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화. 신입사원의 당돌한 딜
선영은 거짓말처럼 자연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건우에게서 멀어지려는 놀라운 본능이었다.
우리를 쳐다보는 선영의 눈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랬다.
“대리님. 저 그 병이요. 방금 걸린 것 같아요.”
“무슨 병.”
“진짜 상사병이요. 완전히 가슴 철렁거리고 있어요.”
선영은 떨어지려는 심장을 붙잡기라도 하듯 제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그럼 저는 대리님만 믿고 있을게요.”
황급히 제 말을 끝낸 선영이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총각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혼비백산이었다.
우리가 헛웃음을 흘리면서 선영을 봤다. 선영은 의미 없는 키보드질만 하면서 우리를 보고는 벙긋 해맑은 미소를 날렸다.
‘진짜 못 말리네.’
간절하고도 애절하게 날아드는 선영의 눈빛에 우리도 꼼짝 못할 지경이었다.
“고대리님.”
“네네.”
선영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길이 건우에게로 돌아갔다.
우리는 그저 건우가 고맙게만 느껴졌다.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선영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미팅 가능합니까.”
“그럼요. 근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광고 태울 매체 선정 때문에.”
“바로 회의하시죠.”
우리는 수첩을 챙기고는 움직였다. 무심한 듯 앞서 걷던 건우가 발길을 멈췄다. 우리와 보폭을 맞추려는 건우의 배려였다.
빠르게 다가선 우리와 나란히 건우가 다시금 움직였다. 두 사람은 조용한 회의실로 향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선영은 고개를 내빼고는 우리의 등을 빤히 쳐다봤다. 뜨거운 눈빛에 우리가 고개를 돌렸다.
선영의 눈빛은 야무지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힘을 내달라고. 짝사랑의 해피엔딩을 위해.
모종의 거래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눈썹을 꿈질거렸다. 걱정 말라는 것처럼.
“뭐합니까.”
“두고 온 거라도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럼 들어가시죠.”
우리가 말을 돌리면서 재빨리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우리와 건우는 마주보고 앉았다.
습관적으로 수첩을 펼친 우리는 당장 열혈 필기를 할 기세로 건우를 쳐다봤다.
두 팔을 테이블에 댄 건우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드디어 단둘이네.”
유혹적인 건우의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흘러내렸다. 나직한 그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할까. 우리는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둘만 있는 회의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차장님. 근데 덥지 않으세요.”
“조금.”
“코트만 벗으시는 건 어때요. 진짜 너무 더워보이셔서.”
“내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아니. 무슨 자존심을 거기서…….”
우리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적색 코트를 더 여미는 건우의 손길이 꽤 당찼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커플 아이템이잖습니까.”
건우는 유일이라는 단어에 힘을 꾹 눌러 담았다. 담담한 건우의 말과는 달리 건우의 이마에는 삐질삐질 땀이 맺혀있었다.
커플을 찾다가 건장한 남자 하나 잡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일단은 벗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유혹적인 말 아닙니까.”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죠. 일단은 유혹적인 말도 야한 말도 아니고. 차장님 살리는 말이니까 진짜 벗으세요.”
“싫다면.”
“제가 벗기는 수밖에 없겠죠.”
우리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난방 때문에 사막 한 가운데라도 서 있는 기분인데.
볼펜을 잡고 있던 우리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당장 건우에게 달려들어 적색 코트를 벗기고 말겠다는 비장한 눈빛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우리의 초강수도 건우는 능청스럽게 넘겼다.
“그러지 말고 저희 제대로 장만해요. 차장님.”
“커플 아이템 말입니까.”
“네. 그냥 우연히 같은 거 말고 진짜요. 운동화든 커플티든.”
“그 생각을 못했네. 내가 열심히 찾아보죠.”
“저도 찾아볼게요. 괜찮은 걸로.”
코트로 무장한지 무려 5시간. 건우는 드디어 코트를 벗었다. 시원한 기운이 건우의 온몸을 타고 번졌다.
제법 가뿐해진 몸으로 건우는 본 회의에 집중했다. 광고를 올릴 매체나 플랫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건우에게 꽤나 도움이 됐다.
