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화 〉탐식마(貪食魔)
“어, 음...미안해?”
“...오실 필요 없다고 했잖습니까.”
“어...그게 흥분해서 못 들었어.”
류 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알 라시드는 그런 류 현보다는 그 옆에 자리한 화련의 눈치를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화련의 눈빛이 거의 적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명백하게 저보다 강한 플레이어가,
그것도 마법사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면 누구라도 알 라시드가 짓고 있는 표정이 되었을 것이다.
화련이 왜 저러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 클랜 내에서 거의 유일한 적극적인 협력자에게 이래서 좋을 것도 없었다.
자신의 요청도 까먹고 요란하게 방으로 밀고 들어와서 모두를 깨워버린 알 라시드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류 현이 그를 구해주기 위해서 슬쩍 팔꿈치로 화련을 건드렸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돌아온 화련은 시선의 방향만 살짝 돌렸다.
시선 끝에는 벽 밖에 없어 그녀의 불만이 아주 잘 드러났다.
“...화련 씨.”
“뭐라고 하시는 건 상관없는데. 그 전에 밖에 죽치고 있는 놈들 치우고 들어도 되죠?”
류 현의 표정이 기괴하게 구겨지다 만 채로 알 라시드에게로 향했다.
알 라시드는 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분명히 오지 말라고 하고 왔...젠장, 진짜 미안해. 지금이라도 돌려보낼 게.”
태연한 채 하곤 있지만,
본인 상태도 좋지 못한 알 라시드도 화련이 지적하고 집중력을 가다듬자 밖에 모여든 인기척들을 느낄 수 있었다.
벌떡 일어난 알 라시드가 모여든 이들을 해산시키는 사이 류 현은 화련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렇게 날 세우고 계시면 안 피곤하십니까? 화련 씨 부상도 가벼운 건 아닐 텐데...”
“언니나 마스터는 완전히 뻗어버릴 정도인데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자기네 은인 대접이 이꼴인 인간들 믿고 뻗을 수가 있어야지.”
그리 말하곤 화련은 류 현의 옆에서 일어나 승하의 침대에 턱 걸터앉았다.
불만이 없진 않지만 의도는 따르겠다는 제스처에 류 현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본인이 보기에도 대접이 빈말로도 좋다고는 못할 수준이었으니까.
아무리 최상위 플레이어들 상대로 현대 의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적다지만,
휴게실로 내주었던 방에 가재도구만 더 들여놓은 건 그가 봐도 좀 아니었다.
‘들어올 때 표정을 보면 알 라시드도 앓느라 처음 들어와 본 것 같던데.’
이상할 건 없는 일.
‘그것’에게 거의 자신의 힘을 밀어 넣기만 한 류 현도 그 마력에 조금 노출된 것만으로도 타격이 없지 않은데,
그보다 훨씬 쳐지는 알 라시드는 지금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접이 이 모양이라는 것을 좋게 넘길만한 이유가 되진 않았지만.
화련은 그 사실이 못내 짜증났는지 조금 씨근덕거리다가 한 마디 더 보탰다.
“삼 일 내로 떠나야겠어요.”
“예? 화련 씨 몸 상태가...”
“여기 있으면 화병 나서 그냥 있어도 내상이 도질 걸요. 그냥 미국까지 날아가서 좀 덧난 거 치료하는 게 훨씬 나아요. 여기 있으면 저도 못 쉬고요.”
그렇게 말하곤 화련은 알 라시드가 해산 시키고 있는 인원들을 향해서 눈을 흘겼다.
“자고 있는데도 알 정도로 아주 대놓고 기웃거리던데요.”
“으음...”
“이번에는 련이 말대로 하는 게 낫겠다. 류 현, 나도 여기선 푹 못 쉴 거 같아. 너 자는 동안 나도 저것들 때문에 몇 번 깼어.”
“...알겠습니다. 얘기가 끝나는 대로 떠나죠. 오늘 말고 내일요.”
“...하루 정도는 제가 더 참죠.”
화련은 그 말을 끝으로 침대 윗부분을 끌어올려 기댄 채로 앉아있던 승하의 옆에 턱 기댔다.
밖의 인원들을 해산시키고 돌아온 알 라시드는 눈을 감고 있는 화련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디까지 했었지?”
“아무것도 시작 안 했습니다.”
“아, 먹는 진통제가 좀 쎄서 나도 좀 오락가락 하네.”
“당분간 ‘그것’이 여기 올 일은 없을 테니 푹 쉬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런 상처는 잘 못하면 성장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니까요.”
“어어, 그래야지. 그런데 곧 떠날 거 같이 말하네...?”
“이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뻔뻔하기도 하지.”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있던 화련은 기어코 한 마디 했다.
류 현은 그녀를 말리지 않고 알 라시드의 반응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그는 좀 찔끔한 표정이긴 했으나 그런대로 수긍하고 있는 듯 했다.
“미안해. 이번 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나도 정신줄 놓기 전에 당부를 해놓긴 했는데...일이 이렇게 됐네.”
“상황이 상황이니 외부인 챙기는 데 신경 쓰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렇게 말해주니 더 할 말이 없어지네.”
“값은 나중에라도 확실하게 치르게 해드릴 테니 걱정 마시죠.”
“관계 단절 당하는 것도 각오했는데 그 정도면 싸게 치는 거지. 고마워.”
“전 아직 대가에 대해서 말씀 안 드렸습니다만.”
