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길은 비명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찢어질 것만 같은 비명은 다급해보였다. 그 소리는 모든 발걸음과 바람을 멈추게 만들었다.
“누나. 방금 비명이었죠. 무슨 일 터진 것 같은데.”
“너 먼저 가봐.”
“왜요. 나 무서운데.”
“같이 등장하면 수상하잖아. 네가 먼저 가면 내가 바로 나갈게.”
우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는 사원과 황주임의 대화를 들었다. 황주임의 말을 따르기로 했는지 사원의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사원과 황주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나오라는 것처럼 우리가 건우를 향해 손짓했다.
그저 주변을 산책했다가 우연히 황주임을 발견했다는 설정을 잡은 우리가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황주임은 누군가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근데 진짜 무슨 일인데 그래.”
황주임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우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머쓱하게 서 있던 사원은 우리와 건우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우렁찬 사원의 인사에 황주임의 고개도 돌아갔다.
“대리님이 왜…….”
황주임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우리와 건우가 어디서 갑자기 등장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프로젝트 때문에 차장님하고 대화하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이야.”
구질구질한 변명처럼 온갖 말이 달라붙었다. 우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황주임에게 다가갔다.
“저도 방금 와서 잘 모르기는 한데…….”
황주임이 말끝을 흐렸다. 제 생각을 말하기 어렵다는 눈치였다.
황주임은 눈빛으로 제 품에 있던 영업1팀 신입 수진을 힐끗 가리켰다. 수진은 누구보다 우팀장과 가깝게 지내던 직원이었다.
우팀장이 유일하게 태클을 걸지 않는 직원이기도 했다.
냉기를 품은 산바람에 수진의 원피스가 나풀거렸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 흘러내린 어깨끈, 바들바들 떨리는 손…….
하염없이 우는 수진을 본 순간.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진씨. 우선은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봐.”
황주임의 말에 수진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우리는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누가 벌인 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난 것만은 확실했다.
우리는 수진에게 다가가서는 허리를 구부리고는 눈을 마주쳤다.
“수진씨.”
“……네에.”
수진의 목소리 끝은 바르르 떨렸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조금 쉬자.”
“하지만…….”
“우리 방에서 쉬다보면 진정될 거야. 꼭 지금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걱정 말고.”
우리의 따뜻한 말에 수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우리가 수진의 머리를 톡톡 다독여줬다. 그 손길 하나에 짐짓 멈췄던 수진의 눈물이 다시금 왈칵 쏟아졌다.
굵직하게 떨어지는 수진의 눈물은 원피스를 축축하게 적셨다.
“황주임. 일단은 숙소로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저희 방으로 데리고 갈게요.”
“그래주고. 나는 슈퍼 갔다가 바로 올라갈게.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네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저희는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우리와 황주임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어쩔 줄 몰라 멀뚱히 서 있던 사원은 황주임을 졸졸 쫓았다.
우리는 멀어지는 수진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괜찮습니까.”
“바로 괜찮아지기는 힘들 거예요. 많이 놀랐을 거라.”
“고우리씨 말입니다.”
건우의 말에 우리가 고개를 돌렸다.
“저는 왜요. 저는 괜찮죠. 괜찮아요. 정말로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우리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속내를 간파당한 모양새였다. 우리는 건우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수진을 본 순간. 제 살결을 스치던 우팀장의 기분 나쁜 손길이 흐릿하게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었다.
그 모든 감촉을 털어내려고 해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나쁜 기억은 늘 그런 것처럼 잊을 만하면 다시금 악착같이 살아남아 고개를 내밀었다.
우리는 단단한 맘을 잡으려고 애쓰면서 제 두 손을 바투 맞잡았다.
“그럼 저희 갈까요. 슈퍼까지 꽤 멀거든요. 차도 없고.”
“있어도 몰면 큰일이죠.”
“그러니까요. 장기자랑 한다고 막 취해서.”
빙긋 억지 미소를 짓는 우리의 얼굴은 푸르께했다. 시퍼렇게 질린 기운을 털어내려는 것처럼 우리가 제 두 뺨을 쓸어내렸다.
“덕분에 1등하지 않았습니까.”
“차장님 덕분에 더 플러스였을 거예요. 댄스 실력이 장난 아니시던데요.”
