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7화 〉탐식마(貪食魔)
세아가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3시간 여 후의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세아가 목도한 건 건물에 불이라도 난 것 마냥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는 경비 병력과 당장이라도 하나같이 식은땀에 절어있는 의료진이었다.
제 몸뚱이만한 부피의 짐을 들고 날아다니는 화련도.
그래서 본인도 정신없는 와중에 그 중심에 있는 류 현을 뜯어말려야 했다.
말을 너무 잘 들어서 그거대로 어이가 없긴 했지만.
“...련이가 확인 했다면서.”
“아니 그래도 확실한 게 아니니까.”
“현아.”
“알았어. 알았다고.”
세아가 말없이 그의 지그시 눈을 들여다보자 류 현은 뒤돌아서 의료진을 해산시키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화련에게도 사과했다.
소란은 그 규모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정리됐다. 너무 빨리 정리되어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평소라면 류 현에게 다 맡겨두지 않고 직접 챙겼을 세아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그러지 못했다.
그런 세심함을 지닌 세아에겐 꽤 충격적인 장면이었으니까.
세아는 ‘원시’로 목격했던 광경의 충격을 뒤늦게 맞이하고 있었다. 잘게 떨리고 있는 손을 류 현이 세아보다 먼저 알아챘고, 슬쩍 거머쥐면서 화련에게 눈짓을 보냈다.
화련은 되묻지 않고 병실을 건물 내에서 격리시켰다. 변화를 눈치 챈 승하가 화련을 돌아봤지만 그녀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짧게 고개를 내저어서 입을 틀어막았다.
눈살을 찌푸리던 승하는 화련이 벽근처로 가서 기대서는 것을 보자 백혜라를 끌고 따라갔다.
사태파악이 안 돼서 눈만 깜빡이던 희란도 딸려 들어가는 것처럼 뒤를 따랐다.
“왜?”
승하가 한껏 죽인 목소리로 물었다.
화련은 이번에도 대답대신 움직였다. 그녀가 슬쩍 손을 내젓자 이번에는 방안에 격리벽이 생겨났다. 류씨 남매를 가려주는 장막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화련이 대답했다.
“...세아 언니가 본 게 상상이상인 가 봐요.”
“음?”
“마스터 관련된 일 말고 언니가 저렇게 동요하는 거 처음 봐요. 마스터 부탁이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티 안내려고 이 악물고 버틸 분인데.”
화련이 짧게 한 숨을 몰아쉬며 마침표를 찍자 승하는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그녀는 초짜 중의 초짜였으니까.
“저주는 아니겠지?”
“아마도요. 세아 언니 능력이 뭐 어떻게 작용하는 건지 아직도 감이 잘 안 잡히긴 하는데...‘비아트리체’ 그 괴물이 날뛰는 걸 관람하고 아무 문제없었던 거 보면,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마스터한테 썼겠죠. 세아 언니 반응도 저주라고 하긴 좀 그렇고.”
“하긴, 대놓고 근접계열이긴 했어. ‘드라우프니르’나 ‘파슈파타’도 그 쪽은 아니고.”
“갑옷이 남긴 해도 마스터한테 그렇게 쥐어터지고도 별 다른 게 없었던 거 보면 방어 몰빵이겠죠.”
“그러고 보니, 아직 아무 훈련도 안 받았었지?”
“네. 세아 언니가 운 띄우려고만 해도 마스터가 죽자고 반대하시니까요. 그래도 요즘은 좀 양보하셔서 틈틈이 마법을 배우고 계시긴 한데...”
“괴수 공략 이론 마스터 한다고 한 방에 그게 실행이 되나. 그게 되는 놈이면 이론 배울 필요도 없는 놈이지. 마법 한 줄 더 익히는 것보다 그런 훈련이 더 중요하지. 저주는 말할 것도 없고.”
뜬금없이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오랜 시간 함께 해온 화련은 승하가 생략해버린 앞의 말을 어렵지 않게 읽어내었다.
보호한답시고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 자체 대응능력을 떨어뜨리는 게 아니냐는 의미.
‘마스터가 아무리 열심히 보호하려고 애써도 세아 언니가 마스터 옆에 안 떨어지는 한은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아무리 플레이어로 각성했다지만 훈련과 실전경험 없이는 특수한 능력이 더 해진 일반인에 불과하다.
아귀가 안 맞는 말 같았지만 어느 정도 실전경험을 거친 플레이어들에게 이보다 공감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일평생 싸움은 고사하고 운동이나 규칙적으로 할까 말까한 일반인에게 특수한 능력 하나만 추가됐다고 과학 엿 먹이는 이상현상에 능숙하게 대항할 수는 없는 일.
플레이어의 사망률과 이탈률이 높은 건 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또 협회가 괜히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고.
여러 방해공작 때문에 협회를 꺼리는 풍조가 조성되는 바람에 크게 의미가 없긴 했지만.
아는 플레이어도 없는 완전 생초짜들이야 맨땅에 헤딩하면서 제 운수 시험해보는 게 일반적이라지만, 류세아는 그런 케이스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 케이스 아닌가.
류 현이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아예 저주 혹은 그 이상을 훈련으로 대응법을 익히고도 남았다.
정작 그걸 허락해 줄 권한과 체험 시켜줄 능력이 있는 류 현이 결사반대 중이라, 불어나는 마법지식과 능력 응용력에 비해서 실제 상황 대처 능력은 바닥에 머물고 있지만.
한 손이라도 아쉬운 입장에서 세아 같은 인력이 놀고 있는 건 참으로 아까운 일이었지만 화련은 류 현을 이해했다.
