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화 〉 탐식마(???)
* * *
“피곤하군.”
의자와 책상 외의 집기들이 모두 사라져서 텅 비어버린 총리의 집무실.
이 공간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남자, 라비 라자는 미간을 주무르며 의자 위로 늘어졌다.
그가 축 늘어진 의자가 불쌍해 보일 정도로 삐걱거리며 뒤로 퍼졌다.
“...몸을 조금 더 추스르시고 오셨어도 됐었다고 봅니다. 아니, 라자님이 직접 오실 필요도...”
“아르가왈.”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다가오던 여자는 이름이 불리자 질책이라도 받은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라비 라자는 속으로 한 숨을 삼키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허리를 들 때까지.
“이유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말해주지 않았더냐. 그래야 할 필요가 있어 그리 했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아니다. 나를 걱정해서 한 말임을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리 말하며 라비 라자는 총리의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창을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멍하니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다가 잠꼬대라도 하는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 크게 다르지 않군.”
“예?”
“총리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이 자리. 이 자리에서 본다고 뭔가 달라지진 않는 듯해서.”
그의 비서이자 부관인 칸가나 아르가왈은 선뜻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그의 옆모습만 바라봤다.
그의 내부에서 휘몰아치고 있을 감정들이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아서.
분란을 피하는 길은 자신이 정치에서 멀어지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여태껏 실천에 옮겨온 남자가 평생의 결심을 꺾고 가장 혐오하던 형태로 정치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 참담함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
칸가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 결단을 내린 계기에 이르러서는 옆에서 모두 지켜보았음에도 아직도 이해가 안 갈 정도.
그가 희생한 만큼 누리길 가장 간절히 바라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르가왈.”
“...예.”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아, 아닙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를 볼 때만 그런 드는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숨 돌릴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니 그게 무엇이든 간에 지금 말해두는 게 나을게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
“아르가왈.”
라비 라자가 다시금 채근해 왔지만 그녀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묻는 것 자체가 그에게 엄청난 무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라비 라자는 재차 채근하지 않고 그녀가 마음을 정리하길 가만히 기다렸다.
그를 기다리게 하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었던 칸가나는 오래지 않아 입을 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와 나눈 말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하긴, 다른 녀석들이 그 난리인데 네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 진작 물었으면 이리 오래 앓게 하지도 않았을 것을.”
초췌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지만 칸가나는 그 얼굴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그녀의 반응에 라비 라자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사실 나라고 그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품고 있었던 의심을 그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칸가나가 반색했으나 그의 의문은 방향성이 조금 달랐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대충 알 것도 같다만, 이왕 말을 꺼낸 김에 확실히 하는 게 좋겠지. 아르가왈, 너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한 제안 전부가 의심 간다는 것이냐?”
칸가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벌써 일주일도 더 됐고, 요즘 들어 심력을 쓸 일이 너무 많았으니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라비 라자가 쓰러졌음을 알린 것이 벌써 20일 전.
라비 라자는 열흘 넘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 동안 ‘용잡이 팀’은 칼리프 클랜의 본부에서 ‘그것’과 교전을 치른 후 부상을 입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대로 소문마저 끊겼다.
자신도 플레이어니 당연한 행동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대장이 쓰러진 시점에서 가장 먼저 그것을 알린 상대가 잠수를 타버렸으니 속이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굳건하던 라비 라자가 쓰러지자, 무슨 공작을 당하던 굳건하던 그의 파수대도 흔들렸다.
그가 쓰러진 후 바로 다음날 중앙정부에서 슬슬 병력을 움직이며 간을 봤고, 라자스탄의 살만 칸은 대놓고 그가 죽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 상황에서 칸가나는 부관의 직함으로 퍼져있던 파수대를 끌어 모아 뒤로 빠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살만 칸이 파수대의 영역이었던 타르 사막에 손을 뻗쳤고, 그러자 눈치 보던 다른 군벌들도 같은 소리를 떠들어댔다.
라비 라자는 죽었다고.
그의 파수대도 곧 그 꼴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전형적인 분열조장 선동이었지만 달리 반격할 방도가 없었기에 강력했다.
라비 라자가 오늘 내일 하는 건 사실이었고, 파수대 대부분은 경호문제 때문에 그 오늘내일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으니까.
이탈자가 다섯 명 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기도를 올렸을 정도로 상황은 좋지 못했다.
뒤늦게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것’이 돌아와서 큰 세력들은 죄다 들쑤시는 바람에 갈 곳이 사라진 자들도 있겠지만, 안전하지 못한 건 파수대도 똑같았다.
‘그것’은 인도에 존재하는 플레이어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듯이 말 그대로 보이는 대로 쳐 죽이고 다녔으니까.
그렇게 죽은 플레이어 숫자만 4천이 넘었다.
어지간한 나라라면 시스템이 붕괴되고도 남을 수치였고, 군벌 중에서도 국경을 넘어서 도망치려다가 내부 반발로 살해당한 이까지 나올 정도로 인도 정세는 혼란 그 자체였다.
