 아니고 조카 얼굴 합성해서 스티커 만들려고 하는데 내가 포토샵을 못해서.”
황주임의 얼굴에 씩 미소가 번졌다. 선영의 손재주를 봤으니 반드시 승낙을 받고 말겠다는 기운마저 흘렀다.
“디자인 비용도 따로 들기도 하고.”
선영은 마우스를 잡은 채로 황주임을 봤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부탁에 선영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냥 재능 기부라고 생각하고 쉴 때 부탁해.”
황주임은 벙긋 웃고는 선영의 등까지 툭, 두드렸다. 어려운 일을 부탁하는 것도 아니라는 막강한 철면피까지 깔고 있었다.
제 할 말을 끝낸 황주임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열심히 선영에게 줄 조카 사진을 찾아댔다.
“주임님.”
“사진 금방 골라줄게. 예쁜 게 너무 많아서. 얼굴이 반듯하게 잘 나와야 하나. 조금 포커스 나가 있어도 수정 가능하지.”
“저 못해요.”
“그건 못하는구나. 그럼 제대로 된 걸로…….”
“아뇨. 그거 말고 작업 못 해드릴 것 같아요.”
선영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똑똑히 거절했다.
괜히 맡을 수 있다고 궁싯거리면서 일을 받는 것보다는 정확히 못 한다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쉴 때가 없어요.”
“쉴 때가 왜 없어. 백날 일만 하는 것도 아닌데.”
“커피도 마셔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그리고 쉴 때 일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완벽하게 그어진 거절의 선에 황주임은 짐짓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기였다면 무조건 두 팔을 걷고 야근도 불살랐을 것이다. 요즘 신입들이란!
“차장님하고 대리님 사진은 수정해주고 있잖아.”
“그건 제가 은혜 갚을 일이 있어서요.”
선영의 말이 못내 고까웠는지 황주임의 눈이 쌜쭉거렸다.
갑자기 무슨 까치도 아니고 은혜 타령이야.
“선영씨. 지금 해주기 싫다는…….”
“헐! 설마. 주임님.”
황주임이 설교라도 할 것처럼 자세를 고쳐 앉았을 때였다. 선영이 의자를 바짝 당겨서는 황주임의 두 손을 잡았다.
난데없이 맞잡은 손에 황주임은 짐짓 당황한 얼굴로 선영을 봤다.
선영은 황주임을 향해 눈까지 빛냈다. 왜 그러는 건데.
“방금 작업비 주시려는 거죠.”
“아니. 무슨 작업비를…….”
“정 주시겠다면 조금만 받을게요. 시급으로.”
선영은 황주임의 말문을 단숨에 막히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작업비 요청에 황주임은 선영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임님한테만 특별히 지인 찬스 드릴게요.”
벙긋 미소를 짓는 선영의 얼굴은 마냥 해맑았다. 그 미소 속에서 탈출하려는 것처럼 황주임은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빼냈다.
치열했던 사투를 보여주듯 황주임의 손은 조금 빨개져 있었다.
“됐다. 됐어. 그냥 내가 할게.”
“못 하신다면서요.”
“부탁하면 되니까. 할 수 있어. 다시 돌아가서 앉아줄래. 선영씨.”
황주임이 두 손으로 선영의 책상을 가리켰다.
“그래도…….”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다정하게.”
건우보다 먼저 사무실로 들어온 우리가 말했다. 선영이 우리에게 한 눈을 판 사이에 황주임은 선영의 의자를 툭, 쳐냈다.
최대한 자연스럽고도 은밀한 발길질로. 그 바람에 선영은 힘 하나도 들이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온 꼴이 됐다.
“대리님 사진 손보고 있었어요.”
선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제 모니터를 콕, 가리켰다. 모니터에는 우리의 턱이 확대돼 있었다.
조그마한 모공 하나 다 보일 만큼 고화질을 자랑하는 사진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선영의 마우스를 잡았다.
최대한 확대됐었던 사진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우리는 사진 속의 건우를 봤다.
터치 하나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밸런스를 자랑했다.
우리는 당장 사진을 받아 제 배경화면으로 설정해두고 싶을 지경이었다.
