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화 〉 탐식마(???)
* * *
“아니, 조사 협조 차원에서도 보내 줄 수 없다는 말입니까?”
간디 총리,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는 우리가 저리가고 이리오라고 지시를 내릴 수 없는 인물입니다.
“부통령님, 제가 아무리 미국 일에 무지해도 ‘신의 방패’일은 빠짐없이 찾아 듣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미국이 사실상 협상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어요! 다섯 살짜리 애가 들어도 단순 협력관계라고는 안 할 겁니다!”
간디 총리.
“무조건 토벌을 성립시켜달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뉴델리 분위기가 어떤지 아십니까? 곧 있으면 아침 인사로 살아서 봐서 다행이라고 할 기셉니다.”
그 후에도 검버섯 자국이 역력한 노인의 부탁을 가장한 하소연은 5분여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노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처진 볼 살이 떨리는 걸 못 보기 힘들 정도로.
한참을 수화기를 노려보며 씨근덕거리던 노인은 콧김을 훅 뿜으며 보좌관을 향해서 씹어뱉었다.
“빌어먹을 양키놈들. 접선 시켜주는 것도 안 된다는군!”
이 말을 듣기 위해서 그 긴 시간을 묵묵히 인내하고 있었던 보좌관은 떨떠름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자신이 이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이유가 그걸 잘 해서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됐군요. 부통령이 받는다면 필시 거절일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소환’ 이후로 미국 정치인 놈들이 걸린 병이야. 한 쪽이 감언이설로 자리를 모면하면 남은 쪽이 칼같이 자르지. 그 때 이후로 늘 이런 식이었지. 빌어먹을 놈들.”
“‘대소환’이 공표된 이후 그들의 이미지가 이미지였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도 미국이 그 팀을 품었다는 게 실감이 잘...”
“뻔하지 않나. 당연히 돈이겠지. 그놈들이 뭐가 있겠나. 마탑과의 거래도 뒷구멍으로 기술 교류나 겨우 하던 놈들인데. 돈으로 되는 건 전부 약속했겠지. 그놈들 이름 정도면 마탑을 돈으로 후려치는 것도 가능할 테고.”
노인, 만모한 간디 총리를 그 후에도 제 가치도 모르는 멍청한 놈들이니, 하필이면 ‘신의 방패’가 그런 놈들 손에 넘어갔느니 불평을 해댔다.
졸지에 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보좌관의 포커페이스도 30분 째를 넘기자 조금씩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보좌관에겐 다행스럽게도, 간디 총리는 격한 감정상태를 장시간 유지하기에는 너무 고령이었다.
던전에서 나온 신비의 약재들과 마찬가지로 던전에서 나온 기술로 배합한 일명 ‘회춘약’이라고 불리는 마약에 가까운 그것을 물마시듯이 마셔도 노인이라는 인상을 벗지 못할 정도로.
올해로 만 92세의 권력욕의 화신은 아직도 덜 풀린 분노에 씨근덕거리면서도 지시는 정확하게 내렸다.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네팔, 부탄, 카자흐스탄, 투르크 중에 우리 라인이 살아있는 곳에 슬쩍 말을 흘리게. 파키스탄 방면 국경이 그 정체불명의 괴물한테 뚫릴지도 모른다고.”
“예? 그러면 칼리프 클랜이나 파키스탄이...”
“못 움직일 걸세. 반쯤은 내 촉이지만 칼리프 클랜은 그 괴물과 이미 대판 붙었고, 그래서 못 움직이고 있는 게야.”
“하지만 알 사디크는...”
“그래 그 망령 난 플레이어 놈은 국내라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지. 하지만 그놈도 정상은 아니야. 팔이 제 팔이 아니라더군.”
“예? 아니 그러면...”
“그래. 알 라시드가 부상당하고 칩거 중 이라는 소문이 칩거가 아니라 오늘 내일 일수도, 어쩌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게지. 그 괴물이면 알 라시드 그 칼리의 칼 같은 미친놈도 별 수 없었을 게야. 오히려 제 주인을 살린 걸 대단하다고 해야겠지.”
“각하 하지만...”
“알아. 자네가 뭘 우려하는지. 내 예상과 반대로 알 라시드가 살아있고 다소 부상만 당한 상태일 수도 있겠지. 그런 괴물을 봤다면 고급전력일 수록 조심하는 게 당연하니. 하지만 칼리프 클랜은 절대 멀쩡할 수가 없어. 놈들은 주요 거점을 거의 포기 했네. 국내외 할 것 없이.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각국 정부들의 눈과 귀가 ‘신의 방패’와 그것을 움켜쥔 미국에게로 쏠려있다지만 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들은 온전히 그것에 집중 할 수 없었다.
