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71화 (71/102)

제 71화. 블랙박스 속의 영상

순식간에 자신을 덮치는 맹렬한 조명의 기세에 우리의 눈이 커졌다.

그 짧은 순간. 얼어붙은 우리는 건우를 향해 폭주하듯 달려들던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생각났다.

“대리님!”

소리를 지르는 선영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건우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우리를 향해 빠르게 손을 내뻗었다.

그리고는 낚아채듯 우리의 허리를 안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리의 몸이 건우에게로 바짝 붙었을 때. 조명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조명이 팟, 소리를 내면서 터졌다. 손톱만한 불꽃이 일었다.

스태프가 놀라서는 소화기를 뿌렸다. 소화기 분말이 사방에 뿌려졌다. 그 기세에 눌려 불꽃은 금세 힘을 잃었다.

“다친 곳은.”

건우가 우리를 살폈다. 놀란 것 빼고는 다친 곳은 없었다. 조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에는 힘이 없었다.

나쁜 일은 모조리 다 끝났는데…….

그 작은 조명 하나 쓰러진 것에도 우리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어느 샌가 자기도 모르게 온갖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조명이…….”

“일단은 쉽시다.”

건우는 우리의 손목을 부드럽게 당기고는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대리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 저희가 저쪽 정리하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일단 대기실에서 쉬고 계시면…….”

“잘못 넘어갔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홍보팀 직원의 말허리를 자른 건우는 단호했다.

있는 힘껏 화를 누르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제가 스태프들한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대리님.”

두 손을 맞잡은 홍보팀 직원은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건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크게 다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만이 건우를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괜찮다는 듯 홍보팀 직원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만 사과해도 괜찮다는 손짓이었다.

“다친 사람 없으면 된 거죠. 괜찮아요.”

우리는 적당히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멀리서 스태프가 혼나는 소리까지 들렸기 때문이었다.

“또 같은 실수 발생하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건우는 더욱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홍보팀 직원은 주의하겠다는 말과 사과만 끝없이 남겼다.

우리는 건우와 홍보팀 직원만 번갈아 쳐다봤다.

그대로 있다가는 대기실에 앉을 시간조차 없을 것 같았다.

“정리되면 말해주세요. 저희는 대기실에 있을게요.”

“그럼 저희는 현장 정리할게요. 혹시 쉬시다가 필요한 거 있으심 말만 해주시고요.”

“네. 그럴게요. 걱정 마시고 가보세요.”

“감사합니다. 대리님.”

홍보팀 직원은 급히 현장으로 돌아갔다. 소화기 분말부터 완벽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우리는 모두 바삐 움직이는 현장을 보던 건우의 손목을 당겼다.

“설마. 쉬지도 못하는 건 아니죠. 차장님.”

우리는 괜찮다는 듯 농담까지 날렸다. 우리의 말에 무장 해제된 건우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건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많이 놀랐겠네.”

“조금 놀라기는 했어요. 조명이 쓰러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본인들도 놀랐을 거예요.”

도리어 우리가 건우를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진짜 저 운 하나는 기가 막힌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

“그때 딱 차장님이 없었으면 정말 그대로 바보처럼 서 있었을 거였는데. 백마 탄 왕자처럼 구해주셨잖아요.”

여전히 놀라 떨리는 맘을 진정시키면서 우리는 씩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떨리는 입꼬리마저 숨기지는 못했다. 굳은 침이 우리의 목구멍을 훑으면서 느릿하게 내려갔다.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던 건우가 우리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조용히 우리를 제 품에 품었다.

“누가 들어오면…….”

“그래도 못 놔줍니다.”

우리를 품은 건우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놔주면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낮은 건우의 목소리가 우리의 귓가에 녹아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도 건우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따뜻하게 제 온몸을 적시는 온기가 놀란 맘을 다독여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들키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건우의 진심은 또렷하게 우리를 적셨다. 우리는 건우의 허리를 두 팔로 꽉, 감싼 채 고개를 들었다.

“그건 아직요.”