“차장님도 손 본 건가.”
“아뇨. 딱히 손댈 데가 없을 것 같아요.”
“그지. 모공도 없고 턱 선도 날렵하고 또…….”
선영은 사진에 빠졌던 우리의 팔을 팔꿈치로 살짝 쳤다.
그 몸짓 한 번에 눈에서 하트를 쏟아낼 것 같았던 우리가 다시금 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래도 차장님도 보정은 해야겠다.”
결점 하나 없는 사진을 보던 우리는 두루뭉술하게 말을 끝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고칠 만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 하면 보내줘. 선영씨.”
“넵! 금방 돼요.”
“잘 나왔는지 체크만 해보려고.”
“그럼요.”
“다른 뜻은 없고.”
“당근이죠.”
만담이라도 하듯 황주임을 사이에 두고 우리와 선영은 말을 주고받았다.
옅은 영혼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들이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
의자를 힘껏 뒤로 젖힌 우리는 선영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진만큼은 반드시 사수하고 싶다는 눈길이었다.
선영은 걱정 말라는 것처럼 슬며시 은밀한 미소를 날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밀스러운 우리와 선영의 눈빛을 가르면서 건우가 등장했다. 묘하게 들떠 보이는 건우의 말투에 황주임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황주임이 목인사를 하려던 순간.
건우의 손에서 반짝거리는 반지의 등장에 황주임의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무슨 할 말 있습니까.”
금붕어처럼 뻥긋거리는 황주임을 보고 건우가 물었다.
“아…… 아뇨.”
“그럼.”
황주임의 말에 건우는 제자리로 걸어갔다. 하지만 황주임은 여전히 놀란 얼굴로 건우가 사라진 자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친이 있었다니…….
황주임은 다급히 선영의 손을 살폈다. 선영의 손에는 반짝이는 반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선영씨. 손 봐봐.”
“손은 갑자기 왜요.”
황주임의 말에 선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두 손을 들었다.
황주임은 선영의 손을 열심히 살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반지는 없니.”
황주임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물었다.
“괜히 반지 하고 있으면 남친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잖아요.”
유달리 해말간 선영의 미소에 황주임은 미웠던 맘조차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쓰린 짝사랑의 말로를 위로해줄 방법조차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근데 반지는 왜요. 사시려고요?”
“그냥. 하나 살까 고민 중이라.”
“추천해드릴까요. 제가 괜찮은 브랜드 몇 개 추천해드릴 수 있는데.”
“나중에 받을게.”
황주임은 저돌적인 선영을 진정시켰다. 정작 선영은 반지라는 말에 흠칫하지 않았지만 말없이 모니터를 보던 우리는 황주임의 말에 바짝 집중하고 있었다.
건우의 반지 사건이 곧 만천하에 번져나갈 거라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촉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황주임의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두 손으로 빈 잔을 든 황주임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갔다.
모든 소문의 근원지인 탕비실을 향해.
“대리님. 보냈어요.”
한창 포토샵에 열정을 쏟아 부은 선영이 우리에게 사진을 날렸다.
그리고는 의자를 쭉쭉 당기면서 우리에게 다가갔다.
“근데 블랙박스는 어떻게 됐어요.”
“없었어.”
“하나도요?”
“교묘하게 피했더라고. 몇 번이나 돌렸는데 허탕이었어.”
“그럼 어쩌죠. 마지막 카드 쓸까요.”
선영은 명령만 받으면 당장 회장님에게 달려가겠다는 눈치였다. 우리가 조근조근 건우의 계획을 말하던 때였다.
탕비실을 나오던 직원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강차장님. 여친 생기셨다며.”
“정략결혼 같은데. 왜 SE그룹 외동딸 결혼 발표한다는 찌라시 돌았잖아.”
“재벌은 피곤하긴 하네. 사랑도 없이.”
“왜. 그래도 나는 돈 한 번 많고 싶다야.”
귓가를 도는 말들이 우리에게 유난히 크게만 들려왔다.
“대리님.”
자기를 부르는 선영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할 만큼.
“대리님!”
