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화. 난데없이 집에서 쫓겨나면
또박또박. 연애한다는 말을 내뱉은 우리를 바라보던 미순은 눈만 껌뻑거렸다.
상황이 빠르게 파악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사귄다는 거는 교제를 하고 있다는…… 뭐?
뭐!
우리의 말을 곱씹던 미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니까 16층 바나나 총각하고 너하고?”
우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삽시간에 어색한 기류가 방안을 적셨다. 어찌됐든 등짝 스매싱이나 옷걸이를 날린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오래 된 건 아니고. 그렇게 됐어.”
우리가 민망하다는 듯 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미순의 입술 사이로 작은 탄식이 흘렀다.
거칠었던 미순의 전투력도 금세 상실됐다. 미순의 동공은 정처 없이 떠돌았다.
옷걸이가 정확히 목표물에 적중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거실에서 봐요.”
미순은 어색한 미소를 날리면서 바닥에 있던 옷걸이를 주웠다.
불과 몇 초전까지만 해도 든든해보였던 옷걸이는 초라하게만 보였다.
“어머! 지저분하게…….”
바닥에 널브러진 옷걸이를 주운 미순은 꼭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보였다. 맹렬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미순은 옷걸이를 옷장에 걸어두고는 방을 나섰다.
물론 방문을 살짝 열어둔 채로.
그제야 우리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숨이 흘렀다. 불안한 기운을 품은 숨결은 미세하게 떨렸다.
잔뜩 얼어붙었던 우리의 심장은 여전히 벌렁거렸다. 쉬이 진정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연애 선전 포고라니.
자신도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이었다.
역시 인생은 제 뜻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팔은 괜찮습니까.”
건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차장님은요. 다친 데는.”
“없습니다.”
“그래도 죄송해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우리가 건우를 살폈다. 옷걸이에 화끈대는 팔만큼 건우의 등짝도 아릴 것이었다.
호랑이가 있는 굴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였다.
“이제 어쩌죠.”
하지만 우리는 도대체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운명을 맞서겠다는 말도 웃겼고 결사반대를 하더라도 연애에 매진하겠다는 답도 그리 좋은 대답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설득해야죠.”
“분명히 완전 반대하실 텐데.”
말끝을 흐리던 우리가 입술을 자그시 깨물었다. 견우와 직녀처럼 반대에 부딪혀 애절하게 서로를 그리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투덜거림마저 흘렀다.
왜 하필 견우와 건우는 이름이 비슷할까.
괜히 신경 쓰이게.
건우를 보던 우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건우의 팔까지 다친 것을 보았으니, 미순의 연애 반대는 더 확고해졌을 것이었다.
불길한 일이 벌써부터 벌어지고 있다고 팔짝 뛸 지도 몰랐다.
‘그 이상한 사주만 아니었다면…….’
여유로운 역술가의 얼굴을 떠올리던 우리의 눈빛이 순간 번뜩거렸다.
“……!”
건우를 바라보던 우리가 핸드백을 뒤적거렸다.
갑갑한 상황을 헤쳐 나갈 묘책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좋은 수라도 있습니까.”
“네. 확실히 있을 것 같아요.”
우리의 얼굴에 빙글 미소가 흘렀다.
대단한 협상가처럼 최고의 협상을 끌어낼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낸 우리가 건우의 팔을 잡았다.
“저희 가요.”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부딪혀봐야죠. 피할 수 없어도 도망이 최고기는 하지만.”
“오늘은 부딪혀봅시다.”
건우는 우리의 뒷말을 이었다. 단단히 마음을 잡은 두 사람은 거실로 나왔다.
미순은 꺼진 텔레비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라도 잠긴 모양새였다.
우리와 건우는 나란히 미순과 마주앉았다.
‘왜 하필.’
미순의 시선은 건우의 다친 팔에 머물렀다.
건우가 다친 이유를 충분히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불화와 화합을 결정짓는 정상회담만큼 세 사람 사이에도 극한 긴장이 돌았다.
“우선은 마실 거라도 한 잔 해요.”
적막을 깨고 미순은 테이블에 있던 바나나우유를 건우의 쪽으로 밀었다.