“갑갑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가끔은 비밀일 때가 더 나을 때도 있잖아요.”

“동감을 못하겠는데.”

“잘못 들키면 이런 촬영도 못할 걸요. 붙어 다녀도 쑥덕거리고. 꼬리가 길면 밟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진지한 얼굴로 온갖 근거를 들이밀었다. 굳건한 우리의 신념에 건우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대로 나가서 폭탄 발표하는 것도 되게 웃길 것 같고요.”

우리가 자못 심각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대기실을 나가서는 갑자기 우리가 사귀고 있다고 소리치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뜨악한 얼굴로 육갑 커플의 탄생을 볼 지도 몰랐다.

어쩌면 조명 사건의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크다고 생각할지도.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진정하라고 소화기를 뿌려댈지도 몰랐다. 어쨌든 뜬금없는 발표에 촬영장은 일순간 조용해질 것이었다.

모두가 어색해질 그 상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차라리 꼬리가 밟히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만 같았다.

“재밌긴 하겠네.”

건우의 말에 우리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저 그럼 정말 탈주할지도 몰라요. 차장님.”

“그럼 큰일인데.”

“그러니까 아직 비밀이에요. 오늘은 딱 할 일만 끝내고 가는 걸로 해요. 커플템의 기운을 받아서.”

“명심하죠.”

건우는 우리의 말을 부드럽게 받아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와 건우는 다시금 촬영장으로 나갔다.

사고 하나 없었던 것처럼 촬영장은 말끔해져 있었다. 선을 밟았던 막내 스태프만 촉촉해진 눈망울로 카메라 밖에 서 있을 뿐이었다.

다시 촬영은 재개됐다. 건우의 리드로 우리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삐걱거리듯 자연스럽지 않았던 우리의 포즈도 놀랄 만큼 좋아졌다.

연달아 셔터가 터졌다. 반사판을 들고 있는 스태프의 손길도 바빠졌다.

“사진 진짜 잘 나온다.”

사진을 확인하는 홍보팀 직원은 그저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밝고 영해보이는 분위기가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화보 사진과 적당한 홍보 영상이 같이 돌아가면 꽤 시너지 효과가 날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컷 찍겠습니다. 환하게 웃어주시고.”

사진작가의 말을 끝으로 마지막 셔터가 눌렸다. 플래시가 환하게 터졌다가 사라졌다.

천천히 식어가는 플래시 속에서 우리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사진작가 뒤로 민우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

갑작스럽게 나타난 민우의 모습에 우리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꿈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환영일지도.

우리가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우리는 다시 민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리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오직 촬영을 끝내고 홀가분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만 또렷하게 보였다. 조명이 쓰러지는 사고에 괜한 생각을 가졌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웃긴 착각.

배가 고파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걸지도.

우리는 민우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면서 대기실로 향했다. 긴장해서 느껴지지도 않았던 허기가 삽시간에 밀려들었다.

우리는 테이블에 있던 과자 하나를 까서 열심히 씹었다.

“먹자. 먹어. 배고파서 그래.”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온몸을 타고 번지는 나쁜 예감을 떨칠 작정이었다.

우리가 앉지도 못한 채로 열심히 과자만 뜯고 있을 때였다.

“대리님. 저 들어가도 될까요.”

이미 대기실의 문을 열고는 선영이 물었다.

“벌써 반은 들어온 것 같은데.”

“아직 절반은 밖이잖아요.”

“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네. 들어와도 돼.”

우리의 말에 선영은 해맑은 미소를 터뜨리고는 대기실로 들어왔다.

“화장은 그대로 하고 가실 거죠.”

“아마도. 지우기도 번거롭고 아깝기도 하고.”

우리가 제 얼굴을 살피면서 말했다. 간만에 정성 들여 화장도 했는데 그냥 집에 돌아가기도 아까웠다.

근사한 레스토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건우와 가벼운 산책이라도 즐길 생각이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수정만 조금 더 해드리려고요.”

“아냐. 번거롭게. 괜찮아.”

