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43화 (43/102)

제 43화. 그녀가 그에게 반한 이유

성민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건우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영업을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성취감에 사로잡힌 표정이었다.

“근데 솔직히 언제부터 덕후 됐는데.”

“입 다물고 들어가지.”

“너 설마 이번 연재 글도 봤냐.”

“조용히 가자.”

잔뜩 들뜬 성민을 잠재우려고 건우를 안간힘을 썼지만 별달리 소용이 없었다.

침실로 끌고 가는 길조차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어쩌다 토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성민의 관심은 온통 건우에게로 쏠렸다.

책을 품은 성민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당장 어쩌다 토끼의 책 내용으로 칭찬 배틀이라도 펼치고 싶은 눈치였다.

성민은 건우를 놓아줄 수 없다는 것처럼 냉큼 건우의 셔츠를 바짝 잡았다.

“재밌지. 이번 글. 약간 더 깊어졌어.”

“됐고. 일은 회사 가서 해라.”

“일이라니. 팬끼리의 깊은 대화지.”

“그러니까 네 직원들하고 나누라고. 그런 대화는.”

“왜. 토끼 팬하고 같이 하고 싶다고.”

성민의 고집은 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찰거머리같이 붙어버린 성민의 모습에 건우가 미간을 좁혔다.

친절한 모습을 유지하는데 한계에 도달한 얼굴이었다.

“주정 부릴 거면 가라.”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야박하게.”

“너희 집. 싫으면 아버님한테 전화 드리고.”

건우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아스팔트에 부딪혀 깨졌는지 액정에는 살짝 금이 가 있었다.

아버지라는 말에 성민이 잽싸게 손을 내뻗었다. 죽어도 집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짜 전화하면 배신이다. 강건우.”

“그러니까 곱게 자자고.”

“일단은 핸드폰 줘봐. 불안하니까.”

“협상 도구를 넘겨주는 바보도 있냐. 잔말 말고 가라.”

성민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고분고분 건우의 말을 따라서 침실로 직진하던 성민은 먹이를 낚아채듯 건우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핸드폰은 감질맛나게 성민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수작 그만 부리지.”

“아. 잡을 수 있었는데.”

손끝에 남은 감각에 성민은 울상이 됐다. 건우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성민은 작전상 후퇴를 결정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모조리 미루기로 했다.

건우의 푹신한 침대를 얻는 것만으로도 우선은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건우에게 내쫓겨 바닥 신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침대가 성민을 반겼다.

깔끔하게 정리된 이불과 베개는 각이 잡혀 있었다. 흐트러뜨리고 싶을 만큼.

전시장을 방불케 할 만큼의 올곧은 각도였다.

“우리씨.”

건우에게 꼼짝없이 잡혀있던 성민이 고개를 내빼고는 우리를 불렀다.

“죄송해요. 건우가 자꾸 먼저 자라네요.”

“괜찮습니다. 저도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곧 또 봬요.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네. 기회가 되면.”

흐트러진 정신을 간신히 잡은 우리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성민은 조심히 잘가라는 것처럼 손을 흔들어댔다.

배슬배슬 초승달처럼 눈까지 휘어가면서 눈웃음을 날리는 성민을 건우는 급히 침대에 눕혔다.

두툼한 이불을 끌어 성민의 머리끝까지 덮어주었다. 순식간에 성민의 모습은 사라지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만 들렸다.

갑갑한 이불에 성민은 거칠게 이불을 걷어 젖혔다.

제대로 꿀잠을 자보겠다는 듯이 성민은 제 머리에 맞게 베개를 벴다.

“가면서 불 좀.”

성민은 제 집인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손 정말 많이 가네.”

“그럼. 네 여자친구 있을 때나 부려보지 언제 부려보겠냐. 천하의 강건우를.”

침실을 나서려던 건우의 발걸음이 짐짓 멈췄다.

“이제야 좀 믿겠냐.”

“딱 보니까 알겠더라. 간만에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고.”

건우를 보던 성민이 바람 빠지듯 픽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전 로봇 같았는데.”

“헛소리 그만하고 자라.”

“아니 뭐. 저승사자 같다고 해야 하나. 총각 귀신같다고 해야 하나.”

“적당히 하자.”

“아무튼 좋다고. 난 잔다. 잘 모셔다 드리고 와라.”

성민은 한 손을 번쩍 들고는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잠기운에 두 손을 들 것처럼 보였다.

