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화 〉 탐식마(???)
* * *
“그러니까, 인도 내의 길드 사무소에 그 놈이 난리를 쳐놨었다고?”
“사무소인 건 모르겠어. 건물 밖에서부터 안 쪽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서.”
그럼 인도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류 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자신도 능력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하면 할 말이 없어서 어지간하면 그러려니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모를 구석만 늘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괴수라는 위험으로부터 세아를 떼어놓는 걸 지상과제로 여기는 류 현이 그녀의 능력 사용을 이대로 둬도 되나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그래도 좌표는 아직 기억하니까 지금 다시 보면 어딘지는 알 수 있...”
“아니, 괜찮아. 거기까지는 안 해도 돼. 그렇게 설쳐대면 알고 싶지 않아도 우리 쪽에 연락이 오거나 미국 쪽에서 알려줄 거야.”
세아를 기겁하면서 말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너무도 가볍게 정보부에 일거리 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한 류 현은 입속에서 혀를 굴리며 말을 골랐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적절하게 순화된 표현은 찾을 수 없었기에 처음 떠올렸던 문장을 그대로 뱉었다.
“...먹고 있었던 건 전부 플레이어들이었고?”
“응. 살점을 먹는다는 느낌보다는 덤으로 딸려 들어가는 느낌이 강했어. 현이 네가 내놓은 상처로 계속 새어나오고 있었거든.”
“그 생기라는 거?”
“응. 정확히는 흡수하려고 하는데 방법을 모르는 건지 원래 안 되는 건지 효율은 일 할 그 이하였고.”
“일할이하라...눈에 띄는 변화는 없고?”
“음...내가 안쪽까지 투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 서 단언은 못하겠는데, 흡수되는 대로 상처를 막으려고 하고 있는 거 같긴 했어.”
“그래서 되는 거 같았어?”
“아니, 내가 눈 떼기 직전까지 같은 시간에 새어나오는 생기양은 비슷했어. 줄어들었다가 확 벌어졌다가 하는 식이었거든.”
“불행 중 다행이네.”
류 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말을 흘렸다.
정말로 그랬다. 놈이 당장 몸을 추스르고 ‘드라우프니르’를 이용해서 이쪽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전생이 생각날 정도로 지난하고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 터.
전생이야 혈혈단신에 확실한 아군세력이라곤 미국뿐이고, 나머지는 나라 형태가 남아있는 곳이 드물 정도로 난장판이었으나 현생은 아니었다.
없던 인류애 같은 게 생겨난 것은 아니나, 어찌됐거나 자신이 지키는데 크게 일조한 것들이 아닌가.
이제 홀몸도 아니었으니 인류 문명은 유지할 수 있는 최대치를 유지해 주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문명을 지키고자 무리한 정면승부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페릭스’때처럼 묘한 짓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시간은 벌었네.”
칼리프 클랜에서 전력 이탈을 각오하고 여력을 쏟아 부은 보람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보장을 받자 끓던 속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드라우프니르’로 상처를 털어냈을 때는 저걸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자신이 냈다는 상처부분도 신경 쓰이긴 했으나 세아가 빤히 보고 있으니 티를 낼 순 없다.
“그럼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계속 가는 걸로?”
“예, 그래야죠. 원래도 놈이 들이닥치면 어지간해선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칼리프 클랜에서 쥐어짠 건 정말 얼마 없던 여력이었다. 회복하는 동안 능력이 어느 정도 막히는 걸 각오했을 정도로 제대로 쥐어짰기에 놈이 물러날 정도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금은 짜낼 수 있는 전력을 계산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내상이 악화됐다.
이제 놈과 마주치면 도망 외의 선택지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버릇처럼 힘들 것 같으면 그냥 도망칠 것이라고 해놓고 정작 상황이 닥치면 들이박고 보는 류 현만 봐온 화련으로서는 재차 확인할만한 문제였지만, 류 현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힘들다는 기준이 많이 달랐기에 오는 오해였을 뿐.
