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화. 진짜 상사병은 말이야
예상하지 못한 삼파전이 벌어졌다. 황주임은 슬금슬금 의자에 붙은 바퀴를 굴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육갑커플과 우내시의 2차 대전.
그 격렬한 싸움에서는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팀장을 보던 건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짧은 적막이 세 사람을 덮었다.
바쁘게 눈을 굴리던 황주임은 선영을 향해 눈으로 힘껏 외치고 있었다.
육갑커플과 우내시가 터지기 전에 도망치라고.
하지만 선영은 반짝 눈을 빛내면서 세 사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팀장님께서 현장 반응을 봐야한다고…….”
“화보 콘셉트가 공유가 되질 않아서…….”
동시에 상황을 설명하려던 우리와 우팀장의 말이 짐짓 멈췄다.
서로를 보는 우리와 우팀장은 여전히 으르렁거렸다.
“화보 콘셉트는 확정되면 바로 전달 드리죠.”
“대강 콘셉트는 알아야 우리도 미리 MD한테 입도 좀 털고 그러지. 거참. 죄다 비밀이면 어쩌나.”
제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는 것처럼 우팀장은 크게 말했다.
사무실에 있던 누구라도 전부 들었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그러지 말고 강차장이 말 좀 해줘.”
우팀장은 건우의 어깨를 툭 쳤다.
“대리들이 뭘 아나. 상사의 고충을.”
우팀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우리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적의 손이라도 잡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우팀장은 알지 못했다.
그 적이 우리의 말이라면 꼼짝 못할 우리의 골수팬이라는 사실을.
“우팀장님도 대리의 고충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건우는 제 팔을 잡은 우팀장의 손을 무심하게 떼어냈다.
“화보 콘셉트는 비밀이 아니라 내부 조율 중이라 말씀드리기 어려운 겁니다.”
“그래도 조금씩 알려주면…….”
“일일이 보고 해야 하는 부분입니까.”
“누가 보고 하래. 협업 하자는 거 아닙니까.”
도둑이 제 발이라도 저린 것처럼 우팀장은 괜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거라는 단단한 신념을 믿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협업 타령을 해대는 우팀장의 열혈 강의에도 건우는 모든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협업을 요청하시는 태도가 아니신 것 같은데.”
“아니. 내 태도가 어때서.”
“강압적이고 막무가내십니다. 협업을 원하시면서 상대 부서의 진척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니 진상이신 것 같기도 하고.”
차분한 건우의 말에는 뾰족한 가시가 들어있었다.
직설적으로 날아드는 말에 우팀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무튼 지금은 못 드립니다. 그러니까 기다리세요.”
건우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단호한 건우의 말에 우팀장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쭈그러들었다.
같은 직급인데도 건우에게서는 묘한 위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우팀장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시면 직접 총괄해보시겠습니까.”
“허…… 그건 강차장이 하셔야지.”
우팀장은 손을 내저었다. 현장 반응 체크부터 화보까지.
연달아 혹만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별 수 없네요. 기다리시는 것 밖에는.”
건조한 건우의 말이 퍼졌다. 건우의 얼굴에는 작은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미소도 화도 없이 표정 없는 얼굴.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뭐…… 그리 부탁하면.”
우팀장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어색한 고요가 세 사람을 뒤덮었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우팀장은 내리 깊은 한숨만 뱉어냈다.
건우가 단 한 순간도 제 아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것이었다.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
“아니 뭐…….”
할 말을 잃은 우팀장은 목덜미만 쓸어내렸다.
우팀장의 눈빛은 갈피를 잃었다.
담백한 건우의 눈빛은 우팀장을 향해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 팀에서 꺼지라고.
“강차장님, 코트가 참 잘 어울리시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우팀장은 건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근데 두 사람. 뭐 있는 거 아닙니까. 꼭 세트 같네.”
건우의 뒤에 있던 우리를 쳐다보면서 우팀장이 뒷말을 이었다.
건우의 적색 코트와 우리의 적색 니트. 우팀장의 눈에는 두 사람이 꼭 핏빛으로 물든 흡혈귀처럼 느껴졌다.
