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화. 진정한 덕밍아웃
웃음 한 점 없는 진지한 건우의 얼굴에 우리는 슬며시 건우의 가슴팍을 눌렀던 손을 뗐다.
‘미쳤구나, 고우리. 띵동이라니!’
절실한 반성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차창에 이마를 댔다.
달리는 차의 움직임에 따라서 우리의 이마가 통통 튀었다.
깊은 반성에 사로잡힌 우리를 바라보던 건우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돌았다.
초인종에 대한 기억은 모조리 잊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조차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옅은 빛을 뿜어내는 차창을 바라보고 있던 건우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차창에 계속 부딪힐까. 건우는 우리가 이마를 대고 있던 차창에 손을 댔다.
“그러다 다치겠습니다.”
우리의 이마가 건우의 손바닥에 가볍게 부딪혔다. 온기를 품은 폭신한 손에도 우리는 차마 건우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띵동이라는 무리수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차장님.”
개미처럼 작은 우리의 목소리가 조용한 차 안에 번졌다.
“죄송해요. 조금만 더 반성 좀 할게요.”
“당황했습니까.”
우리의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우리는 부싯돌에 불을 붙일 때만큼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빛에 반짝거리는 밖을 바라보던 우리가 차창에서 이마를 뗐다.
단단하게 마음을 잡은 것처럼 다부진 눈빛을 날리면서 우리는 건우를 봤다.
“충분히 오해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차장님.”
우리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서두를 열었다.
“진짜 확실히 직업병이에요.”
우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도발적인 글을 위한 기발한 생각과 영감의 소스라는 변명으로 건우의 가슴 습격 사건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건우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벌어진 재킷 사이로 보이는 와이셔츠 위로 탄탄한 윤곽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높게 솟은 건우의 가슴팍은 누가 봐도 시선을 뺏길 수 없게 만들 만큼 완벽한 라인을 자랑했다.
우리는 굳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앞 유리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니까 왜 실해서는!’
더 바라보고 있다가는 다시 한 번 건우의 가슴팍을 습격할지도 몰랐다.
“위험한 발언이네.”
“네…… 뭐가요?”
“직업병 말입니다.”
“딱히 위험하지는…….”
우리가 말끝을 흐리고는 건우를 봤다.
‘차장님. 잡아먹지는 않을게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엉큼한 말이 우리의 목구멍을 휘돌았다.
이성을 놓았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도발을 품은 그 말을 뱉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거야 모르는 법이죠.”
“…….”
“본래 본인은 위험함을 정확히 감지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매혹적인 미소가 건우의 입가를 적셨다. 건우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알고 있더라도 구태여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건우는 약간 몸을 기울여 우리에게로 바투 다가섰다.
“우선은 내 앞에서만 반응하는 걸로 하죠.”
나직한 건우의 목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 직업병.”
따뜻한 봄바람처럼 흐트러지는 목소리에 의자를 짚은 우리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단 기운을 품은 건우의 눈빛에 우리는 그대로 홀려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건우가 묘한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불안했던 마음마저 다독거리는 그런 재주.
“다른 사람 앞에서는 금집니다.”
질투가 녹은 건우의 열기가 우리의 귓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절대로.”
단호한 말은 귓바퀴를 타고 우리의 온몸에 번져나갔다.
우리를 바라보는 건우의 그윽한 미소는 점점 더 짙어졌다. 택시만 아니었더라면 건우는 우리의 목덜미를 당기고는 진한 키스를 날렸을 것이었다.
마냥, 예쁜 우리를 가만히 놔두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건우의 온 신경은 우리의 숨결을 갈구하고 있었다.
건우는 본능의 노예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이성에 따라서 제어하나 할 수 없이 제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럴게요.”
우리가 걱정 말라는 것처럼 대답했다.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불빛이 택시 안에 스며들었다.
서로의 얼굴에 젖은 빛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얼굴에 해사한 미소가 돌았다.
“차장님. 근데 진짜 큰일이네요.”
“뭐가 큰일입니까.”
“고운 얼굴에 상처가 나서.”
우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건우의 얼굴을 봤다. 광대 쪽에 붙은 밴드가 마음에 걸렸다.
잘생긴 얼굴에 생긴 상처라니.