“아…… 어어. 미안해. 시끄러워서.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징계위원회까지 말하셨어요.”
우리는 건우의 반지 사건이 부풀어지는 것을 외면하면서 건우의 계획을 말하는데 집중했다.
지금은 때 아닌 루머가 커지는 것보단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그럼 수진씨한테 말할게요.”
“민감한 일이라서…….”
“같은 신입끼리 말하면 조금 더 잘 통할 것도 같아서요.”
“그럼 부탁해도 될까.”
“넵. 걱정 마세요. 확 혼내줘야죠.”
선영은 걱정 말라는 것처럼 씩 미소를 지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선영을 보는 순간에도 건우의 반지 사건은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곧 건우가 결혼을 발표할지도 모른다는 소리까지 나돌 정도로.
***
끝없이 쏟아지는 소문에도 건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점심 먹죠.”
도리어 들뜬 목소리로 점심을 독려했다. 팀원들과 섞여 구내식당에서 밥까지 한 그릇 말끔히 해치웠다.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반지를 자랑하듯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차장님. 시간되실까요.”
“얼마든지.”
“그럼 산책하면서.”
우리가 바깥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노골적인 몸짓에 경고를 날리려는 우리의 긴급한 호출이었다.
“그럽시다.”
퇴식구에 식기를 반납한 우리와 건우가 구내식당을 나섰다.
“코트만 들고 내려오겠습니다.”
“날도 꽤 따뜻해서 괜찮을 것 같은데.”
“반지가 있어서.”
“그럼 저는 커피 사고 있을게요.”
“내 것도 부탁합니다.”
건우는 제 사원증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제가 쏠게요. 반지 받은 기념으로.”
하지만 우리는 건우의 사원증을 긁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상사라는 오명을 건우에게 건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내 걸로 결제를…….”
“저희 산책 갈 시간도 없을 것 같아요.”
“바로 다녀오죠.”
우리의 말에 건우는 사무실로 올라갔다. 우리와 단둘이 산책할 시간을 뺏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사 로비에서 커피를 주문한 우리가 계산을 끝냈을 때였다.
계산대에 나타난 우팀장이 실수인 척 어깨로 우리를 툭 밀었다.
“어어. 쏘리. 고대리 있는 줄 몰랐네.”
우팀장은 가볍게 손을 들고는 대강 사과를 했다. 진심 하나 묻어있지 않은 사과였다.
“근데 고대리. 은근히 존재감이 없네. 있는 줄도 모르게.”
“그러게요. 제가 작지도 않은데.”
“딱히 크지도 않잖아.”
“그래도 팀장님하고 눈 마주칠 정도는 되는 걸요.”
구두의 힘을 믿으면서 우리는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여유가 흘러넘치는 우리의 미소가 우팀장은 그냥 미웠다.
“말 하나는 딱 부러지네. 고대리.”
“그럼요.”
“근데 나도 주둥이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온 건 모르는 것 같네.”
우팀장도 냉랭한 미소를 날렸다. 우리에게는 절대 질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우팀장의 눈동자에 일렁였다.
“우리 수진씨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몰라도 걘 생각보다 여려서 왔다 갔다 한다니까.”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일종의 경고지.”
“…….”
“뜻대로 못 할 거야.”
우팀장은 계산대 앞에 있던 쿠키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는 무심한 얼굴로 계산을 했다.
“나도 멍청한 팀원 구워삶는 법은 잘 아니까.”
우팀장은 쿠키를 씹었다. 오도독거리는 소리가 우리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차가운 조소를 날리던 우팀장은 우리의 어깨를 치려다가 말았다.
“고대리 몸은 건드리면 큰일 나지.”
“…….”
“성추행이니 뭐니. 아주 성가시게 하니까.”
“가보겠습니다.”
우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우팀장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썩은 냄새가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우팀장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블랙박스를 열어보라고 할 때만큼 여유마저 넘쳐흘렀다.
‘지랄 맞게 잘못 건드려서.’
우팀장은 우리에게 매서운 눈빛을 날리고는 사라졌다.
“우팀장 만났습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는데 표정이 별로라. 혹시 고우리한테 한 대 맞았나하고.”