“괜히 아파트에서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아까도 손목 잡고 막 그러더만.”

“훔쳐봤냐.”

“눈이 붙어 있어서 본 건데. 지켜보고 있다. 강건우.”

지켜보겠다는 다부진 말과는 달리 성민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성민은 건우가 반깁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잠기에 정복당했다.

늘어지게 하품을 뱉은 성민은 결국 무거운 눈덩이에 백기를 들었다.

“시끄러우니까 자라.”

성민은 대답도 않고 금세 잠에 빠졌다.

무시무시했던 술주정을 견뎌낸 건우가 불을 끄고 침실을 나섰다.

“친구 분은.”

“잡니다. 깨면 피곤하니 얼른 가죠.”

두 사람은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집을 나섰다.

봄을 시샘한 차가운 바람에 복도는 제법 서늘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건우는 우리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하고 있었다.

거실 한 쪽에 있던 책에 대해 묻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차장님.”

자신을 부르는 우리의 목소리에 건우는 흠칫 놀랐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어쩌다 토끼는 주워들을 것뿐이라던 담담하고도 앙큼한 거짓말을 들킬 시간.

“진짜로 제 팬은 아니시죠.”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때 제 소설은 본 적 없으셨다고 하셨잖아요. 차장님 취향도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우리는 제 목덜미만 어색하게 문질러댔다. 건우가 전작만은 읽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눈치였다.

제발.

성적 판타지를 쏟아 부은 그 고수위만큼은.

“내 취향이 어떨 것 같은데요.”

“그냥 뭐……. 경제나 마케팅 서적만 읽으실 것 같아서. 그게 아니라면 고전들.”

책을 들고 있는 건우를 상상하던 우리의 입술 사이로 다양한 종류의 책이 쏟아졌다.

건우는 잠자코 우리의 말을 들었다.

제법 심각하게 다양한 책을 말하는 우리의 모습만 봐도 실없이 웃음이 흐를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페스트나 이방인이나…….”

손가락까지 접어가면서 책제목을 말하던 우리의 말이 멈췄다.

아래에서 천천히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제가 차장님한테 뭘 물어봤었죠. 쓸데없이 주절대다가 까먹어서.”

“고우리씨 팬이냐고 물었습니다.”

“되게 난감한 질문이죠. 그냥 궁금해서요. 흘리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괜스레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만 같아 우리는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손짓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우리가 위층 버튼을 누른 순간이었다.

“팬, 맞습니다.”

건우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럼 성공한 덕후로 잘 살아보겠습니다.”

주먹까지 불끈 말아 쥐고는 덕후를 외치는 건우의 표정은 지나칠 만큼 진지했다.

당황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우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성공한 덕후.

성덕의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일은 이상하게 예의에 어긋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건우가 자신의 팬이었다니…….

우리는 기분이 묘했다.

마치 엘리베이터가 하늘로 붕 날아오르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

쾌청하고도 시끌벅적한 아침이었다.

반깁스를 한 건우를 발견한 우팀장은 호들갑을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열변을 토해내는 우팀장의 입에서는 소낙비라도 내리는 것처럼 침이 쏟아졌다.

“아니. 손이 다쳤는데 업무는 어떻게 본다고. 그냥 쉬어요. 들어가.”

우팀장은 채근하듯 건우의 등을 떠밀었지만 건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옹성 같은 건우에게 밀려 우팀장만 휘청거렸다.

“아플 때는 쉬는 게 최고야.”

“괜찮습니다.”

“아픈 거 참는다고 누가 알아주나. 아무도 몰라요. 본인만 손해라니까.”

“업무 없으십니까.”

무심한 건우의 말이 우팀장을 정확하게 관통했다.

뜨끔한 우팀장은 연달아 어색한 웃음을 요란하게 터뜨렸다.

“왜 없어. 많은데. 잠깐 짬을 내서 온 거지. 강차장님은 몰라도 너무 모르네.”

“그럼 업무 보러 가시죠.”

“어허. 일하시려고? 그래도 회사에서는…….”

“업무 잘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업무 보지 않은 건 잘 아는 게 회사죠.”

건우는 어쭙잖은 우팀장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우팀장의 얼굴에 붉으락푸르락 여러 색깔로 바뀌었다.

건우가 없는 사이에 본부장의 애정이라도 갈구하려던 우팀장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업무 보겠습니다.”

우팀장의 말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건우는 덤덤한 얼굴로 보고 내용을 살폈다.

