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44화 (44/102)

제 44화.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성민과의 점심 자리는 무심하고도 어색하고도 밝았다.

열심히 분위기를 띄우려고 성민은 폭풍처럼 여러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순식간에 나타났던 말은 또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무실로 복귀한 우리와 건우의 일상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바쁘게 자료를 요청하고 데이터를 처리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업무를 처리하던 건우가 뒤를 돌았다.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쌀알처럼 잘은 눈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얇은 눈발을 바라보던 건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저녁 고파서 회식 간다. 나 오늘 외박할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자.

성민의 메시지를 보던 건우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 집을 하릴없이 맴돌다가 심심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 분명했다.

침대를 뺏기고 밤새 소파에 웅크리고 잤던 건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성민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집 비밀번호라도 바꿀 생각이었다. 다시는 제 영역을 침범할 수 없도록.

건우는 답장도 보내지 않고 퇴근 준비에 열을 올렸다.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우리와 아늑한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고대리님.”

퇴근 준비를 마친 건우가 우리에게 걸어가 결재 서류를 내밀었다.

“결재 됐습니다.”

“결재가…… 아. 그 결재요. 감사합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결재 서류에 방황하던 우리의 눈빛이 멈췄다.

뒤늦게 건우의 눈빛을 읽은 것이었다.

건우와 눈빛을 교환한 우리가 결재 서류를 받아들었다.

“퇴근하려는데 보고 내용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럼.”

짤막한 인사와 함께 건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결재 서류를 꽉 쥐고 있던 우리가 살살 주변을 살폈다.

안쪽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찰나의 순간.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우리가 재빨리 결재 서류를 열었다.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기안서 폼 위에는 진분홍색의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정말, 은밀하게.

[주차장에서 보죠. 천천히…… 아니. 빨리 왔으면 합니다.]

[벌써 보고 싶어서.]

건우의 필체는 단정하고도 담백했다. 터지려는 미소를 꿀꺽 삼킨 우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숨기는 것도 한계치에 도달하고 있었다.

퇴근만이 살길이었다.

우리는 잽싸게 두툼한 다이어리 사이에 포스트잇을 숨기고는 가방을 챙겼다.

“나도 오늘은 피곤해서 먼저 퇴근할게요.”

우리는 괜히 구질구질한 변명까지 덧붙였다.

“그럼 내일 봐요.”

급히 인사를 한 우리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퇴근길이 마냥 즐거웠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유난히도 느리게만 느껴졌다.

5층, 2층, B1층……. 막힘없이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건우의 차가 한 눈에 들어왔다.

잰걸음으로 건우에게 다가선 우리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운전은 제가 할게요.”

“괜찮습니다. 나도 운전은 할 수 있어서.”

“제가 되게 안전운전에 신경 쓰는 캐릭터라. 제가 할게요.”

우리는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까딱거리는 손은 차 키를 갈구했다.

“부려먹으실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없다니까요.”

“그럽니까.”

“그럼요. 그 손 다 나으시면 끝이에요. 제가 마나님처럼 차장님 부릴지도 몰라요.”

“홈쇼핑에서 마감 임박이라는 소리라도 듣는 것 같습니다. 괜히 조급해지네.”

마지막 한방을 날리려는 것처럼 우리는 건우의 코앞에 손을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얼른 주세요.”

“…….”

“마지막 기횝니다.”

재촉하듯 날아든 우리의 말에 건우는 결국 차 키를 내주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서비스였다.

조수석의 문을 닫은 우리는 운전석에 앉고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채웠다.

“일은 잘 끝냈습니까.”

“아뇨. 차장님 퇴근하니까 조급해서 그냥 던지고 왔어요.”

“괜찮겠습니까.”

“오늘의 일은 내일로 미뤄야죠.”

시동을 건 우리의 미소가 진해졌다.

“좋은 말이네.”

“내일의 제가 좀 고생은 하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즐기려고요.”

우리가 핸들 위에 손을 얹었다.

주차 브레이커를 내리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차장님.”

건우의 차가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싸라기눈이 톡톡 소리를 내면서 앞 유리창에 떨어졌다.

와이퍼는 느리게 움직이면서 싸라기눈을 훔쳤다.

