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화. 오늘 못 재울 것 같거든
우리가 건우를 향해 두 팔을 내뻗었다. 우리는 천천히 건우의 목에 팔을 둘렀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건우의 얼굴에 우리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마냥 신기했다. 항상 보는 얼굴인데도 매일 같이 심장이 뛸 수 있다는 게.
“고마워요. 건우씨.”
“뭐가.”
“우리 연애. 잘 지켜줘서.”
우리의 말이 건우의 입술을 간질였다.
“그런 말은 직접 느껴보죠.”
“어떻게요.”
건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빙긋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면서 건우는 우리에게 바짝 다가섰다.
달뜬 숨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조용히 흐르는 그 숨결은 두 사람을 점점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가 무슨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건우는 우리의 입술을 삼켰다. 열기는 한없이 짙어졌다.
끈적끈적한 숨소리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엉겨 붙었다.
건우의 고삐는 그대로 풀려버렸다. 건우는 거치적거리던 윗옷을 벗었다.
탄탄한 근육은 연이어 피어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불끈거렸다.
건우의 몸은 조금도 군살이 없었다. 잘 다듬어진 조각처럼 밸런스 있게 근육이 잡혀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절로 군침을 흘렸다.
그저 본능에 충실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너무도 정직한 반응이 나오고 있는 줄 인지하지도 못했다. 뜨거운 타액이 우리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소설 속에서 그토록 열심히 설명했던 눈부신 몸매를 코앞에서 볼 수 있을 줄이야!
“와…… 진짜 탄탄하시네요.”
우리는 두 손을 내뻗어 건우의 가슴팍에 손을 댔다. 보드라운 살결 아래로 꿈틀거리는 근육이 손바닥 사이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리는 소설 속에서만 존재했던 탄탄한 가슴팍의 정체를 단박에 이해했다는 표정이었다.
‘어우. 차장님 진짜 장난 아니네.’
단단한 건우의 가슴팍은 성이라도 난 것처럼 불끈댔다. 건우는 제 가슴팍에 야무지게 손을 얹고 놀란 듯 눈만 깜빡거리는 우리를 봤다.
아무리 봐도 분위기 있는 자세는 아니었다.
게다가 가슴팍을 주물거리면서 잔뜩 감탄하고 있는 얼굴이라니.
“반대로 돼야 하는 거 아닙니까.”
건우의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정확히 잡고 있는데요.”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건우의 말에 놀란 우리가 제 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뭇 진지한 우리의 표정에 건우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우리는 그 잘은 웃음마저도 섹시하게만 보였다. 자신만만한 속내가 넘실대는 것만 같았다.
훗, 딱 기다려. 그런 류의 당찬 속내.
우리와 건우는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서로가 거대한 포문을 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뜻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두 사람 사이에 옅은 침묵이 돌았다.
점점 진해지는 정적을 뚫고 건우가 우리를 불렀다.
“고우리.”
고우리, 하고.
“큰일 난 것 같은데 알고 있습니까.”
“무슨 큰일이요.”
“장어 기운이 솟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사뭇 진지한 농담이었다. 맘껏 폭발하는 장어의 기운을 뿜어내라는 것처럼 우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신호에 건우는 스태미나를 완전히 충전한 호랑이처럼 우리에게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건우가 우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얇은 우리의 살결과 건우의 보드라운 입술이 맞닿았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건우의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우리의 목덜미로 건우의 가지런한 치열이 느껴졌다.
피를 갈구하는 뱀파이어같이 건우는 우리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물었다.
새빨간 수채화 물감이 번져나가듯 우리의 목덜미에 붉은 흔적이 군데군데 번졌다.
달뜬 건우의 숨결이 살결 위로 전해질 때마다 우리는 온몸이 아릿거리는 것만 같았다.
“차장…… 아니. 건우씨.”
우리의 말에 건우가 고개를 들었다. 달콤한 피에 취하기라도 한 듯 뇌쇄적인 빛이 건우의 눈동자를 맴돌았다.
“예.”
“저도 같이 솟아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두 손으로 제 배를 문지르면서 말했다.
