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12화 (12/102)

제 12화. 이 연애, 끝내겠습니다

꿈속의 건우는 제집 현관문을 열었다.

마성의 눈빛을 쏘아대면서.

우리는 굳은 얼굴로 입을 맴도는 침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절대 들어갈 수 없다고 우리는 수십 번 되새겼다.

하지만 우리의 걸음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건우의 집을 향해.

‘정말 갈 거야?’

우리는 제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얼른 와요.”

건우의 손짓에 우리의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열기를 삼킨 것만 같았다.

꿈은 무의식의 산물이라더니…….

숨겨졌던 본능이 폭발한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건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이 닿을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보드라운 손끝이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잠에서 깨어났다. 천장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장은 여전히 펄떡거렸다.

싱싱한 활어만큼.

파닥파닥.

“무슨 개꿈인데……. 왜 하필 강차장님이냐고.”

사위를 둘러보던 우리가 머리를 움켜잡았다.

건우도.

건우의 집도 없었다.

정말로 꿈이었다.

그것도 개꿈 중에 완벽한 개꿈.

믿을 수 없는 꿈에 우리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냉수를 들이켜도 정신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들어왔다가 가겠습니까.’

관능적인 건우의 목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떠돌았다.

개꿈의 시작점이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물통을 통째로 마셔버릴 기세였다.

넋을 잃고 냉장고만 바라보던 우리가 방으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비장한 얼굴로 노트북을 켰다.

“글로 푼다. 풀어!”

소설은 욕구불만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다.

[불순한 닥터 9화]

우리의 습관적으로 새벽에 올렸던 소설을 확인했다.

전투적이었던 우리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건우의 조언에 맞춰 살짝 방향을 튼 소설의 조회수가 올라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댓글과 추천까지도 바짝 상승곡선을 탔다.

“벤츠…… 대체, 뭐야.”

우리는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정말 슬럼프의 묘약은 악마와 손을 잡는 것뿐일까.

손을 풀던 우리는 거침없이 소설을 써 내려갔다. 놀랄 만큼 가뿐한 손놀림이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글을 쓰는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소설을 썼다.

빗줄기는 가늘어졌다가 굵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노트북 옆에 있던 시계가 여덟 시를 가리켰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퍽, 지나있었다.

출출한 배를 쓸어내리던 우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영감님]

액정에 뜬 이름이 번쩍거렸다.

문규의 전화였다.

-우리씨! 저 문규 친구, 진혼데요.

시끌시끌한 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찔렀다.

클럽을 방불케 하는 시끌벅적한 음악과 건배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범벅됐다.

우리가 노트북에서 손을 뗐다.

-저희가 지금 문규네 집 근처에 있는 술집인데. 혹시 민규 좀 데리고 가기 힘들까요.

“많이 취했나요.”

-아주 죽겠습니다. 곯아떨어져서는. 저희끼리 남아서 한 잔 더 하고 싶은데…….

당장 문규를 데리고 가달라는 말이었다.

우리도 문규의 술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곯아떨어졌다가 좀비처럼 일어나서는 잔소리를 해대는 진상.

-어떻게…… 안 될까요.

“지금 바로 갈게요. 주소만 보내주세요.”

-역시! 고맙습니다. 바로 보내겠습니다.

홀가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 문규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술집의 주소가 날아들었다.

“꼭 잘 쓰고 있는데……. 웬수야, 웬수!”

술 취한 남편을 잡으러 가는 아내처럼 우리는 분주하게 집을 나섰다.

민폐로 무장한 문규를 포획해 집에 힘껏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우리가 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빠르게 도로를 내달리던 택시는 문규가 있는 술집 앞에 멈췄다.

우리가 술집으로 들어섰다.

술집의 내부는 어둑했다.

다트를 날리는 사람들과 맥주병을 들고 있는 사람들로 술집은 요란스러웠다.

곯아떨어졌던 문규가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멀리서도 문규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야, 우리는 지금 거의 뭐랄까. 그래…… 전우애. 딱, 전우라고.”

납작한 문규의 뒤통수를 향해 걸어가던 우리의 걸음이 멈추었다.

“고우리. 걔는 애교도 없고, 살살 녹이는 맛도 없고. 그냥, 사내새끼라니까.”

