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52화 (52/102)

제 52화. 화마가 집어삼킨 건물 속에서

눈발은 제법 굵어져 있었다. 펄펄 내리는 눈이 거리를 하얗게 밝혔다. 군데군데 밝혀진 가로등 불빛이 허공을 적셨다.

건우가 파란 우산을 펼쳤다. 우산 속은 아늑하기만 했다.

우리가 눈이라도 맞을까. 건우의 우산은 우리의 쪽으로 한없이 기울었다.

건우의 어깨에 떨어진 탐스러운 눈송이는 건우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묽게 녹기를 반복했다.

편의점을 향해 걸어가던 우리가 건우를 봤다. 건우의 코트는 반쯤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우리는 건우의 코트를 바짝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됐다.

“붙어야겠어요. 다 젖었어요.”

“괜찮습니다.”

“아뇨. 제가 안 괜찮아요. 쫙 잘 붙어볼게요.”

빙글 미소를 짓던 우리가 건우의 허리를 안았다.

온기는 빠르게 두 사람을 녹였다. 간간이 번지는 입김 말고는 두 사람은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서로의 체온에 진하게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우산에 쌓였던 눈은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그리고 또 툭.

느릿하게 걷던 두 사람의 걸음은 편의점 앞에 나란히 멈췄다. 비밀을 품은 노파가 있는 곳으로.

편의점 간판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부시게만 보였다. 쉽게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저희 벌써 왔네요.”

우리가 편의점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하얀 입김이 뜨겁게 번져나갔다.

“준비는 됐습니까.”

“저는 됐어요. 건우씨는요.”

“나도 됐습니다. 그럼 가죠.”

“네.”

다부진 우리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사뭇 긴장에 찬 얼굴이었다.

우리는 모두 소복이 쌓인 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눈에 발이 묶여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라고.

찰랑거리는 소리가 공허하게 편의점을 맴돌았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카운터에 서 있던 사장을 보고는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는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중년의 사장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의점 뒤편을 가리켰다. 정갈하게 정리된 테이블에는 노파가 힘없이 앉아있었다.

자신을 만나보고 싶다던 건우와 우리의 말에 노파도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묘하게 번진 적막을 깨고 우리가 먼저 인사를 했다. 뒤이어 건우도 고개를 숙여 목인사를 했다.

우리의 뒤를 빤히 보던 노파가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노파가 건우와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날아든 질문에 긴장한 우리가 뜨듯한 침을 꼴깍 삼켰다.

묘하게 떠도는 적막에 노파는 소매를 끌어내렸다.

팔에 있는 화상의 흔적을 숨기려는 손길이었다.

노파의 앞에 앉은 우리가 건우를 잡아끌었다. 민우의 사진을 꺼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긴 손짓이었다.

우리의 옆에 앉은 건우가 테이블 위에 사진을 내려놨다. 민우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 혹시 이 학생이요. 보신 적이 있나 해서요.”

우리가 조심스럽게 민우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날의 일이 노파에게도 끔찍한 과거일 수 있었다.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우리는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테이블에 있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을 보던 노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래 똑바로 보이 알겠네.”

노파가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보신 적 있으신 거죠.”

“이자뿔 리가 있나.”

사진 속 해맑게 미소를 짓는 민우를 바라보던 노파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해묵었던 기억의 부스러기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노파는 눈만 깜빡거렸다.

“이 학생 아니었음 내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끼다.”

“그날. 그날 정말로 거기에 계셨습니까.”

노파의 말을 듣던 건우가 성큼 몸을 내밀었다. 민우를 봤다는 말만으로도 건우의 심장은 벌렁거렸다.

“우리 민우를 정말로 보셨습니까.”

“봤다.”

“어땠습니까. 우리 민우는 왜 거기 남았습니까. 나올 수는 없었습니까. 거기서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왜 우리 민우는…….”

수없는 말이 노파에게 날아갔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은 사고였다.

살아남은 사람도. 죽은 사람도. 남은 사람조차 잘못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이블 앞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죄인이 됐다. 정말 이상하게도.

