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화. 복분자와 장어가 만났을 때
갑작스러운 우리의 말에 미순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모두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면 집에는 우리와 건우만 덜렁 남게 될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사람이 가까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뭘 믿고 두 사람만 두고 나갈 수 있을까.
“우리 집?”
“응. 우리 집.”
당황한 미순의 질문에도 우리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잠시만요.”
자신을 바라보는 건우의 눈빛에 미순은 살짝 손을 들고는 우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빙긋 인위적인 미소까지 짜내면서.
미순의 손에 끌려 우리는 집 한 구석으로 끌려갔다.
“집은 무슨 집이야. 나가서 해.”
“왜.”
“왜기는. 얘가 제 정신이 아니네.”
너무도 담담한 우리의 표정에 미순의 눈만 커졌다.
“집이 조용하잖아. 어차피 점심도 먹어야하고. 밖에서 돈 쓰는 것보다는 집에서 대접하는 게 낫지.”
“돈 줄 테니까 밖에서 대접해.”
“어차피 일하려면 다시 들어와야 하는데. 차장님 집에서 하는 것보다는 우리 집이 낫잖아.”
“얘가 미쳤네. 어디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거기는 절대 안 돼.”
미순은 꼭 나쁜 친구와 어울려 다니지 말라는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순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거실을 떠도는 목소리라곤 제 목소리뿐이라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미순은 간신히 높아진 목소리를 눌렀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얼굴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었다.
얼마나 봤다고……. 흉흉한 세상 속에서 느슨히 긴장을 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돌려 건우를 보던 미순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바나나 총각도 절대로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남자는 다 늑대야.”
“아니. 늑대라도 잡아먹을 시간이 있어야 잡아먹지. 엄마도 금방 올 거잖아.”
“금방 오기는 할 거지.”
“게다가 차장님 지금 손도 다쳤는데 어떻게 잡아먹어.”
“그렇기는 한데…….”
“너무 나간 거야. 엄마.”
우리는 미순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복작거렸던 반상회까지 참여했으니 그 보상으로 둘만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일만 끝내고 바로 보내는 걸로 할게. 그럼 됐지?”
우리는 반쯤 넘어온 미순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미순은 정말 묘하게 설득되고 있었다.
조용히 일을 하겠다는데 매몰차게 시끌시끌한 카페로 마구 내몰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건우를 덜렁 세워두고 속닥거리고 있는 상황도 몹시 마음에 걸렸다.
물론 우리가 건우의 집을 가는 것도 결사반대였다.
우리의 말대로 집이 가장 안전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밥만 먹고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순은 길어지는 수다는 적당히 끊을 생각이었다.
늑대 소굴에 남을 우리를 위해서.
“진짜 점심만 먹고 일만 하고. 오케이?”
우리는 간절한 눈빛을 미순에게 쏘아댔다. 심각한 얼굴로 우리와 건우를 번갈아 쳐다보던 미순은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식당 예약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숨을 내뱉던 미순과 건우의 눈이 마주쳤다.
건우는 편히 말하라는 것처럼 약간 고개를 숙이고는 인사를 했다.
“금방 온다.”
“알았어요.”
결국 미순은 우리의 말에 넘어갔다. 미순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면서 외투를 챙겼다.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으면 확! 거기 발로 차버려. 알았어?”
“알았어.”
“무슨 일 있음 전화하고.”
미순은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암튼 불편하게. 아주 개딸이라니까.”
구수한 욕설과 함께. 미순의 말에 우리는 넘실거리는 웃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건우와 단둘이 있을 생각만으로도 우리의 입꼬리는 자꾸만 씰룩거렸기 때문이었다.
“편히 있다가 가요.”
“예.”
“금방 올 거라서. 정말로 빨리.”
미순은 뒷말을 꾹 눌러 말했다. 일종의 경고였다.
늑대로 변신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
마지막까지 폭풍 경계의 눈빛을 날리면서 미순은 집을 나섰다.
활짝 열렸던 현관문이 닫혔다. 밖에서 밀려들던 차가운 기운만 옅게 현관을 돌았다.
모두가 나갔다. 북적북적하던 우리의 집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바람만이 간헐적으로 창문을 두드려대고 있을 뿐이었다.
