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탐나는 파트너-8화 (8/102)

제 8화. 붉은 실의 끝자락

우리가 건우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여기는 왜 다시……?”

건우의 눈치를 살피던 우리가 물었다.

말끝을 길게 끄는 우리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생각보다 오지랖이 넓은 것 같습니다.”

참, 건우와 어울리지 않은 이유였다.

남에게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던 건우였다.

그런 건우가 되돌아온 이유는 우리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건우는 아마 소설 때문일 거라고 확신했다.

다음 편을 향한 갈망이 만들어낸, 성가신 참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거라고 건우는 스스로에게 되뇄다.

건우는 자신의 모습이 묘하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그날,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눈빛에 홀린 걸지도.

“손 좀 놔보죠.”

건우가 한 쪽 무릎을 꿇고는 우리의 앞에 앉았다.

급하게 산 고무줄을 꺼냈다.

형형색색의 형광 고무줄은 쫀쫀함을 뽐내고 있었다.

“고무줄은 왜요.”

“임시라도 봉합해야죠. 계속 이러고 있을 겁니까.”

건우가 고무줄을 들고 우리에게 손을 내뻗었다.

손이라도 스칠까.

다급하게 잡았던 패딩 밑단에서 우리는 손을 뗐다.

건우는 찢어진 밑단을 야무지게 묶어주었다.

빈틈 하나 없는 완벽한 봉합이었다.

‘그깟 소설이 뭐라고.’

건우가 실소를 뱉었다.

자신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건우를 봤다.

늘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다.

사막처럼 말라버린 사람과 미소라니…….

우리는 터진 패딩에 건우가 조소를 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소가 아니라면, 분명 실성이다.

“됐습니다.”

건우가 우리의 패딩에서 손을 뗐다.

“고맙습니다.”

“인사는 이 털 좀 치우고 받죠.”

두 사람은 편의점 바닥을 봤다.

찢어진 패딩을 비집고 탈출한 오리털이 꽃가루처럼 날아다녔다.

우리가 무릎을 짚고는 일어났다.

쥐가 난 다리 때문에 오리털을 줍는 우리는 연신 쩔뚝거렸다.

주섬주섬 오리털을 줍던 우리가 건우를 봤다.

건우는 오리털을 줍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남에 일에는 관심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건우가 생각보다 다른 사람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둑한 동굴에 숨은 약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제 손을 바라봤다.

자신처럼 건우도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걸지도.

그래서였다.

유달리 날카롭다고 생각했던 건우의 눈매가 이상하리만치 부드럽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놀고 있을 겁니까. 주워요.”

“예. 주워야죠. 열심히 줍겠습니다.”

건우의 채근에 우리는 수확하는 농부처럼 허리를 숙여 오리털을 주웠다.

날쌘 손놀림에 편의점 바닥은 금세 깔끔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숙였던 허리를 폈다.

뻐근한 기운에 우리의 입에서는 절로 곡소리가 흘렀다.

“적당히 수습은 됐네. 그럼 내일 봅시다.”

건우가 건조하게 인사를 날렸다.

양 손 가득 오리털을 쥐고 있던 우리가 건우를 봤다.

건우의 군청색 니트에 붙은 오리털 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니트에 뒤엉킨 오리털은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차장님. 잠시 만요.”

우리의 말이 건우를 붙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봤다.

편의점에 흐르던 노래조차 숨을 멈춘 것만 같았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바람이 두 사람을 차분히 적셨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옷에…….”

우리가 건우의 니트에 붙어있던 오리털을 똑, 뗐다.

오리털이 우리의 손가락 끝에서 조용히 팔락거렸다.

“오리가 붙어서요. 참 징글맞죠.”

건우는 우리의 손에 있던 새하얀 오리털을 쳐다봤다.

“별로.”

건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대단합니다.”

“뭐가……?”

“끈질겨서.”

건우의 말이 온풍을 타고 번졌다.

우리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건우의 말이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그런 착각.

분명 착각인데…….

우리가 입술 안쪽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다른 사람하고 다른 네가 참, 대단해.

건우가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잔잔한 호수에 번진 물결처럼 건우의 말이 우리를 휘돌았다.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발길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깊은 여운이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차장님.”

