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이웃 사이
우리의 시선은 건우에게 머물렀다.
좀체 얼떨떨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다.
“저기는 우리 회사 마케팅1팀에서 가장 능력 있는 고우리 대리.”
본부장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우리를 소개했다.
“고대리 오고 우리 사업팀 매출이 200%가 뛰었다니까.”
“그렇습니까.”
우리를 보던 건우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건우에게 우리는 아래층에 사는 고수위 소설에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랬다니까. 고대리 이쪽은…….”
“강건우입니다.”
건우는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담담하게 본부장의 말을 이었다.
“마케팅1팀 팀장으로 오신 강건우 차장님.”
건우를 소개하는 본부장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건우의 맞은편에 앉은 우팀장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건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나이가 어린 건우가 마케팅1팀의 팀장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라이벌의 등장에 우팀장은 마냥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열심히 사바사바해서 누구는 간신히 잡은 팀장자린데. 어린놈의 시끼가……!’
우팀장은 건우에게 이글거리는 눈빛을 연달아 쏟아냈다.
따가운 눈총에도 건우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놀랄 만큼의 덤덤함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이번에 입사한 신입 강선영씨.”
본부장의 소개에 선영이 벌떡 일어났다.
폴더처럼 허리를 굽히면서 선영은 열정적으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강선영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우리예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짤막한 소개와 인사가 끝났다.
순식간에 본부장실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우리는 우리대로.
우팀장은 우팀장대로.
건우를 경계하고 있었다.
상황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본부장과 선영만 연신 싱글벙글거렸다.
“고대리가 우리 강차장한테 회사 좀 잘 소개해줘요. 업무 내용도 잘 공유해주고.”
“아…… 제가 소개를……?”
우리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단둘의 시간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어색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고대리가 수고 좀 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우리는 본부장의 말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사의 말을 긍정을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근데 오늘 오후에 무슨 회의가 있었던 것 같은데…….”
“3시에 브랜드 모델 최종 결정 회의 말씀이십니까.”
“아…… 그랬지. 모델. 요즘 내가 이리 정신이 없어요.”
본부장이 제 머리를 가볍게 때리면서 말했다.
“본부장님의 스케줄은 이 우종길이 잘 정리해두겠습니다. 하하하!”
우팀장은 사람 좋은 가면을 쓰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힌 아부 타이밍이었다.
목젖이 보일 만큼 박장대소를 하는 우팀장의 모습에도 건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부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우팀장밖에 없다니까.”
“저도 본부장님밖에 없습니다.”
본부장과 우팀장은 둘만의 세계에 갇힌 것만 같았다.
일상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의 존재는 진즉에 잊은 것처럼 보였다.
“본부장님.”
“그러니까 치매라도…… 강차장?”
본부장의 시선은 건우에게로 움직였다.
“중요하게 하실 말씀 없으시면 업무 보겠습니다.”
싹둑.
건우는 본부장의 말을 잘라버렸다.
얇은 종잇장을 잘라내는 것처럼 아주, 쉽게.
건우의 말 한 마디로 순식간에 분위기는 싸해졌다.
건우를 보던 우리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회사에는 중요한 금기사항이 있었다.
본부장의 말을 절대로 끊지 말 것!
중간에 말을 끊는 것을 본부장은 그 누구보다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열창을 하고 있는데 중간에 노래를 끊어버리는 기분이라나.
그 엄청난 금기사항을 방금 건우가 단박에 부셔버렸다.
깊은 미소를 머금던 우팀장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무좀으로 얼룩진 슬리퍼가 건우에게 날아갈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 그래. 일 해야지. 내가 바쁜 사람을 오래 잡아뒀네.”
손목시계를 힐끔 보던 본부장은 흔쾌히 대답했다.
우팀장과 우리의 입이 동시에 쩍 벌어졌다.
본부장이 화를 내지 않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건우를 쳐다봤다.
‘뭐야. 정말 회장님 아들이기라도 한 거야?’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본부장의 말에 건우는 일말의 주춤거림도 없이 일어났다.
‘뭐야. 오늘 아침 일에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왜? 왜! 뭐!’
