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2화 〉탐식마(貪食魔)
가슴께에 후끈한 감각을 가장 먼저 느끼며 류 현은 눈을 떴다.
윤곽만 봐도 낯선 방안은 어둑했다.
암적응이 끝나자 방안에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옆 침대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승하를 가장 먼저 발견했고,
방에 놓인 가재도구나 방의 형태를 둘러본 뒤에,
자신의 발치에서 엎어져 자고 있는 화련을 확인했다.
‘좀 길게 자고 일어나면 되니까 알아서 쉬고 있으라니깐...’
하여간 이런 건 지시를 더럽게 안 들어먹는 아가씨다.
콧김도 조심스럽게 훅 뿜어내곤 류 현은 침대 옆 탁자에서 탁상시계를 보았다.
‘잠든 지 삼 일 지났나. 생각보다 그리 오래는 안 됐군.’
정확하게 딱 삼 일은 아니었다.
‘그것’이 도망가고 정신을 잃은 후에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알 라시드에게 부탁을 빙자한 지시를 내렸으니까.
‘조사...해 뒀으려나? 본부에서 그 꼴이 났었는데.’
자연히 ‘그것’이 도망치기 거의 직전에 뜯어먹기 위해서 칼리프 클랜원들을 쳐 죽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허망한 죽음들이었지만 그들이 비상사태에 본부에 소집될 정도로 정예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다른 짐이 없으면 모르되,
아프리카에서 꾸역꾸역 밀려드는 괴수 무리라는 짐을 본의 아니게 지고 있는 칼리프 클랜입장에서 삼 일전에 당한 사고는 활동이 정지될만한 일일 것이다.
전생보다 급격하게는 아니어도 느리게나마 진행되고 있는 3차 ‘대소환’의 진행도를 생각하면 숫자 이상의 피해일 것이다.
터져나가는 던전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점점 돌출된 재능 있는 플레이어들의 비중이 커질 테니까.
그러니 2주도 안 되는 시간동안 우두머리가 부상을 입고,
추가로 주력 중 쉰이 사망하는 환란을 겪은 칼리프 클랜이 류 현이 부탁한 ‘그것’의 동선체크를 파악을 제대로 해놓았을 확률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더라도 낮았다.
류 현은 알 라시드를 호출하기 위해 집어 들었던 휴대폰을 손안에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밤중에 그를 불러내봐야 우리 사정이 좋질 않아서 아직 조사를 못했다. 최대한 빨리 착수하겠다.
이런 말만 들을 것이 뻔했으므로.
‘...하긴 네임드 몹인건 이제 확정이라고 봐야겠지. ‘엑스칼리버’를 그 꼴로 만들었는데 네임드 몹이 아니라면 그게 더 골 때리는 일이고.’
당시에야 워낙 급박해서 그런 걸 살필 여유가 없었지만,
기억 속에 남은 놈이 휘두르던 검은 류 현이 본적 있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까맣게 변해서 단박에 알아보긴 힘든 상태긴 했다.
막판에 마력검을 뿜어내면서 그 원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긴가민가했을 것이다.
‘영국의 그 갑옷형 아티펙트까지 합치면 놈이 가진 유니크 아티펙트만 세 갠가. 허어, 우리 팀 보유 갯수랑 똑같네. 셋 다 등장한지 반 년도 안 된 걸로 아는데...한 달도 안 돼서 놈에게 따라잡혔군.’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한 숨을 쉬었다가 엎드려 자고 있는 화련을 살폈다.
그녀는 조금 뒤척일 뿐 일어나진 않았다.
‘본인도 몸도 안 성할 텐데. 그냥 쉬라고 해도 듣질 않네.’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놈의 마력에 직접 노출되지 않아 셋 중 비교적 멀쩡한 상태였던 화련에게도 회복에 힘쓰라고 말을 해두었다.
다시 놈이 들이닥쳤을 때 도망치려면 그녀의 회복이 최우선과제라고 이유까지 덧붙여서.
‘말을 안 들어서 쫓아내는데 성공했으니...대놓고 타박도 못하겠네.’
삼 일 전,
‘그것’을 쫓아낼 때 화련이 우격다짐 식으로 손을 보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
당시에야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긴했다만은,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자신은 그 이상 대치를 유지할 상태가 아니었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쓰면 상당한 소모가 강요되는 검은 불꽃을 부상 중에 있는 대로 끌어 쓰지 않았나.