“장어의 기운이요.”
“잘 솟아나고 있습니까.”
“네. 꿈틀대는 기분인데요.”
제법 심각한 얼굴로 우리가 대답했다. 우리는 제 뱃속에서 장어가 펄떡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주 광활한 민물을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장어 덕분인지 우리는 밤을 새도 끄떡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놀랄 정도로 기운찼다.
“잘됐네.”
“역시 먹기를 잘했죠.”
“예. 정말 잘됐습니다.”
건우가 우리에게 바투 다가섰다.
“오늘 못 재울 것 같거든.”
건우는 선전포고를 날렸다. 욕망을 건드린 우리의 말에 정확히 반응하겠다는 듯.
건우가 흘러내린 우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귓바퀴를 스치는 건우의 손가락에도 우리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뜨거운 한낮의 시작이었다.
건우의 입술은 우리의 목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건우의 향기가 우리의 살결을 적셨다.
건우가 천천히 우리의 윗옷을 끌어 올렸다. 반드러운 우리의 속살이 드러났다.
삽시간에 몰려온 아찔한 감각이 우리의 혼을 뺐다.
건우 말고는 어떤 감각도 침범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흘러가는 시간, 사방을 맴도는 뜨거운 기류, 커튼 사이로 넘실거리는 햇볕까지.
감각은 전부 멀어지고 우리는 그저 물 위에 가만히 떠 있는 기분이었다.
손톱만한 파동도 없는 바다 위.
“차장님.”
우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뱉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우리의 심장이 빨라졌다. 건우만큼 우리도 건우의 모든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온 신경세포가 하나 같이 건우에게 목말라했다.
가빠지는 숨에 우리의 가슴께가 위로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간헐적으로 몰아치는 건우의 손길은 참을 수 없는 전율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연거푸 터지는 뜨거운 숨소리를 목구멍 뒤로 넘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끝을 모르고 오르는 온도 때문에 지독히도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창에 달라붙은 칼바람조차도 더위를 식힐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우리만큼 건우도 끓는 몸을 참아내지 못했다.
“괜찮습니까.”
건우의 말에 우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건우의 향기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코끼리든 호랑이든. 그게 뭐든 건우를 모조리 담아내고 싶었다.
건우가 잔뜩 힘을 줄 때마다 건우의 근육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잘은 근육조차도 또렷했다.
우리가 건우를 힘껏 안았다. 오묘하게 번지는 감각을 모조리 견뎌낼 수 있다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끝없이 잡아당겼다. 서로를 갈망하는 소리가 허공을 채우고 커튼 사이로 밀려들었던 옅은 빛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바튼 숨을 뱉어내던 입술이 이내 마지막으로 눅진하게 붙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그대로 소파에 널브러진 우리는 제 숨을 골랐다. 건우의 향기가 제 몸을 구석구석 도는 것만 같았다.
더운 기운은 여전히 소파 주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운 하나 없이 축 늘어진 우리가 고개를 돌려 건우를 봤다.
건우의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심상찮은데. 설마…… 아니겠지.’
우리는 조금의 피곤한 기색도 없는 건우를 봤다.
그야말로 강적이었다.
쉴 생각도 하지 않다니! 현실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게.
“장어, 벌써 전사했습니까.”
“아뇨. 재충전 중이에요.”
“충전도 필요합니까.”
“그럼요. 소화가 돼버리면 다시 끌어올려야죠.”
묵직한 제 배를 쓸어내리던 우리가 능청스럽게 건우의 말을 맞받아쳤다.
“그러지 말고 차장님도 조금 쉬세요. 쉬어야 달리죠.”
“기다리기가 더 힘듭니다.”
우리는 건우를 빤히 쳐다봤다.
“아…….”
흠칫 놀란 표정을 숨기면서 우리는 슬그머니 돌아누웠다.
소파에 한껏 가깝게 붙은 우리는 연신 건우를 힐끔거렸다.
“뭐합니까.”
“파업이요.”
“멈추지 못하게 만들고 파업이라니. 너무하네.”
“깊은 대화는 한 번이면 충분히…….”
