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3화 〉 탐식마(???)
* * *
같은 시각 협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류 현은 다른 방향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왜 그렇게 까지 해주 신거에요?”
류 현은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화련을 돌아봤다.
그녀는 그 티 나는 거짓표정에 픽 웃으면서도 추궁하기를 포기하진 않았다.
“라비 라자. 그 아저씨 대충 부추기고 마실 거 아니었어요?”
“아니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연락 한 거였습니다.”
이번에는 화련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굳었다.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이었으니까.
“엥? 진짜 밀어줄 생각이었어? 너 그 아저씨 살아있는 거 이번에 처음 봤다면...아으, 혜라야 좀!”
“언니나 좀 말 좀 조심해요! 남들 앞에서 그 소리 했다가 화련 언니가 커버해준 거 벌써 까먹었어요? 말 거르는 거 자신 없으면 평소부터 조심 좀 해요!”
“아니 그럼 입을 꿰매고 살아?”
말을 하다 맞고 호되게 등을 얻어맞은 승하가 눈을 흘겨봤지만 백혜라 에겐 어림도 없었다.
연이어서 등짝에 타격이 들어올 뿐.
승하가 실언하는 걸 눈앞에서 본 적 있는 류 현도 승하의 구원 요청 눈빛을 슬쩍 외면했다.
“어쨌거나 그냥 바람만 넣고 말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정도 효과만 바랐다면 굳이 바람 넣지 않아도 될 일이었으니까요.”
“그 아저씨 전생에서는 못 봤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예, 그래도 꽤 오래 버틴 축이었거든요. 원칙이나 파수대 둘 중 하나를 포기했다면 아마 더 오래 살아남았겠죠.”
“흐음, 저번에 봤을 때는 그렇게는 안 보이던데. 팔도 그렇고.”
“그 때는 두 팔 다 멀쩡했었거든요. 아마 이번에는 ‘파슈파타’를 얻는 과정에서 잘린 게 아닐까 싶네요. 재생뿌리를 못 구하는 게 아닌데 아직도 재생 못 시킨 것도 그렇고요.”
“하긴 혼자서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 급 플레이어가 그런 장기 부상을 당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죠.”
“칼리프 클랜이랑 얽힌 것도 영향이 좀 있었던 거 같고요. 여러모로 운이 안 좋았다고 봐야겠죠.”
“우리한텐 나쁠 건 없으니 상관없잖아.”
승하는 아직도 등이 따가운 지 왼손을 뒤로 보낸 채로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이미 익숙해진 류 현은 어깨만 들먹이고 말았고, 화련은 떨떠름하게 승하를 바라보다가 못 참고 한 마디 했다.
“언니 앞으로 외부인들이랑 일 얘기 할 일 생기면 혜라나 저 중 한 명은 꼭 대동해요. 진짜 무슨 입에도 폭탄이 달렸네.”
“제가 꼭 붙어 다닐 테니까, 걱정마세요.”
백혜라와 던지자 화련이 네가 고생이 많다는 표정으로 받아주었다.
그 모습이 영 고까웠던 승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니, 내가 틀린 말 했어? 그 아저씨 상황이 마냥 좋았으면 우리한테 연락을 했겠어? 죽어도 ‘엑스칼리버’ 안고 죽었지 절대 외부에는 정보 안 풀었을 걸? 그러다 칼리프 클랜이 낼름 해서 정보가 풀리긴 했겠지만.”
“...말을 말죠. 말을 말아. 어떻게 된 게 처음 봤을 때 보다 더 막나가는 거 같지?”
“그으...그 때는 언니 나름대로 그게 내숭떤다고 떠는 거였을 거예요.”
“돌겠네 진짜. 언니, 내 말 장난으로 넘기지 말고 꼭 기억해요. 이제 미국이랑 정식으로 조약 맺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언니가 말 잘 못하면 우리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에요.”
평소에는 거칠 것 없이 살던 승하가 저보다 작은 두 여자의 공세에는 맥을 못 추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던 류 현은 승하가 짜증을 견디다 못해 드러누우려는 자세를 잡을 때 즈음 헛기침으로 주의를 끌어 모았다.
“여하튼 라비 라자와의 관계는 일회성으로 그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물론, 아직 회의도 거치지 않았고, 그래서 라비 라자 본인에게도 아직 팀 내부 회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해두었습니다. 상황 돌아가는 게 좀 급박해서 대가를 당겨서 제공하긴 했습니다만 이 부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아니, 그렇게 눈치 보실 필요 없는데요. 전에 빠른 판단이 필요하면 마스터 판단이 최우선이라고 전에도 말했었잖아요? 일 있을 때마다 우리한테 설명 다 하고 찬성표 확인하고. 어휴, 매번 어떻게 그래요? 이제 우리 팀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맞아, 우리도 그 때 옆에서 통화하는 거 듣긴 했고. 네가 미국 말고 다른 협력자를 굳이 먼저 찾을 거라고 생각 못해서 좀 놀라긴 했지만.”
