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화. 토끼와 코끼리의 상관관계
인사동 거리.
우리가 핸드백을 끌어안은 채로 타로카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꼴깍.
굳은 침이 우리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역술가는 거침없이 타로카드를 뒤집었다.
역술가의 손놀림에 테이블에 깔린 보랏빛 스프레드 천의 밑단이 흔들렸다.
우리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연달아 등장하는 카드 그림이 전부 칙칙했기 때문이었다. 낫을 들고 있는 해골의 등장은 불안의 정점을 찍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입술은 말라비틀어진 꽃처럼 버석하게 말랐다.
“아…… 이거. 쉽지 않은 궁합인데.”
타로카드를 매만지던 역술가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왜요? 성격적으로…….”
“성격만 다르면 참을 수 있게?”
역술가는 우리의 말을 빠르게 가로채고는 말했다.
“그럼 뭐가……?”
“궁합이 최악이야.”
“궁합이요?”
“그래. 그러니까…… 그래! 코끼리한테 토끼가 달려들었다고나 할까.”
역술가의 입술 사이로 거침없는 비유가 흘렀다.
우리는 뜨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역술가의 말에 문규의 얼굴은 짜증스럽게 일그러져있었다.
토끼라는 말이 문규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버린 모양새였다.
역술가의 말을 곱씹던 문규는 연거푸 과장스럽게 실소를 터뜨렸다.
“거참! 말씀 심하시네. 토끼라니…… 허!”
문규는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다는 말투였다.
욱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문규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 여러 색깔로 변했다.
“죄송한데 저희 잘 맞습니다.”
“카드는 다른 말을 하는데.”
“카드가 무슨 말을 한다고.”
문규가 스프레드 천에 있던 카드를 흔들어댔다.
“이건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암튼 됐고. 저희는 일어나겠습니다.”
사방에 침까지 튀기면서 열변을 토해내던 문규가 지갑을 열었다.
신경질적으로 지폐 몇 장을 꺼내는 문규의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끓어오르는 열을 좀체 달랠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더…… 말을 좀 더…….’
역술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은 간절하게 빛났다. 우리는 목이 빠져라 역술가의 궁합 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절한 눈길을 날려대는 우리를 보던 역술가의 눈이 조금씩 가늘어졌다.
“고우리.”
“가방…… 가방 좀 챙기고.”
핸드백을 챙기겠다는 핑계로 우리는 미적거렸다.
역술가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오묘한 기운이 우리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썩 좋은 기운은 아니었다.
역술가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뻗으려던 순간이었다.
“……!”
우리가 테이블에서 황급히 손을 뺐다.
궁합을 향한 호기심 넘치던 우리의 눈빛에는 단번에 경계의 기운이 녹았다.
우리가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우리의 아버지 성원이 순직한 이후로 우리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
아픈 과거를 가진 사람들의 손을 스치기만 해도 그들의 과거가 보이는 능력이었다.
우리는 그저 저주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린다든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것만큼 쓸모 있는 능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처를 입은 사람의 아픔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죽을 만큼의 고통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 때가 많았다.
아픔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선별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이의 과거를 본다는 것.
우리에게는 정말, 끔찍한 저주였다.
“가자고.”
“아…… 어.”
“얼른.”
“알았다고.”
문규의 강력한 재촉에 우리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천막을 걷은 문규의 뒤를 따르면서도 우리는 계속 뒤를 돌았다. 역술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채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천막의 경계를 넘었다.
“인생 참 굴곡지겠네. 저리 단단히 붙잡고 있으니…….”
역술가가 우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크게 혀를 차는 소리에 우리는 뒤를 돌아봤지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역술가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우리는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거리로 나왔다.
“와…… 생각할수록 짜증나네. 코끼리하고 토끼?”
“그냥 흘려들어.”
“이게 흘릴 일이냐? 참내. 봤냐. 봤냐고!”
문규는 소리 없는 천막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재미로 넘겨.”
“재미는 개뿔. 괜히 돈만 날렸네.”
문규는 입술을 내민 채로 계속 툴툴거렸다.
심심한 데이트에 빛과 소금이 될 줄 알았던 궁합 데이트의 비참한 최후였다.
