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화. 가짜 고백, 가짜 연애?
우리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히 방심해버렸다.
조심했어야만 했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었던 우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진짜 돌겠네.”
낮게 읊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맹렬하게 허공을 날아가던 화살이 과녁의 중앙부를 정확하게 뚫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
우리의 눈앞에 건우의 과거가 눈앞에 펼쳐졌다.
백강 고등학교.
건우의 집에서 봤던 사진 속의 장소였다.
건우와 민우가 다정스럽게 서 있었던 곳.
사위는 어두웠다. 짙은 밤바람이 차갑게 흘렀다.
주변을 둘러보던 우리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수십 개의 작은 전구가 대낮처럼 밝은 빛을 쏟아냈다.
수없이 번지는 불빛은 건우의 얼굴을 물들였다.
사진 속에서처럼 건우는 양궁 장비를 두르고 있었다.
곧게 허리를 편 건우가 줄을 잡아당겼다.
‘강차장님?’
우리가 건우에게 다가섰다. 건우는 홀딩을 하고 있었다.
조준한 과녁을 정확히 날아들도록 건우는 잘은 숨을 가다듬었다.
흔들림 없이 곧은 자세였다. 밤바람도 건우를 휘청거리게 만들지 못할 것만 같았다.
모든 것들이 숨을 죽였다.
바람, 숨소리, 발소리…… 전부.
옅은 적막을 가르면서 건우가 줄에서 손을 놨다.
마침내, 화살이 마른 공기를 가르고는 힘차게 날아갔다.
정중앙. 명중이었다.
“강건우!”
무심히 건우가 새 화살을 빼들었을 때였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성민이 건우에게 다급하게 달려왔다.
“왜.”
“그러니까…….”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얘기해. 연습 중이니까.”
“지금 연습이 대수냐고. 지금…… 민우! 학원 갔냐.”
숨찬 호흡을 고르던 성민이 급히 물었다.
“걔 학원 갔냐고!”
“왜 또 어디서 봤냐. 학원 빠지지 말라고 어제 한소리…….”
“거기 지금 불났냐고!”
성민은 건우의 말허리를 단칼에 잘라내면서 소리쳤다.
성민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너진 희망에 걱정돼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짙은 정적이 양궁장을 우악스럽게 집어삼켰다.
“지금 무슨 소리야.”
“학원 있는 건물에 불이 났다는데……. 소방차고 구급차고 죄다 와서.”
“무슨 소리냐고.”
“거기 죽은 사람도 나오고 난리 났다고! 새끼야.”
소리를 내지르던 성민이 발을 굴렀다.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성민을 보던 건우가 활을 내려놨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건우는 양궁장을 나섰다.
민우와 아버지에게 번갈아 전화를 거는 건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건우를 보던 우리의 얼굴도 굳어갔다.
건우가 품은 죽을 만큼 두려운 마음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건우의 숨이 가빠졌다. 건우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정처 없이 민우가 있는 학원으로 향하던 건우의 귓가에 아버지 태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민우는 괜찮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건우가 애타게 물었다.
-우선은 연습 끝나면…….
“민우, 괜찮으면 하겠습니다. 괜찮습니까.”
-신경 쓰지 말고 연습부터 해.
“아버지!”
태석을 부르는 건우의 목소리가 커졌다.
처음이었다.
늘 태석의 말이라면 군말 없이 들었던 건우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자리까지 채우려고 밤낮없이 뛰었던 태석의 고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다.
집착적으로 태석이 양궁에 목숨을 걸더라도.
쉬지 않고 독하게 연습을 시켜도 건우는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이 망할 상황에서도 연습이라니…….
태석의 말에 비소가 흘렀다.
“불이 났다면서요. 민우…… 괜찮습니까.”
건우는 울컥 솟는 마음을 힘겹게 누르면서 재차 물었다.
-강건우! 내일 중요한 날이야. 선발전이라고. 잊었어?
