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0화 〉 탐식마(???)
* * *
‘대소환’과 플레이어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
중국과 인도가 날아오르겠구나.
초기 플레이어 각성 비율은 10000 분의 1이었고, 2차 ‘대소환’ 초기 플레이어들은 거의 백치상태로 던전과 괴수 무리를 향해서 몸을 던졌으니 숫자가 많아서 불리할 것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중국은 플레이어의 시대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진 못했다.
플레이어 숫자는 타 강대국들을 몇 곳 합친 것보다 많았지만, 그 인구수만큼이나 많은 던전들이 나타났고 넓은 영토 위에 존재하는 무인지대에 가까운 곳들과 러시아의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괴수들을 감당하기 바빴다.
바로 위의 러시아처럼 특정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한 건 아니었지만, 밖으로 눈을 돌리기에도 여의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뚝 떨어진 플레이어라는 초인들 때문에 억누르고 있던 소수민족들과 공산당 내의 계파 갈등이 다시 들썩거리기 시작했으니.
국제 정세를 아는 이들은 그대로 중국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중국보다 내부 사정이 훨씬 좋지 못한 인도에 대한 기대는 그보다 훨씬 빠르게 접었다.
당시 인도는 당장에라도 네 다섯 조각으로 찢어질 것 같았으니까.
내부 계파 갈등이 불거지고 있든 말든 어쨌거나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는 중국에 비해서 인도는 너무도 불안정해보였다.
거기에 남아시아 인접국들 중 제 몸을 돌보는 것도 실패한 국가들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인도에 대한 기대보다는 우려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저대로는 인도가 이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견딜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보였으니까.
과연 인도가 무너진 후에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국제 정세에 관심 있는 이들의 화두는 한동안 그것이었다.
그런데.
괴수에게 죽어나간 이들이 마지막으로 부르짖은 신들에게 그 목소리가 닿은 것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괴수에게 무너진 북한 땅을 수복하며 검성이라는 별이 떠올랐을 때, 인도에도 비슷한 광채를 뿜어내는 남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라비 라자라는 이름을 가진, 이전까지는 한 번도 전파를 타본 적 없는 거한은 그 불안한 국내 정세를 끌어안고 괴수를 포함한 자신의 적들을 묵묵히 쳐 죽였고, 1.5세대 플레이어의 전설이 되었다.
인도를 벗어나서 활동한 적이 없음에도 그의 위상은 의심받지 않았다.
오히려 대 괴수 전적만 잔뜩 있는 다른 국가 대표급 플레이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르며 던전 대응체계가 구축되고, 퍼플 던전에서 난이도 상승이 멈추자 사람들은 점점 최초로 헌팅레벨 300대에 도달한 영웅들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갔다.
아프리카의 영웅이었던 딘 앗쿰이 퍼플 던전 공략 중 사망하면서 그런 기류는 더욱더 가속화 되었다.
한국의 나승하는 사실상 칩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고, 지벡 건터는 미국인에서 독일인으로 국적이 바뀌고는 플레이어 입장보다 염문으로 타블로이드지에 얼굴을 더 자주 비추는 망나니로 전직해버렸다.
알 사디크나 웨인 크로이츠는 건재했으나 둘 다 활동을 그리 드러내놓고 하거나 조명 받을만한 짓을 잘 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퍼플 던전에서 난이도 상승이 멈춰, 그들만이 딛었던 경지에 발을 들인 이들이 등장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영향을 주었고 말이다.
인도를 벗어나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라비 라자도 그들과 비슷한 속도로 국제적인 명성이 사그라졌다.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의 이들이 아 하지만, 전성기와 같은 위력적인 느낌은 사라진 것.
지금 와서는 ‘용잡이 팀’이라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세계 최강팀 때문에 2군, 아니 그 사이에 치고 나온 후배들 때문에 퇴물 취급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나올 수준이 되었다.
물론 라비 라자를 한껏 의식하고 있는 인도 내에서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살만 칸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고 생각한 그 이름의 위력을 지금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천여 명의 플레이어로 구성된 3개의 직속 대대를 휘하에 두고 있는 그는 라자스탄을 발아래로 두는 군벌이었다.
그럼에도 살만은 이 관저에 자신이 갇혀있다는 강박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실제로도 갇혀있는 것에 가깝기도 했다.
휘하에 있는 직속 부대와 측근들이 거느린 나머지 4000명가량의 플레이어 부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중앙 정부를 향해 반기를 들었을 때부터 부대에 대한 장악력은 흔들림 없었으며, 라비 라자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인도 전역에 퍼진 지금은 이보다 더 올라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공고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살만은 지금 당장 관저에 생화학 무기 폭격이 떨어진다고 해도 쉽사리 도망을 결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5000명이 넘는, 국가 규모의 플레이어를 휘하에 두고 있으며, 전부 전투대기로 돌려놓고 관저 주변에 대기 시켜두었지만 도무지 그들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협회에 갱신을 요청하면 헌팅레벨 300으로 갱신을 확신할 수 있는 괴물이 되었지만, 그조차도 작은 위안도 되지 못했다.
살만은 전투 손실 보고서를 다시 들어보았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줄에 요 이주 간 희생된 부하들의 수인 1081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가래 끓는 신음소리를 냈다.
