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8화 〉 탐식마(貪食魔) (418/429)

〈 418화 〉 탐식마(???)

* * *

할 일 없는 사람들.

비싼 밥 먹고 할 게 없어서 배 꺼뜨리는 고상한 소일거리로 ‘인류가 해결 못하고 있는 가장 끔찍한 난제는 무엇인가?’ 같은 걸 고민하던 이들은 ‘대소환’ 이후로 소일거리를 하나 잃었다.

티비만 틀면 그 대답이 매일 같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바로 마탑이 신규 마법사들을 들이기 위해서 운영하는 마법 개론 방송이었다.

다 망해가던 케이블을 하나 인수해서 24시간 동안 몇 개의 영상을 주구장창 반복해서 틀어놓는 그 채널은,

점잖게 교양 대결을 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시청률을 잃어갔다.

일반인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어떻게 교양으로 삼겠는가.

방송 효과는 미비했지만 ‘마탑’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변변한 근거지도 없이 후원과 국가들의 눈치를 보며 시작한, 단순히 마법사의 모임에 불과했던 ‘마탑’이 어지간한 강대국과 밀당을 할 수 있게 된 이유도 마법의 난해함 때문이었으니까.

‘대소환’ 이 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서로의 모국어라는 제약에서 벗어났지만,

마법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모르는 언어를 접할 때보다 더 한 새로운 당혹감을 느껴야만 했다.

마법사들이 쓰는 말은 분명히 귀에 꽂히고 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니까.

이상할 건 없었다.

마법사들이 다루는 건 이전 세계관을 깨부수는, 아직 무어라고 학술명을 따로 정하지도 못한 ‘마력’이라는 괴상한 것이니.

마법사를 훈련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마탑이 보여주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대전제로 깔려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플레이어가 마법사가 되지도 못했다.

단순히 마력만 다루면 다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마법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마법사들조차도 용잡이 팀을 주제로 정한 토크쇼 패널로 나와서 혀를 내두르는 능력을 가진, 희란의 능력 기반으로 한 설명은 얼마나 복잡한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전투태세에는 24시간 내내 희란의 ‘연결’을 체험하고 있는 그들이라서 대충이나마 알아들은 것이지.

그마저도 화련의 첨언이 없었다면 아예 알아듣지 못했을 테지만.

“그러니까...”

류 현은 눈치를 살피는 희란의 눈빛에 말을 하다말고, 오른손으로 눈썹 위를 슥슥 문지르며 말을 골랐다.

“저희 누나가 저주 같은 거에 씌우거나 한 건 아니라는 말씀이신지?”

“네에,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전 괜찮습니다. 계속 해주시죠.”

“그으, 제 느낌이지만 남은 잔향? 잔재? 같은 게 마스터가 능력을 쓰시고 나면 남는 흔적이랑 비슷해서...”

“그러니까, 놈이 누나를 인지했다는 거군요. 정확하게 인지하고, 저격까지 했다.”

류 현은 끓어오르려는 화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바로 앞에서 희란이 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가 더 수렁으로 빠져들기 전에 화련이 끼어들었다.

“마스터, 일단 진정하시고. 희란이도 아무런 문제없다고 했잖아요? 미수라고요. 미수.”

“예에, 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화를 삭이려고 하고는 있지만 영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아를 노린 공격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 공격은 ‘페릭스’가 가했지만 그 때는 자신이 옆에 있었고, 어디까지나 자신에 대한 공격의 연장선상 느낌이 강했다.

전생의 세아의 사인이 된 ‘아지다하카’의 독공격은 세아를 노린 것이 아니라, 폭격을 가한 도시에 그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을 감안하지 할 수 없을 정도로 류 현에게는 역린이 되는 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직접 세아를 노렸다는 부분에 화가 덜 나는 건 아니었다.

조용히 이를 갈아붙이던 류 현은 가슴께에서 울컥 넘어오는 비린내에 슬쩍 입가를 가렸다.

아직 수습도 못한 내상이 다시 터진 모양이었다.

대충 힘으로 내리 누르고 자리를 파한 뒤에 제대로 수습할 생각이었으나,

이런 부분에서는 귀신같은 승하가 화련을 툭 치곤 턱짓했다.

류 현은 하나 뿐인 친구가 오늘따라 더럽게 얄미웠다.

“마스터, 잠깐만 손 치워보실래요? 아, 진짜 또 터졌네!”

화련이 벌떡 일어나서 다가오더니 류 현이 손으로 훔친 핏물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고, 그것은 바로 세아에게 전염되었다.

순식간에 방안이 난장판이 되었다.

류 현은 화련과 세아가 다시 불러들인 의료진의 조치를 받으면서 승하에게 눈을 흘겼지만 그녀는 넉살 좋게 어깨만 으쓱하곤 말았다.

결국 류 현이 풀려난 건 끓어올랐던 분노가 가라앉고 세 번은 다시 돌아보고도 시간이 남은 한 시간 뒤였다.

“그러니까. 그놈이 남긴 마력의 잔향이 제가 ‘강림’이나 검은 안개를 꺼낼 때와 유사한 유형이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그으, 힘의 성향이 아니라 목적? 작동 흔적 같은 게 유사한 거 라서요...”

“전에 저희 누나랑 말씀하신 주변 장악 말씀입니까?”

“네에...근데 이것도 대강 보고 판단한 거라 좀 더 확인을 해야 확실해 질 것 같아서요. 그런데 지금 봐도 마스터랑은 좀 다른 것 같기도...”

“좀 더 자세히요.”