“지금 민우, 어디 있습니까.”
-다른 생각 말고 연습이나 하고 있어. 그건 내가…….
“거기…… 있습니까.”
건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무거운 숨과 함께 뒤섞인 말이 한숨처럼 흘러내렸다.
“거기.”
-…….
“그 불 속에…….”
눈물을 삼킨 건우의 목소리는 축축했다.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새빨개진 건우의 눈에서 무거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슬픈 기운이 건우를 집어삼켰다.
건우는 주먹을 쥔 채로 죽을힘을 다해 울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마음을 찢는 고통과 괴로움이 건우를 짓눌렀다.
건우는 세상에 매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캄캄한 지하, 끝까지.
우리는 제자리에서 꿈쩍하지 않는 건우를 봤다.
건우는 민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고객의 전화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민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직접 가볼 수밖에 없었다. 굳은 침을 삼킨 건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덩달아 건우를 따르는 우리의 걸음도 빨라졌다.
살아있는 민우를 마주하고 싶은 갈망만이 건우를 지배했다.
건우가 힘차게 교문을 향해 내달렸다.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른 발걸음이었다.
건우를 쫓던 우리가 멈췄다. 우리는 무릎을 잡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는 점처럼 사라지는 건우를 보고만 있었다.
“아…….”
어둠이 일그러졌다.
지독하게 무르녹은 아픔이 우리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우리의 두 볼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렀다. 우리는 제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깊은 물 속에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목구멍이 턱, 막혔다. 잘게 내뱉는 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우리가 목을 쓸어내렸다.
가늠할 수 없는 아픔의 크기에 우리는 파묻혔다.
흐무러지는 사위를 보던 우리가 허공을 보고는 가느다란 숨을 흘렸다.
‘강민우…….’
우리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우리가 시린 눈을 감았다. 우리의 아랫입술이 애처롭게 떨렸다.
민우의 얼굴이 우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던 그 애가.
슬픈 얼굴로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던 그 애가 죽었다는 사실을.
민우는 죽었다.
온몸을 녹아내리게 만들 만큼 뜨거운 불 속에 갇혔던 우리 아빠처럼.
너도…… 갇혀버렸구나.
***
조용했던 사위가 시끄러워졌다.
건우의 과거 속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우리의 속눈썹은 끝없이 떨렸다. 숨을 고르던 우리가 천천히 눈을 떴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건우가 보였다.
“괜찮습니까.”
건우의 물음에도 우리는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힘들었다.
민우를 죽음 속으로 떠밀었다는 건우의 죄책감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고통이었다.
후회와 슬픔이 뒤범벅돼 우리의 마음에도 깊은 구멍을 만들었다.
“일단 돌아가죠.”
우리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불에 타는 건물을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을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살리고 싶었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서 오는 그런, 절망.
“고우리씨.”
건우가 다정스럽게 우리를 불렀다.
순간, 우리의 코가 싸해졌다. 저릿한 기운이 우리의 온몸을 휘감았다.
우리가 건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정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설마…… 5점 때문에 그럽니까.”
건우가 과녁의 파란 부분에 애처롭게 꽂힌 화살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건우의 손끝을 보던 우리가 왈칵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건우의 기억 부스러기가 만든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농담이었는데…….”
건우는 적잖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큰 대회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했었던 건우는 우리의 눈물 앞에서는 안절부절못했다.
우리를 다독거리는 건우의 손길은 어색하기만 했다.
누군가를 위로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농담에는 재주가 없어서.”
“괜찮아요.”
울먹거리면서 내뱉은 우리의 대답에 건우는 어쩔 줄을 몰랐다.
건우가 급히 우리의 손에 있던 활을 가져갔다.
묵직한 활을 내려놓고는 건우는 약간 허리를 구부리면서 우리에게 눈을 맞췄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던 우리의 입술은 여전히 떨렸다.