진해지는 문규의 불만만큼 두 사람 사이에 몰아치는 칼바람도 점점 거세졌다.
깊은 냉기를 헤치고 두 사람은 카페로 들어섰다.
훗훗한 공기가 우리를 뒤덮었다.
커피를 주문한 두 사람은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온기를 머금은 우리의 커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열 받는단 말이야? 코끼리한테 토끼가 달려들어?”
“그만하지?”
“인간적으로 너 알잖아. 나 최고인 거.”
문규는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쏘아댔다.
열변을 토해내는 문규를 보면서 우리는 의미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문규의 궁싯거림을 서둘러 털어내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열을 식히기라도 하듯 문규는 얼음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오독거리는 소리와 함께 궁합 결과는 문규에게서 희미해지고 있었다.
한참 열심히 열변을 토해내던 문규는 어느새 핸드폰 게임에 집중했다.
우리는 문규를 가만히 쳐다봤다.
늘 같은 패턴의 데이트였다.
식사, 커피, 게임…….
도대체 달라질 틈이라고는 없었다.
“게임 그만 좀 하지?”
“금방 끌게. 이것만 깨면.”
한심한 눈길로 문규를 보던 우리도 핸드폰을 꺼냈다.
나름의 맞불 작전이었다.
‘궁합이 최악이야.’
귓가를 맴도는 역술가의 말에 우리는 살짝 고개를 들어 문규를 봤다.
문규는 핸드폰에 코를 박고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코끼리한테 토끼가 달려들었다고나 할까.’
우리는 참 용한 역술가라고 생각했다.
5년 동안 사귀었던 성문규와의 궁합은 역술가의 말대로 최악이었기 때문이었다.
문규는 홀로 날쌔게 불태우다가 단숨에 뻗어버리는 진정한 토끼 중에 토끼였다.
‘죄송한데 저희 잘 맞습니다.’
정말 하나도 맞지 않았다.
우리가 불꽃 연기로 5년을 불태울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규와 이별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문규가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별난 일 하나 없이 평탄하게 살았던 사람.
평범하게 살아낸다는 것.
그건 바다에서 진주를 찾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무료한 익숙함을 택했다.
평범한 사람을 찾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것에도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5년.
“게임 계속할 거야?”
“잠깐…… 와! 죽을 뻔했네.”
게임에 집중한 문규를 보던 우리의 입술 사이로 묵직한 숨이 흘렀다.
잘 가고 있는 것일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수없이 머리를 맴돌던 고민을 문규는 죽어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늘 갈증에 버둥거리고 있는 코끼리의 불타는 욕망도!
‘됐다, 게임이나 해라.’
우리는 체념한 얼굴로 소설 사이트에 접속했다.
[글. 어쩌다 토끼]
타는 욕망을 달래기 위해 탄생한 우리의 은밀한 필명이었다.
빨간 딱지가 붙은 우리의 소설은 제법 인기를 끌었다.
깊어진 갈증과 욕망만큼 소설의 수위는 끝없이 올라갔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우리는 어젯밤 올렸던 소설을 클릭했다.
[불순한 닥터 8화]
우리는 심각한 얼굴로 조회수를 봤다.
전작 대비 조회수가 뚝 떨어졌다.
댓글을 훑는 우리는 수심에 잠겼다.
‘댓글은 좋은데……. 수위를 더 높여야하나.’
댓글과 조회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이유를 좀체 알 수가 없었다.
우리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답답한 마음이 진해졌다. 우리는 애꿎은 목덜미만 긁어대면서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우리야.”
“…….”
“고우리.”
핸드폰에 집중했던 우리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해? 너 설마…… 그 사기꾼 때문에 그러냐?”
사기꾼은 무슨. 인마.
죽이게 용하다. 용해!
“그러지 말고 우리 좀 쉬러 갈까?”
“개수작 부리지 마라.”
“왜. 날도 추운데 푹 쉬러 가면 좋잖아.”
“그냥 여기서 쉬세요. 내일 김장할 생각만으로도 벌써 피곤해.”
거머리처럼 끈질긴 문규의 구애를 우리는 단칼에 잘라냈다.
떨어지는 조회수도 살리지 못한 마당에 폭풍 연기를 펼칠 기분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규는 뾰로통한 얼굴로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우리는 문규의 눈길을 외면하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바람에 앙상한 가지들이 흔들렸다.
