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성가신 우리 작가님
우리가 메일함을 열었다.
모델 관련 계약서 초고가 도착했다.
빽빽한 계약서 내용을 검토하던 우리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작은 사항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다부진 손놀림이었다.
말끔하게 조율 내용을 체크한 우리가 에이전시 윤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장님, 바쁘시죠. HJ 고우린데요. 전화 괜찮으세요?”
-예. 말씀주세요. 대리님!
“저희 제 5조 1항에 있는 행사 횟수하고, 한소민씨 SNS에 저희 신제품 업로드 정도는 푸쉬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한 번 확인은 해보겠습니다. 요새 한소민씨가 너무 바빠서…….
윤실장은 난감하다는 것처럼 말끝을 끌었다.
HJ그룹에 더 유리하게 계약조건을 수정하기가 난감하다는 말투였다.
“잘 알죠. 한소민씨 핫한 거.”
-그러게요. 스케줄이 워낙 빡빡해서.
“아무래도 요즘 인기가 최고시니까……. 그래도 저희 PPL에, 드라마 앞쪽 광고까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잘 좀 말씀 부탁드릴게요.”
-넵! 최대한 잘 논의하겠습니다.
구슬리듯 부탁하는 우리의 말에 실장이 힘차게 대답했다.
“계약서 1차 수정사항들은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그것도 한 번 체크해주시고. 모델료 네고도 좀 더. 부탁 좀 드릴게요.”
-역시, 고대리님. 왜 말씀 안하시나 했습니다.
“그럼요. 네고 없으면 큰일 난다니까요. 그럼 실장님 파워만 믿고 있을게요.”
숱한 변경사항과 함께 우리는 칭찬을 곁들였다.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는 칭찬에 윤실장은 없던 네고도 추가로 만들어올 기세였다.
하하호호.
자본주의 미소가 우리의 입가를 맴돌았다.
“네. 그럼 내일 연락주세요.”
전화를 끊은 우리의 얼굴은 건조하게 돌아왔다.
1차로 검토한 계약서 수정 내용을 폭풍처럼 메일에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가 살짝 고개를 숙여 손목시계를 봤다.
6시 30분.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키보드를 부술 것처럼 힘차게 두드렸다.
철야만은 피하겠다는 다부진 손놀림이었다.
고개를 한껏 내밀고는 우리는 일에 집중했다. 금방이라도 모니터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닥다닥.
쉬지 않고 두드려대는 키보드 소리를 비집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우리의 손길이 짐짓 느려졌다.
“뭐야. 벌써 가는 거야. 선영씨이?”
황주임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말끝을 올렸다.
가방을 챙기던 선영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넵! 그럼 가보겠습니다.”
“뭐야. 다들 계시는데……. 정말 가는 거야?”
황주임은 퇴근할 기색이 없이 의자에 눌러 붙은 직원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저 일은 다 끝냈는데.”
“회사생활의 팔 할은 눈치라니까.”
황주임이 선영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황주임을 봤다.
매일 퇴근에 목말라했던 황주임이었다.
그런데 그새 신입이 들어왔다고 이토록 달라질 수가 있다니…….
“그러지 말고 저기 탕비실 앞에 있는 복사용지……,”
“들어가요.”
우리는 쓸데없는 잡무를 시키려는 황주임을 막아섰다.
여전히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로.
“그래도 대리님…….”
“일 없으면 퇴근해야죠. 얼른 들어가요.”
무심한 우리의 목소리에는 작은 배려가 녹아있었다.
괜히 우물주물거리다가 선영이 강제로 야근을 하지 말았으면 싶었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시간을 죽이는 일은 정말, 쓸모없는 일이었다.
곤혹 중에 곤혹이기도 했다.
“차장님께 인사는 드리고.”
“넵!”
우리를 바라보는 선영의 눈빛이 빛났다. 존경이 넘실거리는 눈빛이었다.
잰걸음으로 건우에게 걸어가 인사를 하는 선영의 목소리는 마냥 활기찼다.
기강을 잡지 못해 울상으로 변한 황주임을 외면하면서 우리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800타! 900타!
