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22화 (22/102)

제 22화. 고대리, 나 피합니까

무심히 올라오는 웃음을 참던 우리의 코가 벌름거렸다.

코끼리 곱창.

건우와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힘겹게 웃음과 사투를 벌이던 우리는 결국 웃어버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배를 부여잡은 채로 웃던 우리는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재밌습니까.”

“죄송해요. 너무 잘 어울리셔서요.”

우리가 눈물을 닦아내면서 대답했다.

“설마 취하신 건 아니죠?”

“멀쩡합니다.”

건우는 허리를 단단히 조였던 앞치마 끈을 풀면서 대꾸했다.

“솔직히…… 탐나셨죠? 앞치마.”

건우를 놀릴 건수라도 잡은 것처럼 우리가 깔깔대면서 건우를 놀렸다.

부끄러움에서 탈출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건우는 열심히 앞치마를 벗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찬바람에 떠밀린 앞치마는 건우를 놓아줄 수 없다는 것처럼 끈덕지게 건우에게 달라붙었다.

‘이런 앞치마!’

건우가 힘겹게 앞치마를 벗었다.

건우의 손에 말린 앞치마가 구겨졌다.

못마땅한 얼굴로 앞치마를 탓하던 건우는 우리를 바라봤다.

우리는 여전히 깔깔거리고 있었다.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것처럼.

고백의 긴장을 떨쳐버릴 만큼 신나게.

“말 좀 해주지 그랬습니까.”

“진짜로 몰랐어요. 너무 정장이랑 잘 어울리게 붙어있어서. 위화감이 없었다니까요.”

“그렇게 재밌습니까.”

“아…… 죄송해요. 사실 너무 재밌어서요.”

술기운을 핑계로 우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코끼리요. 묘하게 잘 어울리셔서요.”

우리가 헛기침을 뱉으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상사를 놀릴 수 없다는 이성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앞치마를 펄럭거리면서 길거리를 활보했던 건우의 모습을 잊기 위해.

“됐습니다.”

“…….”

“고우리씨가 재밌었다면.”

건우의 입가에 다정스러운 미소가 녹아들었다.

갑자기 불어 닥친 봄바람 같은 미소에 깔깔거리던 우리의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갑시다.”

“……네.”

우리의 대답이 느릿하게 흘렀다.

건우의 시선이 스친 곳마다 뜨거운 열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찬바람을 잊게 만들 만큼 후끈한 그런 열기.

우리는 앞서 걸어가는 건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진짜. 간만의 고백 때문에 설렜나.’

우리의 눈이 깜빡거렸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상사병인가.’

상사병일 수도 있었다.

상사만 보아도 심장이 벌렁거린다는 상사병!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병처럼 돌고 있는 상사병이 갑작스럽게 뛰쳐나온 걸지도 몰랐다.

“거기 춥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던 건우가 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리 와요.”

건우의 낮은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가리면서 우리를 잡아끌었다.

우리는 자석에 이끌리듯 건우의 옆에 바투 섰다.

두 사람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건우가 자꾸 신경 쓰였다.

“그 앞치마는 주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조만간 또 곱창 먹으러 올 것 같아서요. 제가 외국 갔다 오면 습관처럼 꼭 먹으러 오거든요.”

어색한 침묵을 뚫으면서 우리가 말했다.

“그럼 같이 옵시다.”

“아니 뭐. 그러실 건…….”

“나도 반해서.”

건우의 말에 우리의 표정이 굳었다.

폭주하듯 직진하는 건우가 또다시 고백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가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를 바짝 잡았다.

“무슨 고백을…….”

“코끼리 곱창 말입니다.”

건우가 뒷말을 덧붙였다.

우리의 손을 물들이던 땀이 쏙, 식어버렸다.

“그죠. 맛있죠. 반할 만하죠.”

우리는 괜히 목소리를 높이면서 말했다.

“예. 맛있었습니다.”

“일본 출장 다녀오면 한 번 더 쏠게요. 오늘 구해주신 기념으로.”

“사양 안하겠습니다.”

벙글 미소를 머금던 우리가 건우의 반대편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코끼리 곱창에 반했다니……. 뭐야. 잠깐 나 지금 곱창한테 질투하는 거야?’

