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화. 수상한 바나나 커플
바짝 다가선 역술가는 우리의 뒤를 빤히 쳐다봤다.
역술가의 눈에는 우리의 주변을 돌던 민우의 영혼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자기 주변 쫓아다니는 녀석 말이야. 분명히 직접 봤을 텐데.”
역술의 말에 우리는 민우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 있던 민우가.
괜스레 목덜미가 선득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스스한 냉기가 등을 타고 흘렀다.
우리가 주위를 살펴봤지만 점집 풍경만 눈에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원귀는 아니야.”
“나쁜 귀신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나쁜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어. 아직은.”
“그럼…….”
“뭐기는. 두 사람 인연을 묶을 귀신이지.”
역술가가 건우가 나간 곳과 우리를 검지로 콕 집고는 말했다.
“둘이 인연이 된 것도 그 녀석 덕분이야. 지금은 간신히 실 두 개를 잡고 있어서 괜찮지만. 저 녀석이 놓으면 그날로 둘은 끝장인 거야.”
“그럴 수가 있나요. 감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대신 많이 싸우겠지. 내적으로든 외부 환경 때문이든.”
역술가가 우리의 말에 반박하듯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돌려 건우가 나간 곳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 자신이 용기를 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만 같았다.
“어렵겠지만 잘해 봐.”
“…….”
“따로 떨어진 인연의 끈 두 개를 잡고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민우의 영혼을 바라보던 역술가는 그저 대단하다는 감탄사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인연이 될 수 없는 사람을 엮는 일은 정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 영혼이 닳아 없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민우는 두 사람을 잇고 있는 것이었다.
역술가도 민우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두 사람을 연결키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형 때문이라고 대강 짐작했다.
건우는 애당초 여자가 없는 운명이었다. 그 삶이 안타깝게만 보였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쁜 일은 발로 차버리겠다고 생각해.”
역술가가 야무지게 발로 허공을 차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피하지 말고.”
“…….”
“잘 맞서면 좋은 날이 오겠지.”
“그럴까요.”
“자기도 알잖아. 뭐든 돌아보면, 별일 아닌 거.”
역술가의 말은 고요하던 우리의 마음에 작은 파동을 만들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숱하게 했던 고민도 돌아보면 역술가의 말대로 별 것이 아닐지도. 가볍게 웃어 넘어갈 수 있는 시시콜콜한 일이 될지도.
“내 명함인데 받아둬.”
“전화번호는 가지고 있어서 그쪽으로 연락드릴게요.”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 거야. 조만간.”
얼결에 우리는 역술가의 명함을 받았다. 거친 역술가의 성정만큼 명함은 빳빳하기만 했다.
역술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우리는 명함만 빤히 쳐다봤다.
“애인 기다린다. 얼른 가봐.”
역술가는 파리라도 내쫓듯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가 덜렁 손에 있던 명함을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열린 핸드백을 닫은 우리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점집을 나섰다.
역술가의 눈에는 민우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그리 좋나. 형이.”
역술가의 말에 민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좋단다.”
“…….”
“거 지 영혼 사라지고 있는데.”
말을 끝낸 역술가가 혀를 찼다. 걱정스러운 눈빛에도 민우는 절대로 인연의 끈을 놓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나저나 잘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리 열심히 잡고 있는데.”
역술가는 묵직한 숨을 내뱉듯 말했다. 중얼거리듯 내뱉은 역술가의 말에 순식간에 민우의 얼굴에서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사라지면 두 사람의 인연도 끊어질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픈 얼굴로 역술가를 바라보던 민우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역술가의 뒷말은 듣지도 못한 채로 점집을 나와 건우의 옆에 섰다.
옅은 향내가 여전히 우리의 코끝을 맴돌았다. 연한 찬 기운을 품은 바람이 우리의 뺨을 스치면서 지나갔다.
“차장님.”
“예.”
“죄송해요. 불편하셨죠.”
“괜찮습니다.”
건우는 본래대로 돌아왔다. 일말의 흔들거림도 없는 덤덤한 모습이었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뜨겁게 타올랐던 화를 식혀준 것처럼 보였다.