하필 무섭게 붉은색이라니…….
눈을 찌르는 적색의 향연에 우팀장은 미간을 약간 좁혔다.
“세트 같습니까.”
건우가 어깨를 쫙 펴고는 물었다. 건우의 목소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우팀장의 말에 약간 들뜬 얼굴이었다. 우리는 뜨악한 얼굴로 건우를 봤다.
‘커플인 거 티 내지 말라니까요!’
우리는 눈썹을 씰룩대면서 건우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침만 삼켜대는 우리와는 달리 건우는 여전히 의기양양한 모양새였다.
“뭐…… 이게 색깔이 탁, 튀니까.”
우팀장은 둘러대듯 말했다.
“세트라고 해두죠.”
건우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순식간에 번진 어색한 기류를 떨치려고 우팀장은 힘차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컹거리는 복부를 활용한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마케팅팀 단합이 죽이네. 이런 걸 딱 배워야 되는데. 그죠.”
“배우실 필요까지야.”
“좋은 건 당연히 배워야지.”
건우의 딱딱한 말에도 우팀장은 둥그스름하게 대답했다.
사람 좋은 웃음이 우팀장의 입을 비집고 연달아 흘렀다.
“근데 이러다가 강차장님. 고대리하고 장기자랑에라도 출전하시는 거 아닙니까.”
“무슨 장기자랑을……?”
“거…… 왜 워크샵 장기자랑 있잖습니까.”
“그걸 제가 왜.”
건우는 우팀장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육갑 커플에 대한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냉랭하고도 살벌한 눈빛까지 날리면서.
“사은품도 빵빵하고.”
“직접 사겠습니다.”
“에이. 사는 거랑은 다르죠. 1등은 무려 해외여행 상품권인데.”
“관심 없습니다.”
심드렁한 건우과는 달리 우리의 귀가 쫑긋했다.
해외여행이라니…….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지만 우리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는 일은 두 번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갓 태어난 망아지의 춤사위를 보여줄 수 없었다.
절대로!
“하기야 장기자랑의 꽃은 우리 신입의 재롱잔치죠.”
우팀장은 엉큼한 눈빛을 선영에게 보냈다. 건우는 은근슬쩍 선영의 어깨로 손을 내뻗으려는 우팀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는 우팀장님 장기자랑을 기대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돌진한 건우의 손에 우팀장은 꼼짝없이 갇혔다.
허허. 옅은 웃음을 흘리면서 우팀장은 건우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건우는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한 건우의 손아귀 힘에 우팀장의 손은 금세 아렸다.
“무슨 기대를 하신다고.”
“장기자랑 참여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허참. 내가 무슨 신입도 아니고.”
우팀장은 불끈 올라오는 아픔을 굳은 침과 함께 삼켰다. 건우의 손등에 퍼런 핏줄이 솟았다.
강력해지는 알알한 기운에 우팀장은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아댔다.
트위스트라도 추듯 몸을 꼬던 우팀장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장기만 있으면 참여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신입이든 아니든 상관없죠.”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흥도 넘치시는 것 같으신데. 무대에서 푸시죠.”
건우는 고통의 스텝을 밟는 우팀장을 보고는 말했다. 꼭 멈추지 않는 빨간 구두라도 신은 모양새였다.
우팀장의 얼굴이 구겨지려던 찰나였다. 건우가 우팀장의 손을 놔주었다.
허옇던 우팀장의 손에 그제야 혈색이 돌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우팀장은 슬쩍 제자리로 돌아갔다.
‘세트지. 세트야. 육갑 세트.’
속으로는 완벽한 복수를 꿈꾸듯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고대리님.”
“네…… 네?”
멀어지는 우팀장을 보던 우리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건우가 손을 내뻗어 우리의 책상에 있던 제안서를 들었다.
“성운백화점에서 연락 왔습니다.”
“무슨 연락을……?”
“담당자 교체해서 진행하기로.”
우리는 하마터면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담당자 교체라니!
