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0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이 시야 안에 알 라시드를 두었을 때,
알 라시드는 지난 번 장담이 무색하게 왼쪽 팔목과 함께 ‘드라우프니르’를 같이 잃은 상태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칼을 대 여섯 번 맞았는지 상처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
알 라시드가 두르고 있는 아티펙트의 수를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었기에 류 현은 긴장을 끌어올렸다.
‘그것’은 알 라시드의 손목과 함께 떠오른 ‘드라우프니르’를 낚아채느라 잠깐 거리를 벌린 상태였고,
류 현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지난 번과 똑같은 조치를 취했다.
“나중에 봅시다.”
“으앗!”
알 라시드를 호위대가 있는 뒤편으로 휙 던져버린 류 현은 그대로 허리를 뒤틀며 제 몸을 주먹에 실어 내던졌다.
‘드라우프니르’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것’의 반응은 반박자 느렸다.
상황이 급해서 충분한 힘을 담진 못했지만, 류 현은 필중을 자신했다.
맞추기만 하면 된다.
짧지만 강렬했던 저번의 경험을 토대로 류 현은 저것에게 발이든 손이든 기술을 발휘할 시간을 주어선 안 된다고 아예 방침을 정해놓았다.
자신의 공격력이 당장 저것의 방어를 뚫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연습도 없이 불완전하게 펼친 새 기술만으로도 몸뚱이를 벌집 꼴로 만들어놓지 않았는가.
기선을 잡고 몰아붙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허술했지만 전생에서도 비슷한 케이스가 없는 놈이니 류 현은 지금 시점에서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들의 설득에 못 이겨서 철수를 결정하긴 했으나,
눈앞에서 ‘드라우프니르’를 뺏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지능이 높은 놈치고 이상할 정도로 도를 넘은 집착이긴 했으나,
제 부상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눈이 돌아간 놈이니 역으로 기회라고 할 만 했다.
그런 류 현의 확신은 그의 주먹이 놈의 머리통까지 20센티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까지만 해도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의 반쪽짜리 투구를 쓴 머리가 자신을 향해 내려오고,
섬뜩한 예기가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마스터!”
“류 현!”
류 현의 입장에서는 오른쪽 골반에서부터 가슴을 가로질러 왼쪽 어깨로 튀어나오는 궤도로 그어진 회색 선을 그는 뒤늦게 발견했다.
왼쪽팔만으로만 휘둘러졌다기에 는,
근력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물리법칙을 무시한 것처럼 내쏘아진 검기는 류 현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타이밍을 노린 것 같았다.
‘이런...!’
방어적 자세를 취할 겨를도 없었다.
있는 대로 끌어올린 마력만으로 때우기 위해 입을 악무는 순간,
우웅! 슈슉!
머리 위에서 닥쳐든 화련의 제지와 밑에서 치고 들어온 승하의 찌르기가 양자의 사이를 가로 막았다.
파창! 키이이! 츠익!
그 결과는 어떻게 봐도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었다.
“언니!”
화련이 펼친 격리 공간은 검격을 잠깐 멈칫하게 하는 수준이었고,
승하가 내지른 찌르기는 검 채로 토막이 났다.
둘 사이에 끼어든 승하에게 기다란 검상이 남은 것은 물론,
류 현의 가슴께에도 피가 치솟았다.
검상의 깊이로 따지면 그가 입은 상처가 더 깊었지만,
재생력과 체력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문제가 될 쪽은 승하였다.
류 현은 자신보다 멀리 나가떨어지려는 승하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다.
“어?”
머리가 핑 돌았다.
그 직후 류 현은 제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통증 외의 이질적인 기운이 날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로 인해서 진작 닫혔어야 할 상처에서 계속 피가 솟구치고 있다는 것도.
‘염병!’
류 현은 손 끝에 마력을 담아 환부를 아예 파내버리곤,
회색 오러를 끌어올려 나가떨어진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승하에게 있는 대로 퍼부었다.
어지간하면 마력 소모가 거의 없다시피 한 버프에 마력이 쭉쭉 빨려나갔다.
승하가 거칠게 기침을 하며 정신을 차렸다.
“콜록! 크헉...저게 대체 뭐...”
류 현은 대답해주지 못하고 그녀를 뒤로 집어던졌다.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돌아볼 새는 없었다.
