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11화 (11/102)

제 11화. 우리 집에서 쉬었다 가겠습니까

갑작스럽게 밀려든 유혹적인 눈빛이었다.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불시에 날아든 건우의 유혹에 휘청거리던 순간.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순간 정신을 차린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면서 핸드백을 뒤적거렸다.

“일단은 대리 부를게요. 좀 쉬고 계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우리는 급히 대리 운전기사를 불렀다.

건우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네. 그 CO편의점에 있거든요. 대서양물산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이요.”

열심히 길을 설명하던 우리의 전화가 끊겼다.

우리는 덜렁 편의점 앞에 앉아있는 건우에게 다가섰다.

축축하게 젖은 건우의 손바닥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까슬까슬한 아스팔트가 만들어낸 상처였다.

작은 상처 틈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물에 번져 연해졌다.

우리가 서둘러 건우의 손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건우의 손을 잡지 않은 통에 건우의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축축했던 건우의 손바닥에서 물기가 사라졌다.

“연고도 없는데……. 우선은 밴드라도 붙일게요.”

“예.”

“집에 가시면 꼭, 연고 바르세요.”

핸드백을 뒤적거리던 우리가 밴드를 꺼냈다.

건우의 손에 살포시 밴드를 붙여주는 우리는 집중하고 있었다.

건우의 손을 스치지 않기 위해.

건우는 온 집중력을 쏟는 우리를 바라봤다.

비에 젖은 공기에 녹아내리는 빛이 우리를 찬란하게 비췄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건우는 황급히 손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늬 하나 없는 투박한 밴드가 반듯하게 붙어있었다.

참 우리다운 밴드라고 생각했다.

“편의점 좀 다녀올게요.”

난감한 얼굴로 물에 젖어버린 술 깨는 약을 보던 우리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술 깨는 약은 다 팔려있었다.

우리는 차선책으로 숙취해소제를 골랐다.

매끄러운 밴드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던 건우를 향해 우리는 숙취해소제를 내밀었다.

“얼른 드세요.”

“사약입니까.”

건우는 숙취해소제를 힐끔 쳐다보면서 농담을 뱉었다.

“정말 얼른 드셔야 할 것 같아요. 아재 농담까지 하시고.”

“별로입니까.”

“썰렁합니다. 얼른 드시죠, 차장님.”

객관적인 우리의 평가에 건우는 약간 시무룩해졌다.

우리의 재촉 어린 눈빛에 건우는 말없이 두 손을 들었다.

상처가 나서 꼼짝없이 두 손을 쓸 수 없다는 무언의 눈빛까지 날려댔다.

평소라면 두말없이 숙취해소제를 받았을 건우였다.

그런데 오늘은 술기운을 핑계 삼아 투정을 부려대고 싶었다.

유치하게도.

“두 손으로 잡고 드시면 될 것 같은데…….”

건우를 보던 우리가 말끝을 흐렸다.

“빨리 드시고 가죠. 대리 기사님 금방 오실 거예요.”

우리는 괜히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건우의 매혹적인 눈빛에 빨려들 것만 같았던 찰나의 순간을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버젓이 남자친구도 있는 마당에…….’

우리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면서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한시라도 빨리 건우를 집에 데려다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조용하던 우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구세주였다.

우리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저희 편의점 앞에 있거든요. 여기요.”

우리가 발꿈치를 살짝 들고는 간절하게 대리 운전기사를 찾았다.

편의점으로 달려오는 대리 운전기사를 발견한 우리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숨이 흘렀다.

해방이었다.

끝없이 매혹적인 건우의 눈빛에서의 탈출.

“차장님. 키 있으시죠? 대리 불렀으니까 기사님한테 드리면…….”

“고대리는.”

“가시면 저도 갈게요.”

우리는 지하철 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같이 가죠.”

건우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네…… 예?”

습관적으로 말을 내뱉던 우리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는 놀랐다.

우리의 목소리는 한껏 커졌다.

“합리적이잖습니까.”

“대체 뭐가요?”

“비용 효율성 측면에서.”

건우는 애먼 이론까지 들먹거렸다.

효율적이든 비효율적이든 사실 건우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와 함께 있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그냥, 그러고 싶기도 하고.”