우리는 영혼을 갈아서라도 일을 끝낼 생각이었다.
마지막 마침표.
그 찬란한 방점을 찍은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윤실장에게 메일을 보냈다는 확인 요청 메시지도 보냈다.
우리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우리가 가방을 챙겼다.
깔끔하게 업무를 마친 만큼 문규와의 오해도 말끔하게 풀어낼 생각이었다.
우리는 가방을 들고는 건우에게로 걸어갔다.
“들어갑니까.”
“네. 계약서는 수정되면 포워딩하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얼른 퇴근하세요.”
건우는 우리의 퇴근을 적극 장려했다.
밤 9시.
매일 귀신같이 정확히 올라오던 소설의 업데이트가 불규칙해진 이유가 모두 늦은 퇴근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 네.”
건우의 눈빛은 우리를 채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서, 가라고.
불타는 건우의 눈빛에 떠밀려 우리는 어정쩡하게 건우에게 인사를 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도 우리는 연신 뒤를 돌아봤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심히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잠실역.
찬바람이 불었다.
퇴근길은 북적거렸다.
인파를 헤치면서 우리는 역을 빠져나왔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들의 행렬을 거슬러 오른 우리가 성운그룹 앞에 섰다.
하늘과 맞닿을 것처럼 높은 건물이었다.
우리는 낮처럼 밝은 빛을 뿜어내는 건물을 쳐다봤다.
-나 회사 앞. 언제 끝나.
-거의 끝났으니까 거기 사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봐.
문규의 답장은 무미건조했다.
잔뜩 뿔이 난 것처럼 느껴졌다.
칼바람이 우리의 두 뺨을 스치면서 지나갔다. 살을 에는 강바람이었다.
우리는 옷깃을 바짝 여미면서 성운그룹 건물로 들어섰다.
간밤의 일로 마음이 상했을 문규를 반길 생각이었다.
멍하니 카페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한참 로비를 서성거렸다.
밀려드는 피곤함에 우리가 하품을 하던 순간이었다.
익숙한 문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고에 출입 카드를 두고 왔다니까.”
문규는 열변을 토해내면서 직원과 함께 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문규의 옆에 서 있는 직원은 앳되고 세련돼 보이는 스타일의 여자였다.
문규의 말에 여자는 신이 난 것처럼 깔깔 웃어대고 있었다.
여자는 문규의 팔을 가볍게 때리면서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우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여우 짓을 해대겠다?’
우리가 두 사람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둔감한 문규는 느끼지 못할 만큼의 고도화된 여우의 손짓이었다.
“그때, 제가 들어갔구나.”
“내가 딱 소희씨, 없었으면…… 고우리?”
게이트를 나오던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추었다.
우리는 어깨를 쭉 펴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그야말로 슈퍼모델 뺨치는 시원스러운 워킹이었다.
“아…… 그분이시구나. 우리 성주임님께 자주 들었어요.”
소희가 우리를 스캔하면서 말했다.
소희의 태클에도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분이 아니라 고우립니다.”
우리는 가죽으로 된 검은 명함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우리라니……. 와, 성운그룹은 역시 가-족 같은 곳이네요.”
우리는 가족 같다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바람에 꼭 우리의 말은 욕설처럼 들렸다.
X같다, 라는.
소희도 질세라 가방을 뒤적거렸다.
“죄송해요. 명함집이 꽤 차서. 주셔도 받을 수가 없네요.”
우리는 살짝 손을 들고는 명함을 내밀려던 소희를 막아섰다.
급작스럽게 날아든 한방에 소희가 휘청거렸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느꼈다.
“그럼 조심히 퇴근하세요.”
길이라도 비켜주는 것처럼 우리가 약간 옆으로 비켜났다.
“저희는 긴히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우리의 말에 소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여러 색깔로 변했다.
소희는 무슨 말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우리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문규까지 슬금슬금 우리의 눈치를 보면서 냉큼 소희에게 인사를 날려댔다.
“내일 봐. 소희씨.”
어색하게 손까지 흔들면서.
소희에게는 후퇴 말고는 별다른 카드가 없어보였다.
소희는 입술을 쌜쭉거렸다.