“말씀하시죠.”

“맥주 한 잔 하시겠어요?”

묘한 여운 때문이었다.

평소에 내뱉지 않을 말이 술술 흘러버린 건.

우리는 건우를 제대로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게이, HJ그룹 후계자, 벤츠…….

숱하게 붙은 꼬리표 말고 그냥, 강건우.

건우를 알고 싶어졌다.

“이 상황에 대한 보답입니까.”

“네. 괜히 번거롭게 해드린 것 같아서요.”

“그런 대접이라면 맥주 말고 커피로 하죠.”

건우가 덤덤히 대답했다.

“상추라도 흔들었다는 큰일이니까.”

건우는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옅은 미소조차 없는 농담이었다.

우리는 건우의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 상추.

상추!

뒤끝도 기네.

“그럼 커피 대접하겠습니다.”

“그러죠. 대신 잠깐입니다.”

“아…… 네. 잠깐.”

우리는 건우가 불편한 마음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깐이라니…….

퍽, 서운한 말이었다.

소설 집필 시간을 빼앗지 않으려는 건우의 숨은 속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가죠.”

“네. 앞장서겠습니다.”

우리가 호기로운 손길로 편의점 문을 열었다.

순간 허리가 구부러진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는 들어왔다.

우리가 두 손으로 문을 꽉, 잡았다.

차가운 바람에 노파의 희끗한 잔머리가 날렸다.

편의점으로 들어선 노파가 우리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숨겨뒀던 비밀이라도 들킨 것만 같은 기분에 우리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열렸던 문이 천천히 닫혔다.

우리와 노파의 시선이 부딪혔다.

“아시는 분입니까.”

건우가 문을 열면서 물었다.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아뇨. 가요.”

우리가 노파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두 사람은 편의점을 나섰다. 편의점 주인이 급히 노파에게 다가섰다.

“어머니. 추운데 왜 나오셨어요. 집에 계시라니까.”

편의점 주인의 말에도 노파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셔요.”

“내가 죽을 때가 다 됐는갑다. 눈까리에 구신이 다 비노.”

두 사람을 보던 노파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건우와 우리의 손가락 끝에 연결된 고운 붉은 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붉은 실에 끝에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앳된 얼굴.

잔뜩 흐트러진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아이.

“붙지도 않은 끈을 참말로 단디 붙잡고 있구마.”

남자아이는 끊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두 개의 붉은 실을 꽉, 잡고 있었다.

절대로 놓을 수 없다는 것처럼.

편의점 주인은 노파의 시선을 따라갔다.

나란히 걷고 있는 우리와 건우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가 보이신다고.”

편의점 주인이 중얼거렸다.

우리와 건우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편의점에서 멀어졌다.

사부작사부작.

두 사람의 걸음은 어색하지만 평온해보였다.

***

한적한 카페.

우리와 건우는 창가 쪽에 앉았다. 은은한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을 적셨다.

불편한 마음에 우리는 진동벨만 만지작거렸다.

슬리퍼를 비집고 나온 우리의 발가락도 덩달아 꼼지락거렸다.

한참 울리지 않던 진동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제가 갈게요.”

우리는 일어난 건우를 말리면서 말했다.

“아뇨. 제가 가죠.”

“아니에요. 제가 바로 가지고 올게요.”

두 사람은 경쟁하듯 픽업대로 걸어갔다.

서로 음료를 들겠다는 각축전이 벌어졌다.

“그러지 말고 공평하게 각자 들면 될 것 같습니다. 차장님.”

“좋은 생각입니다.”

건우가 무심히 제 커피잔을 들었다.

각자 잔을 든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가 두 손으로 잔을 잡았다. 훗훗한 열기에 실려 초콜릿 향기가 우리의 코끝을 간질였다.

“차장님께 꼭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드디어 하네요.”

“실망스럽네. 설마 커피 하나로 넘어갈 생각입니까.”

“그냥 넘어가시는 줄 알았는데…….”

“워낙, 강렬해서.”

건조한 건우의 말이 우리를 푹, 찔렀다.

우리를 보던 건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도로를 향해 상추를 흔들어대던 우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천재들에게 간혹 괴상한 구석이 있다더니…….