덜렁 건우의 옆에 남겨진 우팀장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뜨거운 콧김만 죽죽 쏟아내고 있었다.

건우의 태도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별달리 트집을 잡을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예. 잘 보세요. 업무.”

“그러죠.”

빈정거리는 우팀장의 말을 건우는 무심히 넘겼다. 우팀장의 속셈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말투였다.

파리채에 놀라 도망치는 파리처럼 우팀장은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건우에게서 멀어졌다.

‘굴러온 돌 주제에…… 말본새하고는. 약 올라 죽겠네!’

영업팀으로 돌아가면서도 우팀장은 연신 뒤를 돌았다. 젊은 나이에 차장의 직급을 차지하고 본부장의 애정까지 듬뿍 받는 건우였다.

우팀장은 건우가 얄밉기만 했다. 건우를 경계하는 우팀장의 눈은 한없이 가늘어졌다.

꼭 가재미눈처럼.

“최주임은 무슨 백화점 왔나보네.”

우팀장은 영업팀 주임의 모니터를 습격했다. 모니터에 빨려들듯 집중을 하던 최주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맹수라도 만난 것처럼 최주임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최주임. 내 분을 풀 곳은 여기다.’

우팀장의 살기를 선명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분노를 풀 먹잇감을 고른 승냥이처럼 우팀장의 눈은 번뜩거리고 있었다.

“아니…… 팀장님. 그게 아니고요.”

“열심히 쇼핑하고 계셨네. 얼씨구. 장바구니?”

“끄겠습니다.”

“계속 쇼핑하세요. 돈도 벌고 쇼핑도 하고 일석이조네. 최주임도 누구처럼 낙하산 타고 내려왔나.”

우팀장은 건우가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맹렬하게 화풀이를 하는 우팀장의 말에도 건우는 관심조차 없이 업무만 보고 있었다.

“낙하산 타는 것들은 죄다…… 아오! 재수 없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기던 우팀장은 빽 소리를 지르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우팀장은 부득부득 이를 갈면서 파일을 넘겨댔다. 비닐로 된 파일 속지가 사나운 우팀장의 손길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넘어갔다.

“나는 배도 뒷배는 쪽팔려서 안탄다. 하늘을 우러러 나는 한 점 부끄럼이 없어요.”

우팀장의 말이 쩌렁쩌렁 울렸다.

파티션을 넘어온 우팀장의 뒷배 타령에 외부 프로모션 업체를 리스트업하던 선영이 계속 움찔거렸다.

“선영씨.”

우리는 선영을 불렀다. 반쯤 일어나 파티션 너머로 귀를 기울이는 선영의 표정은 심각하기만 했다.

우팀장의 말을 선영은 꽤나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뒷배, 낙하산…….

무심히 내뱉은 우팀장의 말은 애꿎은 선영에게 날아들어 비수처럼 박혔다.

“선영씨. 뭐하고 있어?”

“계속 앉아있음 엉덩이가 퍼져가지구.”

선영은 요상한 변명을 들어대면서 여전히 파티션 위로 목을 빼고 있었다.

“엉덩이는 잠깐 퍼지게 두고 일손 좀 빌렸으면 하는데.”

최주임을 갈구는 우팀장을 바라보던 선영의 시선은 우리에게 돌아갔다.

우리의 들썩거리는 눈썹에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우내시의 히스테리 따위에는 별반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

“돼요! 무조건 되죠!”

“경쟁사하고 일본에 가서 산 음료하고 좀 가져왔는데 차에서 꺼내야 할 것 같아서.”

“제가 힘은 또 쎄거든요. 당장 들겠습니다. 대리님!”

선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니트 소재의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였다.

넘치는 선영의 힘에 우리는 묘한 불길함이 스쳤다.

“괜찮겠어?”

“당근이죠. 노트북도 거뜬히 드는데요.”

의기양양한 선영의 말에 우리의 불안은 짙어졌다.

1킬로도 되지 않는 노트북을 거뜬히 들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작은 알통까지 깨알처럼 선보이던 선영의 얼굴은 양손에 음료를 들고는 죽을상으로 변했다.

“무겁지.”

“가볍지는 않지만 괜찮습니다. 대리님!”

선영의 목소리만큼은 사뭇 비장하고도 힘찼다.

우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작…… 아니. 고우리씨.”

벙긋 미소를 짓고는 반갑게 인사를 날리는 사람은 성민이었다.

‘고우리씨. 미안합니다. 내가 아침에 실수를 좀 해서.’

