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21화 (21/102)

제 21화. 건우와 코끼리 곱창의 상관관계

건우의 고백에 우리가 한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면서 황급히 일어났다.

‘설마…… 싸우기라도 한 거야?’

우리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유난히도 흐트러졌었던 건우의 넥타이가 생각났다.

뜨겁게 불타는 낮이 아니라 격렬한 사랑싸움을 벌였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고백을 하는 건 아니지!

“이러셔도 됩니까.”

우리가 젓가락을 테이블에 힘차게 내려놓고는 말했다.

꼭, 사랑과 정의를 지키는 전사처럼 보였다.

“남친도 있으신 분이!”

건우를 몰아치는 우리의 우렁찬 목소리에 일순 가게가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건우에게 쏟아졌다.

여친이 아니라 남친이라니…….

호기심과 선입견에 범벅된 눈빛이었다.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던 건우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운이 돌았다.

예상에 없었던 반응이었다.

알겠다거나 싫다거나. 적어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반응까지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체…….

건우는 회초리라도 든 훈장에게 따끔하게 혼이라도 난 기분이었다.

“남자친구는 대체 뭡니까.”

건우가 되물었다.

“그거는……!”

우리가 짐짓 말을 멈추었다.

남들과 약간 다른 사랑을 하는 건우의 비밀을 만천하에 떠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끓는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자리에 앉았다.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사람들의 시선이 뿔뿔이 흩어졌다.

가게는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우리는 묵직한 의자를 끌고 건우에게 다가섰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꺼낼 모양새였다.

우리가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처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잔을 채우던 호박색의 맥주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장님 취향은 충분히 존중합니다.”

“내 취향도 알고 있습니까.”

“네. 근데 존중하고 바람은 완전히 다르죠.”

“대체 뭐가 바람이라는 건지. 들어나 봅시다.”

건우의 말에 우리는 심각하다는 눈빛을 쏘아댔다.

“이거는 진짜 배신이에요. 그 분하고 사귀시면서 무슨 연애를 또 하시겠다고…….”

눈물을 찍어낼 성민을 생각하던 우리가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같이 좀 압시다.”

“네?”

“나하고 사귄다는 그 사람.”

유리컵 입구를 매만지던 건우가 무감이 물었다.

당당한 건우의 태도에 우리가 헛웃음을 쳤다.

“라울 출판사 대표님요.”

“설마…… 지금 한성민 말하는 겁니까.”

“네.”

우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삽시간에 건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성민과 사랑을 불태우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한성민이라……. 그건 상상하기도 싫은데.”

건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한성민하고는 그냥 친구사입니다.”

“분명히 그때 두 분이 살도 섞고 사셨다고…….”

“살기는 했죠.”

우리를 보는 건우의 눈길은 올곧았다.

한 치의 거짓말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각방에서 잘.”

“아니. 그리고 또……!”

우리는 자신이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꺼내려다가 말았다.

야릇한 자세로 건우의 뒤에 달라붙어있던 성민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곱창을 지글지글 불태우던 열기가 우리의 얼굴을 훅, 적셨다.

우리의 얼굴은 삽시간에 터질 것처럼 새빨개졌다.

“무슨 상상이라도 합니까.”

“아뇨. 상상이 아니라…….”

수습을 하려고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의 손은 애처로워 보였다.

격정적이었던 그날의 자세를 묘사라도 하듯 민망스러운 손 움직임이었다.

두 사람 사이로 옅은 침묵이 켜켜이 쌓였다.

우리는 급히 맥주만 들이켰다.

“확실히 말하죠.”

건우가 우리를 바로 쳐다봤다.

건우의 눈빛은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짙은 밤하늘에 뜬 조각달과 마주한 것처럼.

“남자한테 취미 없습니다.”

우리를 끝없이, 쫓으면서.

“혹시 토끼라면 모를까.”

현혹적인 미소가 건우의 입가에 돌았다.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빈 잔을 잡은 우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맙소사! 그럼 진짜 고백이었어?’

뒤늦게 우리는 상황을 파악했다.

건우를 보는 우리의 눈은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모든 것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빈 잔을 타고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방울조차 얼떨떨한 생각을 깨주지 못했다.