터무니없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우리는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헛웃음을 내뱉었다.

두 사람을 실은 에스컬레이터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를 잡은 우리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건우의 숨소리, 체취, 목소리…….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건우가 고백을 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모든 것에 신경이 갔다.

달라졌다.

뭔가, 크게 달라져 버렸다.

***

고백의 끝은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들쭉날쭉한 마음에 연주는 연거푸 한숨만 흘려댔다.

좋다. 싫다.

확실히 다른 두 개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턱을 괸 채로 화보 촬영 일정표를 보던 우리의 머릿속은 복작거렸다.

화보 일정표가 들어갈 틈도 없이.

“고대리님. 차장님이 찾으세요.”

“아…… 차장님. 그래. 차장님.”

선영의 말에 멍하니 모니터를 보던 우리가 벌떡 일어났다.

건우가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백의 기억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무선 마우스를 손에 든 채로 건우를 쳐다봤다.

“부르셨습니까. 차장님.”

“예.”

건우의 대답에 우리는 건우에게 걸어갔다.

“말씀을…… 아. 죄송합니다. 마우스를……. 제가 정신이 없어서.”

메모를 하려던 우리는 민망했다.

볼펜 대신 마우스를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우리는 급히 책상에 마우스를 두고는 수첩과 볼펜을 챙겼다.

“이제 말해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 주세요.”

“성운백화점하고 2차 미팅 일정 조정 중입니다. 괜찮은 날짜 있습니까.”

“모레 일본 출장 말고는 다른 일정은 없어서. 편하신 날짜로 정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차주에 일정 잡아서 전달 드리죠.”

우리는 건우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긴장을 풀려는 것처럼 수첩에는 아무 말이나 적어대고 있었다.

사내연애 NO.

상사병?

과거 보여.

두서없는 글자들의 나열이었다.

우리의 고민을 한 사발 품고 있는 말.

“추가로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가보겠습니다.”

“예.”

우리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날의 고백 이후로 건우는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열심히 건우를 피해 다니는 것이 한몫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복도에서 건우를 만나기라도 하면 빙글 몸을 돌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갔다.

“고대리님.”

“아…… 차장님. 급하신 말씀 아니시면 저는 물을 좀 빼러.”

부득이하게 건우와 마주치면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

“고대리님.”

“차장님 죄송한데요. 제가 다른 일을 좀 처리하느라……. 메신저로 전달 주실 수 있으실까요.”

온라인 친구처럼 메신저 타령만 해대기도 했다.

건우와 단둘이 있기라도 하면 확실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좋은지 싫은지.

사귈 수 없을지 있을지.

과거를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 진지하게 건우의 고백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

차라리 일본으로 출장을 갈 수 있는 시간은 행운이었을지도 몰랐다.

“마케팅1팀. 음료 타임이라도 가집시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우리를 잡기 위해 건우가 날린 초강수였다.

“팀장님이 쏘시는 건가요.”

“쏘시나요!”

황주임과 선영은 신이 난 얼굴로 건우를 쳐다봤다.

어미 새가 주는 모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보였다.

“예.”

건우는 울리지도 않는 전화를 들었다 놨다하는 우리를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커피는 나하고 고대리님이 사오겠습니다.”

건우의 말에 우리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맙소사!

둘만의 시간이다.

“아뇨. 저는 일이…….”

“공평하고도 평등하게.”

건우가 뒷말에 힘을 주었다.

“그게 우리 팀의 모토니까.”

방금 생겨난 모토였다.

건우는 못을 박아버렸다.

우리가 절대로 도망칠 수 없도록.

황주임과 선영의 눈빛은 우리에게로 꽂혔다.

‘어쩌라고!’

우리는 정말로 난감했다.

싫다는 말이라도 외치는 날에는 권위적이고도 수직적인 인물로 낙인찍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숱한 원망을 들을지도.

“대리님. 커피가 너무 간절한 네 시예요.”

“대리님!”

두 손을 맞잡은 선영과 황주임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알았어. 알았어.”

결국 우리는 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까짓 커피만 사들고 올 생각이었다.

“다들 뭐가 그렇게 마시고 싶은데.”