“그래서 결혼은 평생 미루게?”

“아…… 그게 문제라니까. 의리의 결혼이냐! 우리 소희하고의 새로 출발이냐!”

문규가 키득거리면서 술잔을 들이켰다.

문규의 말이 우리의 마음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소희라면, 분명 회사에서 마주쳤던 그 소희가 분명했다.

유달리도 여유로웠던 소희의 얼굴을 떠올라 우리는 이를 꽉, 깨물었다.

“미친 새끼. 언제부터 우리 소희 됐냐.”

“잤을 때부터.”

“잤다고? 대박! 어땠냐.”

친구들의 관심이 문규에게로 쏟아졌다.

불탔던 밤의 일을 생생하게 듣고 싶다는 얼굴들이었다.

문규는 성지를 점령한 장군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묵꼬치를 들었다.

우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분명, 잤다고 했다.

난데없는 신경전을 벌였던…… 그 계집애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우리는 어묵을 질겅질겅 씹는 문규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성문규.

맘껏 즐겨봐라. 마지막 만찬!

“내가 또 뭐냐.”

우리가 문규의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천장에 있던 붉은 조명이 우리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 모습이 꼭, 죽음의 길로 망자를 안내하는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우리를 뒤늦게 발견한 친구들이 일순간 목석처럼 굳었다.

‘성문규, 살고 싶으면, 닥쳐!’

문규의 친구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에 심취한 문규는 친구들의 경고를 듣지 못했다.

“이 성주임이 누구냐. 바로…… 침대의 황제.”

문규가 어묵을 씹으면서 낄낄거렸다.

소희와의 화끈했던 밤을 아련하게 떠올리던 문규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불길한 기운에 문규의 고개가 돌아갔다.

차가운 조소를 날리는 우리의 얼굴에 문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문규의 손에 있던 어묵꼬치의 막대기가 힘없이 테이블로 떨어졌다.

문규는 삽시간에 취기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술이 확, 깼다.

우리의 눈빛은 살벌했다. 시베리아의 벌판만큼 차가운 바람이 우리에게서 몰아쳤다.

“끝났니.”

“우…… 우리야?”

“한창 흥미진진했었는데.”

더듬거리는 문규의 말을 듣던 우리가 차갑게 대꾸했다.

“근데 말이야. 성주임이 침대의 황제라니……. 토끼도 황제가 될 수가 있나?”

우리가 비꼬듯 말했다. 놀란 문규는 잘게 부서지지도 않은 어묵만 힘겹게 삼켰다.

“요만…… 아니, 요만…… 선심 써도 요만하던데.”

우리는 손톱만큼 작게 손을 벌리면서 말했다.

능청스러운 우리의 말에 문규의 친구들은 설마, 하는 얼굴로 동시에 문규를 쳐다봤다.

문규는 다급하게 일어나서는 우리의 입을 막으려 손을 내뻗었다.

우리가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뒤로 살짝 발을 뺐다.

그 바람에 문규는 중심을 잃고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리는 깨진 무릎을 잡고 있는 문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고우리!”

문규가 소리를 내질렀다.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문규는 가마지눈을 치켜뜨고는 우리를 노려봤다.

“성주임님은 참 좋으시겠어요.”

“…….”

“앞하고 뒤가 똑같아서. 아플 일이 없으시겠네?”

우리의 말이 비수처럼 문규에게 날아들었다.

문규의 얼굴빛은 누르락푸르락 여러 색깔로 변했다.

해도 너무하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팔짱을 낀 채로 문규의 눈빛에 대적했다.

절대로 밀리지 않을 만큼 다부진 눈빛이었다.

“걔하고는 같은 토끼라 잘 맞았나 봐.”

“적당히 해라.”

문규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더는, 우리의 말을 봐주지 않을 참이었다.

이글거리면서 격돌하는 두 사람의 눈빛에 문규의 친구들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너…… 여기서 더 나가면! 나 못 참는다. 친구들도 있는데, 쪽팔리게.”

“쪽팔리기는.”

“고우리.”

“아직 한방은 없었잖아.”

문규는 우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잘 가.”

“……?”

“잘 꺼지라고.”