‘그것’이 있는 힘껏 검을 내려쳐왔으니까!
류 현은 황급히 오른쪽으로 구른 후 땅을 짚은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후욱! 그의 의지를 따라 검은 안개가 화산의 용암처럼 치솟았다.
제 발치에서 전에 호되게 대인 검은 안개가 치솟자 ‘그것’도 바로 연격을 이어가지 못하고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난 놈이 바닥에 떨어져있던 ‘드라우프니르’를 툭 차올려 하나만 남은 제 손목에 쏙 집어넣는 것까지 보고나자 절로 이가 갈렸다.
“괜찮아요? 피가 아직도...”
승하를 회수한 화련이 바로 그에게 붙었다.
“라가 로드 때랑 비슷하군요. 승하 씨는 괜찮으십니까?”
“...5분 이상은 못 싸우겠는데. 한 번 더 당하면 바로 리타이어야. 진짜 못 버텨.”
대꾸하는 승하의 목소리에는 평소 같은 장난스럽게 드러내곤 하던 자신감이 빠져있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정말 순간적으로 삼도천을 봤다고 느꼈을 테니까.
류 현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라가로드 ‘구엘 뒤 굴락’이 그를 밀어붙였을 때 재생력을 억제하는 걸 넘어서 역으로 그를 파먹으려던 것과 비슷한 작용을 했으니까.
마력양도, 항마력이나 육체 강도도 자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승하는 조금만 조치가 늦었어도 바로 리타이어 했을 것이다.
‘...‘구엘 뒤 굴락’이랑 비슷하지만 다르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해 류 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흰자위에 검은 빛이 들어차고 동공에는 허연빛이 검은 부분을 찢고 나왔다.
‘강림’!
거대한 힘의 유동에 한 차례 찢겨나갔던 속이 터져나가며 끔찍한 통증이 그의 집중력을 흩어놓으려고 했으나,
그는 실수하지 않고 검은 기운을 제 통제 하에 놓았다.
가까이 붙어있던 두 여자가 흠칫하고 그를 돌아봤다.
“류 현?”
“마스터?”
“어중간하게 몸 사리면 여기서 몸도 못 뺄 겁니다.”
그의 속내는 말과는 조금 달랐다.
‘종이몸에 비해서 공격력이 상상 이상이다. 나나 승하나 상성도 안 좋고. 놈이 추스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한다.’
움켜쥐는 오른 손에 저번의 배는 넘는 힘이 담긴 건 그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검은 안개가 아닌 검은 기운만으로 이루어진 구체가 달려오려던 ‘그것’을 집어삼켰다.
움켜쥔 주먹위로 아지랑이처럼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류 현은 승하를 곁눈질 하며 말했다.
“한 번 정도는 휘둘러 주실 수 있겠지요?”
“한 번은. 대신 목을 노릴 거야. 저 갑옷 뚫고 나서 벨 정도로 힘이 있을 거 같진 않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제가 앞에 설 테니 안 되겠다 싶으시면 빠지시면 됩니다.”
“아니, 저거 상대로 다시 붙겠다고요?”
“지금 아니면 더 곤란해질 겁니다.”
류 현은 화련에게 대꾸해주며 아직 바닥에 반쯤 드러누워있던 승하를 일으켜주었다.
아직 여파가 남았는지 고개를 두어 번 터는 모습이 영 불안불안 했지만,
자신도 만전과는 거리가 멀어서 화력이 충분하다고 자신할 순 없었기에 뒤로 빠지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정말로 몸을 못 가눌 정도라면 스스로 빠졌을 것이다.
‘이번 공격으로 단 번에 못 죽여도 놈에게 우리보다 더 큰 타격을 줘야 해.’
그는 남은 손으로 유성우를 꺼내 쥐었다.
검은 기운으로 반지 테두리를 갉아내자 안에 깃든 사나운 불꽃이 그의 손아귀를 뚫고 나올 것처럼 꿈틀대었다.
류 현이 달려 나가려던 순간,
퍼엉! 쒸익! 검은 구체가 쩍 갈라지더니 그것을 가르고도 힘이 남은 검기가 그의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류 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것을 피했으나,
그것이 놈이 노리던 반응이었다.
갇히기 전보다 육안으로 봐도 가벼운 상태가 된 놈이 텔레포트라도 한 양 거리를 좁혀왔다.
