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18화 (18/102)

제 18화. 가슴팍에 찍힌 붉은 립스틱

미순의 추진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알음알음으로 맞선 자리를 성사시켰기 때문이었다.

맞선 상대는 유명 로펌에 다니는 변호사라고 했다.

화목한 집안에 유명한 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한 수재라고도 했다.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성격만큼은 최고라고 들었다면서 미순은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맞선 상대를 칭찬했다.

우리는 미순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적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눈을 한 번 딱 감고 맞선을 보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여덟 시에 뵙겠습니다.

의뢰인과의 약속을 잡는 것만큼 맞선 상대의 메시지는 사무적이었다.

급하게 성사된 자리만큼 약속 시간과 장소도 빠르게 정해졌다.

“잘하고 와.”

“잘은 무슨…….”

“괜찮다고 했다니까.”

미순이 출근을 하는 우리의 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쳐주었다.

우리는 몸의 굴곡을 살리는 쫀쫀한 검은색 니트에 버건디 컬러의 치마를 입었다.

온기를 품은 회색의 울 코트를 미순은 단단히 여며주었다.

“갑니다.”

“잘 웃어주고. 첫인상이 중요해. 적당히 말에 반응도 해주고.”

“알았어. 적당히 하고 올게.”

높은 힐을 신고는 우리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연달아 쏟아지는 미순의 맞선 조언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불편한 차림에 궁싯거리면서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내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맞선을…….”

우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문규와 헤어진지도 얼마 되지 않은 마당에 맞선이라니…….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잔뜩 힘을 준 차림새에 한숨을 흘리면서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1층.

건조한 얼굴을 쓸어내리던 우리가 눈을 의심했다.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 익숙한 뒤태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훤칠한 키, 광활한 황야처럼 널찍한 어깨, 다부진 몸매…….

흔하지 않은 뒤태를 바라보던 우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강차장님은 아니겠지.’

체크무늬의 회색빛 코트가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제 마트에서 선보였던 꾀죄죄한 모습에 우리는 건우를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가짜 연애 제안은 최대한 외면하고 싶기도 했고.

손목에 있던 가죽시계를 보던 건우가 뒤를 돌았다.

건우가 아니기를 바랐던 우리의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공동현관문이 힘없이 열렸다.

“출근합니까.”

우리를 보던 건우가 덤덤하게 물었다.

“네. 차장님은?”

“나도 출근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건우는 방금 집을 나선 것처럼 말했다.

우리와 함께 출근하려고 꼭두새벽부터 한참 아파트 공동현관을 서성거렸다는 말은 일체 꺼내지 않았다.

망부석처럼 우뚝 서 있었던 통에 건우의 다리는 저릿했다.

그래도 건우는 마냥, 좋았다.

우리와 함께 출근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린 기운도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나사라도 하나 빠진 사람처럼 실실거릴 수 있을 만큼 건우는 그냥, 즐거웠다.

공동현관에 흐르던 냉기조차도.

“잘됐네. 같이 출근합시다.”

“아…… 같이요?”

놀란 우리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아침부터 직장 상사를 만난 것도 충분한데 같이 출근이라니!

달가운 제안은 아니었다.

“싫습니까.”

“네…… 네? 아뇨!”

우리의 입술 사이로 어정쩡한 대답이 흘렀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이성과 본능의 격렬한 충돌 현장이었다.

“저는 근데 지하철을 탈 거라서요.”

우리가 대강 허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지하철을 탈 생각이니까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속내를 충분히 건우가 간파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건우와 나란히 출근을 하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건우는 HJ그룹 후계자라는 타이틀의 유력한 후보자였다.

신입사원인 선영보다는 건우의 쪽으로 마음을 기울인 직원이 많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건우는 직원들의 강력한 관심대상이었다.

그런 건우와 출근하는 일은 괜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지름길일지도 몰랐다.

“잘됐네. 나도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습니다.”

“네? 왜…… 굳이 지하철을……?”

우리의 진심이 쏟아졌다.

“환경보호에 동참해야죠.”

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생각지도 못한 신박한 대답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뜬금없이 등장한 환경보호라는 강력한 말에 대적할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죠. 지각하겠습니다.”

손목시계를 보던 건우가 채근하듯 말했다.

건우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낮은 계단을 내려갔다.

건우의 뒷모습을 보던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딱히 없었다.

건우와 함께 출근길에 오르는 것밖엔.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조용한 분위기에 우리는 괜스레 하늘을 힐끔 쳐다봤다.

눈이라도 내리려는 것처럼 하늘은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찬기를 품은 바람이 두 사람에게 밀려왔다.

건우는 코트를 여미는 우리를 쳐다봤다.

“춥습니까.”

“아뇨. 괜찮아요.”

우리는 코트를 한 손으로 꽉, 쥐고는 말했다.

아침 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가지런히 길가를 채운 앙상한 가지에는 손톱만한 작은 꽃봉오리가 몽글몽글 매달려있었다.

찬기를 품은 바람에 옹골진 연분홍 꽃봉오리는 가지를 힘껏 붙들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우리에게 발을 맞춰 걷던 건우가 입을 맴돌던 말을 겨우 뱉어냈다.