조금의 감정도 없는 얼굴로 본부장에게 인사를 건넨 건우가 우리에게 다가섰다.
우리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런 건우의 몸짓에 속으로 잔뜩 당황했다.
“가죠.”
“네?”
“회사 소개 안 해줄 겁니까.”
“아…… 네. 해드려야죠. 지금 바로 움직이시겠어요?”
“예.”
건우가 단박에 대답했다.
“그럼 바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수첩을 꽉 그러쥐고 있는 우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힘차게 숨겼다.
꿀꺽.
굳은 침을 삼키면서.
건우가 회장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의 동공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회장님 아드님과 아침부터 기싸움을 벌였다니!
‘미쳤다. 미쳤어. 고우리.’
회사생활이 녹록치 않아질 거라는 불길한 기운이 우리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버석한 입술을 살짝 깨문 우리가 본부장실의 문을 열었다.
사무실로 나온 우리는 직원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 노골적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건우의 존재에 강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정말 건우가 HJ그룹의 후계자일 것이냐!
“1층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우리는 경직된 얼굴로 나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평온한 회사생활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우리는 건우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저벅저벅.
건우의 일정한 구두소리가 우리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여유로우면서도 강단이 느껴지는 발걸음이었다.
“고대리님.”
“네? 뭐 궁금한 거라도 있으실까요.”
우리는 대답을 기다리면서 건우를 봤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건우는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많죠.”
“……?”
우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궁금한 사항.”
건우의 나직한 소리가 엘리베이터에 번져나갔다.
생각을 알 수 없는 건우의 얼굴에 우리는 긴장했다.
건우의 모습은 배고픈 호랑이가 호랑이굴로 먹잇감이 굴러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네. 천천히 말씀주세요.”
연거푸 마른 침만 꼴딱거리던 우리가 굳게 마음을 잡으면서 대답했다.
우리가 힘찬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회장님 아드님이든 금수저든…… 그래! 뭐 어쩔 거야.’
우리는 그저 잘 버티겠다고 다짐했다.
맑은 하늘에 몰아치는 폭풍우도 시간이 가면 다 지나가는 법이니까.
“궁금하신 사항. 전부요.”
악착같은 생존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면서 우리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건우의 얼굴에 살짝 바람 빠지듯 옅은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용호상박.
맹렬하게 맞붙은 용과 호랑이처럼 두 사람은 단단한 눈빛으로 앞을 봤다.
용과 호랑이를 품은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닫혔다.
***
1층 로비를 시작으로 우리는 각 층을 빼곡하게 채운 부서들을 소개했다.
관리팀, 법률팀, R&D(제품개발)팀…….
수많은 부서의 이름이 우리의 입을 분주하게 오르내렸다.
“사원증은 제가 관리팀에 연락해서 처리하겠습니다.”
“내가 하죠.”
“어려운 일은 아니라서. 제가 하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우리는 열린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춰 섰다.
5층 헬스장.
헬스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바스락대는 소리조차 없는 헬스장은 적막의 끝이었다.
“퇴근 시간에는 사람이 많은데. 지금은 업무 중이라…….”
“거기 삽니까.”
“네?”
“우리 집 아래층에 사냐고 물었습니다.”
건우의 물음이 날카롭게 적막을 뚫었다.
그야말로 단도직입이었다.
텅 빈 런닝머신을 보던 우리의 고개가 느릿하게 건우의 쪽으로 돌아갔다.
‘이 인간, 대체 무슨 속셈일까.’
머리를 굴려 봐도 질문의 의도를 간파할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사적인 질문이라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심각하게 사생활을 침해하는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시각에 따라서는 달리 해석될 수도 있죠.”
“시각이라…….”
우리의 말을 되새기던 건우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렀다.
온몸을 얼게 만들 만큼 차가운 냉기가 헬스장에 휘몰아쳤다.
“이웃이 아니길 바라죠.”
“……?”
“피차 불편할 것 같아서.”
건우의 속마음이 속을 뚫고 나왔다.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직장 상사가 위층에 살면 불. 편. 해. 서. 요.”
우리의 뒷말이 스타카토처럼 톡 튀었다.