“이러려고 데리고 온 게 아닌데.”
“알고 있습니다.”
“근데 엄마한테 듣는 거하고 직접 듣는 건. 좀 기분이 다르더라고요.”
건우를 보던 우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그냥 확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사납게 달려들던 차가 정말로 잘못된 인연 때문인지.
미순의 말대로 억지로 맺어진 인연인지.
그 인연이 건우와 자신을 힘들게 할 것인지.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날 운명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답을 듣고 싶었다. 질기고도 악독한 운명을 바꿀 방법.
어쩌면 바꿀 방법은 없더라도 한풀이라도 하듯 역술가에게 한탄이라도 뱉어내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여기 온 거. 후회합니까.”
“네. 되게 후회중이에요.”
우리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건우를 봤다. 역술가가 꺼낸 민우에 대한 이야기가 건우의 속을 날카롭게 긁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상처를 냈을지도 몰랐다.
건우는 별다른 말없이 바슬바슬 내리는 눈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건우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담담하고도 고요한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내리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리고도 적적하게 번지는 고요가 두 사람을 진하게 적셨다.
건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상한 소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건우는 부드러이 우리의 말을 잘랐다.
“운명은 늘 바뀌는 법이니까.”
건우가 우리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우의 매혹적인 미소가 찬바람을 타고 흘렀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뒤엉겼다.
단단한 건우의 눈빛은 우리를 다독이고 있었다.
역술가의 말에 하나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말로 다 괜찮을 거라고.
“그죠. 바뀌죠.”
“물론입니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앞을 바라봤다.
흩날리던 눈발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얇은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굵직한 나무 사이로 밀려든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다.
“이리와요.”
건우가 우리의 쪽으로 왼쪽 팔을 내뻗었다.
“일단은…… 추우니까.”
짐짓 말을 뱉은 우리가 건우의 쪽으로 움직였다. 건우는 우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다.
옅은 향내는 사라지고 건우의 향기가 진해졌다.
우리는 건우의 넓은 품에 반쯤 안겨있었다.
소복소복 쌓이는 눈은 소리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가로등의 불빛에 눈은 연한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사뿐히 거리 위에 앉은 눈을 바라보던 우리가 건우를 봤다.
어정쩡하던 우리의 손은 건우의 허리를 둘렀다.
허리를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건우도 우리를 바라봤다.
“배고파요.”
침묵을 뚫고 우리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얼른 맛있는 것 좀 먹어야겠네.”
“그러니까요. 빨리 가야겠어요.”
“갑시다.”
펄펄 내리는 흰 눈 속으로 두 사람은 발을 내딛었다.
건우는 우리가 눈이라도 맞을까. 깁스한 팔을 올려 눈을 막아주었다.
찬바람을 타고 몰아치는 눈발을 헤치고는 두 사람은 앞으로 걸어갔다.
뚜벅뚜벅.
힘차고도 기운차게.
두 사람을 집어삼킬 것처럼 내리는 눈에도 우리는 더는, 두렵지 않았다.
재빨리 운전석의 문을 잡은 우리가 손을 내밀면서 빙긋 웃었다.
우리는 바꾸고 싶었다. 아니. 바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게 운명이든 불운이든.
“운전은 제가 할게요.”
“내가 하죠.”
“눈도 오는데 안전운전 해야죠. 얼른요.”
우리의 재촉에 건우는 차 키를 건넸다. 우리가 차에 타는 순간까지도 건우는 커다란 손으로 눈을 막아주었다.
운전석의 문을 잡은 건우가 약간 허리를 숙였다.
“고우리씨.”
“네?”
“그냥,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싱거우시…….”
싱겁다는 말이 우리의 입술 사이로 흐르려던 순간이었다.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던 건우가 우리의 입술을 삼켰다.
우리의 달콤한 향기를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온기에 녹은 눈 때문에 건우의 손은 약간 차가웠다.
“무슨 말이 있어도 난 계속 해야겠습니다.”
“…….”