여러 색깔의 불빛을 삼킨 눈은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연한 노란색으로 변하기도 했다.

새순이 돋아나던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은 금세 녹아내렸다.

도로변에 서 있는 가로등에서 쏟아지는 노란 불빛이 물기에 번졌다.

느리게 굴러가는 바퀴에 도로에는 아직도 제법 차가 있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 있다가 가요.”

나직이 번지는 건우의 말에 우리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도움을 받을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인데요.”

차가 정지 신호에 멈췄다. 핸들을 잡고 있던 우리의 온 신경은 건우의 입술에 향해 있었다.

애간장을 태우는 우리를 보면서 건우는 부러 뜸을 들였다.

도움의 형태로 우리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건우의 유혹적인 눈길을 보던 우리의 머릿속은 복작거렸다.

분명 소설 속에서는 유혹의 끝을 달리는 말이었다.

집만큼 폐쇄적인 곳은 없었고 건우를 도울 일이 딱히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푹신한 소파 위에 널브러지는 것.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는 것.

뒤섞인 숨소리를 타고 격정적인 밤을 보내는 것.

불타는 밤에 몸을 내던지는 것.

그 모든 것이 도움의 정체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넘치는 상상에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직업병 발동했습니까.”

“네. 아니요? 전혀요.”

황급히 말을 바꾼 우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상상이라도 한 얼굴이었는데.”

“아뇨. 상상은요.”

격한 부정이었다. 앞 유리창을 보는 우리의 얼굴은 빨갰다.

건우의 여유로운 눈길이 우리를 고스란히 적셨다.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우리는 오른쪽 볼을 쓸어내리면서 건우를 봤다.

야수처럼 야욕적이던 상상을 간파당한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우리 상상 속의 그런 일은 아니라.”

“하긴. 친구 분도 계신데.”

“오늘 회식이랍니다. 외박하실 생각이고.”

믿었던 성민의 부재 소식에 우리는 뜨악했다. 자신의 상상이 정말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크게 준비라도 해야 하나 싶을 지경이었다.

완벽한 타이밍에 우리는 뜨거운 침으로 버석버석한 목을 축였다.

백퍼센트 유혹이다.

아니. 천 퍼센트!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광고 콘티하고 화보 최종안 피드백 전달이 필요한데 보다시피 손이.”

건우가 다친 손을 약간 들었다.

깁스 팔걸이를 보던 우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무슨 신종 암호인가.’

우리는 건우가 던진 말을 샅샅이 파헤칠 것처럼 보였다. 분명 숨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회사 일을 돕는 것을 말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제 소설 속 남자주인공은 전부 그랬으니까.

“타이핑만 좀 부탁하겠습니다.”

“진짜…… 회사 일인 거죠?”

“가짜 회사일도 있습니까.”

“아뇨. 없죠. 타이핑…… 뭐. 쉽네요. 제가 또 800타는 거뜬하게 나오거든요.”

우리는 주절주절 말을 덧붙였다. 괜히 얼굴에 도는 아쉬운 기색을 털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

“얼른 가서 타이핑만하고 빨리 쉬어야겠어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우리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뭐. 타이핑만 하면 되니까요. 그죠.”

우리의 말은 퉁명스럽게만 했다. 건우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우리는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빠르게 건우의 집을 향해 내달렸다.

고혹적인 엔진 소리가 도로에 흩뿌려졌다.

그야말로 분노의 질주였다.

***

우리는 믿고 싶지 않아했지만 건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건우의 집을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는 타이핑의 늪에 빠졌다.

콘티와 화보 최종안에는 빼곡하게 글씨가 적혀있었다.

단정한 글씨들을 전부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다.

“커피 괜찮습니까.”

“맘만 받을게요. 괜히 잘 못 잘 것 같아서요.”

“그럼 핫초코는. 예전에 잘 마셨던 것 같아서 사놨는데.”

건우가 주방 쪽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건우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당당한 기운이 녹아있었다.

커피, 핫초코, 과일 주스. 찬장을 가득 채운 음료들을 우리에게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다.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찬장을 두둑하게 채웠기 때문이었다.

“그건 마실게요.”