찬기를 품은 우리의 목소리가 번졌다.

우리는 일말의 주춤거림도 없이 문규의 중심부를 향해 힘차게 발차기를 날렸다.

붕!

나비처럼 날아오른 우리는 벌처럼 발차기를 쐈다.

그동안의 불만족과 울분을 담은 강력한 한방이었다.

“억!”

우리의 깔끔한 발차기에 문규가 내뱉은 말은 그게 전부였다.

짤막한 비명과 함께 문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문규는 비틀거리면서 테이블을 잡았다. 목에 푸른 핏대가 선 문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였다.

문규는 힘겨운 숨을 내뱉으면서 엉덩이를 두드려댔다.

차진 손놀림에도 온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아픔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미안한 마음보다는 복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문규는 우리를 노려봤다.

“고우리, 너…….”

“그럼 토끼끼리 오순도순 사귀세요.”

우리는 문규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코끼리는 이만 물러갈게.”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우리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고우리. 머슴 새끼 같이…….”

“그만 나대라. 죽는다.”

우리는 문규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히, 위협적인 말이었다.

허리를 곧추세운 우리가 차갑게 문규를 쳐다봤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우리를 보던 문규의 친구들은 일제히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했다.

우리는 냉정하게 걸음을 돌렸다.

술집을 나서는 우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무려 5년이었다.

숱한 추억이 살아있던 순간이기도 했다.

잘 다졌다고 생각한 모래성이 밀물에 순식간에 무너지듯 모든 시간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쩌다, 토끼를 만나서…….’

우리가 뒤를 돌았다. 문규의 친구들이 문규에게 달려들었다.

수십 개의 위로의 손길들이 문규의 엉덩이를 두드려댔다.

실소를 뱉은 우리는 술집을 나섰다.

귀를 울리던 시끄러운 음악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고요가 우리를 물들였다.

“하…….”

우리는 허공을 보면서 깊은 숨을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긴 흔적을 남기고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두 사람은 끝났다.

정말 우습고도 허망하게…….

서로를 위하는 작별의 인사도 없었고 말짱한 정신도 아니었다.

‘잘했다. 잘한 거야.’

우리는 울컥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면서 우리는 도로로 손을 내뻗었다.

택시를 잡는 우리의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우리는 마음이 물러버린 것만 같았다.

힘겹게 침을 삼키면서 우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고우리. 걔는 애교도 없고, 살살 녹이는 맛도 없고. 그냥, 사내새끼라니까.’

문규가 뱉었던 말이 우리의 말을 후볐다. 날카롭고도 뾰족한 말이었다.

우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뒤를 돌아봤다.

숱하게 쏟아지는 술에 취한 사람들의 물결에도 문규의 모습은 없었다.

끝.

그 허망한 말만 우리에게 짙게 스몄다.

눅눅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 불었다.

우리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살을 에는 추위가 우리에게 손을 내뻗었다.

떠나간 똥차에 미련을 두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문규가 그 망할 똥차라는 것도.

“근데 왜 찾는 건데…….”

그런데도 인파 속에서 문규를 찾는 것은 5년의 시간이 대번에 싹둑, 잘려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황급히 도로로 고개를 돌렸다.

이별을 마주해보기로 했다.

받아들여야 버릴 수도 있는 법이었다.

“택시!”

우리는 쥐고 있던 손을 다시 내뻗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던 우리의 눈빛이 굳건해졌다.

그래. 이별했다.

끝났다!

우리의 손길에 도로를 달리던 택시가 멈추었다.

우리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혼 전에 똥차를 거를 수 있었던, 큰 행운.

“답십리로 갈게요.”

우리가 택시 운전사를 향해 말했다.

우리의 힘찬 손길에 택시의 문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세게 닫혔다.

택시가 출발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주먹만 불끈 쥐었다.

절대 흘러간 시간을 잡지 않겠다는 것처럼.

5년의 연애가 끝났다.

단 기운을 뿜어내다가 순식간에 혀끝에서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아주 허무하고도 허망하게.

연애는 끝나버렸다.

***

택시가 멈췄다.

집에 들어가려던 우리의 걸음이 멈췄다.