직접 찾아가는 외부 프로모션을 강화하면서도 온라인 매체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건우의 생각은 확고해졌다.
회의를 끝낸 우리와 건우는 쉽사리 회의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세상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커플 아이템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계는 어떻습니까.”
“너무 들킬 것 같은데요.”
“기부할 수 있는 시계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내가 고대리님한테 추천했다고.”
“뭔가 구질구질하게 변명만 많아질 것 같아서요.”
미간을 찌푸린 우리, 천장을 바라보면서 시름에 잠긴 건우, 멀리서는 묘하게 냉랭해 보이는 기류…….
그 모든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던 황주임은 차마 회의실의 문을 두드리지도 못했다.
“지금 박 터지게 싸우고 계신 것 같은데.”
회의실을 맴돌던 황주임은 그저 제 목덜미만 긁적거렸다.
“윤주임. 회의 끝나면 메시지 좀 날려주라. 일단 도망가야 할 것 같아. 고래 싸움에 새우 끼면 등만 터지지.”
회의실 기류가 스산할 것만 같다고 착각하면서 황주임은 슬리퍼를 끌고는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
육갑커플의 대단한 싸움이 벌어졌다고 단단히 착각하면서.
***
창밖은 어두워졌다. 검은 구름을 비집고 달이 은은하게 빛났다. 짙어지는 밤만큼 사무실도 조용해졌다. 하나, 둘씩 모두 퇴근을 했다.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딱 세 사람이었다.
우리와 선영, 그리고 잠깐 카페에 내려간 건우였다.
조용한 사무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와 마우스 소리만 간헐적으로 번졌다.
심각한 얼굴로 노트북을 바라보던 우리가 힐끔 손목시계를 봤다.
밤 9시. 건우와의 데이트는 물 건너간 것만 같았다.
“퇴근 안 하세요?”
선영은 우리에게 물었다. 불꽃처럼 의지를 불태우면서 키보드를 두드려대던 선영의 손은 이미 멈춰 있었다.
“아직 좀 남아서. 선영씨는.”
“집에서 하려구요. 피부가 푸석푸석해져서…… 얼른 팩 좀 붙여야겠어요.”
“그래. 얼른 가봐.”
우리는 선영의 퇴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건우와 바깥 데이트를 즐길 수 없다면 빈 사무실 데이트라도 노려볼 요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면 선영의 퇴근이 절실했다.
오로지 둘만 오붓하게 있는 사무실을 위하여!
“그럼 차장님께 인사만 드리고 퇴근을…….”
“늦으실 것 같으니까 그냥 가. 내가 잘 말씀 드릴게.”
우리가 선영의 말을 부드럽게 가져갔다. 우리가 자신을 한껏 배려한다고 착각한 선영은 감동에 찬 얼굴이었다.
“피부도 피부고 밤길도 험한데. 얼른 들어가야지.”
“…….”
“빨리 가봐.”
노트북을 끄던 선영의 감동은 폭발 직전이었다.
“대리니이임!”
“왜 이래.”
“대리님 밖에 없어요. 정말로!”
선영의 순수한 대답이 허공에 번졌다. 퇴근을 적극 권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선영은 그저 우리가 멋지게만 보였다. 무심한 듯 아랫사람을 챙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윗선에 주눅이 들지 않고 제 일을 빈틈없이 해내는 모습조차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우리의 까만 속내를 알지 못한 선영의 감격한 얼굴로 주섬주섬 핸드백을 챙겼다. 서둘러 노트북도 껐다.
지친 피부에 잔뜩 영양을 주면서 마사지 기기에 앉을 생각만 간절했다.
분주하고도 말끔하게 책상을 정리한 선영이 핸드백을 들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대리님도 얼른 퇴근하세요.”
“내일 봐.”
“넵!”
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찼다. 선영이 퇴근을 했다. 삽시간에 사무실은 고요해졌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우리는 사무실을 둘러봤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편히 의자에 기댄 우리가 눈을 감았다. 솔솔 쏟아지는 따뜻한 바람에 잠이 올 것만 같았다.
“고우리씨.”