‘그냥, 좋아합니다.’

건우의 말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좋아한다는 말이 우리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우리는 늘 조용했던 마음이 시끌시끌한 기분이었다.

‘좋아해서.’

방심한 틈에 밀려든 건우의 말이 무섭도록 빠르게 우리를 파고들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끈적끈적한 침이 유난히도 뜨겁게만 느껴졌다.

‘우리 연애합시다.’

귀를 때리는 그 말에 우리는 살짝 의자를 들었다.

“도망가는 겁니까.”

낮은 건우의 목소리가 우리의 걸음을 잡았다.

“도망은요. 무슨 도망이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말끝이 떨렸다.

걸음을 멈춘 우리는 의자를 든 채로 엉덩이를 빼고는 건우를 쳐다봤다.

누가 봐도 어정쩡한 도망자의 자세였다.

“옆에 있어요.”

눈발처럼 허공을 흩날리던 건우의 말이 우리에게 녹아들었다.

입술을 깨물던 우리의 마음도 녹아내렸다.

들킬 것만 같았다.

요란하게 뛰어대는 마음을.

정말, 들킬 것 같아.

‘근데 왜 이렇게 심장은 나대는 건데.’

우리는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간만에 받은 고백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지러울 만큼 시끌시끌한 가게와 열기에 바짝 오른 취기 때문일 수도.

우리는 서둘러 뒷걸음질을 쳤다.

가까워졌던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다시 멀어졌다.

“사장님, 저희 맥주 한 병만 더요!”

우리가 맥주병을 힘차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은 술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직원이 잽싸게 맥주를 테이블에 두고는 사라졌다.

우리가 잔을 기울여 맥주를 따랐다.

투명한 유리잔 속에 있던 기포가 톡,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타는 갈증에 우리는 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차가운 맥주도 벌렁거리는 마음을 금세 식히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고백과 혼란스러움이 후텁지근하게 우리를 휘감았다.

오직 손가락만을 타고 선득한 기운이 번졌다.

‘괜찮습니까.’

우리는 건우를 가만히 쳐다봤다.

애달프게 아버지에게 묻던 건우의 말이 설핏 귓가를 스쳤다.

‘거기…… 있습니까.’

우리는 걱정됐다.

‘그 불 속에…….’

정말 건우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도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잘못 손을 스칠 때마다 펼쳐질 건우의 과거를 품을 수 있을까.

맞잡은 손을 타고 번질 온기를 모조리 포기할 수 있을 만큼 건우를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온갖 생각이 우리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좋아하는지.

건우의 과거를 견딜 수 있을지.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이 가지 않았다.

모르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모르겠다. 정말, 하나도.

우리는 한참 건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차장님.”

빈 잔을 비장하게 내려놓은 우리가 건우를 봤다.

“제가 왜 마음에 드시는 건데요.”

우리의 질문이 곧장 건우에게 날아들었다.

“음…….”

고민이라도 하듯 건우가 말을 끌었다.

‘설마…… 착각한 거 아니야?’

우리의 마음에 작은 의심이 불쑥 솟았다.

이웃 간에 솟은 미운 정을 좋아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음……?”

건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우리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얼굴인가. 빵빵한 재력은…… 아니겠고. 그럼 뭐…… 성격?’

잔뜩 기대한 얼굴로 우리는 건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우리의 눈에서는 붉은 레이저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멋있어서.”

“멋…… 네?”

당황한 우리의 목소리가 삐끗했다.

“제가요?”

“예.”

“대체 뭐가 멋있다고…….”

“여러모로.”

내심 달달한 대답을 기다렸던 우리는 맥이 탁, 풀리는 것만 같았다.

두루뭉술한 건우의 말이 달갑지 않았다.

실망한 얼굴로 우리는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곧추세웠다.

건우의 대답은 빵점짜리 대답이었다.

정말, 불만족이다.

불만족.

완전 불만족!

“그런데 좋아하는 이유가 꼭 필요합니까.”

건우가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결의에 찬 얼굴로 우리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우리는 기어코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캐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고우리라서.”

가게를 가득 채운 고소한 연기 속에 건우의 말이 번져나갔다.