건우의 무심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갈망이나 열망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찬바람에 두 사람의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비에 젖은 눅눅한 바람이었다.

옅게 번진 안개는 꿈결 속에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만들었다.

흙냄새를 품은 바람이 우리의 콧속을 간질였다.

우산을 잡고 있던 우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람이 꼭 건우에게로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편의점의 환한 불빛, 노란 가로등, 옅게 번진 회색 안개…….

작은 불빛들이 검실검실 두껍게 깔린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

우리는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말끝만 끌었다.

우리가 건우를 빤히 쳐다봤다.

충분히 건우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단칼에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럴게요.”

그런데도 우리는 오케이를 날렸다.

“제가 꽤, 합리적인 사람이거든요.”

효율성을 중시하는 합리적인 사람…….

우리가 건우의 차에 올라탄 구질구질한 이유였다.

그저, 효율적인 방향을 생각한 선택일 뿐이라고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했다.

사뭇 묵직한 침묵을 안은 채로 두 사람은 뒷좌석에 앉았다.

살살 다시 내리기 시작한 소낙비에 와이퍼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차창을 타고, 뭉쳤던 물방울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꼭, 눈물처럼.

물감이 번진 수묵화처럼 사방으로 번지는 빛을 바라보던 건우의 고개가 느릿하게 우리의 쪽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뒷좌석에 손을 짚은 채로 애꿎은 흐린 창밖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글은 여전합니까.”

고요한 침묵을 깨고, 건우가 입을 열었다.

“아…… 네.”

“뭐가 문젭니까.”

“막히는 부분이 좀 있어서요. 그래도 뭐. 곧, 뚫리겠죠.”

“물어봐도 됩니까. 그 막히는 부분.”

우리의 시선은 건우에게 머물렀다.

“말하자면 길어서요.”

“대강 내용은 알고 있습니다.”

“내용을요?”

놀란 우리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 친구가 대강. 치과의사하고 회사원 얘기라고.”

“뭐…… 네.”

얼굴을 마주본 채로 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는 마냥,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건우가 막혔던 부분을 시원하게 뚫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해결될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그래서 문제는?”

유혹적인 건우의 물음이었다.

우리의 마음이 동했다.

날름 말을 내뱉으려던 우리가 멈칫 했다.

‘고우리, 아무리 급해도 강차장은 아니야. 불끈거리는 건강한 사내라고!’

고수위 소설을 들켰다고 소설 내용까지 깊이 논의할 수 있는 용기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작은 기대로 흔들거리던 마음을 굳게 잡았다.

“객관적인 의견, 필요 없습니까.”

건우의 말이 절실한 우리의 열망을 툭, 건드렸다.

‘다 들켰는데 뭐. 어때?’

달콤한 유혹이 우리에게 손을 내뻗었다.

“괜찮으면 뭐…….”

“됐다는 말씀은 아직 안 드렸습니다, 차장님.”

애끓는 마음을 깊이 숨기면서 우리가 건우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막힌 소설을 뚫을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천적 같은 강건우에게, 영혼을 팔 때!

“남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속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아서요. 좀 딜레이를 시켜야 하나, 생각한 대로 밀고 나가야 하나, 고민이 돼서…….”

결국, 우리는 내질러버렸다.

“감정의 변화는 이미 꾸준히 설명돼서 구태여 딜레이 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네. 오히려 여주인공의 변화가 늦어서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아…….”

“읽는 입장에서는 여주인공이 눈치 빠른 캐릭터답지 않게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건우의 말에 우리는 연달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던 구석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내리는 비에 씻겨 내리는 먼지처럼.

우리는 혹시라도 건우의 말을 까먹을까.

다이어리에 급히 건우의 말을 받아 적었다.

건우는 꼼꼼하게 피드백을 적는 우리를 봤다.

지렁이 같은 글씨도 참, 예쁘게만 보였다.

히터에서 나오는 훗훗한 바람이 건우의 얼굴을 뜨겁게 적셨다.

건우의 모든 신경은 우리를 향해있었다.

지독하고도 참, 검질기게.

“고맙습니다. 덕분에 조금 정리가 됐어요.”

우리는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이었다.