신물이 날 만큼 끝없이 이어지는 바나나 잔치였다.
나름의 손님 대접이라면서 미순은 손수 작은 빨대까지 꽂아주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건우가 술잔이라도 비우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바나나 우유를 마셨다.
뭐든 넙죽 잘 먹는 모습으로 플러스 점수를 얻을 요량이었다.
건우의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코끝을 찌르는 달콤한 바나나 향기에 우리도 바나나 우유를 마셨다.
‘연애도 빨대 꽂는 것만큼 쉬우면 얼마나 좋아.’
우리는 콕, 부드럽게 입구로 들어가는 빨대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타는 속을 달래려 세 사람은 벌컥벌컥 바나나 우유를 마셨다.
그것도, 한 마디 말도 없이.
서로의 눈치만 보면서 우유를 마시던 세 사람은 동시에 단지 모양의 플라스틱 용기를 내려놨다.
“아까는 미안해요. 잘못 오해해서.”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조심스러운 말들이 거실을 부유하고 있었다. 건우는 바짝 마음을 조인 채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건우의 여유 없는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혈기 넘치면 그럴 수도 있죠.”
“그게…….”
“그래도 장소만 지켰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죠.”
미순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우리의 가슴을 탐했던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매몰찬 눈빛이었다.
“그게 아니고 단추가 벌어져서…….”
“너 말고 1601호 총각이랑 얘기하고 싶은데.”
미순은 우리의 말을 단칼에 싹둑 잘라버리고는 말했다. 거실의 분위기는 싸늘하기만 했다.
“괜히 신경을 쓰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저엉말!”
벙긋 미소를 머금은 미순의 얼굴은 조금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과 사귀지 말라는 역술가의 말이 미순의 머릿속을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건우의 다친 팔을 바라보던 미순이 타는 속을 달래려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하지만 답답한 미순의 속은 뚫어질 줄을 몰랐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사주 때문에.’
불만과 걱정이 뒤범벅된 얼굴로 우리는 아랫입술을 자그시 깨물었다.
“거두절미하고 물을게요.”
“예.”
“사실인가요. 우리 애하고 사귄다는 말.”
미순은 단단히 마음을 잡고는 말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모진 말도 뱉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순을 바라보는 건우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고요하게 맞붙은 건우와 미순은 물러설 기색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입니다.”
“…….”
“걱정하시는 부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미순은 뜨끔했다. 연애 결사반대와 사주 결과라는 미순의 카드를 건우가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순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미안해요. 내가 걱정되는 부분도 있고, 워낙 갑작스럽기도 하고.”
“충분히 불편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환영하기 어렵기는 하네요.”
우리의 간절한 눈길을 뿌리치면서 미순은 독하게 말했다.
역술가의 말만 아니었더라면, 단숨에 승낙했을 텐데.
하필 우리와 가깝게 붙어있는 직장상사라니.
미순은 그저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단단히 다물어졌던 건우의 입술이 떨어졌다.
“저는 이 연애, 계속 해야겠습니다.”
건우의 다부진 눈빛에 미순을 할 말을 잃었다. 건우의 호방한 기운에 눌려버린 것이었다. 미순은 한껏 눈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가만히 쳐다봤다.
‘내 명함인데 받아둬.’
‘전화번호는 가지고 있어서 그쪽으로 연락드릴게요.’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 거야. 조만간.’
역술가의 말이 용하게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우리는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탁! 용맹한 소리가 천천히 번져나갔다.
“궁합은 좋대!”
우리가 미순의 앞으로 명함을 들이밀었다.
“직접 가서 봤는데 괜찮다더라.”
우리의 입에서 술술 거짓말이 흘렀다. 미순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날리면서 명함을 집어 들었다.
이름이나 주소를 봐서는 틀림없이 우리의 사주를 봤던 점집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때는 가까운 사람은…….”
“그 박한 사주를 차장님 사주가 풀어준대. 그랬죠?”
영험한 내용이라도 들은 것처럼 궁합을 포장하던 우리가 건우를 툭 쳤다.
거짓말에 일조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예.”