“농담해서 미안합니다.”
건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잘못된 농담으로 상황이 어그러졌다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유머 좀 잘 길러보겠습니다.”
“글로 배우실 생각은 아니시죠?”
코를 훌쩍거리던 우리가 건우의 말을 받아쳤다.
“영상으로 배워야죠.”
“영상이요?”
“예. 필살기 유머 시리즈.”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건우의 말에 우리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의 침이 건우의 얼굴에 흩뿌려졌다.
새싹에 골고루 물을 주는 스프링클러처럼.
“죄송해요, 차장님.”
“괜찮습니다.”
“그래도 얼굴에…….”
“건조했었는데 잘됐습니다.”
참으로 긍정의 끝을 달리는 대답이었다.
얼굴을 닦아내던 건우는 우리의 침이라면 무던히도 잘 받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눈가를 적신 눈물을 닦아내면서 건우를 봤다.
동영상을 보면서 필살기 유머를 연마하는 건우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소나무가 삐치면?’
단 하나의 표정 변화도 없이 케케묵은 유머를 구사할지도 몰랐다.
‘칫솔. 칫! 솔!’
아재 기운으로 얼룩진 부장님 개그를.
건우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눈을 촉촉하게 만들었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도 작아졌다.
덩그러니 오락실 구석에 선 우리는 건우의 아픔을 잊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
건우가 자판기에서 뽑아온 물을 내밀었다.
우리는 고맙다는 것처럼 목을 약간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물을 마셨다.
냉수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문규에게 받았던 스트레스와 건우의 아픔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쏟아낸 눈물만큼, 벌컥벌컥 마신 물의 양만큼 우리의 속은 개운해졌다.
그냥 후련했다.
말끔하게 문규를 잊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은 순식간에 반쯤 사라졌다.
개운한 얼굴로 우리는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훔쳤다.
촉촉한 물방울이 우리의 손등에 스몄다.
‘거기…… 있습니까.’
우리가 건우를 봤다. 건우는 양궁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한없이 무너져 내리던 건우의 목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맴돌았다.
‘거기.’
참 슬픈 목소리였다.
‘그 불 속에…….’
세상 전부를 잃은 목소리.
무너져버린 세상에 절망한 목소리.
덤덤한 건우의 얼굴에 우리의 마음이 시큰거렸다.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동질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죽을 만큼 아팠을 것이었다.
모든 것을 묻고 살아가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묻는 일은 절대 무뎌질 수 없는 일이니까.
커다란 구멍에 찬 바람이 들락날락하는 시린 아픔을 무던히도 견뎌냈을 것이었다.
“좀 진정됐습니까.”
“아…… 네. 덕분에요. 스트레스도 잘 풀렸고요.”
“다행이네.”
“감사합니다. 차장님.”
우리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돌았다.
“괜찮으면 됐습니다.”
건우의 진중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서서히 물들었다.
온기를 품은 난로처럼 따스함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목소리였다.
건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금…… 냉혈한의 미소라니!’
우리는 분명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건우와 부드러운 미소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무심한 눈길로 손목시계를 봤다.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이만 갑시다.”
건우의 말에 우리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멈췄던 두 사람의 걸음이 움직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우리의 걸음은 전보다는 한결 가볍게만 보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오락실을 나섰다.
시끌벅적하던 거리에서 멀어질수록 사위는 점점 고요해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흔들거리는 두 사람의 손끝은 금방이라도 스칠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톡톡, 연달아 손을 쳐대는 바람에도 두 사람의 손에는 묘한 열기가 돌았다.
“흠.”
건우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건우는 우리를 봤다. 가로등 불빛이 쏟아내는 불빛이 우리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부시고도 찬란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예뻤다.
참 예쁘다.
건우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계속 꼼지락댔다.
우리에 대한 열망이 갈증처럼 피어올랐다.
‘강건우…… 참아.’