“이제 유니크 아티펙트도 없는 우리 클랜에 크게 요구할 게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희망적인 얘기겠지.”
혼자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알 라시드.
“그럼 언제 돌아갈 생각이야?”
“아마 다른 일이 없지 않는 이상 내일 돌아갈 것 같군요.”
“내일? 괜찮겠어? 아직 부상도 제대로 수습을...”
“서로 불편한 상태를 유지하는 취미는 없으니까요.”
“...여러모로 할 말이 없네.”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응? 그건 내가 하려고 했던 질문인데.”
“그건 미리 대답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서 부상을 추스를 겁니다.”
“나야 뭐...저번에 말했던 걸 실행해야겠지. 이 방 꼴을 보니 망설임이고 뭐고 싹 사라지네. 확실하게 할 생각이야. 피를 조금 보더라도 말이야...공주님이 내 옆에 붙어있었다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지시를 내렸는데 이런 식으로 개판 칠 줄은...”
방 안을 한 번 휘돌아본 알 라시드는 다시금 고개 숙여 사과했다.
류 현은 손을 내저어 그의 고개를 들게 했다.
“각오를 굳히셨다면 아까 말한 대가를 미리 말씀드려도 될 것 같군요. 정확히는 부탁이라고 해야겠습니다만.”
“뭔데 이렇게 겁을 줘?”
“칼리프 클랜이 이후에 전력을 추슬러도 다시 파키스탄 방면 국경분쟁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류 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알 라시드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큰 기대를 담은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광분할 것을 대비하는 것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아무리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이라곤 해도 칼리프 클랜의 근간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는 걸 좋게 받아들일 리가 만무하니까.
대신이라고 뭣하지만 그에 준하는 메리트를,
당근을 직접적으로 이 자리에서 쥐여 줄 생각이었다.
“좋아. 그러지.”
“...예?”
“뭐야 표정이 왜 그래? 그러겠다니까.”
알 라시드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류 현은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아니 왜 이렇게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거지?
자신이야 전생에 인도 방면 전선이 무너지며 형성된 언데드 부대가 파죽지세로 중국 서부와 남부를 먹어치운 기억이 있어서 꺼낸 말이었지만,
류 현 스스로도 제대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당근을 쥐여 주더라도 그냥 그렇게 하는 채만 하는 것을 계속 닦달해야 할 거라고 예상했다.
류 현이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도 - 파키스탄 간의 국경분쟁과 거기에 끼어든 칼리프 클랜의 종교적 문제는 쉽게 해소될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혹시 다른 근처에 다른 파키스탄이...”
“없지. 요 근래에 우리 클랜이 손을 보태고 있는 곳은 거기 한 곳 뿐 이고.”
“그럼...”
“클랜 내부에서도 계속 얘기가 나오던 문제였어. 실익도, 명분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관성처럼 밀어붙이고 있던 거라서. 최근에 공주님을 투입한 건 소문 하나 확인할 겸, 강경파들 고집 꺾을 명분 만들기 용이었고.”
“그런가요.”
“그 소문이 진짜이긴 했는데...문제는 ‘그것’이 쥐고 나타나서 다 헛짓이 됐네. 어쩔 수 없지. 삽질 한 번 거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걸로 설득이 되겠습니까? 제가 알기론...”
“되는가 안 되는 가 문제가 아니고 해야지. 지금 상태에서 인도까지 적 삼으면 답이 안 나오는데. 거기다가 최우선 순위로 우방 삼아야 하는 인사가 그렇게 말하는데.”
“...점점 더 믿어도 될는지 모르겠군요.”
“처음부터 믿어달라고는 말 안 해. 그냥 아예 시선을 거두지 말고 보다가 저놈 괜찮다 싶으면 껴주는 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껴달라는 것은 ‘신의 방패’ 같은 건수를 말하는 것이겠지.
‘...어차피 칼리프 클랜은 늦게라도 ‘신의 방패’를 확보할 테니. 협조적인 인사한테 주는 게 낫겠지.’
류 현은 ‘가방’에서 꺼내서 쥐고 있던 ‘신의 방패’ 프로토타입 두 알을 만지작거리다가 슥 내밀었다.
“응? 뭔데?”
“그 설득 빨리 끝내길 바라면서 드리는 선입금 입니다.”
“으응? 어, 내가 이런 거에 별 조예가 없어서 그런데 뭐하는 물건인지 말해주면 안 돼?”
“‘신의 방패’ 프토로 타입입니다. 설득하는데 는 충분하겠죠.”
잠시 후,
방에 알 라시드의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가 해산시켰던 인원들이 다시 달려올 정도로.
그대로 류 현에게 매달리듯이 절을 하다가 화련에게 걷어차여 쫓겨난 알 라시드는,
다음날 용잡이 팀이 떠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화련이 강렬한 눈총을 받으며,
더는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엉거주춤 하게 류 현에게 손을 내민 알 라시드가 말했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게. 조만간 칼리프 클랜이 미쳤다는 소리가 나오도록.”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신의 방패’ 협상 때 뵙기로 하죠.”
“...고마워.”
“출발할게요.”
화련의 텔레포트 발동에 서서히 시야가 빛에 가려지는 와중에도 류 현은,
알 라시드에게 ‘신의 방패’ 협상이 무슨 말이냐며 달려오는 클랜원들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를 향한 것이 아닌, 자신을 향한 쓴 웃음이었다.
‘회귀하고 남의 클랜 정치질을 도와주게 될 줄이야.’
슈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