건우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졌다. 꾸벅꾸벅 고개를 떨어뜨린 우리가 눈을 떴다.
“집에 가서 잡시다.”
“아뇨. 잠깐 눈만 감았어요. 일도 남았고요.”
우리가 노트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잠깐 사이에 졸았던 건지 우리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있었다.
우리가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피곤해보여서.”
“화장이 지워져서 그런가 봐요.”
우리는 책상에 있던 거울을 들고는 얼굴을 살폈다.
건조한 온풍을 이기지 못한 피부가 건조해져서는 푸석거렸다. 우리가 한 손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이상하게 회사만 오면 화장이 녹아내리더라고요.”
“잠이 부족해서 그럽니다.”
“아……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마셔요.”
건우는 책상에 기대고는 우리에게 차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커피가 좋은데.”
투정을 부리듯 우리가 말했다.
“그게 피로에 좋답니다. 몸에도 좋고.”
“뭐예요?”
“오미잡니다.”
우리가 컵 뚜껑을 열었다. 온기를 품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연한 붉은빛이 곱게만 보였다.
특유의 향기가 기분 좋게 우리의 코끝을 간질였다. 우리가 살짝 입김을 불어 뜨거운 기운을 몰아냈다.
“조심하죠. 데일 것 같아서.”
건우의 말대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차를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따뜻한 기운이 넘어갔다.
피로도 한결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는 건우의 눈길은 마냥 사랑스럽기만 했다.
“괜찮습니까.”
“네. 생각보다는 맛있네요.”
“앞으론 건강은 내가 챙기겠습니다. 관리라고 해두죠.”
“무슨 관리를…….”
“여러모로.”
건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달달하고도 매혹적인 미소였다. 꼭 악마의 미소처럼.
‘이러다가 커피 금지라도 내려지는 건 아니겠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한 기운이 우리에게 손을 내뻗었다. 커피 없는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건우가 우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촘촘한 설렘이 허공을 물들이고 야릇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를 눅진히 적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엉겨 붙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목을 뺐다.
갈증에 사로잡힌 채로 오아시스를 발견한 낙타처럼.
말캉하고도 부드러운 건우의 입술을 훔칠 수 있다면 커피쯤은 없어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뜨거운 갈망이었다.
“좋네요.”
건우의 목소리가 산허리에 퍼진 메아리처럼 연하게 번져나갔다.
“……빈 사무실도.”
건우의 입가에 번진 유혹적인 미소는 깊어졌다. 한껏 가까워진 거리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불규칙하게 엇갈려 쌓여갔다.
묵직한 숨을 뱉는 우리의 가슴께가 위로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갔다.
두 사람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으려던 찰나였다.
사무실 출입문이 열렸다. 보안이 쉬이 풀린 것을 보면 사무실 직원이 분명했다.
빈 사무실을 습격한 침입자의 등장에 우리는 혼비백산했다. 키스하려던 순간을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각또각. 빠르게 울리는 구두 소리에 당황한 우리가 책상 밑에 숨어버렸다.
“……!”
덩달아 놀란 건우도 급히 우리의 의자에 앉았다. 누가 보아도 이상하고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숨어든 책상 아래를 보던 건우가 나직이 말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우리는 우묵한 땅에 머리만 숨기면 완벽하게 숨은 줄 아는 타조처럼 보였다.
“차장님?”
선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대리님 자리에 앉아계세요.”
“찾을 자료가 있어서.”
“대리님은요?”
“잠깐 좀…… 나갔습니다. 강선영씨는 무슨 일로.”
짐짓 말을 멈췄던 건우가 자연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급히 퇴근하느라 USB를 두고 가서요.”
선영의 밝은 목소리가 퍼졌다. 우리는 쾌활하고도 명랑한 선영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책상 아래 숨어든 우리의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왜 하필 여기에 숨어서는.’
바닥을 보던 우리가 고개를 들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던 우리는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억! 하고.
의자에 앉은 바람에 불쑥 솟은 건우의 바지 지퍼 덮개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넋을 잃은 얼굴로 건우의 바지를 보던 우리의 얼굴에 화르륵 열이 올랐다.