우리는 말춤을 재현하듯 다그닥거리는 포즈를 취하면서 말했다. 화려했던 무대를 다시금 생각하던 우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함과 묘한 흥이 동시에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저희 여행상품권도 받았는데 확 떠나버릴까요.”
“어디 가고 싶습니까.”
“글쎄요. 추우니까 조금 따뜻한 곳에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차장님은요.”
“딱히 생각은 못 해봤는데 어디든 좋을 것 같습니다.”
“진짜 어려운 말 나왔네요. 어디든. 그럼 제가 한 번 기깔나게 찾아볼게요. 좋은 곳으로.”
건우와 여행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마냥 들떴다. 온갖 여행지가 우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남아를 갈까, 제주도를 갈까…….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고민이었다.
우리는 연수원과 멀어질수록 한결 가뿐해진 것처럼 보였다.
“슈퍼가 진짜 멀기는 하네요. 괜찮으세요. 차장님.”
“예. 고우리씨는.”
“저는 아까 차장님한테 마사지 받아서 그런가. 되게 가뿐하네요. 만보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제 다리를 슬쩍 들었다. 힘겨운 겨울 등산을 하거나 격렬한 댄스를 췄다고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다리는 가볍기만 했다.
멀찍이서 희미하게 빛나는 간판이 보였다. 우리가 느릿하게 걷는 건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희 얼른 가요. 다들 기다릴 것 같아서.”
“나는 느리게 가고 싶은데. 욕심이겠죠.”
“어…… 그 욕심은 내일 채우는 걸로.”
“잘 기억해뒀습니다.”
우리는 걱정 말라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빛을 건너듯 사뿐히 걷던 두 사람은 슈퍼로 들어섰다.
고즈넉한 옛 향취를 품은 시골 동네 슈퍼였다. 깔끔히 정리된 냉장고를 보던 우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차장님. 저희 제품이요.”
은밀한 말이라도 하는 듯 우리가 낮게 속삭였다. 냉장고 한 구석을 채운 제품을 봐도 우리는 여전히 신기하기만 했다.
무릎에 손을 대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우리는 금방이라도 냉장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좋습니까.”
“아직도 신기해요. 제가 열심히 홍보한 걸 마신다고 생각하면…… 설마. 저만 그런가요.”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건우를 봤다. 건우도 우리와 같은 포즈로 냉장고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조용히 바라봤다.
“나도 그럴 것 같습니다.”
건우의 목소리가 천천히 번져 우리를 적셨다.
“……지금부터.”
건우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살포시 녹는 해말간 미소에 우리는 금방이라도 빠질 것만 같았다.
냉장고에서 흐르는 조그마한 소음도, 카운터에서 들리는 텔레비전 소리도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건우에게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건우의 따뜻한 눈빛이 우리의 상처에 스미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를 바라보던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우팀장과의 일이 걱정되면서도 건우는 자신이 다시 상처라도 받을까. 그날의 일을 다시 묻지 않는다는 걸.
“차장님도 그런다니까 괜히 좋네요.”
“그럽니까.”
“네. 묘하게 안도도 되고.”
“안도라면.”
속삭이듯 뱉는 건우와 우리의 말이 켜켜이 쌓여갔다.
“내가 이상하지는 않았구나. 그런 느낌이거든요.”
“그럼 매일 말해줘야겠네.”
건우가 우리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의 입술은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걱정 말라고.”
조금 더, 가까이.
“내 기준은 온통 당신이니까.”
조용히 미소를 흘리던 건우가 우리에게 입을 맞췄다. 말랑한 감촉이 우리를 진하게 적셨다.
건우의 숨결은 얇은 살결에 녹아들어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깨우는 것만 같았다.
“아이고야. 또 졸았네.”
꾸벅 졸던 슈퍼 주인 할머니가 깨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내내 건우에게만 집중했을지도 몰랐다.
화들짝 놀란 우리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바람에 건우와 우리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저걸로 살까요. 가격도 괜찮은데요.”
대형 냉장고를 가리키던 우리의 목소리는 한껏 커졌다.
제 발 저린 우리는 온갖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슈퍼 주인 할머니는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우리는 슈퍼를 쓸어버릴 기세로 과자부터 식용유까지 한 가득 품었다.