“……이 연애.”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건우의 목소리가 녹아들었다. 무른 기운 하나 없는 단단한 말이었다.
뜨겁게 떨어지는 건우의 숨결에 우리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가만히 놔둘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저도.”
다부진 목소리가 우리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절대로 못 놔드려요.”
우리가 건우의 가슴팍을 꽉 잡았다. 작은 손을 내려다보던 건우의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가 천천히 번져나갔다.
“놓지 마.”
건우의 나직한 소리가 진하게 흐무러졌다.
“나도…… 놓지 않을 테니까.”
얼굴을 감싼 건우의 보드라운 손길에 우리의 몸도 건우의 쪽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흐릿하게 입김이 번졌다.
건우를 바라보던 우리의 눈은 천천히 감겼다.
열기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우리는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연거푸 밀려드는 건우의 숨결이 마냥, 달았다.
건우의 가슴팍을 잡은 우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녁의 눈은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우리는 잘 있고 싶었다.
고매한 향기를 풍기는 건우의 옆에.
눈부시게 찬란한 당신의 옆에.
늘, 있고 싶어.
계속 하고 싶어.
이 달콤한 연애를.
***
주말 아침.
우리의 집은 아침 일찍부터 시끌벅적했다. 반상회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단장에 열을 올리던 우리는 현관문을 서성거렸다.
아침부터 건우를 볼 생각에 마냥 들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목까지 길게 빼고는 건우만을 기다렸다.
“누구 기다려?”
“아니. 무슨……. 택배! 구두 샀는데 오지를 않네.”
“직접 보고 사라니까.”
“실용적이잖아. 시간도 절약되고. 아저씨가 근데 진짜 오늘 올 생각이 없으신가본데…….”
질질 말을 끄는 우리는 현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느린 걸음으로 방으로 걸어가던 우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활짝 열린 현관문으로 건우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처럼 건우의 주위가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늦지 않게 왔네요.”
“안녕하십니까.”
“반가워요. 이쪽으로 와요.”
미순은 환한 미소를 날리면서 건우를 거실로 안내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사에서와는 달리 건우는 덤덤하지만 꽤 다정스러운 얼굴로 반상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건우의 등장은 거실을 술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우! 소문대로 잘생기셨네.”
“그 유명한 1601호 총각이구나!”
“반상회가 훤해지네. 훤해져.”
저마다 던지는 말은 차곡차곡 쌓였다. 수없는 관심의 눈길을 받아내면서 건우는 한쪽에 앉았다.
불편한 팔만큼이나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인 건우는 한없이 불편해보이기만 했다.
거실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는 다과상을 건네받았다.
“……!”
다과상을 보던 우리는 뜨악한 얼굴이었다.
바나나, 바나나 음료, 바나나 과자, 바나나 빵.
다과상은 그야말로 바나나 천국이었다.
우리는 다과상을 보기만 해도 바나나 향이 코끝을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
“엄마. 이게 뭐야.”
“바나나.”
미순은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무슨 전부 바나나냐구.”
“1601호 총각이 바나나 좋아한다면서.”
“그래도 무슨. 얼굴 노래지겠네.”
“딸내미 사회생활을 위한 눈물 나는 노력이지. 얼른 가져가.”
미순에게 등을 떠밀려 우리는 거실로 나왔다.
민망스러울 정도로 다과장은 샛노란 색깔의 향연이었다.
우리는 무리의 중앙에 다과상을 내려놨다.
건우에게 집중한 덕분에 모두가 바나나로 도배된 다과상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애인은 있어요?”
“뭘 그런 걸 물어봐. 있겠지.”
“없으면 내가 소개시켜줄게요. 괜찮은 사람으로.”
모두가 건우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있습니다.”
“…….”
“애인.”
건우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건우의 눈길을 따라서 모두의 시선은 우리에게로 쏠렸다.
우리는 불타는 시선을 털어내려고 애를 썼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들 이러세요.
“아깝네.”
미순이 우리의 앞을 지나갔다. 우리에게로 쏟아졌던 시선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들 소개해주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우리가 더 미안하죠. 나이가 들면 오지랖만 늘어서.”
