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화. 입술에 눌어붙은 치약도 예뻐 보일 때
일요일.
해가 중천에 떴다. 밤새 글로 불태운 우리는 어머니 미순의 손에 끌려 집을 나섰다.
꾀죄죄한 몰골만은 숨기겠다면서 우리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우리는 슬리퍼를 끌면서 아직 칼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를 헤치고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슬리퍼가 뭐야. 슬리퍼가.”
“요 앞에 마트 가는 건데 뭐 어때. 누구한테 잘 보이겠다고.”
우리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면서 운전석에 탔다.
‘설마…… 강차장님이라도 만나는 건 아니겠지?’
우리가 고개를 내빼고는 열심히 건우의 차를 찾아댔다.
“뭐해. 출발 안가고.”
채근하듯 던진 미순의 말에 우리가 시동을 걸었다.
편의점 음식으로 배를 채우던 건우가 마트에 나타난 일은 죽어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안전벨트를 단단히 맸다.
조수석에 탄 미순이 장바구니를 무릎 위에 내려놓으면서 우리를 살폈다.
“고우리. 너 설마…….”
미순은 수상하다는 얼굴로 우리의 가슴팍을 봤다.
우리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가슴도 숨 좀 푹 쉬어야지.”
“미쳤어!”
우리의 팔을 세게 때리면서 미순이 빽, 소리를 내질렀다.
미순의 격한 반응에도 우리는 두툼한 후드에서 광명을 찾은 가슴이 만족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출발합니다. 어머니!”
힘찬 우리의 목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했다.
내뻗은 도로를 막힘없이 달리던 우리의 차가 점점 속도를 줄였다.
깔끔하게 주차를 마친 우리는 마트 안내직원들의 손짓을 따라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뱅글뱅글.
쉬지 않고 아래로 내려가던 우리는 차를 마트 입구 쪽에 주차했다.
기가 막히게 운수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주말에 마트의 입구를 섭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가뿐한 걸음으로 마트로 들어가면서 미선의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이 끄는 카트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근데 엄마 어제는 어디 갔었어?”
육류코너로 향하던 우리가 미순에게 물었다.
고기를 갈구하는 본능적인 걸음과 이성적인 물음의 대결이었다.
“점 보러.”
“아…… 거기 용하다는 곳? 설마. 거기서 내 점 봤어?”
“당연히 봤지. 네 점 아니면 내가 왜 갔겠니.”
우리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미순의 뒷말을 기다렸다.
점괘가 내심 궁금했다.
“잘 맞춰?”
“용하기는 개뿔. 성서방이 바람이 난다나 뭐라나……. 듣고 어이가 없어서. 참나.”
다시 생각해도 미순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연거푸 헛웃음을 뱉는 미순을 우리는 불안한 얼굴로 쳐다봤다.
미순에게 문규는 성서방으로 통했다.
5년이나 사귀었으니 당연히 가족이 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성서방이 뭐, 그럴 사람이니?”
미순은 잔뜩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미순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문규가 세상에서 가장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을 거라는 확신.
“충분히 그럴 놈이야.”
영롱한 마블링을 바라보던 우리가 넌지시 대답했다.
“우리 성서방이…….”
“그 고귀하신 성서방이 바람이 나셨대.”
기습적으로 들어온 우리의 말에 미선은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하늘이 무너졌다는 것만큼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회사 사람하고 났다더라고. 그 바람.”
우리는 별일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우리에게 문규는 더는, 별일이 아닌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남.
이제 우리에게 문규는 돼지고기보다 못한 존재였다.
우리가 열심히 고기를 살폈다.
목살부터 삼겹살까지…….
주린 배를 쓸어내리면서 돼지고기를 살피는 우리의 눈빛은 살벌하게 번뜩거렸다.
“언제부터. 회사 누구하고. 왜 말 안 했어?”
미순의 질문이 쉬지 않고 쏟아졌다.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좋은 일이든 아니든!”
“어쨌든 좋은 일은 아니야. 사장님, 저희 삼겹살 반 근만 주세요.”
“아이고. 개딸아. 지금 삼겹살이 목구멍에 넘어가?”
삼겹살이 잘 넘어간다는 것처럼 우리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날름 두툼한 삼겹살을 받아들고는 카트에 넣었다.