우리를 바라보던 건우가 조용히 미소만 흘렸다.
***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방에 짐을 내려놨다. 봉지 속에 두둑하게 들어있는 짐을 보던 황주임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생수와 주전부리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등장한 날달걀부터 식용유까지.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사온 건지 황주임은 당황스러웠다.
“대리님. 설마 캠핑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급하게 사느라.”
“그래도 오징어는 좋네요. 오징어 뜯고 싶었는데.”
황주임이 버터 오징어를 흔들면서 말했다. 마스크팩을 들고 있던 선영이 황주임에게 달려갔다.
“녹여서 드세요. 주임님.”
“오징어는 씹는 맛이지.”
“턱이 강해져서 큰일 나요. 오징어는 살살 녹여서 말랑해지면 그때 씹으세요.”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거 아니니.”
황주임은 선영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티격태격하는 황주임과 선영을 바라보던 우리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오징어는 집지도 말아야했다는 후회만 짙어졌다.
“주임님. 부드러운 턱을 위해.”
“강한 턱도 죽이게 매력적이거든.”
서로 턱을 들이밀면서 자랑에 빠진 황주임과 선영을 보던 수진이 픽 웃었다.
“조금 어때.”
우리는 생수를 내밀면서 수진에게 물었다.
“덕분에 괜찮아졌어요. 감사합니다.”
“방도 넓으니까 자도 되고.”
“아뇨. 조금 쉬다가 돌아갈게요.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이상하고.”
“어차피 다들 취해서 어디서 자는지도 모를 거야. 이참에 마케팅팀 친구 하나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우리가 선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황주임과 선영은 턱과 오징어로 한바탕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수진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흘렀다가 사라졌다. 아직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내지 못한 모양새였다.
“동기 있는 거. 그거 되게 중요하거든.”
“왜요.”
“오래 다닐 수 있는 동력이 된다고 할까. 더 일찍 관두고 싶은 맘도 같이 욕하다보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의 말이 천천히 번져나갔다. 우리는 한 번도 동기와 제 고민을 나눈 적이 없었다.
우팀장과의 사건 직후로 모두 우리를 어렵게 대하기도 했다. 우리는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진심 하나 없는 위로를 받는 것보다는 혼자 감내하는 것이 좋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회사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졌다.
어쩌면 같이 화를 내주고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둑했던 긴 터널을 외롭지 않게 버텼을지도 몰랐다.
“……그럴까요.”
수진은 생수병만 만지작거렸다.
“한 번 속는 셈 치고 믿어봐.”
“그럼 대리님만 믿을게요.”
“그래.”
우리는 건배라도 하듯 생수병을 들었다. 쑥스러운 얼굴로 수진은 우리의 생수병에 제 생수병을 부딪쳤다. 경쾌한 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
“대리니임! 설마 저 빼고 방금 건배하신 건 아니죠.”
“해버렸는데.”
“제가 혹시 몰라서 잔도 가져왔단 말이에요. 비밀의 잔.”
재빨리 제 가방을 뒤적거리던 선영이 소주잔을 꺼냈다.
투명한 소주잔은 무늬 없이 말끔하기만 했다.
“거기다가 제가 소주도 쟁여뒀죠. 깔끔하게.”
선영은 소중히 챙겨둔 소주까지 꺼냈다.
“강당에서 가져온 건 아니지.”
“헐! 대리님. 어떻게 아셨지. 거기서 가져왔거든요.”
말을 끝낸 선영은 해맑게 웃었다. 우리는 회사 돈을 절약하는 재벌가의 자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영의 주도 아래 갑작스럽게 술판이 벌어졌다. 잔뜩 들뜬 얼굴로 선영은 각자의 앞에 소주잔을 놓아주었다.
“저희 딱 소주 마시고 털고 팩 때리면 될 것 같아요.”
선영은 두둑하게 챙겨온 팩을 흔들어댔다. 한없이 밝은 선영의 모습에 우리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비밀스럽던 잔의 정체는 금세 밝혀졌다. 잔이 채워지는 순간. LED 조명이 반짝 잔을 빛났다.
“되게 예쁘다.”
잔을 든 황주임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죠. 제가 끝내주게 보내려고 열심히 인터넷 찾았거든요.”