눈이라도 쏟아낼 것처럼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턱을 괴고 바깥을 보던 우리의 입술 틈새를 비집고 한숨이 흘렀다.
지지부진한 소설의 문제를 알 수만 있다면.
마음을 뻥 뚫리게 해준다면 우리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답답하다!
정말 누구 없나.
해결해줄 사람 없냐고!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던 우리의 차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주차장은 꽤 한적했다.
널찍한 주차공간을 보던 우리의 눈에 메르세데스 벤츠가 보였다.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오우씨. 벤츠 잘 빠졌네.”
주차를 하던 우리는 매끈한 벤츠에 연달아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벤츠에서 멀찍이 주차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괜히 작은 실수로 흠집이라도 냈다가는 거금을 날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깔끔하게 주차를 끝낸 우리는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힐끔.
그리고 또 힐끔.
번쩍거리는 벤츠는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신모델이네. 와…… 끝내준다. 끝내줘.’
우리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입맛을 다셨다.
우리가 은근슬쩍 벤츠를 기웃거리던 찰나였다.
벤츠에서 꽤 젊은 남자가 내렸다.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다부진 몸.
회색빛 코트에 단조로운 티셔츠 하나를 걸쳤는데도 절로 귀태가 흘렀다.
괜스레 놀란 마음을 추스르면서 우리는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닫혔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입구의 문이 닫히려던 순간이었다. 벤츠가 빠른 몸놀림으로 우리의 옆에 섰다.
‘벤츠……. 새치기 한 번 날렵하네.’
우리는 제 옆에 서 있는 벤츠를 힐끔 쳐다봤다.
팔짱을 끼고 있는 벤츠의 얼굴은 그야말로 훈훈했다.
쌍꺼풀 없는 날카로운 눈매였지만 묘하게 관능적인 눈빛에 계속 시선이 갔다. 벤츠의 눈빛은 사람을 홀리게 만들기에 충분해보였다.
날렵하고도 오뚝한 콧날을 지나면 적당히 도톰한 연한 핑크빛 입술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참 균형 잡힌 얼굴이었다.
모든 부분이 어우러지면서 벤츠의 모든 것을 돋보이게 만들어주었다.
“강건우.”
닫힌 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뒤로 몸을 기울이고는 입구 쪽을 봤다. 검은 목폴라에 줄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비밀번호에 막혀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지 난감한 얼굴로 목폴라는 건우를 불러댔다.
그런데도 건우는 작은 미동도 없었다.
참 끝내주는 개무시였다.
책을 가득 든 채로 애절하게 건우를 부르는 목폴라의 목소리는 짙어졌다.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건우와 아련한 목폴라의 눈빛.
목폴라는 꼭 냉혈한에게 버림을 받은 비련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문 좀 열어봐.”
목폴라가 힘차게 소리쳤다.
‘뭐야…… 둘이 대체 뭔데.’
괜스레 궁금한 마음에 우리는 슬금슬금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우리의 등장에 굳게 닫혔던 자동문이 열렸다.
“고맙습니다. 와…… 새끼. 너 이럴 거야?”
우리에게 인사를 한 목폴라는 따발총처럼 빠르게 건우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괜스레 민망해진 우리는 하염없이 엘리베이터의 숫자판만 쳐다봤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열린 문틈으로 올라탔다.
“인간적으로 야박하지 않냐고.”
“별로.”
건우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우리 좋았잖아.”
“뭐가.”
“살도 섞고 살고. 와…… 벌써 잊었냐?”
목폴라의 볼멘소리에 우리는 뜨악했다.
귀태가 나는 두 남정네의 은밀한 대화라니…….
우리의 상상력이 끝없이 발동됐다.
강렬하고도 뜨겁게 사랑했지만 세상의 반대에 굴복한 두 사람!
“내가 선물도 챙겨왔는데.”
목폴라가 들고 있던 책을 건우에게 바짝 들이댔다.
“됐다.”
“외로운 밤의 필수품이라니까.”
“가져가라.”
“왜.”
“외로울 일 없을 것 같으니까.”
철옹성 같은 수비였다.
“특별히 베스트로만 꾸렸다니까.”