꼭 신줏단지라도 모시는 것처럼 신중한 손길이었다.
“그래서 가만히 뒀어?”
“발차기 한 방 크게 날려줬지.”
“내 쌍놈의 자식을……. 발차기 하나로 되겠어?”
“엄청 크게 날렸다니까.”
날렵하게 허공을 향해 발차기를 날리던 우리의 슬리퍼가 날아갔다.
둥그스름한 포물선을 그리면서 신나게 날아가던 슬리퍼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우리는 다리 하나를 든 채로 엉거주춤하게 슬리퍼를 향해 나아갔다.
콩콩.
그야말로 강시가 따로 없었다.
콩콩거리면서 슬리퍼를 주우려던 우리의 앞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는 목소리였다.
우리의 눈빛이 정처 없이 사방을 맴돌았다.
“그러니까 기력 회복에는 삼겹살 같은 명약이 없다니까.”
“됐다고.”
“아니. 내가 먹고 싶다고.”
“그럼 네 집 가서 먹어.”
사막만큼 건조하고도 심드렁한 목소리.
남 일에는 관심도 없다는 무심한 말투.
우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슬리퍼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는 자신의 쪽을 향해 곧장 걸어오고 있는 건우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나름의 은신술이었다.
‘제발, 사라져라. 가라. 나는 동상이다. 동상…….’
우리는 세상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무사히 강차장이 지나갈 수 있게 해주소서!
강추위에 꼼지락거리는 맨발도 안 돼.
꾀죄죄한 몰골은 더 안 돼!
거기에 지금…… 노브라라고!
“귀찮게 할 거면 그냥, 가라.”
“와. 실망이야.”
“실망도 네 동네 가서 해.”
“이럴 수가 있냐. 우리 사이에.”
우리는 건우와 성민의 말에 쫑긋 귀를 세웠다.
건우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간절한 기도가 통했다고 생각했다.
안도의 숨과 함께 들려온 불길한 인사를 듣기 전까진.
“윗집 총각인가. 맞네! 그때 우리 집에 왔던.”
미순이 반갑게 건우를 향해 인사를 날렸다.
“안녕하십니까.”
“어머! 웬일이야. 반가워요.”
두 사람의 다정한 대화에 우리가 움찔했다.
미순의 반가운 목소리가 건우의 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그날은 차도 한 잔 대접도 못 하고.”
“괜찮습니다.”
“친구하고 왔나 보네. 나는 우리 애하고 왔는데. 얘가…… 우리야!”
우렁찬 미순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슬금슬금 세 사람을 피해 앞으로 나아가던 우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무섭게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쥐구멍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꾀죄죄한 몰골로 마트에서 건우를 만났다는 것이 꿈이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우리는 해탈한 얼굴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애처로운 슬리퍼를 바라봤다.
“고우리!”
미순의 말이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다.
이 험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철면피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는 것.
위풍당당하게 건우를 반기는 것.
우리는 이 구역에서 진정한 미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고똘, 출격한다.
우리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슬리퍼를 잡았다.
구두라도 신는 것처럼 평온하고도 고상하게 슬리퍼에 발을 욱여넣었다.
노브라가 들킬까.
빠르게 후드티를 살펴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펑퍼짐한 후드에서는 가슴의 굴곡조차 보이지 않았다.
“차장님, 안녕하세요.”
“누구……?”
성민은 우리를 보면서 물었다.
“회사 사람.”
건우의 대답은 간단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직장 동료 말고 달리 정의 내릴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괜스레 허전했다.
무언가 불편하기도 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묘하게 아쉬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구면인데.”
성민의 간단한 말에도 우리는 날을 세우고 있었다.
“어디서 뵀는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성민은 말끝을 흐렸다.
해묵은 기억을 헤집어봤다.
열심히 기억을 헤집어 봐도 도대체 우리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요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저는 건우 친구 한성민이라고 합니다.”
“고우립니다.”
“아…… 고우리씨.”
“네. 강차장님 직장동료입니다. 말씀대로 뭐……. 회사 사람이죠.”
뒷말에 힘을 주는 우리의 모습에서 성민은 건우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낯선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건우의 향기라니…….
우리의 존재를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성민은 하나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틀림없다! 이 사람…… 분명, 제2의 강건우다!’
성민은 우리에게서 번지는 차디찬 분위기에 확신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게…… 일을 잘하신다고.”