우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원수 같은 것들!’

선영과 황주임은 우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로 열심히 메뉴를 골랐다.

“사이즈는 큰 걸로 마시고 싶은데……. 대리님 괜찮겠죠?”

“적당히 마셔요.”

우리가 이를 악물면서 황주임에게 대답했다.

‘네 이놈. 입을 다물라.’

불같은 눈빛까지 쏘아댔다.

황주임은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또라이 레이더망에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주임은 잠시 우리의 별명을 상기했다.

또라이 중에 또라이.

고똘.

“조심히 다녀오세요.”

황주임이 선영을 툭 쳤다.

무슨 말이라도 하라는 눈치였다.

“넵! 사무실 잘 지키고 있을게요!”

선영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면서 우리는 건우와 사무실을 나섰다.

죽을 만큼 피했던 순간이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마음이 조여 오는 순간.

“고우리 대리님.”

“네.”

우리는 엘리베이터만 보면서 대답했다.

“나 피합니까.”

건우의 말이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들었다.

우리는 뜨끔했다.

확실히 건우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차장님을 왜 피해요. 안 피해요.”

“그날 이후로 나하고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은 건 알고 있습니까.”

“그건…… 아시겠지만 제가 되게 바빠져서요.”

인공지능만큼 우리는 말끔하고도 빠르게 대답했다.

민망스러운 마음에 우리는 공연스레 사원증만 매만졌다.

“화보도 있고 저희 프로모션도 있어서.”

변명처럼 우리의 말이 수없이 덧붙여졌다.

“엘리베이터 왔네요.”

우리가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면 여러 말들이 끝없이 달라붙었을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반갑게 맞는 우리의 얼굴이 굳었다.

엘리베이터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단둘이다.

“탑시다.”

건우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왜 하필…… 단둘이냐고!’

흘러내리는 마음을 숨기면서 우리는 건우를 봤다.

우리도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지만, 당혹스러움을 얼마나 감출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다들 기다리겠네.”

우리는 건우의 무심한 목소리가 꼭 자신을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서 고백의 답을 달라는 것처럼.

우리는 굳게 마음을 다잡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천천히 닫혔다.

건우는 멀찍이 서 있던 우리에게로 한 걸음에 다가섰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건우가 우리의 바로 옆에 서려던 참이었다.

“차장님.”

“예.”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직 확신이 없어요.”

가까워지는 거리만 보던 우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단숨에 우리의 걸음이 멈췄다.

“잘 할 수 있을지. 정말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 전부 자신이 없어요.”

“…….”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우리가 고개를 돌려 건우를 봤다.

“주신 고백을 좀 조용히 생각해볼 생각.”

우리의 말은 묵직하게 엘리베이터에 번졌다.

복작한 머릿속은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한 사내연애.

사내연애의 위험부담.

건우의 과거와 자신의 마음.

모든 것들이 뒤엉켰고 정리되지 않았다.

“결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잖아요.”

우리의 말은 얼었던 엘리베이터 분위기를 천천히 녹였다.

“고마워요.”

“뭐가요.”

“아직 거절은 아니니까. 조금은 희망이 있는 것도 같아서.”

건우의 목소리는 한결 밝아보였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

“나도 날 제어하기가 쉽지 않네요. 자꾸, 성급해지고.”

건우의 말에서는 진심이 묻어나왔다.

건우는 스스로도 답답했다.

그토록 목이 빠져라 답을 채근해대는 자신의 모습에.

“본래 그러잖아요. 고백하면 얼른 대답 듣고 싶고.”

“그럽니까.”

“당연하죠. 성적을 기다릴 때의 마음이랄까. 면접결과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의 말은 건우를 다독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열심히 참아보겠습니다.”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나선 건우가 뒤를 돌았다.

“잘 참을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훈훈한 미소가 건우의 얼굴을 돌았다.

일평생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미소였다.

엘리베이터라도 닫힐까.

건우는 까맣게 탄 속을 숨기면서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었다.

얼빠진 얼굴로 건우의 미소를 보던 우리가 재빨리 카페로 향했다.

건우에게 현혹됐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타네. 정말…….’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건우는 카페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우리를 바라봤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시간이 느리게 걷는 것만 같았다.