칼리프 클랜.
저 중국마저 언급할 때 불편한 내색을 숨기지 못하는 그 막나가면서 잘 나가기까지 하는 그 망나니 집단이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기점은 뉴델리에 갇히다시피 한 총리도 알 수 없었으나, 총리씩이나 되지 않아도 상위권 플레이어 정도만 되어도 눈치 챌 수 있을 아주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괴수 피해로 무인지대가 된 곳 중 먹음직스러운 빈 땅이 있으면 일단 괴수 토벌 핑계로 협조를 구하며 깃발부터 꽂고 보던 놈들이,
일단 깃발을 꽂았다 하면 제 땅인 양 당사국을 상대로 영역싸움도 불사하던 놈들이,
그렇게 아득바득 긁어모은 거점들을 거의 전부를 포기했다.
배치한 인원 전부를 철수시킨 게 아니라 2선급 책임간부들을 불러들인 것이지만, 그곳에 깃발을 꽂기까지 과정이나 꽂은 후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 포기나 다름없었다.
너무 급격한 태세전환에 당황한 당사국들이 찔러보기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뿐.
되찾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된지가 삼 주째가 되어간다.
칼리프 클랜에 ‘용잡이 팀’의 텔레포터 같은 능력자가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거점이 무너지는 걸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칼리프 클랜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우습게도 그 외에 이 사실을 가장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는 건 도시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게 된 인도의 총리였고.
“그놈들이 포기한 거점 중에는 파키스탄 놈들의 장벽에 위치한 것도 있네.”
“...정말로 거점을 포기한 거로군요.”
“그래.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거점까지 포기했네. 놈들이 아무리 막나가고, 막나가도 될 정도의 힘이 있어도 이 정도 규모로 거점을 다시 확보하려면 못 해도 2, 3년을 걸리겠지. 그것도 이전과 같은 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간디 총리는 확신했다.
놈들은 아프리카 사태 때도 경계령 단계를 올렸을 뿐 거점 책임자들을 움직이진 않았다.
‘용잡이 팀’을 필두로 한 원정대가 아프리카 사태를 해결하고도 땅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이집트로 몰려들었던 괴수들이 칼리프 클랜의 근거지인 아라비아 반도로 몰려들었을 때도 거점에서 발만 구르고 있던 간부들은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영역구축에 집착하던 놈들이 훌훌 털어 내버리는 것처럼 간부급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클랜 내부의 크나큰 변고가 있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니 지금은 그래도 되네. 주변 놈들은 ‘신의방패’ 때문에 미국 눈치 보기 바쁘고, 또 이쪽을 찔러볼 여력도 없지. 만에 하나라도 칼리프 클랜의 잡놈들이 움직인다면 그 규모를 보고 내부 상황을 가늠할 수 있을 테지. 상황이 꼬인다 한 들 우리가 손해 볼 건 없네. 단체로 정신 나간 게 아니라면 이곳을 넘보지 못할 테니.”
이곳 뉴델리까지 오지 못할 테니 자국 영토를 침략당해도 상관없다.
과연 일국의 수반이 할 소리인가 싶었지만 보좌관은 자기혐오로 그것을 억눌렀다.
이런 인간이라서 이런 시대에 군벌들이 들고 일어나는 판국에도 자리를 보존하고 있고, 그래서 이 밑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이 미친 시대에는 이게 맞는 처신이다. 보좌관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되뇌며 총리에게 물었다.
기존의 장관이고 뭐고 다 날아간 통에 자신이 총리의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이 저 자리를 차지할 때까지 뉴델 리가 남아있을 테니.
“그럼 어느 선까지...?”
“그럴 필요 없소.”
노인과 젊은이의 시선이 동시에 낯선 목소리가 나온 곳을 향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외부인이 서있었다.
인도국민 누구보다 익숙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던 얼굴.
거한, 라비 라자는 제 몸보다 작은 문에 몸을 구겨 넣은 것처럼 기대어 서있었다.
처음부터 그 곳에서, 합의 하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양 아주 자연스럽게.
“자, 자네...?”
“라, 라비 라자...”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으나 두 사람은 그걸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그 거대한 몸에 터질 것처럼 꽉 들어차있던 근육들이 쫙 빠졌고, 볼까지 움푹 들어가 있으며 몸 전체가 병자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을 강렬한 존재감이 그들을 압도했다.