다음을 기약하는 패잔병처럼 소희는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썸타니?”
우리는 멀어지는 소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썸은 무슨…….”
“그럼 잤니?”
“넌 무슨 말이 참. 여자애가…….”
우리를 보던 문규가 혀를 찼다.
“왜. 딱, 매력 넘치는데.”
“벌써 피곤하다. 넌 무슨 애가 사람 피곤하게……. 사근사근한 맛도 없고. 됐고. 그래서 그 새끼는 누구냐.”
“알잖아. 직장상사라고.”
“그런데 왜 직장상사가 너희 집엘 가냐고.”
톡, 치면 날아가는 셔틀콕처럼 문규의 질문이 우리에게 날아들었다.
무슨 말을 덧붙여도 오해를 해댈 문규였다.
깊은 한숨을 쉬면서 우리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겼다.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우리의 뇌리를 스치고 두 남정네의 모습이 지나갔다.
서로를 뜨겁게 갈구하던 벤츠와 목폴라!
“게이야.”
“……뭐?”
“우리 차장님, 게이라고.”
우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에 문규의 오해는 성립되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아니. 이 무슨 신박한 변명이냐?”
“변명 아니고 사실이야.”
“와…… 씨. 진짜 게이라고? 개소름. 남자 둘이…….”
말끝을 흐리는 문규의 얼굴이 구겨졌다.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것처럼 문규는 몸서리를 쳤다.
“소름은. 그냥 사랑이야.”
“사랑은 개뿔. 와…… 이야. 게이도 진급을 하는구나. 비밀이겠지?”
조잘조잘.
우리는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문규의 모습이 우리는 꼴사납게만 느껴졌다.
본인과 다른 사람은 배척하고, 깔아뭉개는 아주 나쁜 부류의 사람.
문규는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문규에게 먹잇감을 던져준 것만 같아 건우에게 미안해졌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문규가 몸서리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건우를 재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렀다. 우리는 문규에게 한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풀어진 매듭을 다시 묶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진짜 게이라고? 개소름.’
저녁을 먹는 순간에도.
‘게이도 진급을 하는구나. 비밀이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우리의 머릿속은 문규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자신이 고수위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죽자고 컴퓨터를 붙잡아도 다음 편을 쓰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키보드에 얼굴을 묻었다. 속이 답답했다.
달콤한 초콜릿으로 당이라도 충전해야 할 것 같았다.
번쩍 고개를 든 우리가 롱패딩을 입고는 방을 나섰다.
우리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슬리퍼를 신었다.
“이 밤에 어디 가게.”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미순이 우리를 보고는 물었다.
“편의점.”
“밤에 먹으면 살찐다니까.”
“몸매를 포기하고 행복을 얻을래.”
“조심히 다녀와. 밤길 위험하니까.”
우리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을 나섰다.
우리는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수많은 군것질거리가 우리를 반겼다.
우리는 진지한 얼굴로 진열대를 살폈다.
“허씨 초콜릿이…….”
고개를 내빼고, 초콜릿을 찾던 우리의 눈이 커졌다.
무심하지만, 시크한 얼굴로 즉석조리식품만 한 움큼 들고 있는 건우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놀란 얼굴로 급히 진열대에 쪼그려 앉았다.
꼭, 물건이라도 훔치려다가 들킨 도둑처럼.
정말, 불쌍하게.
우리가 진열대 앞으로 약간 고개를 내밀었다.
건우는 우리의 존재를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심각한 얼굴로 간편 조리식품을 훑고 있을 뿐이었다.
건우가 고민에 빠져 있는 순간이 기회였다.
우리는 진지하게 편의점 탈출 계획을 세웠다.
‘제발! 들키지만 말아주라.’
우리가 낮은 보폭으로 걸어갔다.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헛 둘!
헛 둘!
무조건 기합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편의점 출입문까지 코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꽁무니 빠지게 편의점 밖으로 내달리려고 우리가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즉석식품을 고른 건우가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황급히 진열대 뒤로 몸을 숨겼다.
완벽하게 몸을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변의 색깔로 몸의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만큼 완전한 은신이 될 수도 있었다.