하지만 우리의 가시 돋친 말도 건우에게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 가죠.”
우리는 헬스장을 나서는 건우를 봤다.
‘허…… 뭐? 이웃이면 불편해?’
기가 차다 못해서 부아가 치밀었다.
재벌 3세보다는 조카 신발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우팀장이라는 혹을 떼려다가 다른 혹을 붙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솟구치는 화를 억세게 누르면서 우리는 건우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던 사람들은 멀리서도 느껴지는 살벌한 기류에 몸서리를 쳤다.
“고똘이 승질 죽이고 잘 소개했을까?”
“고똘이? 저 미친 개대리가?”
“새 차장님한테도 들이박으면…….”
쑥덕거리는 직원들의 대화를 비집고 우팀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잘리는 거지 뭐!”
우팀장의 목소리에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귀신만큼이나 소리 없고도 무서운 등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오셨어요. 우팀장님?”
우팀장은 비밀이라는 것처럼 삐쩍 마른 어깨를 으쓱거렸다.
벌렁거리는 마음을 부여잡는 모두의 모습에 한 번.
우리가 잘릴 수도 있다는 상상에 또 한 번.
우팀장은 연달아 목젖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어보였다.
유쾌하고도 간사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고대리 말이야. 일만 잘하면 뭐해. 사회성이 제론데. 제로!”
말을 끝낸 우팀장은 우리를 향해 혀를 찼다.
“고대리 얼마 만에 잘리나 두고보겠으.”
모두가 들릴 정도로 크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우팀장의 눈빛이 불탔다.
불끈 솟은 마음을 내비치는 우팀장의 모습에 모두 슬금슬금 흩어졌다.
우리를 향해 코웃음을 날리는 우팀장은 우리의 사직서가 하루 빨리 나타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오후 3시. 대회의실.
회의실에는 짙은 긴장감이 돌았다.
우리는 노트북 옆에 있던 생수를 힘차게 들이켰다.
오늘은 반드시 모델을 결정해야만 했다.
프레젠테이션 리모컨을 잡은 우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희 모델 관련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목을 가다듬은 우리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마케팅팀에서 최종 논의된 모델은 한소민, 강유정, 박민재까지 총 3명입니다.”
“박민재는 별로라니까. 상큼한 맛이 없어요.”
“박민재도 충분히 상큼한 이미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아이돌입니다.”
우리가 우팀장의 말에 반박했다.
간헐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우팀장의 손길이 우리의 마음을 박박 긁어댔다.
우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대리가 뭘 모르네. 상큼함은 여자 모델들이 해줘야 제맛이지.”
“트렌드를 잘 아는 거죠.”
우리는 우팀장의 의견을 막아섰다.
“남자모델 말고…….”
“영업팀도 회의 참여 필요합니까.”
연필을 굴리던 건우의 손길이 멈추었다.
건우는 싸늘한 눈빛으로 우팀장을 보면서 물었다.
침을 튀기면서 제 의견을 내보이려던 우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건우의 반박에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이었다.
“모델 결정은 마케팅팀 내부에서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건우의 뒷말이 우팀장을 깊게 찔렀다.
탄산만큼 톡 쏘는 건우의 매서운 눈길에 우팀장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해졌다.
건우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처럼 우팀장은 연신 입술을 삐쭉거렸지만 신박한 반박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건우가 정말로 HJ그룹 후계자라면 눈 밖에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거만한 포즈로 우리의 프레젠테이션을 듣던 우팀장은 슬그머니 곧추 앉았다.
사태를 파악해보고 건우에게 대적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마케팅팀 팀장이 공석이어서 우팀장이 돕느라……. 그러지 말고 고대리. 계속 하지.”
크게 헛기침을 한 본부장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네.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건우와 우팀장의 사이를 흐르던 권력의 알력에 집중하던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우리는 살짝 놀랐던 기운을 황급히 털어냈다.
회사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문 많은 회사에서 살아남을 길은 포커페이스와 침묵뿐이었다.
물을 들이켜면서 마음을 다잡은 우리가 슬라이드를 넘겼다.