현관문을 바라보던 우리가 고개를 돌렸다. 건우의 눈빛은 힘 있게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고프시죠. 점심 해드릴게요.”
우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매를 말아 올렸다.
“솜씨 발휘 좀 해보겠습니다.”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진짜 놀라실 걸요. 아. 이러다가 눈물 흘리시면 어쩌지.”
우리가 계속 흘러내리는 소매를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던 건우는 우리의 소매 끝을 잡았다.
건우는 한 손으로 착착 소매를 접어주었다.
“그러게.”
“…….”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건우의 손은 우리의 살결에 스쳤다가 떨어졌다. 단정하게 접힌 소매를 바라보던 건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건우의 깊은 눈길에는 본능과 상대를 홀리는 기운이 뒤범벅돼 있었다.
반쯤 건우의 눈빛에 홀려든 우리는 천천히 침만 삼켰다.
“감당…… 못할 것도 없죠.”
폭풍처럼 흔들렸던 마음을 숨기면서 우리는 괜스레 자신만만하다는 듯 허리춤에 손을 댔다.
맛있는 음식으로 반드시 건우를 울리고 말겠다는 다부진 몸짓이었다.
“그럼 편히 계세요.”
우리는 건우의 널찍한 등을 힘껏 밀었다. 우리의 채근에 건우는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소파에 앉은 건우를 보던 우리가 손을 털면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우리는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힘차게 냉장고를 열었다.
냉동실에 있는 장어가 눈에 들어왔다. 미순이 홈쇼핑에서 큰맘 먹고 샀다던 장어였다.
장어구이, 계란말이, 갖가지 반찬까지.
우리는 식탁에 올릴 음식을 생각하는데 열을 올렸다. 조리대는 온갖 재료로 가득 찼다.
요란스러운 소리에 안절부절 못하던 건우가 자리를 박차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도울 거라도 없습니까.”
“없어요. 쉬세요. 그냥, 편히…… 악!”
우리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쳤던 장어를 프라이팬에 놓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물기를 충분히 빼지 못해 기름이 사방으로 튀었기 때문이었다.
기름은 인덕션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건우가 급히 인덕션을 껐다.
“괜찮습니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건우는 우리를 살폈다.
“물기를 잘 없애야 됐는데 정신이…….”
“같이 하죠.”
“아뇨! 쉬세요. 편히.”
“유명한 셰프 옆에는 꼭, 보조가 있잖습니까.”
건우가 한 쪽 팔을 걷어붙이면서 덤덤히 말했다.
“나처럼 유능한 보조로.”
웃음기 하나 없는 농담을 능청스럽게 덧붙이면서.
“아…… 유능한. 네…… 뭐.”
“믿을 수 없다는 눈치네.”
“요리까지 잘하시면 반칙이죠.”
“그럼, 반칙 좀 하겠습니다.”
건우는 키친타월로 능숙하게 장어의 물기를 제거했다. 기름이 둘러진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장어를 구워내는 건우를 보면서 우리는 생각했다.
인생은 불공평하다고.
요리까지 잘하면 어쩌라고.
이 남자는 정말로 대체 못하는 것이 뭘까.
“양념장은 꼭…….”
우리가 슬그머니 양념장을 내밀었다. 말끝을 흐리는 우리의 숨은 의미를 건우는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양념장에 적힌 말이 건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복분자 고추장 양념]
장어와 복분자. 그야말로 불끈 양대 산맥의 거룩한 만남이었다.
건우는 괜스레 분주한 손길로 쌀을 씻는 우리를 바라봤다.
눈에 보일 만큼 우리는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바람 빠지듯 웃던 건우가 맛깔스럽게 장어구이를 완성했다.
전기밥솥은 칙칙 소리를 내면서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건우의 장어구이에, 따끈한 밥까지 차례로 식탁을 채웠다. 두 사람의 손끝에서 금세 정갈한 점심식사가 준비됐다.
서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고슬고슬한 서로의 밥그릇에 장어를 올려주었다.
“맛있습니다.”
밥 한 숟갈을 먹은 건우가 우리에게 말했다.
건우는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란말이에 대한 칭찬을 끝없이 쏟아냈다.
