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화. 아주 커다란 프로젝트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창문 아래로 숨어버렸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붙잡은 우리를 보고는 수진도 덩달아 몸을 숙였다.
“왜 그러세요. 대리님.”
우리의 모습에 황주임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대답 대신 검지로 창문만 콕, 가리켰다.
황주임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창을 봤다. 야밤에 산책을 하고 있는 건우와 눈이 마주친 황주임도 냉큼 숨어버렸다.
“상사병 걸릴 것 같아요.”
황주임은 정신없이 뛰는 제 심장을 붙잡고는 말했다.
“진짜 주무시는 법을 모르는 거 아닐까요.”
“걱정이 많으셔서 그러겠지.”
“아니. 걱정은 방에서 하시지. 굳이 추운데 밖에…….”
“건강하게 정신을 차리려면 당연히 밖에 나가야지.”
황주임의 말에 우리는 반격하듯 말했다. 건우를 두둔하는데 모든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맞장구대신 돌아온 채찍질에 황주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선영을 봤다.
선영은 창문 앞에 서서는 눈을 껌뻑거렸다.
“대리님 말이 맞아요. 걱정은 밖에서 해야 제 맛이죠. 저희 차장님도 부를까요.”
저돌적인 선영의 말에 모두가 비상사태였다. 다른 직원이라면 몰라도 선영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영은 바닥에 있던 잔을 들고는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만!’
‘선영씨. 앉아.’
선영을 달래는 수많은 벙긋거림도 통하지 않았다.
“강차장니임!”
선영은 창문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저희 우팀장님 욕하는 중인데 오실래요. 제가 특별히 빛나는 잔도 준비했거든요.”
빛나는 잔을 들어 보이는 선영을 보던 우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건우가 방에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난데없는 실수로 단단했던 비밀에 구멍이 날지도.
해맑은 미소를 날리는 선영의 폭주를 막아야만 했다.
“저희 멋진 고대리님도 계시고…….”
“죄송해요. 얼른 재울게요.”
벌떡 일어난 우리가 선영의 입을 막았다. 웅얼거리는 선영의 목소리는 우리의 손바닥에 흐무러졌다.
“계속 하시던 거 하세요.”
창문을 올려다보던 건우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흐릿한 입김이 피어올랐다.
우리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건우와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눈치였다.
“저희 먼저 들어갈게요. 차장님.”
우리의 목소리가 못내 아련했다. 우물거리던 선영이 일을 벌이기 전에 우리는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선영은 우리의 손을 떼어내고는 창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건우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셨니.”
벽에 딱 붙은 황주임은 힐끗 선영을 보고는 물었다.
“가셨어요.”
건우와 우리의 로맨틱한 시간을 밀어주려던 선영의 어깨가 쳐졌다.
잔뜩 실망한 모습에 황주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강차장님 짝사랑하기라도 하는 거냐고.’
황주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선영을 봤다.
제 아무리 독특해도 건우를 짝사랑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황주임은 잔을 채우고는 선영에게 다가갔다.
힘든 짝사랑을 위로하기 위한 건배를 날리기 위해.
“저희 그러지 말고 마셔요. 건배도 쫙 하고.”
황주임은 눈썹을 들썩거리면서 모두를 모았다.
남친과 이별한 우리, 무시무시한 상사를 짝사랑하는 선영. 그리고 거기에 수진까지…….
단단히 착각에 빠진 황주임은 모두에게 위로의 눈빛을 날려댔다.
“대리님도 한 잔 받으세요. 선영씨도 받고. 건배요. 건배.”
황주임의 애잔한 눈빛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도대체 건배가 왜 구슬픈 건데.
“너무 잘 들어가는데요. 대리님.”
“완전 뻗을 것 같아요. 팩 해야 되는데.”
“선영씨. 나도 자기 전에 하나만 줘봐. 아침에는 이슬처럼 촉촉해야지.”
황주임에 말에 우리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우리도 슬쩍 숟가락을 얹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사진을 찍었을 때처럼 황주임에게 괜한 오해라도 받을까. 우리는 끓는 욕망을 꾹 눌렀다.
하지만 팩 하나만 달라는 간절한 눈빛만큼은 완벽하게 숨기지 못했다.
“제가 다 드리죠. 방에 계신 분들은 다.”
선영은 제 가방을 힘껏 끌었다. 한 눈에 봐도 묵직한 기운이 전해졌다.