“저요?”

“예. 평소하고는 옷차림이 좀 다른 것 같아서.”

건우의 말에 우리는 약간 고개를 숙여 제 옷을 봤다.

건우의 질문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심플한 블라우스와 슬랙스만 고집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스타일이었다.

메마른 가지 사이를 뚫고 불어오는 바람에 우리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두툼한 코트도 막지 못한 바람에 우리의 몸은 차가워졌다.

쫙, 달라붙은 치마도 영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누가 봐도 업무를 보기에 편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아…… 약속이 좀 있어서요.”

우리가 말을 얼버무렸다.

“데이트라도 있습니까.”

건우의 말은 중앙부를 관통하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건우의 물음에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던 우리의 걸음이 멈추었다.

‘선. 안 봐.’

마트에서 미순에게 단호하게 했던 말이 우리의 뇌리를 스쳤다.

우리는 미순의 말을 건우가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우가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데이트는요.”

“그럼 맞선이라도 봅니까.”

대강 상황을 넘어가려던 우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꼭 바람이라도 피우려던 현장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아무 관계도 아닌데…….

강차장님 말대로 우리는 동료일 뿐인데.

그런데 왜!

‘좋아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그 망할 가짜 고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말해서는.

심란하게.

우리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건우를 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건데!’

우리는 당황한 얼굴로 건우를 봤다.

과녁의 중앙부에 집중하는 것처럼 단단하고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건우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엉겨 붙었다.

건우의 눈동자는 깊은 심해처럼 까맸다.

온갖 어두운 색깔이 뒤범벅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직하지만 위태로운 건우의 눈빛은 우리를 채근해댔다.

당장 대답을 듣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네.”

우리는 마수에라도 걸린 것만 같았다.

이토록 술술 대답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우리라면 열을 내면서 사적인 일에는 관심을 끄라고 야무지게 한소리를 했을 것이었다.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조근조근 혼을 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건우의 말에는 이상하게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모든 말에 대답을 해야만 하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만 같았다.

난감한 얼굴로 서 있던 우리가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어머니가 하도 부탁을 하셔서요.”

고우리, 입 좀 다물어!

“저도 딱히 결혼 생각은 없는데……. 너무 거절을 하는 것도 도리는 아닌 것 같아서요.”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

제발! 조용하자고.

“맞선을 간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

“그냥, 경험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터무니없이 쓸모없는 정보까지 우리는 털어놓고 있었다.

“그럼 저희 갈까요. 정말 늦을 것 같은데.”

우리가 제 손목에 있던 얇은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맞선이라는 화제를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출근밖에 없었다.

우리가 성큼 계단을 올랐다.

연거푸 뒤를 돌아보던 우리가 계단 턱에 발이 걸렸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실수였다.

건우에 대한 과한 관심과 방심이 만들어낸 실수.

건우는 고꾸라지려던 우리의 팔을 급히 잡았다.

몸의 중심을 잃은 우리는 건우의 품에 그대로 안겨버린 꼴이 됐다.

“……!”

우리가 고개를 들고는 건우를 봤다.

건우가 잡은 팔이 전기에라도 오른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건우의 눈빛은 우리에게 묘한 여운을 남겼다.

우리가 옆으로 고개를 내뺐다.

이거 무슨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이냐고!

“죄송합니다.”

우리는 황급히 건우의 품을 나왔다.

“급히 올라가느라.”

“고우리씨.”

건우의 낮은 목소리가 우리를 잡아끌었다.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방심을…….”

건우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여러모로.”

우리는 건우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했다.

출근으로 분주한 사람들이 정신없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계단을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하철 시간표를 봤다.

다음 열차를 놓치면 정말 지각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도 건우와 나란히!

“우선은 저희 다음 열차 타야할 것 같아요. 차장님.”

“그러죠.”

두 사람의 걸음이 빨라졌다.

분주하게 움직인 두 사람은 간신히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월요병으로 얼룩진 지옥의 출근길이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인파에 두 사람은 한껏 가까워졌다.

우리의 굴곡이 고스란히 건우에게 느껴졌다.

건우는 짐짓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쉬지 않고 전해지는 우리의 향기와 굴곡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빼곡한 사람들의 틈 속에서 건우는 마음을 다잡는 숨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괜찮습니까.”

건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우리는 늘 있는 일에 놀랍지도 않다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열렸다. 입구에서 사람을 미는 힘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휘청거렸다.

꼭, 강력한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

꾸역꾸역 지하철에 몸을 구기는 사람들의 힘에 우리와 건우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순간적으로 쏟아진 힘에 우리가 건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았다.

죄송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지하철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꽉, 찼다.

가슴팍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우리의 뜨거운 숨결에 건우의 갈망이 일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건우는 속으로 조선의 왕 이름을 주문처럼 속으로 뱉어내고 있었다.

욕정을 누르기 위한 나름의 맹렬한 몸부림이었다.

‘강건우, 참아. 여기서는…… 정신 차리라고.’

건우는 고개를 살짝 들고는 달뜬 숨을 뱉어냈다.