요리에 쏟았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두 사람은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워냈다.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까지 마친 우리는 어색하게 집을 둘러봤다. 점심을 먹고 무슨 일을 할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덜렁 거실에 선 채로 집을 구경하고 있는 건우를 바라봤다.
“고우리씨 방은 어딥니까.”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우리는 순순히 방을 안내하고 있었다.
“지저분하죠.”
“깔끔합니다.”
“깔끔하다기에는…….”
우리가 방을 둘러봤다. 담담히 던졌던 건우의 칭찬과는 달리 우리의 방은 너저분했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우리는 침대에 있던 양말을 주워 급히 구석에 던졌다.
급한 대로 은폐 작전을 펼칠 작정이었다.
건우가 책상에 다가섰다. 벽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빼곡하게 소설 설정들이 적혀있었다.
인물, 기본 배경, 주요 사건.
어쩌다 토끼의 광적인 팬인 건우를 잡아끌기에는 충분히 매력적인 내용이었다. 포스트잇에 적힌 글자를 읽던 건우는 우리가 마냥 멋지게만 보였다.
“제가 아직 아날로그 방식이라서.”
우리는 포스트잇을 살짝 가리키면서 말했다. 건우의 옆에 다가선 우리가 슬쩍 책상에 있던 쓰레기들을 치웠다.
은밀하고도 빠른 손길이었다.
“그냥. 글 쓸 때마다 보려고 적어뒀어요.”
“멋있네요.”
“그걸 노리기도 했고.”
포스트잇을 바라보던 우리가 팔짱을 꼈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포스트잇을 보던 우리가 건우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멋있어 보이기.”
우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물들었다. 건우는 다정한 눈길로 방을 둘러봤다.
졸업사진이나 병에 담긴 말린꽃처럼 작은 물건 속에 담긴 우리의 시간이 참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의자에 앉은 채로 건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용한 집에, 장어까지 먹여서 그런가. 매일 보는데 오늘은 어색해 죽겠네.’
주변을 돌던 건우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시작인가.’
마음을 단단하게 잡은 우리가 의자 손잡이를 잡은 채로 건우를 봤다.
우리가 살짝 입술을 매만졌다. 촉촉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건우의 입술이 떨어졌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목을 내빼고는 건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뭐!’
우리의 눈빛은 반짝거렸고 입술은 벌써 건우에게로 마중을 나가고 있었다.
장어와 복분자의 놀라운 조합이 빛을 발휘할 순간이라고 우리는 확신했다.
“나갈까요.”
“네…… 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우리의 목소리가 삐끗했다.
기껏 복분자 장어까지 먹였더니!
“천천히 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
“엄마도 아직 안 오셨고, 밖은 춥고. 안은 또 후끈…… 아니, 뜨끈하잖아요.”
횡설수설 여러 가지 말이 나왔다. 우리의 입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물거리는 우리의 얼굴을 건우는 가만히 바라봤다.
유난히도 커다란 손짓과 정처 없이 방황하는 눈빛이 우리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알게 했다.
“덥기는 하죠.”
건우가 우리가 앉은 의자의 손잡이를 당겼다.
박력 있는 손길에 우리의 의자는 속절없이 건우의 쪽으로 굴러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자신 있습니까.”
“뭘요.”
“나, 감당할 자신.”
나직한 건우의 목소리가 우리의 입술에 깊숙이 녹아들었다.
야릇하고도 미묘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에 돌았다.
건우의 뜨거운 시선이 넘실거렸다.
두 사람의 입술을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보였다.
열기를 품은 숨결이 서로의 입술 위로 녹았다.
“그럼요. 차장님.”
“그래요?”
“당연히 감당할 수 있죠.”
녹아내릴 듯 아득해지던 우리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감당할 수 없었으면 아마 장어는 꺼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랬습니까.”
“네. 일종의 빅 픽처였는데. 되게 큰 그림.”
대답하는 우리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자신 있으면.”
건우와 우리의 아랫입술이 맞닿았다. 말캉한 감촉이 우리의 입술을 타고 천천히 번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건우의 숨결이 녹아들었다. 우리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벌렁거리는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한 번.”
쿵쿵, 쿵쿵, 쿵쾅.
우리의 심장 소리는 끝없이 커졌다.
금세 정신이 아찔해졌다.
“……잘 버텨 봐요.”