“네. 뭐…… 적당하게 하는 편이기는 해서.”
우리는 성민의 칭찬을 덤덤히 받았다.
좋은 말을 사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민은 우리에게서 언뜻언뜻 건우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살벌한 우리의 말을 듣던 성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저도 잘 부탁할게요. 건우 집에 자주 출몰할 예정이라.”
성민은 특유의 친화력을 뽐내면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꽉, 성민의 손을 잡고 기선제압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괜히 잘못 손을 건드렸다가는 성민의 과거 속에 빨려갈 수도 있었다.
만약, 성민이 건우처럼 죽을 만큼 아픈 상처라도 가지고 있다면…….
‘아…… 답답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로 우리는 성민의 손을 빤히 쳐다봤다.
덩달아, 성민의 손을 보던 건우의 눈빛이 질투에 이글거렸다.
“네가 왜 내 집에 출몰해.”
건우가 성민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집이 내 집이니까.”
“헛소리 말고. 손 좀 치우지.”
“왜.”
성민은 건우를 놓아줄 수 없다는 것처럼 옭아맸다.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우리의 확신은 두터워졌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뼈가 시린 애처로운 솔로 앞에서 염장을 지르는 커플의 애정행각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거슬려.”
우리는 건우의 날이 선 목소리가 꼭,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단호하고도 차가운 말이었다.
우리는 둘 사이에 묘한 질투와 분란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번에 싸해진 분위기에 우리는 미순을 힐끔 쳐다봤다.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우리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미순에게로 걸어갔다.
카트를 잡은 우리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거슬리기는 뭐가 거슬리는데. 마트에서 사랑의 싸움을 하는 커플이 더 거슬린다!’
카트를 잡은 우리는 연신 툴툴거렸다.
속에서 열불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솔로의 마음을 쓰리게 만든 애정행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걸어 나가던 우리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어쩌라고.’
우리가 건우를 향해 불꽃 눈빛을 쏟아댔다.
우리와 건우의 눈길이 마주쳤다.
우리의 입가에는 치약이 허옇게 말라붙어있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수수한 우리의 얼굴도 건우는 마냥, 예쁘게만 보였다.
입술 양쪽에 메말라 붙은 치약조차도.
“그럼 월요일에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우리가 단정하게 끝인사를 날린 순간이었다.
“고대리님.”
건우가 우리를 부르면서 다가섰다.
“잠은 잘 잤습니까.”
“네. 그런데요. 그건 왜요.”
“입술이 튼 것 같아서.”
건우는 우리가 민망스럽지 않도록 최대한 돌려 말했다.
“입술이 왜……?”
건우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우리는 핸드폰을 들었다.
입술이 많이 텄나.
액정에 우리의 얼굴이 비쳤다.
입술 양쪽에 바짝 말라붙은 치약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진짜 치약이야?’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제가 밤을 새서요. 그럼 즐거운 쇼핑 되세요.”
우리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끝내고는 빠르게 카트를 끌었다.
한시라도 건우에게서 멀찍이 떨어질 생각이었다.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찰지고 요란하게 퍼졌다.
“쪽팔려. 쪽팔려!”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채소 코너로 들어선 우리는 주변을 살피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손가락에 살짝 침을 묻혀 입술에 눌어붙은 치약을 닦아냈다.
“잘생기기는 잘생겼는데.”
연달아 건우를 힐끔 쳐다보던 미순이 중얼거렸다.
“선도 곱고.”
“잘생기면 뭐해. 얼굴값이나 하지.”
“얘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네. 못생기면 꼴값해.”
미순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꼴값보다는 얼굴값이 낫지 않겠니.”
미순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미순의 지론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맛없는 음식은 맛있는 음식으로 잊을 수 있고, 나쁜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잊을 수 있다.
강력한 미순의 신념이었다.
건우와의 우연한 만남이 미순의 손길을 타고 순식간에 인연으로 둔갑할지도 몰랐다.
건우와의 관계를 열정적으로 가깝게 만들려고 애쓸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건우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괜히 연결시키지 마.”
우리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진짜 아니야.”
우리는 쌈 채소 코너에 있던 집게를 들고는 말했다.
집게발처럼 위협적이게 보이는 손짓이었다.