건우는 소파에 눌어붙은 우리를 습격했다. 빈틈을 비집고 우리의 입술을 그대로 삼켜버린 것이었다.
우리의 말은 건우의 입안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갔다. 우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건우가 살짝 입술을 뗐다.
“심각하게 부족합니다.”
“…….”
“한 번으로는.”
건우의 눈동자에 불순한 기운이 서렸다. 까만 눈동자가 우리를 자극했다.
원초적인 본능에 사로잡힌 건우를 말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눈빛과 숨결 하나로도 조금씩 옅어지던 열기가 서서히 올라갔다.
우리의 굴곡을 타고 내려가는 건우의 손길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야릇한 분위기 속. 두 사람의 숨소리는 다시금 거칠어졌다. 서로를 갈구하는 눈빛이 넘실거렸다.
서로에게 흡수될 것처럼.
강하게도 끈덕지게.
‘잡아먹혔다. 정말…… 잡아먹히고 있다고!’
우리의 소리 없는 절규가 방안을 돌았다. 정신없이 두 사람을 뒤흔드는 쾌락 속에 헛나간 손길이 협탁을 툭 쳤다.
탁. 무거운 소리가 거실을 흔들었다. 건우와 우리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바닥으로 향했다. 강력한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액자가 떨어져버린 것이었다.
건우가 바닥에 떨어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우리는 담요를 두른 채로 건우에게 기댔다. 액자 속에서는 활을 들고 있는 건우와 민우가 나란히 서 있었다.
“바꿔야겠어요. 금이…….”
“가버렸군요.”
건우가 우리의 뒷말을 이었다. 사진이 들어있는 유리에 금이 갔다. 사진 속 건우 쪽에만 길게.
그 모습이 꼭 사방으로 내뻗은 거미줄처럼 보였다.
산산조각이 난 건우의 쪽과는 달리 사진 속 민우의 모습은 금이 간 곳 없이 말끔하기만 했다.
‘왜 차장님 쪽에만…….’
금이 가버린 액자를 바라보던 우리가 건우를 봤다. 건우는 말없이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별다른 말이 흐르지 않았다.
모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
우리는 건우가 환한 미소를 짓는 민우를 바라보는 것도 같았고 깨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되새기는 것 같기도 했다. 묘한 침묵은 거실에 내려앉았다.
얇은 커튼을 비집고 흘러든 포악한 빛이 두 사람에게 손을 내뻗었다.
엉킨 실타래를 어서 풀라고 재촉하듯.
***
정갈한 선술집. 꼬치가 익어가는 소리가 맛있게 들렸다. 널찍한 테이블에 우리와 건우가 마주 앉아있었다.
작은 냄비에 담겨진 나베가 보글보글 끓었다. 우리는 매실 과실주가 담긴 잔을 매만졌다.
안에 있던 커다란 얼음이 차갑게 녹아내렸다.
우리와 건우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바글바글. 맛깔스러운 소리와 달달한 매실의 향기가 두 사람을 적셨다.
은은한 불빛을 타고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허공을 흩날리는 밤풍경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테이블에 꼬치가 올라왔다.
“드세요. 맛있겠다.”
우리가 건우에게 꼬치를 내밀었다.
“맛있겠네요.”
“여기가 되게 유명하대요. 텔레비전에도 나왔고.”
“매일 지나다녔는데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건우의 앞접시에 꼬치를 내려놨다. 건우는 먹음직스러운 꼬치보다는 손목시계만을 바라보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노파를 만나려면 족히 세 시간은 남았다.
평온했던 건우의 눈빛은 흔들렸고 떨림은 강해졌다.
“이제는 계속 발견하실 걸요. 맛있는 꼬치 맛도 떠오르고.”
“…….”
“보통 한 번 발견하면 눈에 밟히잖아요. 관심이랄까.”
우리가 말끝을 흐렸다. 보이지 않았던 간판이 잘 보이듯. 길에서 흐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듯.
우리는 캄캄하고도 축축한 터널을 지나던 건우가 조금씩 일상을 발견해내길 바랐다.
곳곳에 녹은 작은 즐거움을.