라비 라자는 그런 상황 속에서 깨어났다.
깨어났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다.
열흘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을 정도로 그는 중환자였고, 어떻게 정신을 차렸나 싶을 정도로 내내 피를 토하며 흐릿한 정신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몇몇 측근들이 그가 깨어나기 전보다 더욱 힘들어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을 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드래곤 슬레이어’.
원래는 용종 괴수를 혼자 참살한 플레이어에게 예의상 붙여주던 호칭을 한 번의 사냥으로 독점하게 된 남자.
단 한 번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확고부동한 세계 최강으로 등극한 남자.
류 현.
일주일 넘게 증발한 것처럼 어떠한 소문도 흘리지 않던 그가 라비 라자의 상태가 호전되자마자 연락이 온 것이다.
마치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가 건넨 제안은 이쪽을 감시라도 하고 있었던 듯 한 내용이었다.
모든 회상을 마친 칸가나는 살짝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전까지 그 남자가 보인 행보와는 너무 대치된다고 생각됩니다. 그 남자는 라자님이 말씀하셨듯이...”
“그래, 괴수를 찢어 죽이는 것 말고는 다른 것에는 눈길도 안 주던 자 지. 권력도, 명성도, 재물도, 민족도, 여자도 거들떠도 보지 않던 자야.”
“그런 자가 갑자기 이 땅의 사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것도, 또 그렇게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도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구나. 아르가왈, 하지만 그건 우리 관점에서나 문제될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이 땅이 필요치 않다.”
“예?”
라비 라자는 의자에 기댔던 몸을 다시 세우며 칸가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성인이 된 후로 줄곧 모셔온 그였건만, 그녀는 그 눈빛에서 낯설음을 느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로 꽤 자주 이런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녀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무시한 것인지 그는 무덤덤한 어조로 계속해갔다.
“정확히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을, 인도를 장악할 이유가 하등 없는 자다. 그에게는 이런 방식은 너무 복잡하고, 번거롭지.”
일국을, 그것도 이 플레이어 시대에 가장 많은 플레이어를 보유한 국가를 장악하는 일을 저리 가볍게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칸가나는 그의 말을 쉽사리 반박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라 그가 행사하는 압력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느새 라비 라자가 마력을 움직여 주변 공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총리를 협박할 때와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이전의 그가 멀쩡할 때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주변의 것들을 짜부러뜨릴 기세로.
칸가나는 경악했다.
그가 이런 우악스러운 행사를 자신과 있음에도 행해서가 아니라, 중환자인 그의 몸에 이런 우악스러운 행사가 얼마나 악영향을 끼칠지 상상이 안가서.
그녀는 거의 피를 토하는 기분으로 말을 뱉었다.
“라자님, 아직 마력을...”
“괜찮다. 아르가왈. 이제 그 정도는 가늠할 수준까지는 올라왔다.”
“어?”
그리곤 거짓말처럼 압력이 잦아들었다.
“아직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 정도는 가능하군. 아르가왈, 이것이 내가 그 사경을 헤매면서 가지고 올라온 것이다.”
칸가나는 반쯤 얼이 빠져서 입을 벌린 채로 그의 손아귀를 바라봤다.
칼날이 빛나고 있었다.
일체의 불순물도 없이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어디까지라도 뻗어나갈 것 같은 날카로움을 뽐내고 있는 칼날이,
아무것도 없는 손아귀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피어올랐다는 말 이외에는 그것을 형언할 다른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퍼플 던전 솔로 클리어를 바라볼 수 있는 고위 플레이어인 그녀의 눈에 그것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손을 뻗고 싶게 만드는 예술 작품에 가까운 무언 가였기에.
저것을 다 알아볼 수 없는 자신의 부족함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라비 라자가 그것을 손을 휘저어 지워버렸을 때, 그녀는 가까스로 탄식성을 참아냈다.
“‘그것’에게 패배한 나조차도 견뎌낸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네임드 몹을 모두 격살한 자 지.”
“그렇다면 ‘파슈파타’ 확인 차 왔을 때는...”
“아니, 그 때도 그들은 실력을 숨기거나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알아볼 눈이 없었던 것뿐이지.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구나. 지금 이 두 눈으로 검성의 일검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의 요구에 응하기 훨씬 용이할 텐데 말이다.”
칸가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의 설득에 설득당해서가 아니라, 그 말대로라면 자신들이 저항한다한 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 스스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어서.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죽을 것이 아니라 그의 팀을 어떻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본인이라면...모르겠군. 네임드 몹들도 어쩌지 못한 자를 인간들이 어찌할 수 있을지.”
“아르가왈, 난 오히려 이것이 이 땅에 굴러들어온 마지막 호재라고 생각되는구나. 눈앞의 시련이 너무 가혹하다마는,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 날을 기념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지. 그는 울타리 안에 들인 이를 어렵다고 외면하진 않는 자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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