그야말로 토끼 커플의 비참한 말로였다.
“기획안은 큰 틀은 수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네.”
“차주에 미팅 일정 잡혔으니 그리 알고.”
“알겠습니다.”
우리는 건우가 건넨 제안서를 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술술 풀렸다. 딱, 한순간에.
꼬여있던 매듭이 말끔하게 풀린 기분이었다. 고민스럽던 것들이 이제는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쁜 일은 항상 한꺼번에 나타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참 신기하게도.
그리고 선물 같은 좋은 순간도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나타났다.
깜짝 선물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려주기라도 하듯.
“선영씨.”
“넵!”
“인생은 역시 복세편살로 살아야 한다니까. 욕심 부리지 말고 평온하게.”
투덜거리는 얼굴로 자리에 앉는 우팀장을 힐끔 쳐다보던 황주임이 말했다.
흘러가듯 허공을 돌던 말이 건우의 귀에 꽂혔다.
복세편살이라……. 건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황주임과 선영에게로 돌아갔다. 건우와 눈이 마주친 황주임이 흠칫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황주임이 건우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일은 아니고. 황주임님 말에 동의해서.”
“아…… 복세편살 아세요?”
제안서 수정에 박차를 가하려던 우리의 손이 삐끗했다.
설마, 설마!
“예.”
“대박! 역시 신세대시네요. 그거 고대리님도 맞추기 어려워하셨거든요.”
“쉽잖습니까.”
건우의 목소리는 의기양양했다. 우리는 건우에게 눈짓을 주면서 약간 고개를 흔들어댔다.
우리의 눈빛은 간절하게 외쳐대고 있었다.
제발…… 스톱!
“복권 세 장이면 편하게 살 수 있다.”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우리를 시작으로 황주임과 선영이 뒤이어 얼어붙었다.
모두 잘못 들었는지 의심하는 눈빛들이었다.
정말 실화냐고.
“아…… 물론 당첨된 복권.”
마지막 강력한 한방이었다.
우리는 살짝 의자를 돌렸다. 자신감 넘치는 적색 코트의 건우를 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못 본다.
아니…… 안 볼란다.
건우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저 자신이 내뱉은 복세편살의 뜻이 정답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뿐이었다.
“저…… 차장님.”
갑작스럽게 싸해진 분위기를 깨고 선영이 슬쩍 손을 들었다. 총대를 메는 다부진 손길이었다.
“예.”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건우의 물음에 선영은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선영의 손길이 멈췄다.
선영은 힘찬 얼굴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건우는 핸드폰을 받았다.
[복세편살]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를 줄여 이르는 말건우는 핸드폰을 바짝 코앞으로 가져갔다. 금방이라도 핸드폰 속으로 빨려갈 모양새였다.
지식백과에 적힌 뜻풀이를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건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던 우리가 벌떡 일어났다. 건우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죄송해요. 차장님!”
우리는 바짝 건우에게 다가서고는 말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로 향했다.
“내가 차장님한테 농담을 좀 했거든.”
우리가 황주임과 선영을 보면서 서둘러 말을 이었다. 우리의 말에 황주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고똘이 농담을 하다니.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치킨에 들이켜는 우유가 어울리지 않는 만큼.
“곤란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
“쓸데없이 장난을 쳐서.”
고개를 돌려 건우를 보던 우리가 재빨리 눈을 찡긋거렸다.
“장난이었습니까.”
“아…… 네. 분위기가 딱딱해서 풀려고 던진 농담이었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우리의 눈빛을 읽은 건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야말로 날렵한 쿵짝의 현장이었다.
건우는 우리에게 바짝 다가섰다. 무슨 짓을 하시려고……!
우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건우를 쳐다봤다. 건우가 살짝 몸을 숙였다.
우리와 건우의 거리는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건우는 여유로운 손길로 우리의 뒤에 서 있던 선영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걱정스러운 우리와는 달리 건우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무 걱정도 말라는 것처럼.
“고대리님.”
“네…… 예?”
우리의 목소리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음 농담도 기대하죠.”