예술가 특유의 신선한 손짓일지도 몰랐다.

“단단히 준비해요.”

건우가 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건우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에게 고정돼있었다.

“곧, 고대리 찬스를 써볼 참입니다.”

“무슨 찬스를……?”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죠.”

우리는 건우의 미소가 마냥, 사악하게만 느껴졌다.

밤새 술주정을 부려댄 순간을 후회했다.

고우리 찬스라니…….

쉬운 벌칙은 아닐 것만 같았다.

우리는 건우의 눈길을 피하면서 따뜻한 음료로 목을 축였다.

대체 어디서 고우리 찬스를 외칠 거냐고!

“차장님. 혹시 금요일 시간 괜찮으실까요.”

“그건 왜 묻습니까.”

“성운백화점 담당자가 금요일에 미팅 요청을 해서요.”

우리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고우리 찬스를 잊으라는 것처럼.

“일은 회사에서만 생각하죠.”

“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말씀드렸습니다.”

“궁금합니다.”

나지막한 건우의 목소리가 테이블에 흘렀다.

“관심도 상당하고.”

건우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건우의 눈동자가 우리를 잡아끌었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검은 눈동자였다.

별의 부스러기를 모두 삼킬 것처럼, 아주 검은 빛.

매혹적인 눈빛은 우리에게 묘한 여운을 남겼다.

묘한 고요가 테이블을 촘촘히 메워나갔다.

우리를 보던 건우가 커피를 마셨다. 건우는 어지러이 부유하는 마음을 힘껏 붙잡았다.

“글은 진척 좀 있습니까.”

건우의 말에 우리는 음료를 그대로 뿜어낼 뻔했다.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친구가 궁금하답니다.”

건우는 성민을 팔았다.

더는, 작은 죄책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는 커피 한 잔에 들끓는 소설에 대한 욕망을 눌렀다.

“그 출판사 운영하신다는 분이요?”

“예.”

“무슨 출판사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울 출판사입니다.”

“거기셨구나.”

우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민의 출판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정성스러운 리뷰와 함께 출판 제의를 해온 대형 출판사였기 때문이었다.

번번이 어긋나 작업은 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관심 있게 지켜보던 출판사이기도 했다.

“글은 좀 걸릴 것 같아요. 슬럼프가 와서.”

우리의 말에 건우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슬럼프라니.

커다란 상심과 상실의 감정이 건우에게 휘몰아쳤다.

잔을 잡은 건우는 뜨거움조차 잊은 것처럼 보였다.

“해결 방법은 없습니까.”

“소설에 문제가 있기는 한데……. 해결은 해봐야죠. 암튼 회사에는 비밀로 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건우의 말에 우리는 안도했다.

적어도 건우의 입은 가볍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황주임이나 우팀장에게 들켰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소문에 빠졌을 것이었다.

두 사람은 따뜻한 음료를 마시면서 서로를 봤다. 한 테이블을 물들인 동상이몽이었다.

***

하늘이 흐렸다.

꾸물꾸물한 하늘은 우울한 금요일을 알리는 것처럼 보였다.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 축 늘어진 날에도 우리는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가 복합기로 걸어갔다.

우리는 감청색 니트에 무늬 없는 스카프로 포인트를 주었다.

단정한 슬랙스와 하이힐.

완벽한 미팅 차림이었다.

제본된 제안서까지 확인을 한 우리가 손목시계를 봤다.

성운그룹으로 출발할 시간이었다.

“대리님. 저희 오늘 전체 회식 잊지 않으셨죠?”

황주임이 급히 물었다.

“6시였나.”

“6시 반이요. 차장님도 꼭 모시고 오라는 본부장님이 엄명이 있어서.”

알겠다는 것처럼 우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F&B본부의 꽃.

건우가 없다면 회식 분위기가 우울해질지도 몰랐다.

게다가 본부장의 사랑이 건우에게로 쏟아지고 있지 않던가!

우리는 꼭, 건우를 끌고 제시간에 회식 장소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차장님. 저희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건우가 가방을 들었다.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섰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첩보영화의 비밀요원만큼 비장해보였다.