“맞아요. 좀 의외라서 놀란 거지 마스터 판단 자체에는 전 이의 없어요. 그쪽을 믿을 수 있느냐가 조금 걸리는 정도였지. 같은 편이 늘어난다는데 딱히 반대해야할 이유도 모르겠고.”
백혜라와 오희란까지 눈을 맞춰오며 고개를 끄덕거리자 류 현은 오히려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식의 신뢰 표현은 아무리 지나도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크흠, 다시 돌아가서. 칼리프 클랜이 우호 세력으로 돌아서기로 했고, 나중에 조금 틀어지더라도 전면전 수준이 아니라면, 그 뒤를 받쳐줄 세력이 있는 게 낫다고 봅니다. 아프리카가 제가 알던 아프리카가 아니게 된지 오래고, 전생과 비교해서 딱히 호전되었다고 하기도 힘드니까요. 당장 ‘그놈’ 문제도 있고요.”
“그건...그렇긴 하네요. 한창 분탕질 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어느 정도래요?”
“화련 씨가 조율에 들어가신 동안 죽은 플레이어만 5천 가까이 된답니다. 워낙 넓고, 3차 ‘대소환’이후에 인프라에 문제가 생겨서 정확한 판단은 안 서지만 대강 그 수준에서 500명 정도 오차로 보고 있다더군요.”
“와...한국에 떴으면 플레이어 풀 그대로 붕괴였겠네요.”
“예, 인도라서 지금 견디고 있는 거지 어지간한 나라였으면 그대로 국가가 붕괴했겠지요.”
“지금도 뭐 나라라고 하긴 뭣 하던데. 군벌만 거의 두 자릿수라면서?”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든 세력만 해도 그 수준이고, 대놓고 반기는 안 들었어도 은근슬쩍 자립해버린 세력까지 합하면 그 이상이라더군요.”
“자기들이 난세의 영웅이라고 생각한 건가? 인간들이 욕심하고는 참...이런 소식 들을 때마다 네가 봤다던 전생은 얼마나 막장이었을지 상상도 안 가네.”
류 현은 쓴웃음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그 때는 정말 나라라는 개념이 거의 해체되다 시피해서, 나중에는 특정 문화권 출신들을 묶기 위해서 나라의 이름을 걸기도 했었다.
부흥 운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뭉침에 가까웠고, 3차 ‘대소환’이 더 진행되어 생존문제가 더 격화되자 사오분열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내전은 류 현이 죽을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상대의 씨를 말리거나, 아니면 네임드 몹의 손에 공멸하거나 중 하나였다.
막장이라는 말조차 무색한 광기의 시대였다.
류 현이 괜히 미국에 대한 호감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때까지 나라라는 틀을 유지하고, 미래를 보고 있는 건 그들이 유일했다.
“그럼, 이후에도 미국처럼 같이 가는 건가? 아, 이건 오바고 대충 칼리프 클랜 수준? 당장은 ‘그 놈’ 대처를 위해서 힘 실어주는 걸로?”
“예, 당장 인도 내부를 수습하지 않으면 ‘그 놈’에게 인도가 박살날 판이니까요. 희생자 숫자를 획기적으로 줄이진 못해도 인도라는 틀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야겠지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그 아저씨 지금 중환자라면서? ‘그 놈’한테 당한 거면 반년은 골골할 텐데.”
“들어보니 그냥 당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의식을 회복하면서 깨달음이 있었다더군요. 당장 전선 복귀는 힘들어도 플레이어 세력 규합에는 문제없을 것 같고, 정 안 되겠으면 쓰라고 엘릭서 C타입도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말하는 걸 보니 오자마자 마실 거 같더군요.”
“허어, 진짜 본격적으로 할 건 가 보네. 근데 다른 나라들이 뭐라고 하는 거 아냐? 다들 자기네 ‘신의 방패’ 번호표 순번 당기려고 로비를 아주 퍼붓던데.”
“그건 또 언제...상관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지원하는 걸로 갈 테니까요. 뭐 개인적으로 불만을 표하기는 하겠지만 미국 눈치도 있으니 투덜거리는 정도겠죠.”
“그럼 일단 지금 인도 분열 방지 겸, 이후에 칼리프 클랜의 아프리카 봉쇄선 백업용으로 밀어주실 거라는 거죠?”
“당장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어, 그런데 너무 낙관하시는 거 아니에요? 인도쪽 사람들 ‘파슈파타’ 보러 갔을 때 그 여자보고 마녀니 어쩌니 수군거리던데. 원래도 사이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전쟁 수준이라던데.”