“제가 그럴 줄 알고 또 특급 팩으로 가져왔다니까요.”
선영이 맹렬하게 팩을 흔들어댔다. 촉촉한 피부만큼은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대박. 써보고 싶었던 건데.”
“효과가 진짜 좋기는 하더라고요.”
“웬일이니. 가격이 있어서 망설였는데. 해보고 괜찮으면 큰맘 먹고 사야겠다.”
“대리님도 하나 받으세요. 촉촉하게.”
방판이라도 하듯 들이닥친 팩을 우리는 만지작거렸다. 쫀득쫀득한 피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소중히 팩을 바닥에 두고는 잔을 말끔하게 비웠다. 쌓여가는 빈병만큼 모두의 눈도 풀렸다.
“근데 속이 답답해요. 막 화도 끓고.”
빈병을 잡은 수진은 연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 속내를 털어놨다.
“제가 확 말해버릴까요.”
“누구한테요.”
“저희 아빠요.”
선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우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회장님이 아신다면……. 증거 없이 달려들다가 소란스러워지면 수진만 곤란해질지도 몰랐다.
그날의 일이 반복되는 것을 우리는 원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우리는 솟구치는 선영의 정의감을 달래듯 말했다.
“히든카드는 마지막에 던져야 하잖아. 자. 그럼 마지막 건배할까.”
우리가 건배를 독려했다. 돌격을 외치는 선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채근에 모두들 건배를 했다. 마지막 잔을 비운 수진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활짝 창문을 열었다. 마른 가지 사이로 바람이 흘렀다.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는 수진을 바라봤다.
딸꾹질을 하던 수진의 씩씩대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수진은 두 손을 대고는 힘껏 소리 질렀다.
“우내시. 진짜 씨를 말려버릴 거야.”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용솟음을 쳤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수진을 봤다.
“수박 씨 발라 먹을 자식아! 또 깝죽거리면 고자 만들 거라고!”
온갖 격렬한 말이 끝없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수진의 말을 못 들은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잔만 바라봤다.
“그래요. 우리가 만들어요. 그 고자.”
선영은 수진에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말했다. 성을 점령하려는 장수들처럼 선영과 수진은 비장하기만 했다.
“완벽하게 없애요.”
“고마워요. 선영씨.”
“고맙기는요. 동료 사이에. 우팀장님 기다리세요. 저희가 갑니다!”
“간다!”
산을 울리는 목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우리의 방을 빼고는 숙소는 조용하기만 했다.
“알았으니까 다들 자자고. 자!”
황주임은 낄낄 웃어대는 선영과 수진을 끌고는 잘 준비를 했다. 금방이라도 숙소에 있는 모두를 깨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잘 준비를 마친 우리가 널브러지듯 누웠을 때였다. 우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정말 곧 거사라도 치룰 생각입니까.
건우의 말에 우리는 벌떡 일어났다. 메말랐던 팩이 툭 떨어졌다.
맙소사. 차장님이 다 듣고 있었다니.
-설마. 들린 건 아니죠.
-잘 들렸습니다. 내가 깜짝 놀랐네.
-고…… 는 제가 한 거 아니에요. 맹세해요.
메시지를 날리는 우리의 손길이 빨라졌다. 쏟아지는 환한 빛에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어색한 미소를 날리면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는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대리님. 살아계신 거죠.”
선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홑이불을 비집고 들려왔다.
“어. 잘 살아있어. 왜.”
“더우실 것 같은데.”
“내가 이열치열이라서 그래. 걱정 말고 자.”
“넵! 푸욱 주무세요. 대리님.”
우리는 선영의 말에 대강 대답하고는 핸드폰을 봤다. 창문으로 던졌던 거친 말을 향연을 건우가 모조리 들었을 생각을 하니 괜스레 민망해졌다.
정작 들어야 할 우팀장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누가 욕을 하냐면서 귀를 후비고 있을지도.
-진짜로 그렇게 만들 생각이라면 동참하려고 했는데.
-큰 프로젝트잖습니까.
연달아 날아든 건우의 메시지에 우리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웃지 말아야 할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조용한 곳에서 찾아왔다.
웃음을 삼키는 우리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담담한 얼굴로 완벽한 집도를 준비하는 건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웃음을 흘리는 콧구멍도 벌름거렸다.