굳은 침을 삼키는 노파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하얘진 노파의 입술은 애달파 보이기까지 했다.

그 날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노파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정신없었던 그곳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편히 자지도 못했다.

“미안하데이.”

노파는 건우를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정말 미안타.”

식은땀을 흘리면서 미안하다는 말만을 남길 뿐이었다. 우리도 건우의 맘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만 참아달라는 것처럼 건우의 팔을 잡았다.

더 나갔다가는 노파가 그대로 쓰러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내려놨다. 사진 속 민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건우가 고개를 돌렸다.

편의점에 번지는 노래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테이블은 그저 조용했다.

더는 진전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방법을…… 아니. 있다.’

방법을 찾으려던 우리의 눈동자가 노파의 손에 멈췄다.

과거를 품고 있는 손. 그 손을 잡는다면 그날의 일을 단숨에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정말로 노파가 민우를 봤다면. 해볼 만한 일이었다.

“할머니.”

우리가 다정스럽게 노파를 불렀다.

“제가 손 한 번 잡아 봐도 될까요.”

“그만 일어나죠.”

“아뇨. 할 수 있어요. 아니. 해야 돼요.”

자신을 말리는 건우를 바라보던 우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계속 하고 싶거든요. 우리 연애.”

“…….”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주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훗훗하게 도는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는 우리는 노파의 손을 잡았다. 짧은 탄식조차 흐르지 않았다.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다. 걱정스러운 건우의 얼굴은 희미해졌고 편의점은 순식간에 형체조차 없어졌다.

오직 매캐한 냄새만이 코끝을 찌를 뿐이었다.

노파의 과거로 온 것이었다.

폐부 깊숙이 빨려드는 회색빛 연기만이 사위를 뿌옇게 물들였다.

우리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온갖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우리의 귓가에 꽂혔다.

넘실대는 화마에 건물은 아비규환이었다. 연기를 지우려는 것처럼 우리는 손을 내저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과 갇혀버린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끔찍하고도 잔혹하게 우리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왔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강민우?”

민우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민우의 교복은 잔뜩 헝클어져있었다. 민우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차림새였다.

그을음이 군데군데 번진 민우의 얼굴을 거뭇거뭇했고 교복도 까맸다.

재킷으로 입을 막고 있던 민우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민우는 철근에 깔려 있는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그냥 지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우는 철근을 들어올리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하지만 철근은 쉽게 들리지 않았다.

“괜찮아요. 제가 금방 꺼내드릴게요.”

우리가 철근에 힘을 주었다. 철근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민우를 도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민우를 바라보던 우리는 철근 아래에 있던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 돼요.”

다정스럽게 말을 하는 민우를 쳐다보는 사람은 노파였다. 젊은 기운이 넘쳤지만 확실했다.

“내는 몬 가겠다.”

노파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철근을 들어 올리려는 민우의 이마를 타고 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놀란 노파를 진정시키면서도 민우는 온 힘을 쥐어 짜냈다.

“거의 다 됐어요. 조금만.”

이를 악문 민우는 힘겹게 철근을 치워냈다.

“일어서실 수 있으시겠어요?”

노파의 다리는 풀려있었다. 민우가 사위를 둘러봤다. 연기는 끝없이 짙어졌고 단단해 보이던 건물은 허물어진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던 민우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조급해졌다.

노쇠한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내는 몬 간다.”

“잡으세요. 저만 믿으면 가실 수 있어요.”

민우가 노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노파를 그냥 두고 갈 수 없다는 다부진 손길이었다.

불꽃은 금방이라도 두 사람을 집어삼킬 것처럼 넘실거렸다.

딱딱 소리를 내면서 이까지 떨던 노파가 민우의 손을 잡았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노파를 부축하면서 민우는 탈출구를 찾았다.

눈물로 범벅된 노파의 살갗은 불에 녹아있었다. 화상에도 노파는 죽음의 공포 앞에 모든 고통마저 잊은 것처럼 보였다.

