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9화 〉탐식마(貪食魔)
“진짜 갈 거야?”
평소와는 달리 자신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우리가 언제 남아서 상대 해주겠다고 했었나?”
대꾸하는 승하는 그것마저 마음에 안든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현했다.
알 라시드는 최대한 억울함을 어필하는 표정으로 그녀 옆에 있는 류 현을 곁눈질 했으나,
류 현은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대꾸를 대신했다.
명백하게 승하의 발언에 동의한다는 제스처.
‘젠장, 대체 그 사이에 뭘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알 라시드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흘 전만 해도, 아니 어제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자신이 제시한 ‘드라우프니르’의 실소유권 양도에 혹한 것처럼 엉거주춤한 태도긴 하나 떠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건 류 현 한 명에 국한된 일이긴 했으나,
용잡이 팀의 특성상 류 현의 뜻이 곧 팀의 방침이 된다는 것을 알 라시드는 잘 알고 있었다.
X던전 동행으로 직접 본 바가 있고,
‘비아트리체’ 생중계를 보고 난 뒤로는 그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가지게 되었다.
저렇게 강하면서 자기희생적인 우두머리를 어떻게 따르지 않겠는가?
목숨을 아끼는 작자들이라면 진작 팀에서 이탈했을 터이니 류 현의 팀 장악력은 당연한 것이라고 그리 여겼었다.
실제로도 알 라시드의 생각은 딱 맞아 들어갔다.
첫 날에 말 몇 마디를 보태긴 했으나,
두 여자는 기본적으로 저들의 대장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했다.
둘의 실력이나 중계 이후 치솟은 위상을 생각하면 외부 평가를 모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순했다.
특히 아는 바가 많은 검성 쪽은 다른 관계가 더 있나 싶을 정도로.
알 라시드 입장에서는 상당한 호재라고 할 만 했다.
팀원들이 머리가 커져서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면 자신이 쳐다도 못 볼 실력자 셋을 상대로 일일이 협상내용을 조율해야할 판이었으니까.
그 류 현이 당장 혹해서 수락의 뜻을 내비치진 않았지만 클랜에 머물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신호다.
알 라시드는 불안 속에서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 외부 고문들과 원로까지 모은 회의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파투나고,
여태 별 말없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던 용잡이 팀이 귀국을 통보해 온 것이 아닌가?
대가로 제시할 ‘드라우프니르’에 대한 협상은 깨졌지만 당장 그들이 떠나면 ‘그것’에 대한 대응책을 떠올리기도 힘든 알 라시드는 부리나케 류 현을 찾았다.
불행히도 그를 맞이한 건 류 현이 아닌 검성 나승하였고,
그녀는 제 검술 실력만큼이나 칼같이 그의 애원을 잘라냈다.
그리고 지금,
알 라시드는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귀국길에 오르려는 세 남녀를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붙잡았다기에는 그들은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았지만.
“아니,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우습게 들릴지 모르진 않지만...우린 ‘그게’ 다시 돌아오면 이걸 지킬 여력이 없어. 세 번째든, 네 번째 습격이든 간에 결국 뺏길 거라고.”
“웃긴 걸 알면 말이나 말 것이지.”
승하는 코웃음 쳤다.
“어차피 협상도 파투났잖아. 안 그래? 받을 걸 못 받게 됐는데 우리가 무료 봉사를 해줘야 할 정도로 친했던가?”
“일 주일, 아니 사흘만 더 시간을 주면 설득할 수 있어.”
알 라시드는 스스로 말을 뱉으면서도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설득?
결국에는 할 수 있긴 할 것이다.
칼리프 클랜은 ‘드라우프니르’를 노리고 있는 ‘그것’을 막을 전력이 없으니까.
당장 눈앞의 손익에 눈이 벌개져서 안 된다고 거품을 물던 늙은 돼지들도 클랜의 전력이 퍽퍽 깎여나가는 걸 보면 하기 싫어도 생각을 달리하게 될 테지.
무엇보다 어제 회의에는 자파르 알 사디크가 부상 때문에 불참했었다.
실무와는 거리가 멀다 못해 발 한 번 담가본 적 없는 작자들이 목소리를 그렇게 높일 수 있었던 것도 알 사디크의 부재 때문이었다.
알 사디크가 다시 자리에 돌아온다면 판도가 확 뒤집히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반반 수준까지는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사흘 안에 일어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알 라시드 본인이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알 사디크가 입은 타격은 외상 정도와 무관하게 다음 분기까지 활동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했다.
흘러들어온 마력이 1할 정도만 더 많았더라면 재기는 꿈도 못 꾸었을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클랜의 비상사태에도 회의에 참가 못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사흘 안에 알 사디크가 회의에 참석할 정도로 회복을 한다고 해도 바로 알 라시드의 대안을 받아들인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한 번 대판 싸우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알 사디크가 이룰 수 없는 망상을 꿈이라고 여기는 머저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야망이 없는 사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에게 호되게 대여 봤으니 더 ‘드라우프니르’의 소유에 집착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잠깐 동안 처참하게 당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힘에 대한 갈망이 훨씬 커졌을 터.