미순은 손을 내저었다.
“좋은 분이 애인이 없으면 더 이상하지.”
미순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모두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군지 참 좋으시겠네.”
미순은 입을 가리면서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안도한 얼굴로 덜렁 소파에 앉은 우리는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한 건우의 옆선을 가만히 바라봤다.
‘엄마, 그거 나야.’
목구멍을 도는 말을 우리는 뱉어내고만 싶었다.
멋진 애인이 있다고 맘껏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우리는 간신히 눌렀다.
단 기운을 잔뜩 품은 기다란 바나나 하나에.
반상회에 모인 사람들은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샛노란 바나나로 시작된 반상회는 지루하기만 했다.
모두들 무단으로 쓰레기를 투기하는 범인을 잡아낼 방법으로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CCTV를 설치해보는 건 어떨까요.”
“발뺌하면 그만일 것도 같은데.”
“그래도 증거가 있으니까 덜하지 않을까.”
논의는 깊어졌다. 반상회가 이어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건우를 보지 못했다.
눈치 빠른 누군가가 건우와의 관계를 눈치라도 챌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부엌으로 가는 척, 핸드폰을 보는 척, 바나나에 집중한 척.
온갖 척을 해대면서 우리는 힐끔 건우를 쳐다봤다.
침까지 튀기면서 열변을 토해내는 한 주민의 말을 듣던 건우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야금야금 바나나를 씹던 우리와 건우의 눈이 마주쳤다.
도토리를 갉는 다람쥐 같은 우리의 모습에 건우는 터지려는 미소를 힘겹게 참아냈다.
“다른 안건은 없어서 오늘은 여기에서 마무리해요.”
길게 이어지던 반상회가 끝났다. 모두 수고했다는 박수와 함께.
쉬지 않고 밀어닥쳤던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주말을 즐기겠다는 다부진 의지에 찬 몸놀림들이었다.
“주말 잘 보내요.”
“수고하셨어요.”
배웅을 하는 미순의 옆에서 우리도 열심히 인사를 해댔다. 거실에 남은 몇몇 사람들과 미순은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단지 앞에 생겼다는 맛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으려 외투를 챙기려던 미순은 신발을 신는 건우에게 다가섰다.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분위기도 좋고 좋은 의견도 나왔네.”
“별말씀을요.”
“근데 오늘 대접이 변변치가 않아서. 다음번에 오시면 맛있는 점심이라도 대접할게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가지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건우는 단정하게 인사를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타고 건우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차장님!”
우리가 황급히 건우를 불렀다. 부모님이 집을 비우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야무진 목소리였다.
우리는 손이 불편한 건우를 위해 점심이라도 해줄 참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들을 모조리 꺼내 가장 맛있고 건강한 점심을.
“저희 남은 업무 있잖아요. 그…… 네. 그거.”
우리는 말을 얼버무렸다. 기막힌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달리 생각나는 업무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거?”
“네! 그거요.”
우리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던진 미끼를 물라는 것처럼 간절한 몸짓이었다.
“프로젝트 변경 내용 말입니까.”
“네…… 그거!”
우리는 가벼운 손길로 건우를 가리켰다. 막힌 생각을 건우가 단박에 뚫어버린 것이었다.
“저희의 성과가 달린 중요한 문젠데. 그죠?”
“예.”
“골치 아프지만 꼭 완성도 해야 하고.”
우리가 살살 밑밥을 뿌렸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대화를 미순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결론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살금살금 미순의 눈치를 살피던 우리가 침을 꼴깍 삼켰다.
“것도 꼭 둘이 머리를 모아야 하잖아요.”
“괜찮으면 나가죠. 고대리님. 카페라도 갑시다.”
“카페는! 주말이라 전부 시끌시끌해서.”
우리는 건우의 말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카페라니! 다 된 밥인데!
분노로 이글거리는 우리의 눈빛에 건우는 짐짓 움찔거렸다.
“저희 집, 어떠세요.”
결국 우리는 뱉어버렸다.
건우와 단둘이 집에 있겠다는 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