건우가 우리의 숨을 삼켰다. 건우는 우리에게 깊숙이 밀려들었다.
커다란 건우의 손은 우리의 두 볼을 품었다.
살결을 타고 건우의 온기가 스몄다. 열기가 섞인 숨소리가 타액과 함께 뒤섞였다.
두 사람의 숨결은 거칠어졌고 온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건우의 팔을 꼭 잡은 우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달뜬 숨이 우리에게 깊숙이 넘실거렸다.
건우가 우리의 윗입술을 자그시 깨물었다.
온 감각이 예민하게 되살아났다.
번개라도 오른 것처럼 우리의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아.”
우리의 뜨거운 숨이 건우를 자극했다.
건우는 원초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성을 갉는 욕구를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건우의 목울대가 위로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로의 향기를 품은 끈적끈적한 숨은 끝없이 뒤엉켰다.
건우의 입술은 우리의 턱선을 타고 미끄러졌다.
뜨겁고 단, 우리의 향기를 건우는 온전히 삼켜버릴 기세였다.
매끄러운 목덜미에 건우가 입술을 묻었다. 건우의 숨결이 닿는 부분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우리의 고개가 살짝 뒤로 젖혀졌다. 간질거리는 기운에 우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목덜미를 타고 번지는 건우의 숨소리가 제 심장을 살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우리가 두 손으로 건우의 볼을 감쌌다.
건우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정말, 당장.
“차…… 차장님.”
우리는 가쁜 숨을 삼키고는 건우를 불렀다.
빨개진 우리의 두 볼에는 연한 복숭앗빛이 돌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사이에는 거친 숨소리만 차곡차곡 쌓여갔다.
“위로 올라갈까요.”
“인사도 없이 가면 이상할 것 같습니다.”
“그죠. 좀 수상할 수도 있기는 할 것 같은데. 엄마가 생각보다 빨리 올까봐. 괜히 불안해서.”
“이제야 좀 불안합니까.”
우리가 고개를 약간 끄덕거렸다. 귀신의 집이나 롤러코스터보다 스릴이 넘치는 현장이었다.
격한 입맞춤에 취해 미순의 등장도 눈치 채지 못할지도 몰랐다.
뒤늦은 불안함에 우리의 머릿속이 복작거렸다.
“난 멈추기가 힘들 것 같은데.”
“…….”
“먹은 게 꽤 많아서.”
우리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면서 복분자 양념을 내밀었던 자신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변태적인 욕망이 불안을 이겼었는데.
“대답해줘야죠.”
“무슨 대답이요?”
매혹적인 건우의 눈빛에 우리가 마른 침을 삼켰다.
무시무시한 건우의 색정적인 기운에 우리는 쭈그러들고 있었다.
마치 불판에 구워진 오징어처럼.
건우의 손길이 우리의 목선을 타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오늘 만들어준 점심에 대한 대답.”
톡, 첫 단추가 힘없이 열렸다.
“눈치 채셨어요?”
우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의 앙큼한 생각을 건우가 진즉에 간파했을 거라고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건우의 손길에 단추가 다시 하나 더 톡, 쉬이 열렸다.
“예.”
옅게 번지는 건우의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우리의 심장은 여전히 펄떡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깊은 건우의 눈동자에 반쯤 빠져들었다.
본능은 이성을 쉬지 않고 잡아먹었다.
이성과 욕망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근데 그거 압니까.”
“뭘…….”
“장어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참기 힘듭니다.”
나직이 번지는 건우의 말에 우리의 눈길은 본능적으로 아래로 향했다.
모든 힘의 근원지로.
“……!”
선명한 건우의 힘에 우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건우의 손길이 우리의 가슴팍을 살짝 스쳤다.
살결에 번지는 보드라운 감촉에 놀란 우리가 반사적으로 건우의 손을 잡아버렸다.
“아…….”
우리의 입술 사이로 짙은 탄식이 흘렀다. 잠깐의 실수였다.
손바닥을 돌던 건우의 온기가 희미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우리가 뒤를 돌았다.
방안의 모든 풍경이 흐릿해졌다. 우리는 울상인 채로 앞을 봤다.
순식간에 건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날아든 거무스름한 재가 우리의 손등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재를 집은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와버린 것이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건우의 기억 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