건우의 다친 생채기만 봐도 우리는 제 볼이 아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금방 아물 테니까.”
“그럴까요. 아까 보니까 꽤 다치신 것 같아서.”
“보기보다 꽤 괜찮습니다.”
“그래도…….”
“고우리가 다치는 것보단 낫기도 하고.”
건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물들었다.
누구 하나가 다칠 수밖에 없었다면 차라리 제가 다친 것이 건우는 마음 편했다.
우리의 얼굴에 상처라도 났다가는 정말 정신없이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우리 이용권도 하나 얻었으니 만족합니다.”
“이용권은 언제.”
“곧 부탁할 일이 있겠죠.”
의미심장한 말을 날리면서 건우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순식간에 돌진한 차에 놀라기는 건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건우는 구태여 놀란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둘 다 허둥대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걱정과 긴장이 범벅됐던 건우의 마음이 그제야 풀어졌다.
부드럽게 도로를 내달리는 택시가 빨라지는 만큼 평온도 진해졌다.
건우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늦지 않아서. 다치지 않아서.
그래서 참, 다행이다.
“차장님. 도착했어요.”
한참을 내달리던 차가 속도를 줄였고 부드러운 손길이 건우를 흔들었다. 건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미안합니다. 깜빡 졸았네.”
“괜찮아요. 저도 졸았는데요. 오늘은 무조건 일찍 주무세요. 제가 친구 분한테도 단단히 말해 둘게요. 꼭 차장님 재우라고.”
“아마 자고 있을 겁니다.”
“에. 설마요. 술 기다리고 있으실 것 같은데.”
“생각보다 술도 약하고 자정을 못 넘기는 스타일이라.”
택시에서 내린 두 사람은 밝은 빛을 뿜어내는 건우의 집을 동시에 쳐다봤다.
***
자신만만하게 술을 외치던 성민의 모습을 떠올리던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건우의 말대로 성민은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대(大)자 모양을 한 채로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빈 캔을 쥔 채로 알코올에 대한 욕망을 분출하던 성민은 두 사람이 집에 들어온 줄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침대에라도 옮길까요.”
우리가 팔짱을 끼고는 성민을 보면서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뻐근한 몸에 몸살을 앓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건우는 성민을 향해 작은 손을 내뻗는 우리의 손목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얜 내 침대, 접근 금집니다.”
“그럼 소파에라도.”
“소파도 금지고.”
단호한 건우의 말이 날아들었다. 성민에게 허용된 곳은 거실 바닥에만 한정된 것처럼 보였다.
건우는 단단한 철벽을 치듯 성민의 접근 범위에 깐깐한 기준을 날려댔다.
“손대는 것도 금지고.”
건우는 우리가 성민을 부축하는 모습만 봐도 소심한 질투라도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래도 바닥에서 자도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그럼 자리라도 정리하고 갈게요. 차장님 손도 불편하고.”
우리의 시선은 거실 테이블로 옮겨졌다. 식은 치킨을 품은 박스와 비어있는 맥주 캔이 보였다.
일회용 분리수거나 설거지도 건우가 하기 힘들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부탁은 내일 정식으로 하죠.”
하지만 이번에도 건우는 우리의 손길을 막았다.
“고우리가 고생하는 건 내가 보기 싫어서. 아침에 성민이 깨면 부탁할 테니 걱정 말아요.”
“정말 괜찮은데.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굳이 도와주고 싶으면 내 옆에서 자주는 건 어떻습니까.”
건우의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할까.
우리는 잔뜩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달콤한 잠에 빠져든 성민이 전부였다.
“근데 아까는 소파도 침대도 전부 다 출입 금지라고.”
“어떤 일에도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죠.”
바짝 우리에게 다가선 건우는 매혹적인 눈빛을 흘렸다.
성민의 드르렁거리는 소리까지 들리지 않는 조용한 거실에서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번졌다.
빙긋 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건우가 반깁스한 팔을 우리의 목에 둘렀다.
건우의 작은 힘에 우리는 한 발자국 건우에게 다가섰다.
은은한 건우의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우리는 모든 시간과 공기가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입술에 있는 예민한 신경을 모두 깨우는 건우의 숨결이 얄밉게만 느껴질 지경이었다.
“고우리는 예욉니다.”
“…….”
“내 영역에선 전부, 다.”