‘무슨 실수를…….’

‘잘못 말해버렸습니다. 어쩌다 토끼가 누군지.’

‘……!’

성민의 등장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건우 말고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누설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하더라도 마냥 믿을 수만은 없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쉽게 누설됐기 때문이었다.

‘뭐야. 여기는 왜.’

우리의 머릿속에 있던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내심 속마음을 숨겼지만 달갑지 않은 표정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무뚝뚝하게 떨어지는 우리의 말에도 성민은 성큼 우리에게로 다가섰다.

“무거우시겠다. 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괜찮아요. 제가 들 수 있어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걱정 말고 주시면 잘 들고 있겠습니다.”

“그럼 저 친구 좀 도와주시겠어요?”

가볍게 성민의 손길을 피한 우리가 선영을 가리켰다. 선영은 끙끙거리면서 힘겹게 음료수가 담긴 봉투를 들고 있었다.

손등으로 땀을 훔치는 선영은 성민을 향해 강력한 도움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선영의 손에 있는 봉투는 금방이라도 바닥에 닿을 것처럼 보였다.

축 쳐진 어깨, 올망졸망 간절한 눈빛, 연신 이마를 훔치는 손길…….

선영은 최대한 불쌍한 눈길로 성민을 바라봤다. 꼭 제발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처럼.

미적거리던 선영이 간신히 우리에게로 다가선 순간이었다.

“동료 분은 굉장히 잘 드시는 것 같습니다.”

성민의 직격탄이 선영에게 날아갔다. 도움의 손길을 기대한 선영의 몸은 휘청거렸다.

거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씨. 그러지 말고 저 주세요. 손에 무리라도 가면 어쩌시려고.”

성민은 꼿꼿하게 우리의 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말 괜찮아요. 제가 들게요. 근데 여기는 무슨 일로.”

우리는 날렵하게 선을 그었다.

“건우하고 점심 먹을 생각인데 괜찮으시면 같이 하시겠어요?”

성민은 부드럽게 물었다. 짐짓 우리는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짧은 순간. 수십 개의 상상이 우리의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건우야. 아…… 해봐!’

젓가락질이 불편한 건우를 위해 성민이 반찬을 건우의 입에 넣어주는 상상.

‘아…….’

매혹적인 눈빛을 흩날리면서 무심히 입을 벌리는 건우의 모습 같은 쓸데없는 상상!

“같이 해요. 점심.”

“정말이죠?”

“네. 꼭이요.”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만들어주고 싶지 않다는 다부진 목소리였다.

우리의 입가에는 빙긋 얄팍한 미소까지 흘렀다.

“그럼 차장님 불러드릴까요.”

“제가 전화하겠습니다.”

성민은 핸드폰을 꺼내들고는 대답했다.

짤막한 인사를 남긴 채로 우리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연신 뒤를 돌면서 성민을 힐끔거리던 선영은 우리에게로 바짝 달라붙었다.

“차장님 지인 분이시죠. 그때 로비에서 뵌 것 같은데.”

“어. 맞아.”

“근데 대리님하고 혹시 썸 타시는 거예요?”

“썸은 무슨. 그냥 차장님 지인이라 어쩌다가 알게 된 거야.”

“그럼 대리님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닌 거죠?”

비밀 접선이라도 하는 것처럼 선영은 우리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우리를 바라보는 선영은 그저 우리의 대답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왜. 관심 있어?”

우리는 농담하듯 물었다.

“넵! 반한 것 같아요.”

“그…… 뭐?”

우리가 놀란 얼굴로 우뚝 멈춰 섰다. 그야말로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얼마나 봤다고 반하길 반해!

“왜?”

“처음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뭐가.”

“부탁을 거절한 남자! 정말, 처음이었어요!”

선영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얼굴도 제 스타일이고.”

수줍은 고백을 하는 선영의 두 볼이 새빨개졌다.

“그러니까 대리님이 잘 좀 도와주세요.”

“내가?”

“그럼 저도 뭐든 힘껏 돕겠습니다!”

선영의 부드러운 눈길에 힘껏 힘이 들어갔다.

양손에 봉지를 들고는 씩씩하게 걸어가는 선영은 잔뜩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왜 좋다는 건데?”

중얼거리듯 우리는 혼잣말을 뱉었다. 얼떨떨하기만 했다.

부탁의 거절과 반한다의 상관관계를 도대체 연결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히, 재벌의 남다른 짝사랑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