핸드백에 다이어리를 넣은 우리가 뒷좌석 시트에 손을 얹었다. 건우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였다.

우리에게로.

두 사람의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마주할 것처럼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톡, 마주하려던 순간이었다.

서로를 보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숨결이 엇갈려 흘렀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눈빛에 우리는 마른 침을 천천히 삼켰다.

“아……!”

우리가 아슬아슬하게 닿을 뻔했던 손을 말아 쥐었다.

“육각수요!”

“육각수?”

“네. 애창곡이셨어요?”

우리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애창곡 중에 하납니다.”

“하나라면. 다른 애창곡은……?”

“왜요. 고대리 찬스라도 더 줄 생각입니까.”

“일단은 차장님 애창곡을 좀 알아보고요.”

건우의 말을 우리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건우가 바람 빠지듯 조용히 미소를 흘렸다.

“허닙니다.”

건우의 대답에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설마…… 박진영은 아니죠?”

“박진영, 맞습니다.”

우리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렀다.

OH. HONEY.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노래방을 제패하는 건우의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건우가 고대리 찬스를 외치는 모습도.

그리고 격렬하게 허니 춤을 추고 있을 스스로의 모습까지도.

“고대리 찬스는 다음에 쓰기로 하죠. 노래 말고.”

“네. 노래는 사양할게요.”

육각수나 허니나…….

전부 가시밭길이었다.

평소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은 묘한 건우의 애창곡이 신기해 보일 지경이었다.

건우는 제 취향에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미스트처럼 흩뿌려지는 가는 빗줄기를 헤치고 내달리던 차가 느려졌다.

차는 부드럽게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깔끔한 주차를 마친 대리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렸다.

간단하게 대리 운전기사에게 인사를 하고는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힘겹게 서 있는 건우를 보던 우리가 16층을 눌렀다.

“16층…… 우리 집입니다.”

“알아요. 그래서 가는 거고요.”

우리의 말을 삼키듯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혔다.

“차장님, 책임져야죠. 끝까지.”

우리는 제 말의 힘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는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봤다.

“알아서 가겠습니다. 고대리님도 집에 가시죠.”

“아뇨. 들어가시는 거 보고 바로 내려갈게요. 그래야 맘이 편할 것 같아서요.”

우리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건우는 뜨거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본인의 말이 얼마나 도발적인지…….

분명 우리는 모를 것이었다.

끝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대체 얼마큼 참기 힘든 열기로 가득차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1층, 2층, 5층…….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만큼 건우의 심장도 한없이 뛰었다.

건우의 들끓는 마음은 그대로 폭발해버릴 지경이었다.

좁은 공간, 얼굴에 번진 열기, 옅게 번지는 숨소리…….

그 모든 것들이 건우의 신경을 건드렸다.

불끈 솟는 욕망을 건우는 힘겹게 참아내고 있었다.

16층.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면서 건우는 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번호키의 경쾌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었던 현관문이 열렸다.

“차장님.”

우리의 목소리에 문고리를 잡던 건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쉬세요.”

아쉬운 기운이 건우를 집어삼켰다.

보내고 싶지 않았다.

우습게도 우리를 잡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조금만, 더…….

정말로 아주 조금만 더.

“고대리님.”

건우가 우리를 불렀다.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뜨겁게 적셨다.

건우의 목소리는 계단으로 내려가던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봤다. 미동도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복도를 환하게 밝히던 불빛이 꺼졌다.

짙은 암흑이 두 사람을 뒤덮었다.

서로의 숨소리만 선명하게 귓가를 간질였다.

건우가 우리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제야 꺼졌던 불빛이 반짝, 켜졌다.

놀랄 만큼 눈부신 빛이었다.

“들어왔다가 가겠습니까.”

건우의 말이 복도를 천천히 물들였다.

나지막한 건우의 목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묘한 유혹의 향기를 풍기는 말.

차가운 복도를 뜨겁게 적시는 건우의 목소리에 계단 손잡이를 잡은 우리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순간 문규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대번에 건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을지도 몰랐다.

한여름의 햇빛만큼 강하게 넘실거리는 매혹적인 건우의 눈빛을 당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오늘은 좀…….”

“예. 알겠습니다.”