건우의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깊게 스며들었다. 약간 고개를 기울인 건우가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섰다.
온몸을 꼼짝없이 굳게 만들 정도로 건우의 깊은 눈빛은 우리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했다.
두 사람의 단 숨과 열기를 타고 입술이 맞닿으려던 순간이었다.
“나중에요.”
우리가 차가워진 손으로 건우의 입술을 막았다. 몸을 뒤척거리는 성민의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촉촉한 건우의 입술 감촉이 우리의 얇은 손가락을 타고 선명하게 전해졌다.
앙큼한 우리의 마음은 금방이라도 본능에 굴복할 것만 같았다.
우리의 손은 부드러운 건우의 입술 위를 미끄러졌다. 제자리로 돌아온 손에는 건우의 체취와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리는 굳은 침을 삼키면서 간신히 끝없이 솟구친 본능을 억눌렀다.
“언제 말입니까.”
“둘만 있을 때요. 그때 하는 걸로 해요. 차장님. 슬슬 집에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는 멈춰 버린 제 손목시계를 대강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러게. 어머님이 걱정하시긴 하겠네.”
덤덤히 대답하는 건우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굿나잇 키스 한 번 날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열두 시를 훌쩍 넘겨버린 시간이었다.
마냥 우리를 잡아두기도 어려웠다.
점수를 따도 모자를 상황에 밤늦게까지 일만 시키는 악덕 상사로 미순에게 찍혀버릴 지도 몰랐다.
건우는 지금은 확실히 이미지를 관리할 때라고 생각했다.
남자든 상사든 이웃집 총각이든. 그게 뭐든.
“우선은 갑시다.”
건우가 우리의 팔목을 부드럽게 잡고는 말했다. 당장 집 앞에라도 데려줄 기세였다.
“설마 같이 올라가실 생각은 아니죠.”
“현관문은 닫혔을 테니까.”
“아…… 그래도 엘리베이터에서 괜히 누구 만날지도 모르고. 혼자 잘 올라가보겠습니다.”
“그래도 걱정되는데.”
“바로 위니까요.”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데려다주겠습니다. 거기까진 봐줘요.”
마지막 부탁까지 거절하면 건우는 완전히 상처를 입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꼭 비에 홀딱 맞아 젖어버린 강아지처럼.
아, 정말 거절할 수 없게 만드시네!
“그럼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우리의 말에 건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정말 못 말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회사 프로젝트를 처리할 때보다 더 심각하고 큰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갑시다.”
“아. 네.”
“천천히면 더 좋고.”
건우가 덧붙인 말에 가득 힘을 주었다. 우리의 팔목을 잡은 건우는 그대로 우리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솟구치는 욕망을 누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건우의 간절한 눈길은 우리까지 애달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견우와 직녀가 된 것만 같았다.
오작교가 놓아질 때만 서로를 만나고 탐할 수 있는 사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바닥에 붙어있던 성민이 벌떡 일어났다.
“벌써 가시면 섭섭한데.”
성민은 졸린 기운을 모조리 털지도 못한 채로 우리에게 말했다.
“아직 더 달리셔야죠.”
“적당히 하고 잠이나 자라.”
“내가 언제 잤다고. 명상했어. 명상. 우리 작가님들 어떻게 하면 잘 대해드릴까. 고민.”
술기운이 깨지 않은 성민의 말은 왔다갔다 정신이 없었다.
명상이었다가 고민이었다가.
성민은 자꾸만 중얼거리는 말의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질한 기운을 털어내려는 것처럼 성민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성민의 눈은 여전히 풀려 있었다. 진하게 범벅된 취기와 잠기운은 쉽게 풀리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던 성민은 좋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제 무릎을 탁 쳤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책 선물을 좀 드려야지.”
성민은 소파에 내던져 둔 제 가죽가방을 향해 기어갔다.
비장한 손길로 가방을 연 성민이 빳빳한 책 한 권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제가 진짜 재밌게 읽은 소설이거든요.”
성민이 건넨 책을 받아든 우리는 뜨악했다. 책에 선명하게 박힌 익숙한 글자가 어색한 웃음만 흐르게 만들었다.
[잠 못 이루는 밤
作. 어쩌다 토끼]
우리의 시선은 책에 있던 필명에 꽂혔다.