화련이 천장 쪽으로 곁눈질 하며 ‘그 여자’라고 하자 류 현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마람 압둘아지드는 화련에게는 불쾌하기만 한 존재겠지만, 류 현에게는 처치 곤란의 손님이었으니까.
쳐낼 수도, 그렇다고 깊숙이 이쪽 일에 끌어들일 수도 없는 손님.
평소라면 적당한 방을 제공하고 적당히 소일거리나 저쪽이 원하던 정보를 던져주고 말겠지만, 잡아야하는 네임드 몹이 등장해서 이미 교전까지 한 상황이라 그러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나마 좀 회복이라도 됐으면 모를까 팀원들이 겉보기만 멀쩡하지, 속은 아직 만신창이였으니까.
그렇다고 마람 압둘아지드에게 경호를 받아야할 정도로 약화된 인원도 없었지만, 마람 압둘아지드는 아직도 돌아가지 않고 병원 방 한 칸을 차지한 채로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이번에 등장한 네임드 몹이 유니크 아티펙트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용잡이 팀’이 있는 곳이 곧 위험지대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말이다.
의도는 명백하긴 했다.
화의의 상징으로서 왔으니 최대한 이쪽에 성의를 보이려고 하는 것일 터다.
첫 번째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도 눈도장을 찍어두고 말이다.
‘...아직 아무 일도 안 터졌는데 돌려보내기도 좀 그렇지. 화의 얘기 꺼낸 지 아직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미국 정부 쪽 보는 눈도 있으니 그렇고, 일 터지기 전까지는 그냥 두는 게 맞아.’
떠올릴 때마다 입맛을 쓰게 만드는 주제를 그렇게 정리한 류 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람 압둘아지드 씨가 인도파키스탄 국경 분쟁지대에 몇 번 투입이 됐다더군요.”
“어쩐지. 근데 직접 부딪혀본 사이인데 서로 백업 해주려고 하겠어요? 알 라시드 그 남자 계획대로 되면 그 여자랑 둘이서 칼리프 클랜의 얼굴로 나설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이후에 다시 물어보긴 했는데 라비 라자 씨의 의지가 확고하더군요. 당장 생존이 우선이니 그 정도는 감수하겠다고요.”
“어째, 영 믿음이 안 가네요. 그러다가 꼭 내부에서 문제 터지던데.”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였다.
그 때 통화 때 라비 라자는 어지간한 반발은 힘으로 찍어 누를 기세였다.
그 이상의 빠른 해결책을 자신도 알지 못하기에 반대하진 않았지만, 서로가 움직일 조직이 워낙 크다보니 우려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류 현은 문제가 터지는 걸 확정해놓고 요 며칠간 부산하게 계산기를 두드렸고, 그렇게라도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쩌겠습니까. 부외자 입장에서 대놓고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는 문제니 잘 해내길 믿어야겠지요. 라비 라자 씨 말대로 당장은 생존에 급급한 상황이니 그런 걸 굳이 따지고 들사람도 많진 않을 테고요. 저도 중간에서 조율이 필요하면 나서주기로 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가 생각해두고 있는 게 있겠죠.”
“엥? 니가 왜?”
“미 정보부한테서 들어보니 군벌이나 중앙정부나 할 것 없이 여론 선동에 들인 돈이 상당해서, 국경에서 구르던 파수대는 물론이고, 수장인 라비 라자 씨의 인도내의 위상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라더군요. ‘그 놈’ 한테 부상당하자마자 죽었다는 소문이 쫙 깔렸었답니다.”
“그 쪽 동네도 개막장이네. 그래서 너 진짜 킹메이커 노릇이라도 하게?”
“필요하다면요.”
“어째 사서 고생하는 느낌이긴 한데...그래도 네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게 맞긴 하겠지. 그럼 최종적으로 인도칼리프 동맹 묶어서 아프리카를 틀어막겠다?”
“예. 아프리카가 그 꼴이 됐으니 어떻게 상황이 굴러갈지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남아시아가 파멸하는 건 늦춰봐야지요. 막을 수 있다면 최고겠지만요.”
“하긴, 유럽놈들 하는 꼴을 보면 알아서 막는 건 반 쯤 텄지. 근데 진짜 괜찮겠어? 괜히 남의 동네 사정에 개입했다가 귀찮은 일만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 방패막이 찾는 거면 차라리 중국놈들이 낫지 않아? 하는 짓이 영 꼴같잖아도 단결은 기가 막히게 하는 놈들인데.”
승하의 물음에 류 현은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웃음의 의미를 파악 못한 승하가 고개를 갸웃하자 류 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저도 아시아 쪽 전황이 전생이랑 다르게 흘러가서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랍니다. 오히려 더 막장이 된 거 같던데요.”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