“저도 완전 괜찮아요. 아까 보니까 조명이 뜨거워서 눈이 조금 번졌더라고요. 그게 자꾸 눈에 걸려서.”

선영은 하나도 번거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선영의 고집스러운 재촉에 결국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화장을 수정하는데 심취한 선영의 숨소리와 과자만 열심히 주워 먹고 있는 우리의 파사삭거리는 소리만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아…… 역시. 수정하니까 확실히 더 깔끔한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네. 고마워.”

“대리님도 저 때문에 고생해주시는데요. 완전 쌤쌤이죠.”

선영이 메이크업 가방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근데 저요. 역시 토요일에는 명랑한 컨셉이 낫겠죠.”

“지금도 충분히 명랑한 것 같은데.”

“제가 조금 차분한 데가 있어서요. 조용한 스타일을 좋아하려나.”

선영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차분과 명랑의 기로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것이었다.

“그래도 조금 차분해지는 게 좋지 않을까.”

“그죠. 너무 어린 것 같은 느낌은 별로겠죠. 그럴 것 같아요.”

메이크업 박스를 닫는 선영의 손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전투에 출전하는 것처럼 비장해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토요일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조용히 야구 경기만 관람하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

짐을 챙긴 우리와 선영이 대기실을 나왔다. 메이크업 박스를 잡고 있는 선영의 눈이 빛났다.

토요일의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 당장 퇴근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선영씨. 먼저 들어가 봐.”

“그래도 될까요. 차를 바로 앞에다가 주차하기는 했는데.”

선영은 쓸모없는 과한 정보까지 흩날렸다. 괜찮다고 묻는 선영이었지만 이미 절반은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 할 일도 없고. 내일 보면 될 것 같아.”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내일 뵙겠습니다. 즐거운 데이……!”

갑작스럽게 뛰쳐나온 말에 선영도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다. 난데없는 말을 수습할 적당한 말을 찾듯 선영의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갔다.

“촬영 데이요! 그러니까 덕분에 즐거운 촬영 데이 보냈습니다. 감사해요. 대리님.”

두 손을 맞잡은 선영은 꼭 기도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 실수가 고요히 넘어가기를 바랐다.

“그래. 빨리 가.”

“그럼 빨리 갈게요.”

우리가 급히 선영을 보냈다. 밖으로 나가는 선영과 본부장의 비서가 출입문에서 부딪혔다.

갑작스런 비서의 등장에 우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건우를 봤다.

“거래는 정확히 해야 하니까.”

건우는 비서가 올 줄 진즉에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했다. 비서가 짧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정신없이 시간을 맞춰 차를 밟는 통에 땀까지 죽죽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죄송해요. 시간을 맞춘다고 맞췄는데 차가 막혀서.”

“적당히 잘 오셨습니다. 생각보다 촬영이 딜레이 돼서.”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조명에 문제가 있어서. 그것 말곤 잘 끝냈습니다.”

건우를 보던 비서는 다행이라는 듯 길게 날숨을 내뱉었다.

블랙박스 영상을 전달하지 못했다가는 본부장에게 한소리를 크게 들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잔소리를 듣기 싫으면 건우의 집을 수소문해 찾아갔어야 했을지도 모르고.

“SD카드는.”

건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화보다는 블랙박스 영상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투였다.

“조심히 다뤄달라고 당부하시더라고요.”

“예.”

“다 보시고 내일 저한테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럼 제가 본부장님께 바로 전달 드리겠습니다.”

“그러죠.”

비서는 가방에서 SD카드를 꺼내 건넸다. 조그마한 칩에는 그날의 일이 잘 담겨 있을 것이었다.

우리는 본부장의 블랙박스 SD카드가 우팀장을 무너뜨릴 강력한 도구가 되길 바랐다.

“그럼 저는 다른 업무가 또 있어서.”

비서가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예.”

짤막한 건우의 대답이 퍼져나갔다. 비서는 깍듯하게 목인사를 하고는 스튜디오를 나섰다.

비서가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지도 우리의 눈길은 SD카드에 머물러 있었다.