맙소사. 남의 손에 쥐여진 책을 보다니!
“배경이나 감정 묘사가 최고거든요. 내용도 재밌고.”
“그런가요.”
코앞에서 듣는 리뷰가 우리는 묘하게만 느껴졌다.
쏟아지는 호평 속에서 조금이라도 나쁜 말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욕심도 생겼다.
“재탕을 세 번이나 했다니까요.”
“아. 세 번이나 하셨구나.”
“그만큼 아끼는 책인데 특별히 드릴게요. 친구 기념.”
성민이 들고 있는 책은 집에 한 다발 쌓인 증정본 책과는 달라보였다.
책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그럼 우리 친구…….”
“친구는 무슨. 작가하고 친구 먹는 편집자도 있냐.”
날카로운 말을 날린 건우가 성민의 손에 있던 책을 가져갔다.
우리와 성민의 시선이 동시에 건우의 손으로 향했다.
“네가 우리 토끼 작가님에 대해 뭘 안다고.”
“나는 잘 알 것 같은데.”
건우는 목을 빼고 제 책을 바라보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책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성민은 비틀거렸다.
손에 닿을 듯 잡히지 않는 책에 성민은 잔뜩 미간을 좁혔다.
“강건우. 진짜 내놔라.”
“싫다면.”
“그거 흠집이라도 나면 가만히 안 놔둔다.”
“나도 흠집 낼 생각은 없어서.”
“아…… 진짜. 새끼. 너한테도 하나 줬잖아. 근데 두 권을 탐내냐. 와.”
건우의 손에 있던 책을 빼앗으려다가 힘이 빠진 성민이 한탄하듯 말했다.
폭풍처럼 내던져진 성민의 말에 건우는 움찔댔다. 성민의 말을 우리가 듣지 못하고 흘려듣기를 바랐다.
“설마. 차장님도 있으신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책이요. 그 책. 들고 계신 책.”
더듬거리듯 말을 내뱉는 우리는 정확히 건우의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가 선물로 줬거든요.”
자랑스럽다는 것처럼 성민이 제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말했다.
은밀하고도 대단한 책을 추천해줬다는 묘한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손짓이었다.
당황한 빛이 건우의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술에 취한 성민이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더 무슨 말을 내뱉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책을 선물 받았다는 성민의 말에 우리의 눈빛은 하염없이 흔들렸다.
건우가 들고 있는 책은 다른 책보다 수위가 한참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 강렬한 합체의 현장을 건우가 직접 봤을 수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두 볼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원초적인 욕구에 불탔던 순간을 들키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우리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지금 무슨 소리를. 취했다. 자러 가자.”
벼랑 끝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건우가 급히 성민에게 팔을 둘렀다.
모든 상황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성민을 잠재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민을 재우고 나면 변명이든 뭐든 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 멀쩡한데.”
“멀쩡하기는 무슨. 헛소리하는 것 보니까 심각하네.”
“강건우. 막 말 돌리네. 내가 너 책 포장지도 다 뜯은 거 봤는데.”
“됐고. 자라.”
건우가 성민의 품에 책을 쥐어주었다. 제발. 더 이상의 말은 하지 말라는 무언의 눈빛까지 날렸다.
하지만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성민의 등을 떠밀던 건우도 지쳐가고 있었다.
불끈 힘이라도 솟은 것처럼 성민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책은 우리 친구 거라니까.”
“잠이나 자라고. 침대든 어디든 좀 자라. 자.”
건우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자식. 앞에 딱지 때문에 부끄러워서 그러냐. 다 괜찮다니까. 예술성 있는 딱지야.”
성민이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우리에게 책을 건네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성민을 말리던 건우는 결국 터져버렸다.
“그래. 토끼 팬이다. 됐냐.”
발끈 소리친 건우는 성민을 침대에 눕힐 작정이었다. 제 침대든 소파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주절거리는 시한폭탄 같은 입만 막을 수만 있다면.
“오. 강건우. 너무 덕후였냐.”
“그래. 덕후니까 자라고.”
“완전 동질감 드는데. 토끼 덕후.”
성민은 건우의 마음을 다 안다는 것처럼 가슴팍을 탁 때렸다.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덕밍아웃이었다.
어쩌다 고우리 덕밍아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