1081명.
그것이 이주 전에 처음으로 존재를 드러낸 놈이 카자스탄에서 죽인 플레이어의 숫자였다.
질을 따지지 않아도 어지간한 나라라도 휘청하는 수준이 아니라 비명을 지를 정도의 숫자.
질의 차이가 있으니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전의 데스나이트 사태 때 지벡 건터는 이만한 인원수의 희생을 내고 사태 종료가 되기도 전에 국제 법정에 세워질 뻔하기도 했다.
사태가 종료된 지금도 말이 나올 정도.
살만이 얼어붙은 건 이 말도 안 되는 전사자 수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두 눈을 완전히 감으면 그 광경이 너무도 선명히 떠오를 거 같아서, 한 쪽 눈을 번갈아가면서 감았다 뜨는 괴상한 행동을 하는 중이었다.
나흘 전 직접 나선 정찰에서 본 ‘그것’은 닳고 닳은 플레이어조차 정신적 충격을 받을 정도로 끔찍했다.
언뜻언뜻 비추던 그 시커먼 살의와 마력만으로 그가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희생된 200명의 정예병들의 목숨이 큰 희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항하는 건...불가능하다. 남은 병사들을 모두 쏟아 부어도 놈을 잡는 건 불가능해.’
공포에 마비된 머리가 마구잡이로 ‘그것’의 존재를 부풀려서 낸 결과가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살만은 겁에 질려있기에 어느 때보다 정확한 견적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뇌리에는 200명의 정예병들의 협공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찢어버리던 ‘그것’의 모습이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살만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눈을 감으면 자연히 떠오르는 그 끔찍한 무위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때까지 강제로 봐온 것이다.
‘...이 땅에는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없어.’
아마 인도의 모든 플레이어가 몸을 던져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아니 죽이지 못할 것이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부정적 쪽의 확신만 더해져갔다.
‘그걸 상대할 수 있는 건 용잡이 팀 정도겠지. 하지만 부를 순 없다.’
아무리 잘 나가봐야 군벌이고, 타국 정부와 커넥션을 만들어 둘 정도로 시간이 있지도 않았다.
더욱이 용잡이 팀이 머무르고 있는 미국에는 연방정부 공무원 번호 하나 알지 못했다.
알아내려고 하면 알 수는 있겠으나, 아무런 관계도 쌓지 않았고 줄 수 있는 것도 시원찮으니 해보나 마나 일 터다.
‘주변에 의탁할만한 곳이라고 해봐야...칼리프 클랜. 그 잡놈들 밖에는 없군.’
다행스럽게도 국경 인접지대임에도 칼리프 클랜과의 사이는 나쁘진 않았다.
국경지대에서 온갖 분쟁을 다 도맡아서 쳐내던 라비 라자와 그 수하들 덕이었다.
말 그대로 나쁘지 않다 뿐이고 망명 요청을 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해주기 보다는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칼끝부터 들이밀 터.
‘...힘들겠지만 해야 한다. 이 근처에서 놈을 견제라도 할 수 있는 건 그 놈들 밖에 없다.’
살만은 그리 결론을 내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전히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금 정도가 아니라 목숨 그 자체였다.
살만은 방문을 열고 자신의 비서를 찾으려고 했다.
보이지 않았다.
“쿠마르?”
침묵을 미덕으로 삼고 언제나 살만이 편히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던 충실한 비서이자 칼이 보이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 번이나 당부를 해두었음에도.
쿠마르가 자리에 없음을 인지한 순간 살만이 느낀 것은 분노나 배신감이 아니라 공포감이었다.
동시에 살만은 자신의 공포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이성적인 추론이 아니라 순전히 감에 기반한 감정이었고, 살만의 이성이 공포의 이유를 찾아내었을 때는...
쯔걱 철퍽 츠걱 투둑
집무실을 향해서 기분 좋게 일직선으로 트인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인간 정도의 체중을 지닌 것이 찐득찐득한 것을 밟은 채로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는 살만에게는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경보음이었으며, 동시에 카운트다운이었다.
검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살만의 정예병 200명을 집어삼킨 그 때와 다름없는 시커먼 갑옷 차림으로.
발소리가 양자의 사정거리 언저리에 도달한 순간,
쒸익! 살만은 공포로 굳어있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가방’에서 뽑아듬과 동시에 쾌속으로 플레일 휘둘렀다.
마력을 잔뜩 머금고 살만의 순간가속 기술까지 받은 머리 부분은 순간 철구가 아니라 도깨비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살만의 생을 압축한 최속의 일격.
그러나,
츠컹 츠읏 푸화학! 살만이 던진 혼신의 일격이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지 자세에서 시작한 올려베기는 물리법칙을 거부하는 것처럼 두 호흡 더 빠르게 시작한 살만의 공격을 초월해 그의 몸뚱이를 토막쳐버렸다.
검은 ‘그것’은 눈을 부릅뜬 채로 숨을 거둔 살만의 머리통을 집어 들었다.
투구에는 눈구멍도 없었고, 투구 너머에도 눈 같은 건 있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잠시 살만의 원통해 하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콰직!
***
“아니, 조사 차원에서도 보내 줄 수 없다는 말입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