“가면서 확인할까요. 아니면 집에 가서 확인할까요.”

“원하는 대로.”

“아무래도…….”

우리는 복작거리는 촬영장을 쳐다봤다. 홍보팀 직원과 눈이 마주친 우리는 괜스레 눈인사만 날렸다.

“집에 가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럽시다.”

우리의 말에 건우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스튜디오를 나갔다. 근처에 있던 건우의 차에 올라탄 우리는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온 신경은 자꾸만 건우의 재킷 주머니로 향했다.

우리는 자신만만하던 우팀장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었다. 정말 다시는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저녁은 아직 괜찮습니까.”

시동을 걸던 건우가 종일 밥을 먹지 못한 우리를 보고는 물었다.

“블랙박스 확인하고 먹을게요.”

“배고플 것 같은데.”

“그래도 확인해야 맘이 편할 것 같아서요.”

“갈 때까지 시간 있으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잘 생각해봐요.”

“설마. 차장님이 쏘시는 건가요.”

건우를 보는 우리의 눈빛이 빛났다.

“그러죠.”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것처럼 건우는 단번에 우리의 말을 승낙했다.

“그럼 맛있는 걸로 생각하고 있을게요.”

“얼마든지.”

건우가 우리를 보고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온갖 요리를 떠올리면서 기뻐하는 우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건우의 기분도 마냥 좋아졌다.

건우의 차가 골목을 비집고 도로로 들어섰다. 빠르게 내달리던 차에서는 온풍이 쏟아졌다. 우리는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둑해진 하늘을 뚫고 갖가지 빛깔의 빛이 빛나고 있었다.

길가에 심어진 나무가 노란 조명을 받고 조금씩 젖어든 초록빛을 뽐냈다.

막힘없이 도로를 내달리던 건우의 차가 아파트에 들어서면서 속도를 줄였다.

건우의 집으로 들어서는 우리는 SD카드만 빤히 보고 있었다.

“제 노트북 가져올까요.”

우리가 아래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 노트북 쓰는 걸로 하죠.”

“그럼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니면 제가 서재로 갈까요.”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건우는 서재 책상에 있던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노트북이 켜지는 속도조차 느리게만 느껴졌다.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던 우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되게 떨리네요. 그냥 블랙박스만 보는 건데.”

흐릿한 미소가 우리의 얼굴을 적셨다. 증인도 여럿 있었고 몇 년 전과는 사내 분위기조차 달라졌다.

본부장의 블랙박스에 증거물이 남았다면 본부장도 우팀장을 마냥 감싸줄 수 없을 것이었다.

SD카드가 삽입됐고 노트북이 돌아갔다. 우리는 목을 빼고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블랙박스는 꽤 갖가지 영상을 품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끼어들기를 하는 운전자를 향해 욕설을 날릴 때도 있었고 가족들과 대화를 하는 소리도 들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수원 주차장에서의 화면이 나타났다. 건우가 지나가는 장면이 보였고 황주임과 사원의 모습도 보였다.

조용하고도 적막해 보이는 영상 속에서 우팀장과 수진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우팀장이 수진의 손목을 잡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정말로 원본은 아니겠죠.”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영상을 되돌렸다. 하지만 우팀장의 등에 가려지거나 우팀장과 수진의 모습이 갑자기 카메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당당하게 증거물로 내밀 수 없을 만큼 블랙박스 영상은 우팀장을 옥죄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기억은 없어져도 증거는 남는 법이죠.’

‘강차장님 맘대로 하세요. 나 귀찮게 하지만 말고.’

영상을 보던 우리는 그제야 우팀장이 여유롭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팀장은 본부장의 차를 진즉에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진도 찍었는데…….”

노트북 화면을 보는 우리의 얼굴에 허망한 기운이 녹아들었다. 우리의 손은 거실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연수원에 붙은 무늬만 CCTV도. 본부장의 블랙박스도 수진에게는 결국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야말로 우리는 또 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도 바퀴벌레처럼 악착같이 살아남을 우팀장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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