화마는 모든 것을 삼켰다.

살아있는 것부터 죽은 것까지. 모조리.

“저쪽까지만 가면 될 것 같아요. 조금만 힘내세요.”

민우는 깨진 창문을 가리켰다. 불꽃이 넘실대는 건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것조차 언제 닫혀버릴지 몰랐다.

“눈 딱 감고 가면 돼요.”

“…….”

“다 잘 될 거예요.”

민우는 두려운 맘을 감추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창문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민우가 제 손수건을 건넸다. 무늬 하나 없이 투박한 손수건.

노파가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앞만 바라봤다.

“저만 믿으시면 돼요.”

천장을 집어삼킨 화마가 내뿜은 독한 연기는 민우의 폐부로 돌진했다.

팔로 입을 가리고는 민우는 창문을 향해 내달렸다.

노파가 짐짓 발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

코앞에서 천장이 무너졌다. 간발의 차였다. 자칫 타이밍을 놓쳤다면 떨어진 천장에 그대로 깔려버렸을 것이었다.

민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건물이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노파를 부축하면서 민우는 간절히 기도했다.

살 수 있기를.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그 소리를 누군가 듣기라도 한 것처럼 위험한 순간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두 사람을 쫓던 우리는 간절하게 바랐다.

‘살아. 제발 살아줘. 민우야.’

민우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보처럼 기도했던 것이었다.

변할 수 없는 사실이 기적처럼 변해주길.

‘죽지 마.’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처럼 두 사람은 창문 앞에 섰다.

바깥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비명소리도 힘없이 흐무러졌다.

깨진 창으로 몸을 내던지면 모두 끝나는 일이었다.

“먼저 가세요.”

“니는.”

“가시면 바로 따라갈게요.”

노파가 깨진 창문 아래를 바라봤다. 매트가 깔려있었지만 쉽게 용기를 붙잡고 뛸 수 있는 높이는 아니었다.

“몬 하겠다. 니 먼저 가라.”

“아뇨. 하실 수 있어요. 먼저 가셔야 제가 가죠.”

“몬하겠다. 몬해. 내는 몬한다.”

노파의 눈동자는 갈 길을 잃었다. 앞과 뒤. 무엇 하나 쉬운 길이 없었다. 민우가 재빨리 가방을 뒤적거렸다.

활을 날릴 때 손가락을 보호해주는 가죽으로 된 핑거탭을 꺼냈다.

노파에게 핑거탭을 내미는 민우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스스로도 무서웠던 것이었다. 넘실대는 죽음의 그림자가.

누구보다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었지만 민우조차 감당할 수 없는 깊이의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믿기로 했다. 정신을 차리면 살 수 있을 거라고.

“저희 형이 이번에 큰 대회에 나가거든요. 그래서 새로 샀는데. 꼭 금메달 따라고 제 운도 전부 담았거든요.”

침착하게 말을 잇는 민우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연달아 들이닥치는 죽음의 그림자는 짙어졌다가 옅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쓴 연기에 민우는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손등으로 눈을 훔쳐내면서 민우는 노파의 손에 핑거탭을 놔주었다.

“되게 중요한 건데요. 이거 빌려드릴게요.”

“됐다카이.”

“가지고 계시면 꼭 사실 거예요. 운이 전부 담겼으니까.”

“몬 받는다.”

노파가 놀란 얼굴로 민우에게 핑거탭을 다시 건넸다.

하지만 민우는 노파의 손을 접어줄 뿐이었다.

“내려가면 그때 주세요.”

“…….”

“저희는 꼭 살아서 나갈 거니까.”

노파는 떨리는 손에 소중한 핑거탭이 떨어지기라도 할까. 꽉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떨리는 몸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앞만 보세요. 그럼 할 수 있어요.”

노파가 창문에 섰다. 매트가 설핏 보였다. 뿌연 연기 속에서 믿을 것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노파도 잘 알고 있었다.

다정스러운 민우의 말은 끝없이 노파를 다독였다.