두 사람의 묵직한 구두소리가 사무실에서 멀어졌다.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내 차로 이동하죠.”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우리는 건우의 호의를 단숨에 거절했다.

상급자의 옆에서 멍하니 앉아있기가 더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사양하겠습니다.”

건우는 거절을 또, 거절했다.

“직접 운전하는 편이 마음 편해서.”

순식간에 조용해진 분위기에 눈치라도 보듯 건우가 뒷말을 붙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고대리.”

“제가 이래봬도 무사고 10년이거든요.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쉬지 않고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우리는 핸드백에 있던 차 키를 꺼냈다.

건우는 정확하게 우리의 키를 낚아챘다.

손이라도 닿을까.

우리는 황급히 손을 말아 쥐었다.

놀란 우리의 속은 벌렁거렸다.

우리는 헛기침을 하면서 쿵쾅거리는 마음을 달랬다.

“차장님.”

“전 14년입니다.”

“……?”

“무사고.”

건우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주차장에 들어섰다.

건우의 손길에 깔끔하게 주차됐던 벤츠가 빛났다.

운전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는 건우의 뒷모습을 우리는 가만히 바라봤다.

벤츠 신모델이라니…….

우리가 굳은 침을 삼켰다.

남의 차를 모는 일은 절대로 못할 것만 같았다. 그것도 벤츠라면.

흠집이라도 난다면 큰일이 날 것이었다.

우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결국 건우에게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푹신한 승차감에 우리가 은근슬쩍 몸을 움직여댔다.

푹신한 기운을 흡수해버리고 말겠다는 것처럼.

우리는 들뜬 마음을 숨기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태운 차는 빠르게 주차장을 벗어났다.

“제안서 최종 검토하세요.”

정지 신호에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은 건우가 말했다.

“아……. 차 멀미라도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편히 봐요.”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우리는 무릎에 있던 제안서를 펼쳤다. 차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간간히 와이퍼 움직이는 소리와 제안서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볼펜을 꺼낸 우리는 제안서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예상되는 질문도 빼곡하게 한쪽에 적어갔다.

작은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집중력이었다.

건우가 차장에 턱을 괬다.

길게 이어지는 정지 신호에 건우는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봤다.

볼펜을 쥐고 있는 우리의 손이 야무지게만 보였다.

건우는 작은 손으로 밤새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을 우리를 상상했다.

“행사는 외부 스테이지 쪽에서 진행하고…….”

우리가 작게 속삭이듯 발표 연습을 했다.

우리의 다홍 빛깔의 입술이 약간씩 움직였다.

생기 넘치는 우리의 눈빛이 건우를 사로잡았다.

물빛처럼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그 밤.

우리가 눈동자에 별의 부스러기를 품은 그날처럼.

빵.

뒤에서 시끄럽게 경적소리가 울어댔다.

그 소리만 아니었다면 건우는 한동안 넋을 잃고 우리를 바라봤을지도 몰랐다.

차체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강해졌다.

제안서를 보던 우리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고요한 심해만큼 깊고 아득한 침묵이 두 사람을 눅진히 적셨다.

“차장님. 파란불인데.”

우리가 신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가셔야 할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다른 생각 좀 하느라.”

“혹시라도 피곤하시면 말씀주세요. 바로 교대할게요.”

“그렇게 하죠.”

건우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멈췄던 차가 움직였다.

한참 도로를 내달리던 건우의 차가 속도를 줄였다.

복잡한 잠실역에 우뚝 서 있는 성운그룹의 건물이 보였다.

주차장에 주차를 끝낸 두 사람은 로비로 들어섰다.

우리는 급히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고대리님. 일찍 오셨네.”

로비로 내려온 문규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문규의 옆에는 우리와 기싸움을 벌였던 소희가 서 있었다.

소희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얼굴로 건우를 향해 수줍은 인사를 날렸다.

고개를 숙여 화답을 할 뿐.

건우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일단은 올라가시죠.”

문규가 우리와 건우를 안내했다.

네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조용해졌다.

우리를 사이에 둔 채로 건우와 문규가 서 있었다.

회의실로 가는 짤막한 순간.

엘리베이터에서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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