류 현 조차 연속 동작의 잔상이나 쫓을 수 있을만한 순간가속.
그는 몸을 트느라 열린 상체 위로 찔러 들어오는 찌르기를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직감했다.
‘그래, 주마.’
저 진득한 마력에 심장이 날아가면 자신도 멀쩡하게 넘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류 현은 팔을 어설프게 내밀어 찌르기 궤도를 막기 보다는 놈의 하나 남은 어깨 움직임에 집중했다.
놈의 칼을 몸으로 지체시키고 팔을 뽑아버릴 작정이었다.
섬전같은 찌르기가 음속의 벽을 뚫고 그의 심장을 뭉개버리려던 찰나,
류 현은 자신의 간격 안에서 시간마저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존재를 포착했다.
방금 전처럼 아래쪽에서 치고 들어온 승하가,
트랜스 상태에 돌입한 그녀의 검이 닿을 수 없는 시간 내에 ‘그것’의 검과 격돌했다.
키가각! 끼이이! 빠카앙!
한 호흡조차 길다고 할 만한 순간에 승하의 검이 두 줄의 선을 그려내고 부러져나갔다.
그 주인인 승하도 엉망으로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찌르기 궤도가 조금 높아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류 현은 그 값이 비싸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의 찌르기의 직선상에 있는,
시야 상의 모든 것들이 짓이겨졌으니까.
알 라시드의 소식을 듣고 달려오던 의료진이나 충원되고 있던 병력들,
다른 인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흔적이 핏물로만 남은 지붕부터 1층까지 쪼개진 건물까지.
마력을 품은 플레이어의 인체가 아닌 건물들은 절단면이 베일 것 같이 날카로운 모습이 그저 커다란 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기척도 없이?’
자신도 이만한 힘을 다루지 못해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놀람은 아무런 힘의 유동을 못 느꼈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기껏해야 대인 수준의 힘이 담겼을 거라고 생각한 찌르기.
마력 작용을 보고 ‘구엘 뒤 굴락’과 비슷하다고 여겼는데 이건 아주 결이 달랐다.
목표 달성에 실패한 ‘그것’이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올라갈수록 검은 빛깔의 마력검이 검 위로 끓어올랐다.
‘마력검?’
류 현은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몸을 날렸다.
기는 것처럼 낮은 자세로 내달리는 그의 두 팔이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것처럼 피부 아래가 들끓어 올랐다.
당분간 양팔을 포기하게 될 지라도 놈을 막을 생각이었다.
그에 응해 ‘그것’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던 것이 그를 놀리기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려치는 동작은 한 팔로 행하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순간 검 끝의 움직임을 놓친 류 현은 중상을 각오하고 더욱 가속했다.
그의 머리를 노린 검이 그의 정수리에 닿고,
류 현이 자신의 간격안에 ‘그것’을 집어넣는데 성공한 그 순간,
슈슉! 화련이 류 현의 머리 위로 던져놓은 승하가 다시금 시간을 희롱하는 검술을 선보였다.
이미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승하는 그 몰골이 무색하도록 침착하게 검을 ‘그것’의 궤적과 반대로 그어 올렸다.
츠걱- 쉬잉!
승하의 검은 접촉을 단 1초도 버텨내지 못하고 버터마냥 잘려나갔다.
그러나,
당황을 표하게 된 것은 ‘그것’ 쪽이었다.
류 현의 몸을 쪼개고 그 밑의 대지에 커다란 상흔을 남길만한 힘이 검의 질 차이 때문에 다 내뻗지도 못한 검격에 전부 상쇄된 것이다.
허공에 검을 내리긋다가 덜컥 멈춰선 놈의 틈을 류 현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콰직! 꾸지직!
주먹이 아닌, 갈고리처럼 펄친 다섯 손가락은 검은 기운의 보조에 힘입어 놈이 걸친 사슬갑옷과 판금갑옷이 뒤섞인 갑옷을 뚫고 들어갔다.
상상이상의 방어력에 박아넣은 손가락의 살점이 다 떨어져나갔지만 류 현은 망설이지 않고 팔 안에 끌어다 놓았던 힘을 모조리 손가락을 통해서 때려 부었다.
꾸웅! 푸화학!
피처럼 쏟아져 나온 검은 것들이 둘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