우리는 속으로 회의에 집중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소민에 대한 포털사이트 검색 트래픽입니다. 다른 모델보다 꾸준하게 검색량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우리는 포인터로 그래프의 상승곡선을 부드럽게 가리키면서 말했다.
“또 상반기에 드라마가 나올 예정이라…….”
가만히 우리의 말을 듣던 건우가 연필을 쥔 손을 살짝 들었다.
질문을 하겠다는 손짓이었다.
건우를 보던 우리의 말이 순간 멈췄다.
연한 주홍색의 연필을 쥐고 있는 길고 매끄러운 건우의 손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았다.
“출연 드라마 체킹을 끝냈습니까.”
“네. 스토리하고 라인업 확인했습니다. 맡은 캐릭터가 청량하고 밝은 캐릭터라 저희 신제품 이미지하고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성적은 잘 나올 것 같습니까.”
“충분하다고 판단됩니다. 작가진하고 연출진이 전작에서 좋은 성적도 냈고요.”
우리는 건우의 물음에 한 번의 막힘도 없이 답을 했다.
“PPL 논의는?”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풋티지 광고-드라마를 활용한 CF광고의 일종-도 고려해볼 만하고요.”
“나쁘지는 않군요.”
“네. 그만큼 메리트 있는 모델입니다.”
건우가 다시 느릿하게 연필을 돌렸다.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실까요.”
“생기면 다시 물어보도록 하죠.”
프레젠테이션은 막힘없이 계속됐다.
우팀장은 간간히 우리의 말에 태클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건우의 눈빛에 밀려 엉덩이만 들썩댔다.
우리가 발표를 끝낸 순간까지도 건우는 별다른 질문 없이 우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럼 바로 거수로 결정할까요. 저는…….”
조용한 분위기를 뚫고 우팀장이 손을 들면서 말했다.
“바로 결정해야 합니까.”
냉큼 들었던 우팀장의 손이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한창 모델 전쟁 중이라……. 해당 모델도 다른 곳과 계약을 해버릴 수도 있어서 빨리 결정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금일 발표 내용 보내주시면 최종 결정해서 본부장님께 보고 드리죠.”
“당장 결정은 어려우실까요.”
“급하다고 마구잡이로 결정할 수는 없죠.”
건우의 말에 우리의 입술 사이로 작은 탄식이 흘렀다.
질질 끌어온 사안이었다.
당장 결정을 해도 빠듯한 마당에 시간을 더 달라니!
우리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괜찮겠습니까. 본부장님.”
건우의 물음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본부장에게로 쏠렸다.
‘제발! 안 된다고 말해주소서. 당장 지금 선택하라고 말해주소서!’
우리는 간절한 바람이 담긴 눈빛을 본부장에게 날려댔다.
“뭐…… 그럽시다.”
본부장이 두 손을 맞부딪혔다. 쾌활한 웃음이 대회의실을 뒤덮었다.
허망한 대답에 우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모든 결정을 어물어물거리던 우유부단한 본부장은 건우를 적극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가 택하는 모델에 대해서는 무조건 오케이를 날릴 기세였다.
“그럼 고대리님 의견 덧붙여서 발표 내용 전달주시죠.”
“네. 알겠습니다.”
건우의 말에 우리가 빠르게 대답했다.
우리가 준비한 내용보다 핸드폰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본부장은 꽤 비장한 얼굴로 테이블에 있던 볼펜을 처음으로 집어 들었다.
똑딱똑딱.
볼펜을 똑딱거리던 본부장은 위대한 제안이라도 던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오늘 강차장님도 왔는데 저녁에 한 잔 해야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격하게 반겨드려야죠. 그럼 바로 장소 잡겠습니다.”
“우팀장은 역시! 내 맘을 가장 잘 안다니까.”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하는 본부장과 알랑거리는 우내시의 콜라보가 성사됐다.
번갯불로 콩을 구워먹는 것보다 빠른 회식 성사의 현장이었다.
“그럼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우팀장에게서는 가짜 충성심이 넘쳤다.
우리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반기지 않을 회식이었다.
듣기만 해도 진이 쭉 빠지는 공포의 월요일 회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