“그럼 꼬치 건배라도 할까요.”
조용해진 테이블의 분위기를 털어내려 우리는 서둘러 꼬치를 들었다.
얼결에 건우도 접시에 있던 꼬치를 들었다. 두 사람의 꼬치가 살포시 부딪혔다.
“건배.”
진지한 우리의 말에 건우가 피식 웃었다. 꼬치 건배라니. 건우를 보던 우리가 힘차게 꼬치를 베어 먹었다.
꼬치가 머금은 숯불 향이 입안을 돌았다. 쫀득쫀득한 염통이 잘게 부서졌다.
“……건배.”
뒤늦게 속삭이듯 말하던 건우가 꼬치에 있던 가슴살을 베어 물었다. 적당하게 간이 된 가슴살이 맛있었다.
건우는 사케가 든 술잔을 들었다. 술잔을 타고 흘러내린 사케가 밑에 받쳐둔 그릇 위로 톡 떨어졌다.
건우가 입을 축였다. 입에 번지는 말끔한 맛이 걱정됐던 건우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는 조심스럽게 술잔을 내려놨다. 맑은 술이 살짝 흔들리다가 이내 멈췄다.
건우의 입술을 비집고 작은 숨이 흘러내렸다.
“긴장되는군요.”
잔을 보던 건우가 우리를 보고는 말했다. 덤덤한 얼굴에 숨겼던 진심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테이블을 떠돌았다.
“민우는 날 싫어했습니다.”
“설마요.”
“아버지가 제게만 애정을 쏟으셨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죠.”
묵혔던 과거가 건우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해묵어 꺼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었다.
그런데 바보처럼 그 말이 흐르고 있었다. 건우는 모두 술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맑은 술 한 모금에 취해 제멋대로 술주정을 해대고 있는 건지도.
“사고 전날에 민우하고 크게 다퉜습니다.”
“…….”
“나는 삐뚤어지는 동생을 보기 싫었고 민우는 애정을 전부 뺏은 내가 싫었겠죠.”
건우는 바람 빠지듯 웃었다. 썩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쓴웃음은 건우의 얼굴을 빠르게 적셔나갔다.
“나 때문이었습니다.”
“뭐…… 가요.”
“평소라면 밖으로 나돌 녀석이었는데……. 내가 떠민 겁니다. 그 불길로.”
잔을 잡은 건우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후회는 여전히 건우의 심장을 쥐어 뜯어댔다.
다투지 않았더라면. 그날 거기에 가지 말라고 말렸더라면. 그럼…… 달라졌을까.
숱한 가정은 수도 없이 건우를 무너지게 했다. 훌쩍 지나버린 시간 속에서도.
“그래서 무섭습니다.”
덤덤한 건우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애달파보였다.
“마지막 순간도 날 미워했을까봐.”
건우의 미소는 썼다. 말없이 건우를 바라보던 우리가 술잔을 내밀었다.
“저희 건배하죠.”
우리는 힘차게 말했다. 우리의 잔에 있던 얼음은 죽죽 녹아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잔을 잡은 우리는 다부진 얼굴이었다.
우리는 위로의 말 대신 건배를 택했다.
괜히 어설픈 위로가 건우에게 큰 생채기를 남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보다 힘든 사람이 많다는 말. 단순한 위로의 말. 죽을힘으로 살라는 말. 위로의 가면을 쓴 말들은 때로 침묵보다 아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담담한 건배가 오히려 건우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던 건우가 술잔을 들었다.
“건배!”
“……건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부딪혔다. 쓰고도 단 술은 두 사람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두 사람은 금세 일상적인 대화로 주제를 돌렸다. 적당히 배를 채우면서 조금이라도 그날의 화재를 잊기로 한 것이었다.
한참 말을 주고받던 건우가 손목에 있던 시계를 봤다.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벙긋 미소를 머금으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지만 노파와 마주할 시간이 우리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고통이 있을지는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죠.”
“네. 차장님. 저희 가요.”
펄펄 눈이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던 건우와 우리는 나란히 선술집을 나섰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직접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싫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도망쳐도 같은 문제는 다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