우울한 마음을 안은 채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편의점에 들어섰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냉장고로 직진했다. 맥주에 남은 미련을 모두 털어버리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우리는 다섯 개의 맥주를 들었다.

한 캔을 마실 때마다 한 해의 기억을 잊을 참이었다.

쫀득쫀득한 육포와 안줏거리를 들고는 우리는 계산대로 걸음을 옮겼다.

진열대 코너를 돌던 우리가 불시에 튀어나온 건우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았다.

콩, 박은 머리에도 우리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누구랑 부딪혔는지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사과를 한 우리는 계산대에 멈춰 섰다.

건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계산을 하는 우리를 봤다.

‘글 쓰는데 힘들었나.’

반조리식품만 들고 있던 건우가 초콜릿을 집었다.

달콤한 주전부리로 스트레스를 푸는 작가들이 많다는 성민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초콜릿이나 젤리를 건우는 양손 가득 들었다.

건우가 편의점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우리는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건우와의 관계를 의심했던 문규의 말이 우리의 머릿속에 끝없이 휘몰아쳤기 때문이었다.

‘그 새끼랑 잤냐고. 잤구나?’

도둑이 제 발 저린 말을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15,600원입니다.”

“…….”

“손님?”

“아……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우리는 급히 지갑을 열었다. 카드는 빠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직 길들이지 못한 빳빳한 가죽 지갑이 카드를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힘껏 카드를 잡아당겼다.

힘을 이기지 못한 카드가 아르바이트생에게 곧장 날아갔다.

“죄송해요.”

우리가 서둘러 사과를 했다.

“괜찮아요.”

아르바이트생은 덤덤한 얼굴로 카드를 긁었다.

우리는 되는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생각했다.

계산을 끝낸 우리는 부랴부랴 묵직한 봉지를 들고는 편의점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우리의 걸음이 주춤했다.

코를 훌쩍거리면서 편히 술을 홀짝거리기에 집은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에 있던 놀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칼바람과 짙게 깔린 묵직한 어둠에 놀이터는 황량하기만 했다.

“딱, 좋네.”

우리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파트에서 간간이 쏟아지는 불빛과 노란 가로등만이 쓸쓸한 놀이터를 물들였다.

우리는 부스럭거리면서 봉지를 뒤적거렸다. 빠른 손놀림으로 육포를 뜯었다.

제법 불량한 자세로 육포를 질겅거렸다. 우리는 맥주를 땄다.

촥, 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맥주에서 포말처럼 하얀 거품이 쏟아졌다.

맥주를 흘릴까.

우리는 서둘러 맥주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궁상맞은 모습이라도 오늘은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나쁜 놈…….”

우리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면서 삿대질을 했다.

“안녕, 건배다!”

빈 허공에 건배를 외친 우리가 맥주를 들이켰다.

알싸한 맥주가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허공을 노려보면서 우리는 단숨에 맥주를 비웠다.

연거푸 들이닥치는 차가운 맥주도 끓는 우리의 마음을 식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순식간에 맥주캔을 비웠다.

우리의 손길에 맥주캔이 일그러졌다.

빈 캔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낄낄거리는 문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미친 새끼. 언제부터 우리 소희 됐냐.’

‘잤을 때부터.’

잤을 때부터…….

잤을 때부터,

잤을 때부터!

문규의 말이 돌풍처럼 몰아쳤다.

빈 캔은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문규에 대한 배신감에 우리는 울화가 치밀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우리는 빈 허공을 향해 빈 캔을 던졌다.

탁!

쉬지 않고 날아간 빈 캔의 끝에서 둔탁한 소리가 퍼졌다.

아픈 소리가 놀이터에 울려 퍼진 것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멈추었다.

맹렬하게 날아올랐던 빈 캔이 건우의 이마에 부딪혀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뜨악한 얼굴로 건우를 봤다.

왜 하필…….

“……아.”

빈 캔이 모래에 반쯤 파묻히던 순간이었다.

건우가 뒤늦게 빈 캔에 맞은 이마를 매만졌다.

거북이보다 더, 느린 반응속도였다.

“너무 격한, 환영 인사 아닙니까.”

“…….”

“……고대리님.”

밤처럼 고요하고도 낮은 건우의 목소리가 놀이터를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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