우리는 작은 봉지를 벌리고는 집게로 치커리를 집었다. 식감이 살아있는 케일도 담았다.
나쁜 사람을 잘 잊을 방법은 맛있는 음식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윗집이라 안 되겠네.”
미순의 말에는 아쉬운 기운이 녹아있었다.
“멀리만 있었어도 괜찮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채소를 담던 우리가 미순을 쳐다봤다.
미순은 가물가물해지려는 점쟁이의 말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인연을 멀리서 찾으라고 그러더라고. 그 점집 양반이.”
“왜.”
“안 그러면 사고나 괜한 구설수에 휘말릴 수 있다나.”
괜히 마음에 걸릴 말이기는 했다.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우리는 두둑하게 쌈 채소를 담은 봉지를 저울에 달았다.
가격표를 붙이면서 미순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그래도 괜히 찝찝하잖아.”
심드렁한 우리와는 달리 미순은 심각했다.
문규의 바람을 간파한 점쟁이의 말에 백퍼센트 신뢰가 갔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인연을 잡아서 탈이 나는 거라고 그랬다니까.”
“그럼 잘 좀 말해달라고 해봐. 잘생긴 사람으로 인연 부탁한다고.”
“이게 아직도 철이 없어요. 삼재가 겹친다는데 잘생긴 놈은 무슨!”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잖아.”
카트를 끌던 우리가 빙글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등을 향해 미순의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아릿한 등에 우리는 그저,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너한테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돼 죽겠구만.”
“그런 일 없어.”
“그러지 말고 부적이라도 좀 쓸 걸 그랬나.”
“부적 없어도 잘만 살 걸.”
천천히 움직이던 두 사람은 과일 코너에 멈췄다.
우리가 귤을 들었다. 새콤한 냄새가 향긋하게 코를 간질였다.
우리는 잘 익은 귤을 고르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일단은 선이라도 좀 보자.”
“무슨 얘기가 거기까지 가.”
“엄마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니. 올해까지 애인 없으면 여든은 넘어야 생긴다는데……. 일단 멀리서 찾으면 괜찮겠지.”
“그냥 솔로로 살겠습니다.”
우리가 한 손을 들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솔로 선포였다.
“내가 잘 알아볼게.”
우리의 말에도 미순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친구 아들을 전부 뒤져보겠다는 미순의 손을 잡아보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문규와의 이별을 내뱉은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대체 무슨 선을 보라는 건데!’
우리는 재빨리 바나나 진열대로 걸음을 옮겼다.
선을 보라는 미순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우리가 샛노란 바나나를 들었다. 바나나는 미순의 잔소리를 잊을 만큼 단 향기를 풍겼다.
우리가 시식코너에 있던 바나나를 먹었다.
단 기운이 입을 적셨다.
바나나 한 묶음을 산 우리가 고픈 배를 달래려 바나나를 하나 뜯었다.
길쭉하고 탐스러운 바나나를 입에 가득 넣은 순간이었다.
“……!”
빨간 딸기 한 팩을 들고 있던 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한껏 벌어진 우리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왜 하필 바나나를 뜯어 먹었나!
우리는 건우의 시선을 피하면서 슬그머니 남은 바나나를 봉지에 넣었다.
별일 아닌 일에도 뜨끔대는 이유는 모조리 직업병 때문이었다.
바나나는 바나나일 뿐인데!
“일단은 영숙이한테 물어봐야겠다.”
“선. 안 봐.”
“고집 부리지 말고 봐.”
멈췄던 실랑이가 다시 벌어졌다.
선이라는 말에 딸기를 들고 있던 건우도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안 나가.”
“그럼 너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아……. 갑자기 무슨 선이냐고.”
툴툴거리는 우리의 말에 건우는 천국과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안도와 불안이 건우의 속에서 요동쳤다.
“강건우. 상추 사야 된다니까.”
성민의 말에도 건우의 몸은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
“고기 파티 안 할 거야?”
성민은 고픈 배를 쓸어내리면서 물었다.
“……미치겠네.”
멀어지는 모녀를 보던 건우의 건조한 혼잣말이 허공을 물들였다.
건우는 삶의 격동기라도 마주한 얼굴이었다.
맞선.
고작 그 짤막한 단어가 불러일으킨 소용돌이였다.
건우의 속은 숯처럼 까맣게 타들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