“그러니까 됐다고.”
“나중에 고맙다고 울지 말고. 나없는 외로운 밤을 책이 달래…….”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나 충분히 홀가분하다.”
두 사람의 옥신각신은 끝날 기색이 없었다.
우리는 관심 없는 척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거울만 보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목폴라는 억지로 건우의 품에 책을 안겨주었다.
‘대체 그 외로운 밤의 필독서가 뭔데?’
거울 속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우리의 고개는 한없이 거울 쪽으로 기울었다.
목폴라가 들고 있는 책을 살피던 우리의 눈에 익숙한 표지가 들어왔다.
오묘한 남색 빛깔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제목.
“……!”
잠 못 드는 밤
글. 어쩌다 토끼
선명하게 붙은 빨간색 딱지가 우리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분명 자신의 책이었다.
‘대박! 진짜 대박 사건!’
우리는 벽면의 거울에 거의 코를 박을 지경이었다.
목폴라가 들고 있는 소설들의 정체가 비로소 선명하게 보였다. 빨간 딱지들이 붙은 후끈한 소설들의 향연이었다.
소설의 제목을 훑던 우리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15층입니다.”
단조로운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하지만 우리는 내릴 생각도 못했다.
건우의 품에 있는 제목을 훑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골적인 우리의 시선을 건우는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파블로프의 개야? 빨간 딱지에 정신이 나갔네.’
우리를 보던 건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기요.”
“…….”
“15층입니다만.”
건우의 말에도 우리는 책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어쩌다 토끼의 다른 책이라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내심 기대가 됐다.
약간 입까지 벌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리를 보던 건우는 기가 찼다.
붉은 딱지의 위력이 이토록 컸나, 싶었다.
“내릴 생각 없으시면 닫겠습니다.”
건우의 눈치를 살피던 목폴라가 팔꿈치로 우리의 팔을 콕 찔렀다. 제 소설 찾기에 열을 올렸던 우리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허리까지 구부려 제목을 훑고 있었을 줄이야.
민망한 기운이 우리를 뒤덮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건조한 건우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우리를 보는 건우의 눈빛은 그야말로 미친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
메마른 건우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죄송해요. 내릴게요.”
건우에게 강력하게 박혀버렸을 것이었다.
빨간 딱지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실례했습니다.”
우리는 구질구질한 변명 대신 담백한 사과만 뱉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변태로 기억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변명도 쉬이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우리가 약간 고개를 숙이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가져가.”
“왜.”
“적당히 해라.”
현관문에 붙은 번호키를 누르던 우리의 귀에는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다.
“진짜 끝내준다니까. 다 명작이야. 나중에 더 달라고 울지나 마라.”
“됐다…….”
후두둑.
묵직한 책이 떨어지는 소리에 묻혀 건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았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닫히지 못한 채로 계속 열렸다.
“그러니까 귀찮게 왜 가져와서는…….”
건우가 한숨을 내뱉듯 말하고는 머리칼을 넘겼다. 두 사람은 빠르게 책을 주웠다.
“뇌물공세라도 부려봤다.”
“뇌물공세는.”
“한 번 더 하고 싶어서.”
“됐다.”
“이번에는 절대로 안 멈출게. 그때는 무서워서 그랬다니까.”
목폴라의 말에 우리의 귀가 움찔거렸다.
‘뭐가 무서웠는데! 뭘 멈춰!’
절로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마성의 대화였다.
“이번에는 끝까지 간다. 내가 정말로. 어?”
“한성민.”
“고?”
“내가 거절이라고.”
무미건조한 건우의 말을 덤덤히 듣던 성민의 얼굴에 장난기가 번졌다.
성민은 뒤에서 건우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건우를 덮치는 것처럼.
성민은 건우의 등에 찰싹 달라붙은 꼴이 됐다. 참으로 유혹적이고도 섹시한 포즈였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쪽에 있던 책을 줍던 건우와 눈이 마주쳤다.
건우의 눈빛은 사람을 홀릴 만큼 관능적이었다.
묘하고도 야릇한 두 사람의 포즈에 우리는 굳은 침만 꿀꺽 삼켰다.
‘뭐지…… 이 격정적인 로맨스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두 사람을 품은 엘리베이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