불끈 솟는 열락을 건우는 있는 힘껏 참아내고 있었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돌겠네.’
뜨거운 침을 삼키는 건우의 온 신경은 우리를 끝없이 갈구하고 있었다.
우리의 코끝에 살짝 내려앉은 빛도, 바람결에 실려 날아온 향기도…….
건우는 전부 탐이 났다.
우리의 모든 것이 건우의 마음을 달리게 했다.
깊은숨을 조용히 내쉬면서 건우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달뜬 얼굴의 열기를 억센 바람이 식혀주기를 바랐다.
찬기에도 용광로만큼 뜨거운 건우의 숨은 좀체 식을 줄을 몰랐다.
“강차장님.”
자신을 부르는 우리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건우가 손을 말아 쥐었다.
“예.”
감정을 꼭 숨긴 건우의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을 물들였다.
들끓는 속을 달래는 건우는 무표정이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딱히 한 일도 없습니다.”
한참 거리를 걷던 두 사람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아니에요. 속도 후련하고 스트레스도 쫙 풀렸고. 혼자 있었으면 엄청 우울했을 거예요.”
“…….”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차장님.”
다부진 의지를 다지듯 우리가 말했다.
우리는 이번 일본 출장길에 건우의 선물이라도 사올 생각이었다.
은혜를 갚은 까치처럼.
“됐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그걸로 됐습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 3층, 5층…….
엘리베이터가 올라갈 때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15층.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인사를 하는 우리는 괜스레 어색했다.
꼭 첫 데이트라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우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이었다.
“고우리씨.”
건우의 목소리가 우리의 걸음을 붙잡았다.
“잘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무슨 생각을……?”
“오늘 내가 했던 말.”
우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건우를 봤다.
건우가 뱉었던 말들을 뒤적거렸다.
건우가 했던 말이라면…….
‘좋아합니다.’
생각이 났다.
‘……온종일, 관심 갈 만큼.’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생각나 버렸다.
건우의 난데없는 고백이.
“정말 동료 간의 애정일지.”
얼떨떨한 얼굴로 건우를 보던 우리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었다.
폭풍처럼 밀려들었던 그 말이 다시 선명하게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무심한 손길로 닫히려던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남녀 간의 애정일지.”
건우의 뇌쇄적인 눈길이 거세게 우리를 흔들어댔다.
우리는 그대로 숨이 멎어버렸다.
굳은 침조차 삼킬 수 없었다.
“밤새 생각하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네.”
매혹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건우가 엘리베이터의 문을 잡았던 손을 뗐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닫혔다.
“그럼 월요일에 봅시다.”
건우의 모습이 우리의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온전히 닫힐 때까지 우리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밀물처럼 몰려든 건우의 물음의 답을 우리는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쳤다.”
무심하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보던 우리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여전히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진짜로…… 미쳤네.”
우리는 정말로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건우의 눈빛, 숨소리, 말…….
그 모든 것들이 잔상처럼 진하게 남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건우의 앞에서 삼키지 못했던 마른 침을 우리는 천천히 삼켰다.
우리의 목울대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긴장이 풀린 우리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흘렀다.
우리의 뇌리를 스치고 검은 목폴라가 떠올랐다.
건우와 엘리베이터에서 야릇한 포즈를 취했던 그 사람.
분명, 출판사 대표라는 친구였다.
‘정말 가짜 연애라도 하자는 거냐고!’
우리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필시 건우가 애달프게 가짜 연애를 갈구하는 것에는 집안의 반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HJ그룹 후계자가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라니…….
회장님은 눈에 불을 켜고서라도 결사반대를 외쳐댔을 것이었다.
‘자신 없는데…….’
우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재벌가의 맹렬한 반대라니…….
우리는 자신에게도 돈 봉투를 내미는 막강한 시댁과 건우와 검은 목폴라의 애틋하고도 뜨거운 사랑을 상상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로맨스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뿐히 넘어설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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