우리가 건우를 향해 빙글 미소를 지었다. 분노를 잠재울 만큼 놀라운 힘을 가진 초콜릿의 위력이었다.

건우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타이핑을 하는 우리의 속도는 한없이 느려졌다.

건우와 함께 있는 시간을 내심 늘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타닥타닥. 느리게 들리는 키보드 소리 위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서 번진 달달한 향기가 금세 우리의 코끝을 간질였다.

“마셔요.”

“고맙습니다.”

“뜨거우니끼 조심하고.”

건우가 우리에게 머그잔을 내밀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머그잔을 받고는 뜨겁게 올라오는 김을 불었다.

작은 날숨에 더운 김은 멀찍이 날아갔다.

진한 초콜릿의 향기가 우리의 입안에 기분 좋게 번졌다.

“맛있습니까.”

“되게 맛있어요. 거의 바리스타급이신데요.”

우리의 입을 도는 초콜릿 알갱이가 짙은 풍미를 자아냈다.

핫초코의 온기에 빠짝 긴장했던 우리의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우리는 코를 찡긋거리면서 초콜릿의 향기를 풍성하게 느끼고 있었다.

“칭찬 좋네.”

우리의 칭찬을 곱씹던 건우의 입가는 미소를 참느라 연신 실룩거렸다.

꼭 칭찬에 춤을 추는 고래처럼 신난 얼굴이었다.

책상에 기댄 건우가 가만히 우리를 바라봤다.

우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질 때마다 건우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물들었다.

건우의 세상은 우리에게 깊게 녹아들었다. 경계선을 잃을 만큼.

우리를 보는 건우는 그저, 좋았다.

입술에 초콜릿이 군데군데 배어든 우리가 그냥 좋아죽을 것만 같았다.

머그잔을 내려놓고 다시 타이핑을 하려던 우리의 손이 멈칫했다.

“차장님은 쉬고 계세요.”

“왜. 부담스럽습니까.”

“네. 되게.”

우리는 자신에게 고정된 건우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가셔서 편한 옷이라도 입으세요. 슈트는 영 불편해보이셔서.”

등을 떠밀듯 쏟아지는 우리의 말에 건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킷을 벗으면서 건우는 방으로 들어갔다.

열린 틈을 비집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샤워 소리에 키보드를 두드리던 우리의 몸이 건우의 방 쪽으로 슬금슬금 기울어졌다.

‘샤워에, 단둘이 집에, 조용한 공기…… 딱, 나이스 타이밍인데.’

우리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마음이 울렁거렸다.

물소리 하나에 직업병이 완전히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키보드 위에 얹어진 손은 그대로 멈췄다. 욕실 바닥을 탁탁 때리는 물소리가 유혹적이게 들렸다.

우리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짙은 고요를 가르면서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띵동.

또…… 쉬었다가, 띵동.

“차장……!”

건우를 부르면서 벽에 있던 인터폰으로 걸음을 옮긴 우리의 입이 쫙 벌어졌다.

넓은 인터폰 화면으로 미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연달아 들이닥치는 연애 발각 위기에 우리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비상이었다.

그것도 초특급 비상!

“차…… 차장님. 차장님!”

방으로 뛰어 들어간 우리가 다급히 욕실 문을 두드렸다.

문이 떨어져 나갈 만큼 박력 넘치게 문을 두드리는 우리의 손길에 욕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그쳤다.

우리는 욕실 문을 두드리면서도 초인종이 들리는 방문 바깥을 잇달아 돌아봤다.

“정말로 큰일……!”

굳게 닫혔던 욕실의 문이 열렸다. 하얗게 흐르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커다란 샤워 타월을 두른 건우가 나왔다.

탄탄하게 솟은 굴곡진 근육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불끈거리는 선명한 근육질 몸은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에 우리의 마음이 벌렁거렸다. 단단하게 잡힌 근육을 바라보던 우리는 노크를 하던 자세대로 굳어버렸다.

두 사람을 채근하는 것처럼 다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여기도 큰일, 저기도 큰일…….

큰일투성이다!

“저희 엄마가 오셨어요.”

우리가 덜렁 건우의 팔을 잡으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잘 숨겨야겠네.”

우리를 보던 건우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돌았다.