“제가 맞았죠.”
우리의 말에 건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우리에게 생채기라도 생겼을까. 건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의 얼굴을 살폈다.
“생각보다 더 빨리 욱하시더라고요.”
“걱정되긴 했나보네.”
“그럼 절반은 성공이네요.”
우리가 건우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커피를 받아든 건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리를 봤다.
“나쁜 짓을 하면 발 뻗고 자지는 못한다는 거. 그거 하나는 깨닫게 해줬으니까요.”
우리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회사를 나섰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또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밤에 자지 못하는 우팀장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통쾌해지는 것만 같았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 있던 건우는 우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힘찬 우리의 구두 소리가 대견해보이기까지 했다. 조용히 미소를 흘리던 건우는 우리에게 걸어갔다.
제법 따뜻한 바람이 우리와 건우의 두 뺨을 어루만지듯 스쳐지나갔다. 성큼 봄이 다가온 것이었다.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연초록빛 향기가 스며있었다.
“자주 산책 나와야겠네.”
건우가 회사 근처에 있던 공원을 보면서 말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 햇빛이 아스팔트 위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가끔은 좋을 것 같아요. 자주 나오면 의심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받지 않을 수도 있죠.”
“어떻게요.”
“소문이 상당하니까.”
건우는 제 손을 가볍게 들었다. 매끄러운 건우의 손에 있는 반지가 유달리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다 듣고 계신 줄 몰랐어요.”
우리는 건우에게 바짝 다가서서는 말했다. 일에 열중하느라 지나가는 소문에는 관심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였다.
그런데 모조리 듣고 있었다니!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으시고 해명도 딱히 하지 않으셨으니까.”
“웃길 것 같아서.”
“뭐가요.”
“갑자기 나타나서는 나는 재벌도 아니고. 그래서 아버지가 맺어주는 여자하고 결혼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거.”
“어…… 웃길 것 같기는 하네요.”
우리도 건우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탕비실의 문을 열고는 소리치는 건우의 모습을 상상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우리는 모든 세포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지독한 어색과 민망에.
“솔직히 말하면 입이 간지럽기는 했습니다.”
나직하게 말을 내뱉는 건우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말하고 싶어서.”
“뭘요.”
“고우리씨하고 사귄다고.”
따뜻한 건우의 눈길이 우리를 맴돌았다. 호수를 빛내는 물비늘조차 건우의 관심을 사로잡지 못했다.
조용히 부는 훈훈한 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햇빛은 건우의 얼굴을 적시는 매혹적인 미소를 환하게 비췄다.
“주목해달라고 거의 박수까지 칠 뻔했습니다.”
“아까는 갑자기 나타나서 말하면 웃길 것 같다면서요. 차장님.”
“괴상한 소문을 해명하는 거하곤 다르니까.”
“뭐가 다른데요.”
“여자친구 자랑이잖습니까.”
건우는 사뭇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열심히 하고 싶은 건 당연하죠.”
농담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건우는 당장 사무실로 달려가 두 손을 맞부딪히고는 우렁차게 말할지도 몰랐다.
우리와 열렬하게 사귀고 있다고.
“차장님!”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일만은 막아야만 했다.
“사무실 발칵 뒤집힐 지도 몰라요.”
“재밌을 것 같은데.”
“차장님. 발표는 상상 속에서만. 아시죠.”
우리의 단호한 말에도 건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광합성을 하는 꽃처럼 유유히 햇볕을 즐기면서 산책을 할 뿐이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우리의 말에도 건우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온갖 설득에 열을 올리던 우리는 건우를 따라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사무실로 올라가면서도 우리는 복화술이라도 하듯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그 모습마저 건우는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미소를 넘기는 건우는 괜히 헛기침만 내뱉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가 마지막 당부를 하려던 때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잔뜩 풀이 죽은 수진과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사무실 쪽을 힐끗거리던 수진은 우리의 눈을 피하면서 도망치듯 화장실로 가버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우리가 수진을 따라가려던 순간.
“강차장님. 어디 갔다 오셨나보네.”
비열한 우팀장의 목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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