건우는 우리의 재촉에 짤막하게 대답했다.
미순의 의심은 제법 연해졌지만 작은 의심은 여전히 미순의 눈빛을 떠돌았다.
미순을 보던 우리가 걱정스럽게 건우를 쳐다봤다. 미순이 역술가에게 전화라도 하는 날에는 거짓말이 들통 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침묵. 숨이 막힐 정도로 묵직한 고요였다.
우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명함을 바라보는 미순의 입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미순이 그냥 넘어 가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일단 알았어.”
“어…… 어?”
“생각 좀 해볼게.”
미순의 입술 사이로 상당히 긍정적인 대답이 흘렀다.
칙칙했던 우리의 낯빛은 금세 해사해졌다.
“생각이고 말고 할 게 없다니까. 궁합, 최고래.”
강력한 한방을 위해 우리가 말을 덧붙였다.
“그럴 수가 있나.”
“당연하지. 딸 좀 믿어, 엄마.”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나만큼 믿을 사람이 어디 있다고.”
“너만큼 못 믿을 사람도 없지. 입만 살아서는.”
우리의 말에 미순은 코웃음을 쳤다.
최고의 궁합이라고 떠드는 모습에 수그러들었던 의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중에 또 봬요.”
“예. 또 뵙겠습니다.”
미순의 끝인사에 답례하듯 건우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던 미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에는 명함을, 또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채로.
우리의 눈빛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설핏 불길한 기운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어디 가려고.”
우리가 황급히 미순의 앞을 막아서면서 물었다.
“물어보려고 그런다, 왜.”
“뭘 물어봐.”
“궁합. 궁금하잖아.”
미순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우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거짓말이 들통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 전화하면 좀 그런가.”
“당연하지. 되게 바쁜 것 같던데!”
“얘는. 그래도 전화 받을 시간도 없으려고. 돈이 얼만데.”
“나중에 해. 나중에.”
우리는 미순의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었다. 역술가에게 전화를 걸려는 미순을 방해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우리의 요란한 사투는 무지무지한 미순의 힘에 제압됐다.
미순은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직 조용한 통화를 위하여.
“차장님은 올라가세요. 제가 상황 좀 지켜보고 보고 드릴게요.”
“옆에 있겠습니다.”
“아니에요. 또 맞을지도 몰라요.”
“괜찮습니다.”
“아뇨, 아뇨. 가세요. 만약에 혼날 것 같으면 저도 차장님 집으로 도망칠게요.”
우리의 손에 등을 떠밀려 건우는 현관문을 나섰다.
입술을 꾹 깨물면서 비장한 눈빛을 날린 우리가 문을 닫았다.
대차게 침을 삼킨 우리는 발꿈치를 들고는 안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우리는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안방의 방문에 바투 붙어 귀를 댔다.
웅얼거리는 소리 밖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불안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옷걸이가 아니라 옷장이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우리. 무조건 모르쇠로 나가는 거야.’
우리가 굳건하게 마음을 잡은 순간이었다. 웅웅거리는 소리조차 사라졌다.
방에 있던 미순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우리는 짐짓 뒤로 물러났다.
우리는 침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로 미순을 봤다.
긴장한 탓에 얼어붙은 우리는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미순은 명함을 꽉 쥐고 있었다. 이로 입술 안쪽의 살을 깨문 우리는 미순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놈의 개딸…….”
대치하듯 서 있던 미순이 제일 먼저 꺼낸 말이었다.
“너……!”
우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강렬하고도 매운 미순의 손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곧 등을 얼얼하게 만들 스매싱이 날아들 것이었다.
미순은 잔뜩 얼어붙은 우리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
기특하다는 손길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부드러운 손길에 우리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껌뻑거렸다.
불길에 사로잡혔던 미순의 기세는 유순해져 있었다.
다행히도 옷장을 던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확실히 어렸을 때부터 얘가 운은 좋았다니까.”
“그럼. 나 운 좋지.”
“그러니까. 윗집 총각이 네 살(殺)을 풀어줄 귀인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우리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낯빛이 스쳤다.
“이 살 말고 살(殺)?”
우리는 농담이라도 하듯 제 살을 살짝 꼬집으면서 말했다.