건우는 조금의 실망도 없어 보였다.

“아…… 그럼 쉬세요.”

“회사에서 뵙죠.”

강렬한 유혹을 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심한 대답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우리의 걸음이 느려졌다.

문을 닫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우리가 조심히 고개를 돌리고는 건우의 집을 바라봤다.

“뭐야. 놀랐네.”

우리의 입술을 비집고 안도의 숨이 흘렀다. 동시에 아쉬운 기색도 번졌다.

터덜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어쩌면, 한 번 더 건우가 붙잡아주기를 바랐는지 몰랐다.

‘들어왔다가 가겠습니까.’

건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미칠 만큼 끈덕지게.

건우의 집 앞을 밝히던 복도의 불이 꺼졌다.

“고우리…… 너, 완전 돌았구나.”

얼빠진 얼굴로 건우의 집을 보던 우리가 계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술기운에 날아든 건우의 유혹을 덥석 물어버릴 뻔했다니…….

우리는 모든 것을 풀리지 않는 소설 탓으로 돌렸다.

무뎌진 로맨스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함이라고.

풀리지 않는 소설로 욕구불만이라도 발동한 거라고.

소설만 업로드하면 쓸데없는 쿵쾅거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고.

우리는 온갖 변명거리를 끌어왔다.

굳게 입술을 다문 우리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

우리는 불타는 금요일 밤을 보냈다.

건우의 뇌쇄적인 눈빛을 잊기 위해 밤새 폭발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려댔기 때문이었다.

간밤에 건우가 건넸던 조언은 막혔던 소설을 푸는데 꽤, 도움이 됐다.

[불순한 닥터 9화]

가까스로 업로드를 끝낸 우리는 그대로 침대에 뻗었다.

푹신한 기운이 온몸을 나른하게 적셨다.

묵혔던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창을 타고 내려오는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우리의 얼굴을 옅게 적셨다.

참, 눅눅한 빛이었다.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던 비는 드세졌다.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창을 두드렸다.

창틈을 통해 스미는 냉기에 우리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뜨겁게 열기를 뿜어내던 노트북도 식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피곤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우리의 얼굴에는 졸린 기운이 가득했다.

우리의 눈은 조금씩 감겼다.

톡톡.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우리는 책상에 있던 액자를 바라봤다.

사진 속에는 소방차 앞에 서서 쑥스럽게 웃고 있는 어린 시절 우리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의 옆에는 주홍색 활동복을 입은 우리의 아버지 성원이 환하고도 듬직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빠…….”

우리의 입술 사이로 조용한 목소리가 흘렀다.

쉬지 않고 살아내느라 희미해졌던 말이었다.

사진 속에 담긴 아빠가 보고 싶었다.

참, 오랜만에.

사진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꺼풀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곧, 우리의 눈이 감겼다.

칠흑 같은 어둠이 빠르게 우리를 물들였다.

깊어지는 꿈속.

검은 색깔로 물든 꿈의 끝에 환한 빛이 보였다.

부지런히 걸어가던 우리의 걸음이 느려졌다.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강민우

남자아이의 가슴팍에는 명찰이 반듯하게 붙어있었다.

민우의 얼굴선과 눈매는 부드러웠다.

길게 내뻗은 눈매가 품은 눈빛은 깊고도 아련했다.

민우는 꼭, 길을 잃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강민우?”

“죄송합니다.”

민우의 난데없는 사과에 우리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손을 들었다. 약지에 붉은 실이 동여져 있었다.

붉은 불빛이 붉은 실을 꽉, 붙잡고 있던 민우를 삼켰다.

꼭 불길에라도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잠깐……!”

우리가 민우에게 손을 내뻗은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민우는 사라지고 실의 끝에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강차장님?”

건우였다.

우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의 약지에 있던 붉은 실이 느슨하게 연결돼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대리 찬스 좀 쓰겠습니다.”

“갑자기요?”

“예.”

“이번에는 무슨 찬스를……?”

우리가 불안하게 물었다.

“잠깐 쉬죠.”

“……?”

“우리 집에서.”

건우의 말에 우리는 뜨악했다.

뭐야.

욕구불만이 담긴 이 개꿈은 뭐냐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