핸드폰을 제 품에 살포시 둔 채로 우리는 슬픈 상상에 열을 올렸다.
퇴근 준비를 끝냈는데 갑자기 업무가 날아드는 아주 끔찍한, 그런 상상.
***
창을 타고 새소리가 흘렀다. 우리가 이불을 걷어 젖혔다. 불가마 같은 이불 속에서의 탈출이었다.
우리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창을 바라보던 우리는 눈만 끔뻑거렸다.
건우와 밤새 메시지를 날려대느라 우리는 밤을 새버렸다.
말간 아침볕이 퉁퉁 부어버린 우리의 눈두덩을 조용히 찔렀다. 우리는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푸석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온갖 한방 재료가 들어간 팩도 우리의 얼굴을 살리지 못한 것이었다.
“대리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낭랑한 선영의 목소리가 번졌다. 햇빛을 본 좀비처럼 널브러진 황주임과 수진과는 달리 선영은 멀끔해보였다.
선영은 숙취 하나 없는 얼굴로 준비를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히 박수갈채를 던질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다.
“언제 일어난 거야.”
“5시에 일어났어요. 제가 낯선 곳에서 잘 못 자거든요.”
선영의 우아한 미소에 우리는 당황했다. 우렁차게 달리는 기차처럼 코를 골았던 지난밤을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난밤의 일은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대리님. 어제 장기자랑 때문에 힘드셨죠.”
“설마. 내 얼굴 푸석하니.”
“눈 아래가…….”
우리에게 다가선 선영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짙은 다크서클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보정할 수 있어요. 제가 화장품도 듬뿍 챙겨왔거든요.”
선영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미니 메이크업 박스를 꺼냈다. 박스를 펼치는 선영의 손길은 야무졌다.
온갖 화장품이 말끔하게 정리된 박스를 보던 우리는 감탄만 내뱉었다.
선영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샤워를 하고 나온 우리를 빤히 바라봤다.
“바로 시작할게요.”
그리고는 누구보다 비장하게 브러시를 들었다.
“턱도 깎을게요. 확 칠게요.”
“그래.”
“코도 또렷하게 딱 치고.”
우리는 화려한 손목 스냅을 자랑하는 선영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거친 붓질도 그냥 믿기로 했다.
자못 미간까지 좁히면서 집중하던 선영의 표정이 풀렸다. 선영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제 두 손을 맞잡았다.
“와…… 진짜 저 금손 같아요.”
선영은 제 두 손을 보고는 감탄을 내뱉었다.
“대리님. 얼굴 반쪽 되셨네. 어제 고생하셔서 그런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뜬 황주임이 배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우리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거울을 봤다. 황주임의 말대로 강력한 쉐딩에 우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다들 일어나. 갈 준비해야지.”
“저요. 가고 싶은데 가고 싶지가 않아요.”
세상만사 귀찮은 얼굴로 황주임은 베개를 품었다.
한시라도 빨리 워크샵을 끝내고 싶었지만 밀려드는 숙취에 꼼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주임. 주말 고작 하루 남았어.”
하지만 잔혹한 사실에 황주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황주임은 이부자리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말끔하게 방을 정리한 우리가 모두를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모두들 숙취를 푸느라 뜨끈한 국물만 마셔대고 있었다.
반찬을 뜨던 우리의 얼굴이 굳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우팀장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봉밥 한 그릇을 뜬 우팀장은 여자 직원들 사이를 비집고 앉았다.
우리부터 줄 끝에 있던 선영까지. 모두 우팀장을 따갑게 노려보면서 한 구석에 앉았다.
“밤에 가위라도 눌린 것…… 다들 왜 저러는 거야.”
줄줄이 이어지는 눈총에 우팀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귀 간지러워 죽겠네.”
우팀장은 부러 크게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 몸으로 수진을 최대한 가리면서 심드렁한 표정만 지었다.
우팀장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국물 먹으니까 속이 풀리는 것 같네.”
뜨뜻한 국물에 우리가 감탄을 뱉은 순간이었다.
“잘 풀립니까.”
건우가 식판을 들고는 우리의 앞에 섰다. 힐끔 건우를 쳐다보던 선영이 슬그머니 제자리를 내주었다.
고맙다는 눈빛을 날리면서 건우는 우리의 앞에 앉았다.
“차장님도 드셔보세요. 확실히 맛집이예요.”
“믿고 먹을 만하겠네.”