류 현은 앞으로 다가가지 않으려고 애쓰며 목소리를 깔았다.

‘비아트리체’ 레이드가 끝나고 희란이 앓아누웠을 때,

화련에게 희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고 푸념하고 들은 조언 중 하나였다.

놀라서 눈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홱 돌리는 희란을 봐서는 이 조언은 글러먹은 것 같았지만.

“마스터가 집어삼키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음...흔적만 봐서 확신은 못하겠지만...긁어모으는 느낌이에요. 한 번 더 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요...”

그게 유의미한 차이가 있나?

류 현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반응이었다.

그의 생각에 ‘탐욕’을 절제하지 않은 검은 안개나 희란이 말하는 긁어모으는 느낌을 주는 장악이나 별 차이 없었다.

‘비아트리체’ 레이드 직전 반응 훈련을 위해서 검은 안개에 직접 노출되어봤던 이의 말이니 아주 근거가 없진 않겠지만, 설명을 들을수록 더욱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하기야 내 스스로도 이게 뭔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모두 사실인가 문제를 제쳐놓고 보면 ‘비아트리체’나 ‘살바토르’의 첨언도 있긴 했지만 애매모호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행성단위의 재앙이 될 수 있다는 흉흉한 보장만 받았을 뿐.

자신의 가슴께를 잠깐 보던 류 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 부분 판단은 희란 씨께 일임할 테니 조금이라도 새롭게 알아내신 게 있으시면 번거롭더라도 제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다른 때라면 모르겠는데 놈의 손에 ‘드라우프니르’가 떨어져있으니 말입니다.”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마자 병동에 남아있던 팀원들에게 공유한 내용이었다.

‘드라우프니르’라는 새로운 유니크 아티펙트의 성능과 놈이 어떻게 그것을 썼는지와, 그것으로 인해 앞으로의 전투양상이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해서.

그 길로 계속된 논의에서 내놓은 결론은 간단했다.

팀원들의 완전회복과 기능 정지된 ‘천공성’의 수복이전까지는 본격적인 교전은 피할 것.

‘드라우프니르’ 때문에 팀의 전열의 저지력이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놈이 ‘드라우프니르’로 치명상을 털어낼 때 과정을 보면 유니크 아티펙트라고 멀쩡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판단근거가 너무 모호했다.

‘비아트리체’ 전 에서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마구 사용한 청뢰와 유성우는 그 직후에도 정상작동하기도 했고.

“전에도 말했지만 그 ‘드라우프니르’. 그대로 둬도 되겠어? 진짜 분탕질 최적화 아티펙트잖아. 솔직히 우리 빼곤 알 라시드가 말한 그 분신 수준만 되도 못 당해낼 거 같은데. 하던 거 보면 머리가 안 도는 놈 같지도 않고.”

여태 화련을 부추기는 것 말고는 입을 다물고 있던 승하가 불쑥 치고 들어왔다.

류 현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바뀌고 화련이 옆구리를 찌르며 눈을 흘겼지만 승하는 우직하게 못 본채 했다.

대충 뭉개고 넘겼다가는 이 무모한 친구가 또 뛰어나가서 부상을 악화시킬게 뻔했으니까.

초연한 채 하면서도 일단 일이 터지면 몸부터 던지고 보니 원성을 들어도 단단히 못 박아두는 것이 나았다.

그가 죽고 못 사는 누나의 앞에서.

“그 부분은 당장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대답은 예상치 못 한 곳에서 튀어나왔지만.

류 현의 뒤에서 시종일관 부루퉁한 표정으로 그의 뒤통수만 보고 있던 세아가 끼어들자 그녀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말을 주고 받아본 게 스무 번 이하일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니까.

정확히는 승하가 세아를 껄끄러워 해서 일방적으로 피해 다니는 사이였다.

세아는 승하가 느끼는 불편함을 대번에 눈치 채곤 굳이 다가가려고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세아가 동생의 친구에게서 아예 관심을 거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중요한 시기고 힘든 시기니 동생의 친구에 대한 궁금증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지.

그런 둘의 기묘한 거리감을 모르지 않는 류 현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괴수를 많이 본 것도 아니고 갑옷에 싸여 있어서 완전히 다 파악한 건 아니겠지만, 현이 네가 말한 거랑은 상태가 좀 달랐어.”

“그게 무슨...외형은 내가 말한 그대로였다면서?”

“으음...확실한 건 아닌데. 희란이가 말하는 거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더 맞는 거 같아. 그 괴수 현이 너한테 당한 상처 때문에 죽인 사람들한테서 생기를 긁어모으고 있었어.”

“죽인 사람들? 생기를 긁어모아? 아니 왜 진작 말을...”

‘원시’를 끝내자마자 세아가 기절한 것 때문에 뭘 봤는지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류 현은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기절한 걸로 모자라서 희란의 진단 때문에 가슴 졸이던 게 이제 좀 숨통이 트이나 했는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류 현은 바로 돌아서서 세아를 덮어버릴 기세로 바짝 붙었다.

그리고 바로 뒤의 너스콜 버튼을 부숴버릴 기세로 난타했다.

그에겐 과하다는 걸 인지할 정신적 여유조차 없었다.

저 때문에 봐선 안 될걸, 안 봐도 될 걸 필터 없이 세아가 봤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쳐서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되새김질 시켰다.

그 기세가 뒤에 앉아있는 네 여자가 진정시킬 엄두도 못 낼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류 현의 급발진에 당황한 세아도 그대로 기세에 휘말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하던 말을 이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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