넌지시 던진 건우의 말이 우리에게 녹아내렸다.
“그럼 제안서 수정되면 전달 부탁합니다.”
“아…… 네.”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우의 얼굴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불처럼 타올랐던 복세편살 사태는 순식간에 기운을 잃고 꺼졌다.
우리는 넋을 놓은 채로 건우를 봤다. 덤덤한 얼굴로 업무를 시작한 건우가 마냥 대단해 보였다.
“대리님.”
슬그머니 주위를 살피던 선영이 우리를 불렀다.
“무슨 일 있어?”
“다른 건 아니고요. 그때 그…… 차장님 지인 분이요.”
“지인? 누구?”
“왜 그때 짐 팍팍 들어주셨던. 그 분이요.”
선영의 말에 우리가 기억을 더듬거렸다. 설핏 짐을 들어주던 성민의 모습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성민씨?”
“성민. 이름도 멋지시네요.”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선영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숨소리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마저 피어올랐다.
선영은 당장이라도 성민의 소식이 궁금한 눈치였다.
그야말로 애달픈 짝사랑의 서막이었다.
“혹시요. 정말로 혹시…….”
선영은 조심스러웠다. 말을 내뱉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우물쭈물하는 선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선영이 꺼내지 못하는 말을 우리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주저하면서도 간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개시켜달라고?”
선영의 입을 맴돌던 말을 우리가 대신 꺼냈다.
“네네!”
따발총처럼 선영은 대답했다. 선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환해져 있었다.
묵었던 체증이 쑥 내려간 얼굴이었다.
앙증맞은 입술을 힘껏 다문 채로 선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필코 우리에게 소개를 받아내고 말겠다는 묘한 전투력마저 선영에게서 솟구치고 있었다.
“말은 해보겠지만…….”
“잘 말씀 좀 부탁드릴게요!”
선영은 덥석 우리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선영의 습격이었다.
놀란 우리는 황급히 손을 빼면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의 커다란 반응에 선영도 덩달아 당황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불안하게 손을 말아 쥐었다.
“미안. 정전기가 나서.”
우리는 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꽤나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선영이 굴곡 하나 없이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우리의 앞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전기가 올랐었나. 괜찮았었는데.’
제 손을 바라보던 선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내가 한 번 힘은 써볼게.”
우리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제 손을 보던 선영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돌아갔다.
“정말요?”
“잘 말씀드리면 되지 않을까.”
“대리님! 역시 대리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선영은 잔뜩 감동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야멸차게 손을 내뺐던 순간은 벌써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니 뭐…… 생명의 은인까지야.”
“대리님 아니었음 큰일 났을 거예요. 저…… 상사병에 걸린 것 같거든요.”
“상사병?”
“네. 저 되게 심해요. 잠도 설치고. 매일 9시간 밖에 자지도 못하고.”
선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우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9시간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 자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푹.
“요즘에는 좋아하던 케이크에도 손이 잘 안 간다니까요. 제가 그렇게 디저트를 좋아했는데.”
푸념을 하는 선영의 어깨는 금방 땅에 달라붙기라도 할 것처럼 축 쳐졌다.
항상 자신감 넘치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도 되게 상한 것 같아요.”
제 피부를 만지는 선영은 시무룩해졌다. 촉촉한 피부가 푸석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는 슬픔의 나락에 빠져버린 선영을 바라봤다.
멀리서 봐도 푸석한 기운도 없었고 다크서클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것처럼 선영의 피부는 투명하기만 했다.
아주, 맑고 깨끗한.
“선영씨. 정말로 상사병이니.”
“넵! 완전 진짜예요. 근데 혹시 가짜 상사병도 있나요?”
선영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있지.”
“그게 뭔데요.”
선영이 잔뜩 궁금하다는 것처럼 목을 빼고는 우리에게 다가섰다.
“상사가 다가오면 소멸하고 싶어지는 병이라고.”
슬픈 전설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련하게 말했다.
선영은 우리의 말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걸어오는 건우를 본 바로 그 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