바지가 뚫어질 것처럼 건우를 보던 우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짙은 정적 사이. 우리의 머릿속은 단 하나의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나가고 싶어 죽겠네. 근데 여기서 들키면 진짜 끝장인데.’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면서 우리는 숨을 죽였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USB도 잘 챙기고.”
선영의 옅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넘겨보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예.”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날리는 선영의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우리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숨이 흘렀다.
우리가 빈틈을 비집고 책상 아래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순간이었다.
“아. 차장…… 대리님.”
사무실로 돌아온 선영과 어정쩡한 개구리 자세로 책상에서 기어 나오던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우리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여전히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로.
“왜 거기서…….”
선영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우리와 건우만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가히 이상야릇한 자세였다. 선영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빛은 한없이 흔들렸다.
좋은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정말 하나도.
‘떨어뜨린 물건…… 이상해. 숨바꼭질을…… 할 이유가 없잖아!’
얼어붙은 우리의 머릿속은 끝없이 복작거렸다. 절망과 불안이 연달아 우리를 뒤덮었다.
심하게 흔들리는 우리의 눈빛을 바라보던 건우가 선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건우의 눈빛은 무심하고도 메말라 있었다.
“강선영씨.”
“네…… 넵?”
선영은 놀란 얼굴로 건우를 봤다.
“궁금합니까.”
“……?”
“이 상황.”
낮은 건우의 목소리가 허공을 물들였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선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묘하게 팽팽한 긴장감이 세 사람을 에워쌌다. 우리는 건우가 신박한 변명을 던져주길 바랐다.
“우리 연애합니다.”
저돌적인 진실 공개가 아니라. 그야말로 초강수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우리라면…… 두 분이요?”
선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연애소식에 잔뜩 흥분한 얼굴이었다.
간절히 건우를 바라보던 우리는 망부석이 됐다.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돌덩어리.
“진짜 두 분이 사귀시는 거예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는 없는데…… 진짜 대에에박.”
선영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대박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정작 말을 내뱉은 건우는 덤덤하기만 했다.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고대리님 일어나면 계속 얘기하죠.”
건우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닥을 기듯 엎어져있던 우리가 건우의 손목을 잡았다.
바닥에서 일어난 우리는 무거운 손길로 먼지를 털어냈다.
쏟아지는 민망한 물결에 우리는 선영을 보고는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그럼 두 분 사귀는 거요. 이거…… 비밀이죠?”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둘러보면서 선영은 속삭이듯 물었다.
“예.”
“소문이라도 나면…….”
“범인은 바로 찾겠죠.”
건우의 눈빛은 한겨울의 바람처럼 차갑고도 매서웠다.
비밀을 발설하면 두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다부진 눈빛이었다.
“하기는 딱! 봐도 저니까.”
선영은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냉랭하고 매몰찬 건우의 눈빛에 괜스레 눈치마저 보였다.
짧은 순간 사무실은 조용해졌다. 핸드백을 잡은 선영의 손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차장님.”
선영이 비장하게 건우를 불렀다.
“예.”
“저…… 딜을 하고 싶습니다!”
맹랑한 선영의 말이 힘차게 허공에 퍼져나갔다.
“조건은.”
“차장님 친구 분이요. 저한테 소개시켜주세요.”
“내 친구라면.”
“한성민씨요.”
선영은 뒷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기필코 소개를 받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건우는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성민이라니.
“그럼 오늘 일은 비밀로 하겠다는 겁니까.”
“넵!”
“믿을 수가 있나.”
“무덤까지 가지고 갈게요. 그걸로 부족하시다면…… 이 연애에 조력하겠습니다!”
선영은 핸드백을 손목에 걸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참 힘찬 기운이었다. 선영의 눈은 검은 하늘을 뚫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우리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건우를 봤다. 건우는 고심을 하고 있었다.
괜찮은 조건일까. 저울질을 해대고 있던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건우가 우리에게 물었다.
“성민씨가 동의만 하신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가 살짝 건우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대답했다.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애초에 소개를 시켜주는데 적극 힘을 쓰겠다고 약속을 한 상태이기도 했고.
선영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건우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해봤는데 강선영씨 제안은…….”
고심하던 건우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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