“그게, 전부입니다.”

“…….”

“좋아하는 이유.”

건우의 말이 천천히 물들었다.

훈훈한 봄바람에 눈이 녹아내린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흐늘거렸다.

우리는 건우의 시선을 피하면서 불판에 있던 막창을 열심히 질겅거렸다.

입 안 가득 부추를 밀어 넣는 우리는 여전히 멍한 눈빛이었다.

“고민 중입니까.”

“네. 쉬운 문제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테이블에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동그란 불판의 중앙에는 기름이 고여 있었다.

눌어붙은 양파도 우리의 마음처럼 흐늘거렸다.

기름기가 도는 입술을 닦고는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드셨으면 일어날까요.”

“그럽시다.”

우리가 커다란 봉지에 있던 건우의 외투와 가방을 꺼내 건넸다.

“잘 고민해보길 바라죠.”

코트를 입으면서도 건우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를 향했다.

“우리 연애에 대해서.”

건우의 말이 우리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오래는 못 기다릴 것 같습니다.”

“…….”

“내가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어서.”

건우가 계산서를 들었다.

좁다란 테이블을 나서는 건우의 뒷모습은 덤덤해보였다.

멀어지는 건우의 모습에 우리의 입에서 안도감을 품은 밍밍한 날숨이 흘렀다.

“차장님.”

우리의 말에 건우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부랴부랴 좁은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왔다.

“답, 벌써 나온 겁니까.”

“설마요. 답은 몰라도 계산은 제 꺼라서.”

우리가 빠르게 건우의 손에 있던 계산서를 가져갔다.

“곱창은 제가 쏩니다.”

진지한 분위기를 풀면서 우리가 가볍게 말했다.

“사장님. 계산할게요.”

우리가 카운터에 계산서를 내밀었다.

결제를 끝낸 두 사람이 가게를 나섰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눈은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구름 위의 세상처럼 세상은 온통 하얬다.

진한 곱창냄새만 솔솔 두 사람의 코끝을 간질였다.

“눈 정말 많이 오네요.”

우리가 불쑥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좀 더 기다렸다 가겠습니까.”

“네. 조금만요.”

두 사람은 처마 아래에서 눈 내리는 풍경을 봤다.

함박눈이었다.

눈은 폭신폭신하게 세상을 뒤덮었다. 참 예쁘고 탐스러운 눈이었다.

차가운 눈발 사이로 건우의 입김이 번졌다.

뒤이어 번진 우리의 숨도 건우의 숨에 뒤엉켰다.

건우가 약간 고개를 돌려 우리를 봤다.

‘우리 연애합시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건우도 얼마나 떨렸는지 몰랐다.

온갖 대회를 나갈 때도 떨린 적이 없었던 건우였다.

과녁만을 바라보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면 최고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날린 화살은 좀 달랐다.

숨을 멈추고 집중을 해도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작은 눈빛에 담긴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도 없었다.

어려웠다.

미지의 영역을 마주한 것처럼.

“정말 펑펑 내리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건우는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결과를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없는 세상에서는 더는 살아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동안 잘 살아왔으면서.

정말 우습게.

“그래도 참 예쁘네요.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고.”

“그러게요.”

건우는 손바닥에 내려진 눈을 말아 쥐는 우리는 보고는 대답했다.

조바심을 누르면 욕심이 생겨났다.

별처럼 빛나는 당신을 옆에 두고 싶다는 욕심.

“예쁘네요.”

예쁜 당신을 지켜주고 싶다는 욕심.

“……정말.”

건우의 눈길은 우리에게 머물렀다.

건우의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적셨다.

사방을 밝힌 불빛이 두 사람을 적셨다.

펄펄 내리는 눈을 두 사람은 한참 바라봤다.

우리를 보던 건우도 새하얀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부셨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토록 눈부신 사람은 처음이라…….

그래서 네가, 욕심 났나보다.

***

사락사락 내리는 눈이 밤거리를 적셨다.

건우가 우산을 펼쳤다.

눈발은 더욱 거세졌기 때문이었다.

좁은 우산이 두 사람을 품었다.