“그래. 네 살이다, 네 살.”
미순이 우리의 말을 가볍게 맞받아쳤다. 미순의 얼굴빛은 눈에 띌 정도로 환해져 있었다.
인생의 진리를 통달하기라도 한 것처럼 인자한 미소까지 날리는 미순의 모습이 우리는 도리어 무서울 지경이었다.
대체 뭐라고 했길래.
“점쟁이가 자기도 놀랬대. 가까운 사람 중에 네 나쁜 기운을 풀어줄 귀인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흥분한 미순은 침까지 튀기면서 열변을 토해냈다.
역술가는 건우가 우리의 액운을 막아주고 있다고 했다. 둘은 잘 어울리니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억지로 붙은 인연인데 궁합이 나올 수가 있나.’
그날. 역술가에게서 우리가 들은 말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단칼에 무라도 잘라내듯 역술가는 우리와 건우의 궁합에 혀를 내둘렀었다.
그런데 건우가 귀인이라니.
우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왜 거짓말을. 헷갈렸나?’
역술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위기를 넘겼다는 기쁨과 묘한 의구심이 우리를 맴돌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역술가의 말에 미순이 충분히 안심했다는 것이었다.
미순은 돌덩이처럼 마음을 짓누르던 고민을 벗어던진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이제 좀 안심이네. 찰떡궁합이라니.”
미순은 역술가의 말을 곱씹었다. 낭랑한 미순의 말에 우리는 하마터면 놀란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낼 뻔했다.
찰떡궁합.
그래. 어쩌면 찰진 궁합이기는 하지.
“그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래도.”
메마른 우리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네가 엄마의 마음을 알겠니.”
“그래도 사주 때문에 연애 반대라니. 정말 그건 아니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게다가 바나나 총각 팔도 다쳤고. 어머! 그거 살(殺)을 풀어주느라 그런 건가. 어떡하니.”
건우의 다친 팔을 떠올리던 미순은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의 액운을 막아내느라 건우가 다쳤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위해 온갖 풍파를 막는 바나나 서방이라니.
미순의 눈빛에는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가득 녹아있었다.
“그러니까 구박 그만 하고 잘 좀 해줘.”
상황을 간파한 우리가 미순의 두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아련한 눈빛까지 장착한 채로.
“얼마나 고생하겠어. 내 살 푸느라.”
“그러니까. 면박만 줬는데 어쩌니.”
“사랑과 애정 듬뿍. 그거면 끝이지.”
눈에 잔뜩 힘을 주고는 우리는 미순을 바라봤다. 건우에 대한 미순의 애정을 끌어올릴 유일한 기회였다.
우리의 말에 충분히 동의한다는 것처럼 미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순은 열심히 사랑과 애정이라는 말을 되새겼다.
“우선은 선물부터 보내야겠네. 애정에 선물 만 한 게 없으니까.”
“아니. 선물은…….”
“식탁에 바나나가 있을 테니까.”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미순은 부랴부랴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있던 바나나를 바리바리 싸서는 우리의 손에 들려주었다.
바나나 파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엄마. 이러다가 차장님 얼굴 샛노래지겠어.’
미순의 손에 떠밀려 우리는 과한 애정을 담은 바나나를 품에 안았다.
“가서 주고 와. 아니다. 데이트도 좀 하고.”
“갑자기?”
“무조건 놀고 와. 늦게 들어오고.”
선물 공세와 함께 밀려든 데이트 재촉에 우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덜렁 내쫓기듯 현관문을 나온 우리는 당혹스러웠다.
슬리퍼 신고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야!
“엄마.”
우리는 열심히 초인종을 눌러댔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나 쓰레빠야.”
삼선슬리퍼에 안착한 발가락들만 찬 기운에 꼼지락거렸다.
번호키도 먹히지 않았고 미순은 메시지에도 답장이 없었다.
“발이 쓰레기가 되어가고 있어…… 엄마.”
스산한 날씨에 우리의 발은 금세 차가워졌다.
달리 방도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결국 건우의 집을 습격했다.
우리의 선택지에 남은 유일한 대피소였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