‘그 일이 없었으면 모르겠지만, 아무리 없던 일이 됐다고 해도 시신...을 봤다고 했었으니까.’
“마스터도 머리론 알고 계실 걸요. 문제는 세아 언니 일이라는 거죠.”
승하도 그 대답에는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난 모르겠다. 그냥 계속 입 다물고 있을 거니까 네가 알아서 어르든 닦달하든 알아서 해.”
뒤에 따라오는 씁쓸한 궁시렁거림을 화련은 못 들은 채 해주었다.
대신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희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희란아.”
“네에.”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다가 걸린 것처럼 흠칫 희란의 어깨가 떨렸다.
“내가 말 안 해도 마스터가 부탁하겠지만 네가 세아 언니 검진 좀 같이 해야 할 거 같거든? 컨디션은 괜찮니?”
“괜찮아요. 근데 그으...”
“왜?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니에요. 다시 확인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저도 모르게 화련의 왼쪽 눈썹이 올라갔다.
오희란이 이렇게 빼는 건 마냥 불분명해서가 아니다. 대체 무슨 성장과정을 거친 것인지 몰라도 매사에 주눅 들고 들어가는 성격 때문이었다.
자신의 판단이 들어가는 일에 한해서 그녀는 확언하는 법이 없다.
어쩌다가 긴장이 풀려서 확언해버려도 정신이 돌아오면 사과까지 해가며 이런 저런 말을 덧붙인다.
책임지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감이 밑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실을 뚫고 들어가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는데.’
당장 FA선언을 하고 팀을 나가도 각국 수뇌부가 날아와서 꽃가마에 태워가려고 할 텐데.
그게 아니어도 용잡이 팀 내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임을 류 현이 잊을만하면 상기시켜주고 있음에도 희란의 태도는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위상이 오른 것은 팀원 외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모를 수가 없을 텐데도.
이런 부분 때문에 류 현이 아직도 희란을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어지간해서는 단 둘이 두지 않으려고 다른 팀원들이 눈치껏 움직일 정도였다.
그나마 팀원들끼리 있을 때는 좀 느슨하게 변하고 의견개진도 그녀치고는 적극적으로 했지만 스스로 판단하는 걸 삼가는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어쩌다보니 그런 희란의 소통창구 역할을 하게 된 화련은 굳이 닦달하진 않았다.
그래봐야 역효과뿐이라는 걸 수차례 확인했고, 그럼에도 그녀가 너무 늦게 말하는 법이 없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하지만 화련은 곧 후회하게 되었다.
류 현이 차단막을 두들겨서 그것을 걷어내고 희란에게 미리 말한대로 검진한 후에,
몸에는 아무 이상 없다고 진단을 내린 희란이 뜬금없이 폭탄을 투하했으니까.
“...그러니까, 제 누나한테 놈이 붙인 저주가 씌었다는 겁니까?”
류 현의 목소리는 전에 없는 떨림을 담고 있었다.
회귀 고백할 때도 안 저랬던 거 같은데.
화련은 평하고도 스스로에게 어이없음을 느꼈다. 지금 그런 태평한 소리 할 때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희란을 봤다. 희란은 저 혼자만 진동모드가 탑재된 인류마냥 파르르 떨고 있었다.
류 현의 감정적 동요가 마력 파동으로 살벌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전에 몇 번 류 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들었다.
‘마스터는 표정 변화는 잘 없으신데 감정적으로 격해지면 마력이 제일 먼저 변화해요. 어...누르고 계신 건 맞는데 밑에서 부글부글 하고 끓어오르는 게 워낙 격렬해서...’
그 뒤에 더듬더듬 뭐라고 말한 것도 기억해두긴 했는데 당장은 쓸모가 없어서 회상을 끊었다.
화련은 희란의 정신이 이승을 탈출하기 전에 손을 끌어다가 꽉 움켜쥐었다.
희란이 흠칫 놀라서 자신을 돌아볼 만큼 강하게.
화련은 입술만 달싹여서 속삭였다.
류 현의 신체능력을 생각하면 못 들을 수가 없겠지만 저 정도로 동요한 상태면 귀가 들어도 머리가 인지를 못할 것이다.
“희란아, 좀 더 명확하고, 자세히. 아무도 네 판단 의심 안 해.”
애초에 용잡이 팀 구성원 하나하나가 가진 능력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고,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어서 달리 물어볼 상대도 없다.
세계 마법사랭킹 1위부터 100위까지 줄 세워놓고 희란이 발견한 걸 설명해줘도 진짜 찾아낼 인사조차 없을 테니까.
오죽하면 그런 경향의 정점에 서 있는 류 현조차 눈치 못 채고 희란이,
‘그런데 세아 언니 주변에 아까 말씀하신 그 시야차단 마법 같은 거 흔적이 남아있는 거 같아요.’ 라고 하자 멘탈이 나간 것 같은 반응을 보이겠는가.
화련은 희란의 손을 조물거리면서 슬쩍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금세 식어있던 손이 뜨끈뜨끈 해져왔다. 그녀가 고개를 재차 끄덕여 독려하자 희란의 입이 어렵사리 열렸다.
그 입에서 나온 소리는 또다시 화련의 뒤통수를 깨부쉈지만.
“그게...저주가 아니라. ‘장악하는 힘’에 가까운 거 같아요.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마스터가 예전에 ‘강림’ 쓰실 때랑 조금 비슷한 것 같...”
옛날이지만 저와 비슷하다는 말에 류 현의 표정이 더 썩어 들어갔다.
화련은 그의 반응에 속으로 질겁하면서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