“연애 공개는 계획에 없던 일이라.”

“계획이요?”

“설마, 일만 시키려고 불렀을 것 같습니까.”

건우의 입술 사이로 애가 탈만큼 매혹적인 목소리가 흘렀다. 천천히 건우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색정적이었다.

휘몰아치는 초인종 소리와 건우의 매혹적인 눈길에 우리는 넋을 잃었다.

복작거리는 우리의 머릿속은 잠잠해질 기색이 없었다.

‘침착하라고. 이성을…… 찾기는 개뿔!’

우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우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 좋을 일이 없었다.

“생각만큼 순수한 사람은 아니라.”

초인종 소리를 등진 채로 건우는 우리에게 다가섰다.

“아는데요.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니. 밖에 저희 엄마가 있는데…….”

“정확히는 집 밖에 계시죠.”

“집에 사람 있는 줄 알고 있으실 거예요. 불도 쨍하니 잘 켜져 있고. 우선은 잘 숨어있을게요. 나머지는 이따가.”

우리의 쪽으로 몸을 기울인 건우는 느린 손길로 협탁에 있던 깁스 팔걸이를 들었다.

우리는 재빨리 거실로 달려가 코트와 가방을 들었다.

숨을 낮추고는 현관에 있던 구두까지 모조리 들고 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얼른요.”

우리가 대강 셔츠를 걸친 건우의 등을 살짝 밀었다.

당장 초인종 소리를 해결하고 오라는 간절한 손길이었다.

건우가 뒤를 돌았다.

우리는 방문에 매미처럼 바짝 달라붙어있었다.

“뭐합니까.”

“은신 중이요.”

우리가 문 뒤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대답했다. 깁스 팔걸이를 하던 건우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우리가 누룽지처럼 방문 뒤에 눌어붙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불쑥 내밀었던 고개를 숨겼다.

“고우리씨.”

“있어요.”

문 뒤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흘렀다.

“잘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해결하겠습니다.”

건우의 말에도 벌렁거리는 우리의 마음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들킬 수도 있다는 불안과 거사를 예고한 건우의 도발이 뒤섞여 우리의 마음을 펄떡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리 없는 방을 바라보던 건우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재촉하듯 퍼지는 초인종 소리에도 건우는 별다른 동요 없이 침착한 얼굴이었다.

건우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로 발길을 돌리려던 미순의 걸음이 멈췄다.

“집에 있으셨네. 하도 눌러도 답이 없어서 없는 줄 알고 가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샤워 중이여서.”

“늦은 시간에 내가 미안하죠.”

미순은 손을 내저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우리 반상회비 때문에. 오늘까지 걷어야 됐는데 깜빡해가지고.”

“바로 드리겠습니다. 잠시.”

건우는 걸음을 돌렸다. 닫히려는 문을 잡은 채로 미순은 건우를 기다렸다.

텔레비전 소리조차 없는 고요한 기운이 흘렀다.

연거푸 흐르는 조용한 공기에 미순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어디

미순은 느릿하게 우리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회사! 곧 가니까 걱정 말고 주무셔요.

번개보다 빠른 답장이었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핸드폰을 보던 미순이 우리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이었다.

건우가 나타났다. 건우는 고급스러운 작은 유리병을 미순에게 내밀었다.

정갈한 유리병은 맛있게 내려진 식혜가 담겨있었다.

“변변히 대접할 게 없어서. 약소하지만 받아주세요.”

“약소하다뇨. 고마워서 어쩌나.”

“아닙니다.”

말리지 않은 건우의 머리칼을 타고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런데 팔을 어쩌다가.”

“사고가 좀 있었습니다.”

“아이고. 어쨌을까. 심하지는 않대요?”

“인대 정도만 늘어나서 금방 나을 것 같습니다.”

“액땜했네.”

제 팔이라도 아픈 것처럼 미순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두 사람 사이로 잠깐의 침묵이 흐르던 순간이었다.

안쪽에서 갑작스럽게 쿠당탕거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났다.

짤막하지만 강렬한 여자의 비명와 함께.

“방금 안쪽에서 무슨 소리가…….”

흐릿하게 퍼지던 비명 소리에 미순은 살짝 몸을 기울여 안쪽을 살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