“역시. 우리 신입이 열정 하나는 최고라니까.”
“넵!”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는 것처럼 황주임과 선영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모두 빛나는 잔의 매력에 푹 빠졌을 때였다.
조용하던 우리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우리가 슬쩍 핸드폰을 확인했다.
-잘 쉬고 있습니까.
-오늘은 보기 어렵겠죠. 당장 나갈 수 있는데.
-자려나. 꿈에서 봐야 하나.
연달아 날아오는 건우의 메시지에 우리는 웃음이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가 꾹 입술에 힘을 주고는 반짝거리는 잔을 찍었다.
찰칵, 하는 원시적인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다들 왜. 할 일들 해.”
우리는 모두의 시선을 흩뜨리게 하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허우적대는 부자연스러운 우리의 손짓을 모두 수상하게 쳐다봤다.
“남친한테 보내시려고 그러시는 거죠. 대리님.”
가늘게 눈을 뜬 황주임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뜨끔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선영을 쳐다봤다.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잘 막아달라는 눈빛을 날려댔다.
“딱 눈빛이 그러셨어요. 남친한테 보내려는 손짓이랄까.”
“그냥 소장용이야.”
“근데 진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오래 사귀실 수 있어요. 저는 진짜 1년도 제대로 못 가서.”
푸념 섞인 황주임의 말이 흘렀다. 회식자리와 탕비실에서 매일 뱉는다는 황주임의 1년 한계설이 또 시작된 것이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우리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건우에게 답장을 보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자나보네. 내일 봐요.
건우의 메시지에 당장 답을 날리고 싶었다.
아직 정신 바짝 차리고 앉아있다고.
“비법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대리님.”
두 손을 맞잡은 황주임의 눈빛이 빛났다. 슬금슬금 선영도 귀를 쫑긋 세운 것처럼 보였다.
“무관심.”
“거짓말이시죠. 오래 사귀는 비법이 무관심이라니. 너무 슬프다.”
황주임은 김빠진 표정이었다.
“그래서 헤어졌어.”
“그러니까…… 에!”
“적당히 잘 깨졌지. 서로 점심 메뉴 말곤 딱히 관심도 없었으니까.”
우리는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도리어 갓 헤어진 것 같은 사람은 황주임이었다.
세상 안타까운 얼굴로 황주임은 제 잔을 들었다.
“건배해요. 고대리님.”
“지금 나 동정 받는 거니. 진짜 괜찮은데.”
“대리님 같이 끝내주는 여자를 찬 그분을 동정하는 거죠.”
“말 하나는 잘한다니까.”
막무가내로 밀려드는 건배에 결국 우리는 백기를 들었다.
전남친을 위하여, 워크샵 탈출을 위하여, 짝사랑을 위하여……. 갖가지 건배사가 뛰쳐나왔다.
-심각하게 대화하고 있어서요. 나중에 문자 드릴게요.
숱하게 건배를 하느라 우리는 업무처리만큼 딱딱한 메시지만 날렸을 뿐이었다.
“근데 진짜로 누가 우리 수진씨 건드린 거야.”
“오늘은 피곤하니까…….”
“누군지 알면 혼내주려고요.”
황주임은 주먹을 그러쥐고는 말했다. 잔을 기울이던 선영도 재빨리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반짝거리는 잔을 매만지던 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우팀장님이요.”
착 가라앉은 수진의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잔을 잡고 있던 우리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자꾸만 터지려는 실소를 우리는 간신히 눌러 담았다.
“하실 말이 있다고 보자고 하셨는데 갑자기…….”
수진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누그러들었던 긴장은 다시금 수진을 덮친 것처럼 보였다.
“저도 그러실 줄은 몰랐거든요. 근데 앞으로 어떻게 봐야할지도 모르겠고 또 그러실까봐 겁도 나고요. 그냥 머릿속이 복잡해서.”
정리되지 않은 걱정들이 수진에게서 쏟아졌다. 수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는 수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방으로 몰아닥쳤다.
“그럴 때는 소리치는 게 제일이야.”
“그래도…….”
“우팀장, 나쁜 자식아. 변한 게 하나도 없냐! 개상……!”
시범을 보이듯 창을 향해 힘껏 소리치던 우리의 눈이 커졌다.
숙소 앞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