비스듬한 우산살을 타고 눈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이 걸을 때마다 밀착된 두 사람의 몸이 스쳤다.

뽀드득뽀드득…….

하얀 눈길을 밟는 소리만 컸다.

건우는 우리의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건우의 어깨는 축축하게 젖어갔고 적당한 긴장감이 두 사람을 적셨다.

우산 속의 분위기는 가게를 가기 전보다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고우리씨.”

“네?”

“집에 가면 뭐합니까.”

“글 좀 쓰려고요. 눈도 오고 술도 마셨고…… 딱 감성적이잖아요.”

우리는 당장 글의 신이라도 모실 기세였다.

밤마다 글을 쓰는데 몸이라도 축이 날까.

우리를 보는 건우의 눈빛은 걱정스럽게 바뀌었다.

“잠은 언제 잡니까.”

“졸리면 바로 잘 것 같아요. 아마도.”

우리는 뒷말을 급히 덧붙였다.

가끔은 졸린 기운을 억지로 털어내면서 글을 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우리는 빙글 미소를 지었다.

지하철역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지금도 충분히 졸려 보입니다.”

우산에 있던 눈을 털던 건우가 순간 우리에게 눈을 맞췄다.

‘왜 이러는 거야. 사람 떨리게.’

건우의 작은 움직임도 우리에게는 큰 파동을 일으켰다.

우리는 졸음을 몰아내려는 것처럼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가면 자도록 해요.”

건우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번졌다.

“뭐…… 노력은 해볼게요.”

“노력 말고.”

건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건우에게 소설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의 건강이었다.

스캔하듯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건우의 눈길에 우리가 살짝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잘게요. 잡니다. 그럼 됐죠?”

우리가 백기를 든 것이었다.

건우는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재우려면 얼른 가야겠네.”

건우가 지하철역으로 들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차장님?”

우리가 건우를 붙잡았다.

난감하다는 얼굴로 우리는 건우를 쳐다봤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우리는 건우의 가슴팍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짐짓 말끝을 당기는 우리의 말에 건우의 심장이 뛰었다.

머뭇거리는 우리의 모습이 건우의 애간장을 녹였다.

우산 손잡이를 잡은 건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건우는 우리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대로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달뜬 열기가 건우의 몸을 물들였고 건우의 절박함은 더욱 강해졌다.

굳은 침이 건우의 목울대를 타고 내려갔다.

‘고민 중입니까.’

‘쉬운 문제는 아니잖아요.’

지독한 고민이 끝났을지도 몰랐다.

건우는 눈에 젖은 모든 밤의 풍경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짧은 침묵이 혼을 뺄 만큼 길게 느껴지는 순간.

“고민, 끝났습니까.”

건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는 말이 간절했다.

그 말이 우리에게 나온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까.

거절한다면.

정말 그대로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건우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진정으로 탐나는데.

눈부신, 네가 이토록 탐나 죽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던 우리의 입술이 떨어졌다.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건우의 가슴팍에 머물러있었다.

“코끼리가…….”

우리가 조심스럽게 건우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건우의 재킷과 코트에 꽁꽁 가려져있던 글자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코끼리

그야말로 선명한 순백의 글자였다.

우리의 말에 건우는 고개를 약간 숙여 제 가슴팍을 봤다.

남색의 앞치마가 위화감 없이 건우에게 둘러져있었다.

‘코끼리가 왜 거기서 나오는데?’

예상하지 못한 앞치마의 등장에 건우의 얼굴이 굳었다.

“……!”

건우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앞치마 밑자락을 들었다.

허리를 조른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설마하니 앞치마를 두른 채로 가게를 나섰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건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반짝거리는 신호등 불빛만큼.

실수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던 건우였다.

꼼꼼하고 정확하게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잔뜩 긴장해 앞치마를 두른 채 가게를 나서버렸다.

웃음조차 흘리면서 가볍게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건우는 우왕좌왕이었다.

‘……제길.’

건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멋진 모습만 보여도 부족한 마당에 앞치마를 두른 채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라니…….

부끄러움은 건우의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차가운 바람에 앞치마가 펄럭거렸다.

코끼리 곱창

앞치마에 새겨진 강력한 글씨를 자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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