‘그 상황에서 추가 공격이 아니라 미련 없이 내뺀 거 보면 어떻게든 됐을 거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근거로 타박할 순 없는 법.
‘유니크 아티펙트를 둘둘 감은 네임드 몹...하필이면 제 약점을 채워주는 것들로 잘도 골라 먹었군.’
‘다른 두 개도 문제지만...진짜 문제는 ‘드라우프니르’ 그거지.’
‘대체 뭐 어떻게 작용했길래 부상도 다 떨쳐내고 튄 거야?’
자신을 포함한 용잡이 팀의 부상이 더 심해서 그 의의가 퇴색되긴 했으나,
‘그것’도 다시 나타났을 때 빈말로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검은 불꽃은 ‘비아트리체’에게도 먹혔어. 놈은 그 때만 해도 검은 기운도 못 떨쳐내고 있었고.’
환부를 도려내는 것으로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해서 오른 쪽 어깨가 흔적도 없이 깎여나가 있지 않았나.
거기에 검은 불꽃까지 갑옷형태의 유니크 아티펙트가 녹아내릴 정도로 때려부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소멸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상태를 ‘드라우프니르’의 복제로 떨쳐버린 것이다.
‘분신체가 아홉도 아니었지. 나눠지는 순간 힘의 변화도 못 느꼈었고.’
몸에 손을 박아 넣지 않는 이상 존재감을 느껴내기도 힘든 놈의 특성을 감안할 때,
‘드라우프니르’의 분신체 분열을 통한 순간적인 힘 뻥튀기가 제대로 이루어 졌다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보장은 없긴 했다.
‘차림새도 복제가 안 됐었다. 알 라시드의 말에 따르면 걸친 무장이 부담되는 수준이라도 겉보기라도 복사된다고 했었는데. 상태도 다르게 복사됐었고.’
‘상처를 입은 되는 놈이 소멸하자마자 은폐 상태가 풀리고 힘도 반토막 난 걸 보면 괴수라고 원본 개념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그렇다고 알 라시드가 말한 분신체 같은 느낌은 또 아니었지.’
복제된 놈은 화련과 자신이 유지하고 있던 불의 감옥을 한 번의 칼질로 부숴버렸다.
그 손에 ‘엑스칼리버’가 있었다곤 하나,
승하에게 ‘엑스칼리버’를 쥐여 줘도 그렇게 손쉽게 해낼 수 있다고는 장담 못할 것이다.
류 현과 화련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해도,
검은 불꽃은 발현자가 뻗어버린다고 쉽사리 꺼져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놈의 분위기나 기술이 알 라시드가 말한 분신체의 다운 그레이드와는 상태가 멀었다.
‘...애초에 힘의 크기로 압도하는 타입도 아니지. 품은 힘이 반토막 난 것보다 겨우 입혀놓은 상처를 털어낸 게 더 문제다.’
놈이 진짜인지 아닌 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복제된 놈이라고 해도 인간에 대한 살의가 없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게 된 탓에 그 끔찍하고 흉흉한 살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성하지도 않은 상태로 그런 살의를 표할 수 있는 놈에게 시간을 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처음 봤을 때 잡았어야 했어. 다음 놈을 걱정할 게 아니었다.’
놈의 존재를 네임드 몹에 대입시킬 증거들을 스스로 찾아갈 때도,
그렇게 대강 결론을 내린 후 놈을 처음 보았을 때도,
무의식중의 브레이크 때문에 온힘을 쏟아 부을 수 없었다.
회귀 이후 네임드 몹은 한 턴에 둘 씩 나타났었으니까.
개체수가 아니라 그 이름이 정의하는 존재가 둘 씩 말이다.
아직 회복도 덜 된 상태에서 전력을 때려 부으면,
아직 발견을 못했을 뿐인 다른 놈에게 무방비로 노출될 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첫 교전 이후 화련과 승하가 철수하자고 성화를 부렸을 때 거의 등 떠밀리는 식으로 그러자고 했던 것이고.
놈을 추적할 단서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입혀놓은 부상이 작지 않으니 당분간 몸을 사릴 거라는 예상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치긴 했었다.
똑똑한 놈이니 회복되기 전에는 저에게 부상을 입힌 인간들에게 달려들지 못할 거라는 예상.