기다리는 순간순간이 설레고도 무서웠다.

우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건우는 처음으로 간절히 바랐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당신의 순간에 살아있길.

숨 쉬어볼 수 있길.

설령. 지나친 욕심이라고 해도.

***

일본 출장 전날.

우리는 침대에 캐리어를 펼쳤다.

허리춤에 손을 대고는 하드 캐리어를 바라봤다.

얇은 옷도 챙겼고 화장품 서랍에 차곡차곡 모아뒀던 샘플도 잘 담았다.

비상약부터 잠옷까지 담았는데도 캐리어는 빈 것처럼 보였다.

“우산도 챙겼고, 지퍼백도 있고…… 컵라면!”

짐을 살피던 우리는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얼굴이었다.

우리가 거실로 나가 찬장을 열었다.

“엄마. 우리 컵라면은?”

“그때 다 먹었지.”

“두 개는 필요할 것 같은데…….”

“내일 공항 가서 사.”

“정신없을 것 같아서.”

한참 고민을 하던 우리가 방을 쳐다봤다.

“그냥 사와야겠다. 편의점 좀 갔다 올게.”

우리가 지갑을 들고는 결국 집을 나섰다.

전부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마음 편했기 때문이었다.

슬리퍼로 뛰쳐나온 발이 유난히도 시렸다.

우리는 내달리듯 편의점으로 향했다.

뽀얀 입김이 연거푸 흘렀다.

“동상 걸리겠네.”

우리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난방에 얼었던 몸이 녹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진지한 얼굴로 진열대에 정갈하게 놓인 컵라면을 살폈다.

보기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았다.

우리는 얼었던 손을 녹이면서 컵라면을 몇 개 골랐다.

위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컵라면을 집은 우리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편의점 주인의 옆에 있던 노파가 우리의 뒤를 쳐다봤다.

희끗한 노파의 백발이 따뜻한 바람에 흔들거렸다.

우리의 뒤를 보는 노파의 눈은 가늘어졌다.

노파의 눈에 교복을 입은 민우가 보였다. 분명, 귀신이었다.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승을 떠도는 영혼.

“힘 좀 내봐라. 잘 쫌 무까지구로?”

노파는 끙끙거리고 있는 민우를 보면서 말했다.

잘 묶이지 않은 실에 민우는 힘겨워보였다.

“붙들고만 있으면 무슨 사달이 나도 난데이.”

노파는 마냥, 걱정스러웠다.

제 쪽을 보고 하는 노파의 말에 우리가 뒤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우리의 표정에 편의점 주인이 노파를 말렸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편의점 주인은 노파를 말렸지만 노파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의 뒤를 향해있었다.

“문디 머스마. 억지로 인연 잡는다고 뭣이 해결이 되겠노.”

노파가 다그치듯 말했다.

‘억지로 인연을 잡아서 탈이 나는 거라고 그랬다니까.’

컵라면을 받아든 우리가 짐짓 멈췄다.

미순의 말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뒤를 쳐다 보던 우리가 다시 노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을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노파의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렸다.

“할머니.”

“와.”

“인연을 잘 묶을 방법은 없나요. 억지로 잡으면 탈이 난다던데.”

우리의 물음에 노파가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기야 기스 난 맴이 나으면 잘 무까질지도 모른다 카이.”

노파는 우리의 팔목을 잡았다.

노파의 손등을 타고 이어지는 화상 흉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녹아서 뒤엉켜버린 살은 손등을 타고 팔까지 길게 이어졌다.

우리는 노파의 손등에서 시선을 옮겼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면…….’

우리는 노파의 말을 곱씹었다.

“그쟈?”

노파가 우리의 뒤를 넘겨보며 되물었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노파의 주름이 깊어졌다.

우리도 제 뒤를 돌아봤다.

설핏 민우가 생각났다.

붉은 실을 꼭, 잡고 있었던.

미안하다고 구슬프게 말하던 민우가.

‘대체 누가 상처가 났다는 걸까.’

우리는 컵라면을 든 채로 눈만 껌뻑거렸다.

답을 알 수 없는 수십 가지의 의문이 우리에게 지독하게 달라붙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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