“문제는 시간이네요.”
“예, 그렇죠. ‘드라우프니르’로 그런 묘한 짓까지 벌이고도 상처를 다 못 털어냈다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우리 쪽도 입은 상처가 가볍진 않으니까요.”
류 현은 어느 새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승하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놈의 공격에 직접 노출됐었으니 피로감 호소 정도가 아니라 아프다고 난리발광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자신도 성치 못 해서 체내로 침입한 놈의 마력을 다 빨아내주지 못했으니까.
기능 복구가 시급한 ‘천공성’도 화련 없이는 손도 못 댈 테니 사냥 돌입까지 얼마나 걸릴지 현 시점에서는 가늠도 잘 되지 않았다.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게만 되면 유니크 아티펙트로 유인은 될 거 같긴 한데.’
언제나 그렇듯 상대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되느냐 일 터.
‘오늘은...일단 승하 상태부터 호전시키자.’
놈이 ‘드라우프니르’로 치명상을 다 털어낸 줄 알았을 때는 팀 전체의 복귀 보다야 자신의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썼지만, ‘드라우프니르’를 쓰고도 그 모양이라고 하니 그냥 뒀다간 오래 골골 거릴 거 같은 승하를 회복시키는 게 급선무 같았다.
아직 감정이 격해지면 피가 터져 나오는 내상이 더 악화될 테니 세아가 기겁하겠지만 밥 먹다가 코로 피를 쏟는 게 일상 수준이라는데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류 현이 그렇게 승하를 따로 호출해서 상태를 봐주기로 마음먹고 자리를 파하자는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저어...마스터.”
“예, 희란 씨.”
“세아 언니랑 같이 의논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그런데...”
“예?”
류 현의 표정이 대번 떨떠름해졌다. 희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그가 아는 한 누나는 승하를 제외한 팀원 전원과 꽤 친해진 상태였다.
뒤늦게 류 현의 회귀에 대해서 듣고 애매한 상태를 벗어난 백혜라 조차도.
언젠가 어디에 뭘 보러가자고 구체적인 약속도 잡는 사이로 아는데 왜 내 허락을 구하는 것일까.
류 현의 의구심 가득한 시선을 슬쩍 피하던 희란은 질끈 눈을 감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으...언니가 괴수를 포착하셨을 때 상황을 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서요.”
“......”
“다, 다시 봐달라고 할 건 아니고 ‘비아트리체’ 때처럼 영상화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마지막 마디에서는 그의 귀로도 잘 들리지 않을 수준으로 작아졌다.
‘가면 갈수록 더 모르겠네. 진짜 내가 문제인 건가? 전에 보니 누나랑은 잘만 말하던데.’
잘 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것 같은 기분 속에서 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지대의 타르 사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소환’ 이전과 다름없이 고요해 보이지만 ‘대소환’ 이후 언제나 남아시아 국가들이 주목하는 격전지였다.
플레이어 전력이 강력한 국가도 내부에 사막이나 험준한 산맥이 있으면 괴수 위험지대가 십상인데, 인도는 플레이어 전력이 많았던 적은 있어도 전력자체가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이 없었고 심지어 파키스탄과 엮인 칼리프 클랜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었으니 접경지대의 타르 사막의 생태가 어떨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대소환’ 초기 한창 국경 분쟁이 심할 때는 파키스탄 측에서 침투시킨 플레이어 유격대가 분탕질까지 쳐댔으니, 지금에서라도 괴수 청소를 시도라도 할 수 있는 것이 기적이라 할만 했다.
그래서 청소를 위해 투입된 팀들은 플레이어 팀보다는 ‘위스프’처럼 플레이어가 포함된 테러팀 같은 모양새였다.
하나같이 소총과 전투조끼에 매달린 주먹보다 살짝 큰 특수 수류탄을 장비하고, 탄창을 둘둘 두른 인원까지 포함된 무리는 어떻게 봐도 플레이어 보다는 군인에 가까웠다.