남겨질 ‘드라우프니르’가 찝찝하긴 했으나,
알 라시드가 내부 회의를 열었던 날 회의장 안에서 새어나오던 소리들을 생각하면 그런 설득은 먹히지 않을 게 뻔하다고 여겨 반쯤 포기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추측을 바탕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놈의 흉포함은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으니까.
성하지 않은 상태로 라비 라자에게서 ‘엑스칼리버’를 빼앗고,
여기까지 날아와서 ‘드라우프니르’를 빼앗기 위해 거의 빈사의 상처를 입고도 ‘드라우프니르’ 통해 부상을 수습을 하면서 자신들을 이렇게 눕혀놓았으니 말이다.
‘결정 내린 날 바로 돌아가서 손쉽게 ‘드라우프니르’를 빼앗은 놈이랑 붙었으면...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드라우프니르’의 작동방식이나 놈이 멀쩡한 몸을 빼낸 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추측일 뿐이지만,
‘놈은 ‘드라우프니르’를 포함한 유니크 아티펙트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유성우가 아니라 그것들부터 사냥한 것만 봐도 확실해.’
‘놈에게 필요한 기능을 가진 것들이 딱딱 나타난 것도 있지만, 놈이 알고 모은 것이 가장 크다. 소유자의 취약함을 기준으로 습격한 거라면 ‘엑스칼리버’가 아니라, 내가 근처에 있던 ‘드라우프니르’부터 노린 게 아귀가 맞질 않고.’
‘아마 우리 이상으로 유니크 아티펙트에 대해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렇게 똑똑한 놈이 그 꼴을 당하고도 ‘드라우프니르’에 매달린 걸 보면...삼 일전 그렇게 치고받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놈의 행보를 생각하면 두 번째 전투 없이 ‘드라우프니르’를 손에 넣었을 경우,
삼 일전보다 더 힘겨운 싸움을 했을 거라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내뺀 걸 보면 놈도 겉보기랑 다르게 완전히 다 떨쳐내진 못했다는 거겠지...이번에도 시간 싸움을 하게 되나.’
결국 류 현은 손 안에 굴리던 휴대폰 화면을 켜서 가장 상단에 이름이 박힌 알 라시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에도 깨있어야 할 만큼 일에 치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바짝 긴장해 있었던 것인지 상대방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엄청 금방 깼네. 지금 상태 체크할 의료진을...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 상태는 제가 아니까요. 당장은 검사보다는 수면이 우선인 것 같네요.”
-어...그럼 뭐 불편한 거라도?
“잠만 잘 건데 이 상태에서 불편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류 현은 그리 말하면서도 발치에 잠든 화련을 힐끗 한 번 봤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목소리를 죽여서 말했다.
“...날이 밝으면 간병인 한 분이나 보내주시죠. 플레이어 말고 일반인으로. 아, 여성분으로요.”
-그럴게. 근데...다른 용건이 있는 거 같은데?
“제가 이틀 전에 부탁드린 것 말입니다.”
-어? 아, 그놈 동선 체크 해달라고 한 거 말이야? 허어, 일어나자마자 그것부터 찾을 줄은 몰랐는데. 어디보자...
“예에, 그걸 좀 더 빨리 착수를...”
-파악 끝났어. 으음, 끝났다고 하니까 좀 이상하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선에서 어디 갔는지는 확인했어.
“예?”
생각지 못한 대답에 류 현은 잠깐 동안 벙쪄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칼리프 클랜이 놈을 잡아 죽인 것도 아니고 물건은 물건대로 빼앗긴 후에 겨우 쫓아내는 데 그치고 뻗어버린 자신의 요구를 그대로 이행해주었을 줄이야.
하지만 이런 오산이라면 기분 좋은 오산 아닌가.
“어딥니까?”
-메카 방향으로 내빼다가 그 근처 화이트 던전으로 들어갔어.
“던전이요?”
-그래, 어이 없지? 우리도 무슨 눈속임인가 싶어서 아주 주변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확신을 갖기 까지 자신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주절주절 늘어놓는 알 라시드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기어이 텀도 줄여서 나타나는군. 던전 게이트 이용 능력도 사라진 게 아니었어.’
‘그것’의 네임드 몹이라는 사실에 가까운 추측을 확인 사살까지 받았으니 다른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정말로 시간 싸움을 하게 됐군. 젠장, 승하라도 그 때 무리시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만이 그의 머릿속을 망령처럼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