노파는 민우의 말을 꼭 듣겠다는 것처럼 앞만 바라봤다.

“저희 얼른 가요.”

민우의 목소리에 노파가 뒤를 돌았다. 손에 쥐고 있던 가죽 핑거탭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라자.”

“그럼 아래에서 봬요.”

“얼른 와야 된대이.”

“그럼요. 저도 얼른 가야죠. 우리 형이 기다릴 거거든요. 목 빠져라.”

민우가 벙긋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그 말을 따라서 노파는 건물 밖으로 힘껏 몸을 내던졌다. 유일한 탈출구를 향해.

노파는 순식간에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하늘 위로 무섭게 피어오르는 회백색의 연기를 뚫고 노파는 앰뷸런스로 이동했을 것이었다.

우리는 민우를 봤다. 노파의 기억은 여기까지일 것이었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여기서 끝나야만 했다.

그런데 과거는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모든 것이 선명해질 뿐이었다.

“왜. 아직도 여기에…….”

우리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사위를 살폈다. 뜨거운 기운마저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민우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깨진 창문으로 몸을 내던지면 모든 것이 끝날 일이었다.

“강민우. 민우야.”

하지만 민우는 창문을 넘지 못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가. 그냥 가. 강민우.’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민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런 민우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힘차게 외쳤다. 도망가라고. 더는 뒤로 돌아보지 말고 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라고.

하지만 민우의 걸음은 창문에서 멀어졌다.

“민우야. 살려줘.”

민우의 시선에 끝에 바닥에 주저앉은 여학생이 보였다.

민우의 걸음이 빨라진 순간. 창문 위에 있던 천장도 힘없이 무너졌다.

탈출구는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었다.

“나 무서워.”

우리가 민우에게 매달린 여학생의 명찰을 봤다.

[주혜원]

민우와 비슷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민우와 혜원은 서로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민우를 붙잡은 혜원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혜원에게 손을 내뻗었지만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민우야.”

“잠깐.”

“가지마. 나 무섭단 말이야. 다리에 감각도 없고. 나…… 무서워.”

혜원이 다급히 민우의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살갗이 벗겨진 혜원의 다리는 손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멀어지는 민우를 보면서 혜원은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 소리는 단순한 비명보다는 절규에 가까워졌다.

“혜원아.”

끝없이 멀어지던 민우가 혜원에게 다가섰다.

민우는 눈물와 재로 뒤범벅된 혜원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나…… 나 버리고 가는 거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금방 올게. 꼭 돌아올게.”

“어디 가는데.”

“너랑 나가려고. 여기.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꼭 살려줄게. 약속해.”

민우가 손을 내밀었다. 단단한 그 말에 혜원은 눈물을 훔쳤다. 민우는 탈출구를 찾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혜원이 걱정돼 자꾸만 뒤를 돌았다.

멀어지는 혜원과의 거리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잘못된 판단은 모두 죽음에 몰아넣을 것이었다.

한참 걷던 민우가 탄식을 내뱉었다. 막다른 길의 연속.

연기 속에 사라지는 혜원의 모습에 민우는 절망했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소방관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민우야!”

혜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번졌다. 혜원을 부축해 나가는 소방관의 모습에 민우의 걸음이 조금씩 움직였다.

“제 친구가 있어요. 저쪽에 있어요.”

혜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민우의 걸음이 조금씩 움직였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민우를 벅차게 했다.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소방관을 향해 민우가 다가가던 찰나였다.

“강민우!”

우리가 민우를 향해 소리쳤다. 민우의 앞에 커다란 불꽃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콘크리트가 무너졌다. 모든 것이 매몰되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위험천만했다. 허공을 향해 짙은 숨을 내뱉는 민우가 뒤를 돌았다.

민우와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민우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이었다.

자신에게 들이닥칠 미래를 모두 알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느릿하게 번지는 잔잔하고도 고요한 민우의 눈빛이 스며들기도 전이었다.

펑 그리고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건물은 무너졌다.

그리고 민우는 죽었다.

예정됐던 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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