우습게도 그것을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총리였다. 일반인인 보좌관과 다르게, 2차 ‘대소환’ 이 후 구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닥치는 대로 위 안에 쑤셔 넣은 노인은 그 영향인지 고령임에도 플레이어로 각성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불행히도 각성했기 때문에 라비 라자의 강렬한 존재감을 보좌관의 곱절은 더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보좌관은 일반인이라 내성이 없어서, 총리는 플레이어라 더 생생한 존재감에 짓눌려서 그들은 라비 라자가 총리의 책상까지 다가올 때까지 그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오. 간디 총리.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이었던가?”
“...”
“여,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젊은이의 오기를 쥐어짠 물음이었다. 보좌관은 물음을 내뱉자마자 후회했지만 라비 라자는 그를 돌아 보지조차 않았다.
마치 그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양,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간디 총리는 그 태도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그가 아는 라비 라자는 일반인이라고, 누군가의 하수인이라고 무시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기에 기반도 없이 무력만으로 떨치고 일어난 그가 인도 총리인 자신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영향력을 사용할 생각을 안 해서 자신이 이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는 것을 아는 노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던전에서 나온 약재들만 꾸역꾸역 먹었을 뿐 아무런 실전경험도 없는 자신이 그래봐야 백전노장인 라비 라자의 털끝도 상하게 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라비 라자는 자신의 느긋한 페이스대로 총리에게 말을 걸었다.
여전히 보좌관은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다는 태도를 고수한 채로.
“총리.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한 말을 기억하오?”
“무, 무슨 말을...”
“총리가 그 때 내게 물었소. 차라리 당신 아래에서 국방부 장관 같은 걸로 시작해서 플레이어계 전체를 장악하는 게 내 소원을 이룰 복안이 아니겠냐고.”
“내, 내가 그랬었나?”
그랬었다. 잊고 있었지만, 방금 라비 라자의 말을 듣고 곧바로 떠올랐다.
힘과 영향력을 가졌으면서도 정치에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죄악시 여기는 모습에 이건 써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할 제의도 아니었고.
하지만 긍정할 순 없었다.
순전히 감이었지만, 이 대화의 의도가 이전의 라비 라자와 다를 것이라는 걸 느꼈으니까.
라비 라자의 존재감에 더 견디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보좌관의 꼴만 봐도 그랬다.
총리는 섬뜩함을 느꼈다.
‘설마...어차피 죽을 것이라고 여겨서...’
“내가 멍청했었소.”
자책하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총리는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기세에 짓눌려 상상보다는 엉거주춤한 모양새였지만, 총리는 만족했다. 이대로 뒤돌아서 도망을...
“아직, 내 말 안 끝났소. 만모한 간디 총리.”
어깨에 바윗덩이가 떨어졌다.
총리는 어깨를 짓누르는 바윗덩이 같은 손이 주는 통증에 가까스로 비명을 참아냈다가 허탈감에 빠졌다.
비명을 참아서 무엇하게? 저자가 관저 주변의 병사들에게 안내를 받아서 들어왔겠나?
그럴 순 없었다.
라비 라자와 사실상 틀어지고 난 뒤로 가장 먼저 내린 명령이 그에 대한 무조건 사살명령이었으니까.
병사들은 자신의 지시를 충실하게 지켰든, 아니든 더는 근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듣고 이 방으로 난입해서 상황을 꼬이게 만들 자도 없었다.
“내 그 때 이리 답했었소. 서로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서로의 자리에서 하자고. 그러면 우리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할 일도 없으니 최대한 만나지 않도록 전화로 안부나 주고받자고 했었지.”
“...”
“멍청했소. 그리고 오만했지. 인드라조차 비웃을 오만함이었소. 하나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는 자가 수단을 가린다니.”
“이, 이보게 라자...”
“간디 총리. 내 그 때의 대답을 번복해야겠소. 그러기 위해서 이리 온 거요. 아르가왈!”
그의 부름에 문 너머에서 피칠 갑을 한 여인이 들어왔다. 누가 봐도 플레이어로 보이는 여인은 안경의 피를 살짝 닦아내더니 차림새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서류가방을 내려놓았다.
라비 라자는 서류 가방을 열지 않고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더 서늘해질 수 없을 것 같은 그 눈빛으로 총리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살의를 담아.
“총리, 내 비슈누께 맹세하건데 협조만 잘 해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요. 총리 자리도, 관저도 계속 총리 것으로 남을 것이며, 그저 하는 일이 바뀔 뿐이오. 반대로 총리가 그러길 거부한다면 비슈누께 다시 맹세하건데, 나는 내 생각이 관철될 때까지 총리의 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오. 이해 하셨소?”
죽음으로 도망칠 수도 없을 거라는 협박.
이미 기가 눌린 총리는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가 진위를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아, 알겠네.”
정치판 위의 칼날을 평생 걸어왔지만 과도에 손을 베여 본 적조차 없었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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