퍼-엉!
커다란 소리와 함께 패딩이 터지지만 않았더라도.
그냥 펑도 아니었다.
뻥이요!
우렁찬 소리와 함께 뛰쳐나오는 튀밥처럼 요란하고도 강렬한 터짐의 소리였다.
까만 패딩이 벌어지면서 수많은 오리털을 뱉어냈다.
‘새 됐다. 완전히, 새 됐어.’
순백의 오리털은 수없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아스팔트를 적시는 가는 실비처럼 새하얗고도 고운 오리털은 편의점 바닥에 수북이 쌓여갔다.
우리는 빠른 손길로 패딩을 들췄다. 찢긴 밑단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들었나. 못 들었을 수도 있잖아.’
우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건우가 절대로 모를 수 없을 만큼 소리가 컸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오리털까지 꽃가루처럼 날리지 않았던가!
말라버린 아랫입술을 깨문 우리가 패딩 끝을 잡은 채로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이동했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빵가루를 쫓아 집으로 돌아온 헨젤과 그레텔처럼, 건우는 오리털을 쫓았다.
새하얀 흔적의 끝.
거기에는 우리가 있었다.
건우가 우리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건우의 발밑에 있던 오리털들이 팔락거리면서 허공으로 올랐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고개를 든 우리와 고개를 내린 건우의 눈이 딱, 마주쳤다.
우리는 그대로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건우의 눈길을 피하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 못한 것 같은데.”
건우는 패딩 밑단을 붙잡고 있는 우리를 보면서 말했다.
그냥 넘어갈 문제를 굳이 콕 집어서…….
악의 없는 건우의 말이 우리는 못내 얄밉게만 느껴졌다.
“오리, 날립니다.”
“아…… 터져 버려서…….”
우리가 패딩 밑단을 살짝 들면서 대꾸했다.
우리는 놀라울 정도의 빨랐던 반사 신경을 탓했다.
건우에게 놀라 빨리 숨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초콜릿도 맥주도 집지 못한 채로 편의점 바닥에 쪼그리고 있는 꼴이라니.
우리는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찢어진 패딩을 잡고 있는 것조차 쪽팔렸다.
건우만 만나면 모든 상황이 꼬여버리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뜨거운 눈길을 건우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꺼져, 라는 눈빛.
“계속 그러고 있을 겁니까.”
우리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건우는 사라질 기색이 없었다.
찢어진 패딩을 잡고 있던 우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히, 진퇴양난이었다.
이대로 날름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도도한 얼굴로 별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우스웠다.
게다가…… 다리까지 저려왔다.
“살 물건들이 있어서……. 먼저 가세요.”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괜찮죠.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우리는 약간 엉덩이를 들고는 건우에게 인사를 했다.
한시라도 빨리 건우를 보내버리고 싶었다.
편의점 밖으로, 아주 멀리.
다리를 물들이는 저릿한 기운을 우리는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아…… 쥐나서 미쳐버리겠네!
무미건조한 얼굴로 우리를 보던 건우의 걸음이 움직였다. 가보겠다는 인사조차 없었다.
건우가 사라졌다는 것이 고맙고도 얄밉게 느껴졌다.
냉혈한.
건우에게 참, 잘 어울리는 수식어였다.
어쩌면 사내에 퍼진 소문처럼 건우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뱀파이어나 알고리즘으로 잘 연결된 인공지능일지도.
“15,800원입니다.”
편의점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약간 몸을 기울여 카운터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열심히 몸을 기울여도 건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곧, 종소리가 들렸다.
건우가 편의점을 나간 모양이었다.
종소리가 홀가분하게만 들렸다.
대강 건우가 편의점을 나갔다고 생각한 우리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건우도 나갔으니 수습을 시작할 때였다.
패딩 끝을 우악스럽게 잡은 채로 우리가 일어난 순간.
“……!”
우리의 시야에 단단한 두 다리가 보였다.
우리의 시선은 천천히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끝없이 올라가던 우리의 눈길이 멈췄다.
편의점 검은 봉지를 든 채로 건우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가시게.’
딱, 그 말을 담은 눈빛을 날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