끓는 욕망을 누르던 건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우리의 옆에 있던 남자가 우리에게 슬금슬금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방심할 수가 없네.’

건우는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소리 없는 으르렁거림이 건우의 눈빛을 타고 흘렀다.

그야말로 살벌한 맹수의 눈길이었다.

야수에게서 도망치는 사람처럼 흠칫 놀란 남자는 건우의 시선을 피해 잽싸게 등을 돌렸다.

“고우리씨.”

“네.”

“퇴근길도 이럽니까.”

“보통, 그렇죠.”

우리의 말에 건우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이토록 가깝게 살을 부대끼고 있다니…….

건우는 퇴근길도 꼭, 지하철을 이용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누군가 우리에게 접근이라도 할까.

건우는 두 팔을 약간 들었다.

경계선이었다.

누구에게도 우리의 곁을 내어줄 수 없다는 단호가 의지가 담긴, 분계선.

“이번 역은 양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지하철 방송이 나왔다. 지옥의 끝이 보였다.

지하철의 문이 열렸다.

스크린도어가 열리기 무섭게 지하철에 있던 사람들이 내렸다.

인파에 밀려 나온 우리와 건우는 나란히 회사로 들어섰다.

건우가 손에 들고 있던 재킷과 코트를 입었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건우의 와이셔츠 가슴팍에 선명하게 찍힌, 우리의 붉은 립스틱을.

***

우리와 건우는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다.

회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말 동안 묵혀있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던 우리가 건우에게 긴급회의를 요청했다.

혹시라도 문규가 프로젝트를 망쳤을 때의 대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회의실로 들어섰다.

우리는 먼저 콜라보가 가능한 업체 추가 리스트를 건우에게 내밀었다.

리스트를 넘겨보던 건우가 검은색 재킷을 벗었다.

후끈거리는 회의실의 열기가 갑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태진 백화점이나 아예 신촌 거리……!”

한창 설명을 하던 우리의 얼굴이 굳었다.

건우의 가슴팍에 붉은 립스틱이 선명하게 물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익은 색깔이었다.

아침에 꾹꾹 발랐던 연한 핑크빛이 도는 적색.

“왜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건우의 시선은 우리를 따랐다.

두 사람의 시선은 건우의 가슴팍에 머물렀다.

인파 속에서 허우적대던 기억이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다.

“지하철에서 묻은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죠.”

“퇴근하고 전달주시면 세탁해서 드리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죠.”

옅은 회색의 와이셔츠를 보던 건우가 덤덤하게 말했다.

“꽤…… 쓸모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건우의 말에는 여유가 있었다.

당황스러움도 없었고, 립스틱을 지우기 위한 별다른 노력도 없었다.

바람 빠지듯 내뱉은 말에 우리만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붉은 립스틱이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건지.

건우의 생각은 정말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곤혹스러우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

“잘못하다가 오해할 수도 있고. 오해는 또 나쁜 소문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단속, 잘 해보겠습니다.”

건우는 가슴팍에 얼룩진 립스틱을 걱정하는 우리의 말을 단칼에 막았다.

“계속하죠.”

건우는 우리가 가지고 온 리스트의 장단점을 살폈다.

별일이 아니라는 무심한 눈길에 우리도 더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네. 일단은 계속 설명 드리겠습니다.”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시선은 건우의 가슴팍에 꽂혔다.

옅은 회색 와이셔츠를 물들인 립스틱의 색깔이 점점 진해지는 기분이었다.

꼭, 찬바람을 견뎌내면서 핀 붉은 동백꽃처럼.

플랜B부터 추후 마케팅 일정까지…….

우리의 말을 따라서 건우는 종이를 넘겼다.

우리가 가져온 타임테이블은 깔끔하고도 빽빽했다.

CF와 화보뿐만 아니라 외부 프로모션까지.

신제품에 전력을 쏟아내는 일정이었다.

“우선은 차주까지 성운백화점 피드백을…….”

테이블에 있던 건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건우의 말이 잠깐 끊겼다.

-아직 일하는 중?

-그럼 1층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린다. 빨리 와.

-배고파. 배고파 죽어.

성민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끈질긴 집착에 건우는 결국 핸드폰을 봤다.

회사 근처에서 있다던 작가와의 미팅이 예정보다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건우가 손목시계를 봤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성운백화점 대답은 차주까지만 기다려보죠. 후에는 리스트업된 곳과 다시 미팅 일정 잡아보고.”

“네.”

“추가로 더 하실 말씀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던 회의가 끝났다.

“차장님, 식사는……?”

“오늘은 내가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합시다.”

재킷을 입은 건우가 일어났다.

맹랑하게 울어대는 핸드폰은 건우를 재촉해댔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건우에게 채찍질이라도 날리듯 성민의 메시지 폭탄이 이어졌다.

건우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유치하게.’

건우에게는 골치 아픈 메시지 폭탄이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우리의 눈에 핸드폰 화면이 보였다.

[한성민]

건우가 급히 회의실을 나섰다.

우리는 사라진 건우의 자리만 쳐다봤다.

평소 점심을 먹지 않았던 건우의 걸음을 재촉하게 만드는 사람은 분명…….

‘저는 건우 친구 한성민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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