그 겉모습이 그들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면모기도 했다.
플레이어 협회가 그토록 막고 결성을 견제하던 플레이어로 구성된 초인 부대.
그들은 수도의 중앙 정부를 바로 위에 두고 있으면서도 가장 빠르게 군벌화 한 라자스탄을 적을 두고 있는 군인들이었다.
그 십여 명의 무리의 선두에 선 근육질 남자는 사구의 머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무선 준비하고 10분간 휴식.”
곧바로 뒤의 무리들에서 복명복창이 돌아왔다.
무리의 대장, 란비르 싱은 수통의 물을 잠깐 머금었다가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라비 라자 그 미친 놈 때문에 개고생을 하는군.”
입에 담은 욕지기와 다르게 그의 어조는 거의 경의를 표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전까지는 자신도 라비 라자를 ‘대소환’ 초기에 큰 힘을 가졌으면서도 모두의 노예가 되어 퇴물이 되어버린 멍청한 놈이라고 조소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지껄인 자신의 입을 짓이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타르 사막만 뒤져도 이렇게 피가 마르는 기분인데, 칼리프 클랜과 파키스탄의 잡놈들, 국경 따윈 모르는 상위 괴수들까지 그 작은 무리로 커버하고 다녔다니.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 그런 생각이 안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새삼 같은 플레이어가 맞나 싶어 허망할 지경이었다.
‘그런 라비 라자도 그 뭔지 모를 괴물놈에게 고꾸라졌다. 이건 미친 짓이야.’
동시에 상부의 생각을 더 이해하기 힘들어 졌다. 라비 라자가 고꾸라졌다고 그 아래 전력이 증발한 것이 아니고, 그 라비 라자가 고꾸라졌다면 그 위험이 적지 않다는 의미 아닌가.
그놈들이 같은 인간상대로는 어지간해서는 칼을 겨누지 않는 쓸개 빠진 놈들이라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막에서 플레이어 유격대를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실전 경험이 란비르를 압도하는 괴물들을 상대로 저보다 약한 놈들을 커버해가면서.
당연히 출발하기 전부터 란비르는 이번 출동을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징계를 각오해서라도 제대로 반대의사를 표할 생각이었다.
타르 사막에서의 일주일은 그만큼 고달팠다. 이제 헌팅레벨 200후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란비르조차 진이 빠져버릴 정도로.
만에 하나 파키스탄의 잡것들을 만난다면 다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 정도로.
“통신 준비됐나?”
군기 바짝든 대답이 터져 나왔다 란비르는 귀가 아프니 적당히 하라는 말조차 할 생각 못하고 뒤로 손을 내밀었다.
“여기는 흰수리, 보리수 나와...음?”
통신도중에 말이 끊기자 본부측 통신담당이 다급하게 그를 찾았지만 란비르는 미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몸의 모든 털이 곤두설 것 같은 소름끼치는 감각이, 살의가 닥쳐들었으니까.
란비르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대원 전부가 자신과 같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분대원 중 누구도 자신과 비슷한 감각을 느끼고 있지 못할 거라는 것도.
그것은 검었다.
누런 모래뿐인 사막 위가 아니라 빛 한줌 없는 암흑천지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고 누구라도 자신할 수 있을 만큼 검었다.
하지만 그것의 존재감은 기묘한 색감 때문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란비르는 그것을 색깔로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구멍.
주변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숨길 생각도 없이 닥치는 대로 전부 먹어치우려는 살의 가득한 구멍.
새어나오고 있는 마력과 살의는 가히 하늘에 닿을 것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괴수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로 여길 수도 있었으나 란비르는 그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새어나오고 있는 살의와 마력을 감지한 순간 전의를 상실했으니까.
오히려 스스로에게 놀랐다.
‘저것이 괴수라고?’
저 정체 모를 것을 보자마자 괴수라고 판단한 자신에게.
‘저게 그 라비 라자를...’
그리고 그것이 란비르가 생애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