“저 거의 기미상궁 같은데요.”
“맛과 업무만큼은 고대리님을 따라갈 직원이 없는 것 같아서.”
건조한 건우의 말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용한 식탁에서는 밥을 먹는 소리만 가득했다.
자리를 비켜주려는 선영의 숟가락질은 빨라졌다. 황주임은 선영이 부끄러워 밥을 먹는 데만 골몰한다고 착각했다.
“저는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선영은 식판을 깨끗하게 비우고는 일어났다.
건우의 눈치를 살피던 황주임과 수진도 재빨리 선영을 뒤따랐다.
“고우리씨 선택이 맞았네.”
모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건우가 나직이 말했다.
“대탐소실 말입니다.”
“그죠. 괜찮죠. 제가 무대에서 심하게 망가지는 했지만.”
우리는 흥을 주체하지 못했던 장기자랑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매일 부탁하고 싶던데.”
“설마. 망아지를 매일 보고 싶다는 건 아니시죠.”
“맞다면 보여줄 겁니까.”
“차장님이 말로 변신하시면 생각해볼게요.”
근육질의 말로 변신한 건우를 상상하던 우리는 픽 웃었다. 말로 변신해도 그저 섹시할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단단하게 붙은 콩깍지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건우는 우리의 얼굴을 살폈다.
“저…… 얼굴에 김이라도 묻었나요.”
우리는 내심 예쁘다는 말을 기다렸다.
“그건 아니고.”
“그럼…….”
기대감에 찬 우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올라가면 보양 시켜야겠습니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
하지만 건우에게서는 걱정스러운 말만 날아들었다.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공든 탑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깨닫고 있었다.
아침부터 브러시로 얼마나 열심히 턱을 깎았는데!
“피곤할 텐데 조금 쉬어요. 출발까지 아직 조금 시간 있으니까.”
건우가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그죠. 뭐…… 쉬면되니까.”
우리는 허탈한 미소를 터뜨리면서 일어났다. 퇴식구에 식판을 두면서도 우리의 신경은 온통 턱에 꽂혔다.
병약한 고우리를 탄생시킨 과한 쉐딩에.
“강수진씨는 괜찮습니까.”
“어제보다는 좋아졌어요. 진정도 된 것 같고. 근데 딱히 증거가 없어서요. 제대로 본 사람도 없고.”
“거기 본부장님 차가 있었을 겁니다. 그건 내가 확인해보죠.”
“보여주실까요.”
건우가 우리에게 물을 건넸다.
“못 보여주실 것도 없죠.”
걱정 말라는 눈빛까지 흘렀다. 우리는 건우만 믿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총애하는 건우의 부탁을 본부장이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무슨 수작을 또 부리는 거야.’
묘하게 은밀해 보이는 우리를 보던 우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갑작스럽게 수진을 끼고 있었던 우리였다.
어젯밤의 일을 건우에게 낱낱이 말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우팀장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수진의 사건까지 걸리면 본부장의 슬리퍼가 날아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팀장은 무조건 우리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우팀장은 이를 꽉 깨물고는 우리를 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우팀장의 힘에 우리는 건우의 쪽으로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우리는 들고 있던 물을 건우에게 모조리 쏟아버렸다.
“아. 고대리. 거기 있으면 어떡해.”
우팀장은 제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윽박지르듯 말했다.
“급한데 길이나 막고 있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조심성이 없어. 서로 조심하자고.”
우팀장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우리의 어깨를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건우가 우팀장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사과하시죠.”
“아니. 고대리가 잘못 있다가 내가 다친 건데. 사과는 고대리가 해야죠.”
“억지 부리시면 저도 못 참습니다.”
“못 참으면 때리기라도 할 건가. 와. 한 대 칠 기세네. 치고 싶으면 쳐도 되고요.”
우팀장은 건우의 신경을 바득바득 긁었다. 건우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워졌다. 그러쥔 건우의 주먹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팀장이 조금만 더 자극하면 건우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우리가 주변을 살폈다. 모두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우팀장과 건우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누군가 자칫 본부장이라도 끌고 왔다가는 시말서라도 작성할지 몰랐다.
빈 컵을 든 채로 우리는 건우와 우팀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때리지 못할 것도 없죠.”
긴 냉기를 뚫고 건우의 낮은 목소리가 번졌다.
차가운 조소를 흘리던 건우의 주먹이 우팀장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