정말로 목숨이 간당간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고선 경지를 진일보 시키는 것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유니크 아티펙트를 연구하는 게 훨씬 빠를 테니까.
쉽사리 ‘드라우프니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것을 실질적으로 양도하게 되는 대상이 그에게 처음으로 위기감을 심어준 남자다?
설득하는데 만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사흘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알 사디크가 온전하게 의식을 회복했다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지연시킬 수 있는 상태까지 도달하는데 드는 시간이 그 정도였다.
류 현 본인이 ‘드라우프니르’에 꽤 미련이 있어보였기에 알 라시드는 이 설득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다.
유감스럽게도 류 현 대신 협상창구로 나선 승하는 지나치게 단호했다.
“그 사이에 그게 다시 들이닥치면 우리가 막아주고. 너희는 어영부영 또 시간 보내고?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유분수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영감님이 누워있어서 지금 당장은 깔끔하게 넘겨줄 수 없는 거. 그쪽도 다 알잖아?”
“그래, 그래서 이만 가보려는 거야. 알 사디크가 못 일어나고 있는 이상 너 혼자서는 원로회고 이사회고 설득 못하는 거 뻔히 아니까. 그 인간들은 우리가 체류하는 동안 그런 식으로 써먹으려고 들 테고.”
“......”
“어지간하면 너희한테 속아주고 물건 받아가고 싶은데 우리도 그렇게 넉넉한 상태는 아니어서 말이지. 우리 대장님이 너희 대장 살려주느라 무리해서 몸조리도 해야 하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어제 회의에서 정말 그런 말을 하는 외부 고문이 한 명 있었으니까.
그걸 듣고 좋은 생각이지 않냐고 자신에게 확인을 빙자한 강권을 시도하던 작자까지.
알 라시드는 어제 처음으로 제 파벌을 만들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아마 알 핫산이 끼어들어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그곳을 갈아엎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들에게 달려간 것인데,
자기들끼리 대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인지 이틀 사이에 상황이 이렇게 변한 것이다.
시중 핑계로 하잘이라도 붙여놓고 있을 것을,
중간 중간에 그들을 들여다본다는 핑계로 나와 볼 것을.
때 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최선은...그만 매달리고 아직 덜 똥칠 된 부분이라도 남겨두는 거겠지. 젠장.’
한 숨과 함께 그는 후회를 조금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티끌만큼이라도 호의적인 이미지를 남겨둬야만 했다.
“좋아, 알았어. 내가 붙잡을 권리는 없지. 근데 잠깐만 시간을 내주면 안 되겠어? 우리 영감님도 구해줬는데 빈손으로 돌려보낼 순 없지. 영감님 깨면 불호령이 떨어질 지도 몰라.”
“...그 팔찌는 아닐 거고. 뭐 주게?”
“그쪽 팀한테 거래 걸만한 물건이야 ‘드라우프니르’ 정도지만, 답례품으로 줄만한 물건이 없진 않아. 저번에 보니까 쓰는 검이 썩 마음에 안 차던 거 같던데.”
승하는 이번에는 저가 대답을 내놓지 않고 슬쩍 눈알을 굴려 류 현을 봤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칼리프 클랜 창고에 있는 물건이면 차고 넘치지요.”
“야,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검도 제대로 못 구하고 다니는 거 같잖아.”
“좋은 검은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검이라는 게 만들어달라고 몇 십 자루 씩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강 찬 씨한테 부탁해도 공급이 소모되는 속도를 못 따라갈 겁니다.”
“그야 그렇지만.”
알 라시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1시간 뒤에 다시 보자고. 준비가 조금 필요하거든.”
***
“아니 뭔 창고 하나 여는데 이렇게 요란을 떨어?”
승하가 드물게 목소리를 죽여 가며 투덜거렸다.
류 현은 빙긋 웃으며 앞을 향해서 턱짓했다.
“칼리프 클랜의 창고지 않습니까. ‘마탑’ 마스터도 들여다보고 싶어서 혈안이 된 그 창고요.”
“그래봐야 안 쓰는 물건이나 잔뜩 쟁여놨을 텐데.”
“근데 좀 과하게 요란하긴 하네요. 저 인원들 다 합해봐야 언니 하나 못 당할 텐데. 뭐 저렇게까지 한데?”
“아마 지금 와있는 원로회나 외부 고문들 때문이겠죠.”
승하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고,
화련은 그들 앞에 운집한 플레이어 무리를 하나하나 꽤 세심하게 살폈다.
류 현은 화련보다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들의 숫자만 헤아렸다.
‘서른이라. 좀 많긴 하네.’
창고 개방에 동원된 인원치고는 지나치게 많았다.
왜 이렇게까지 모았는지는 알만 했지만 선물 받는 판에 긁어 부스럼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알 라시드가 선물을 쥐여 보내서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처럼,
류 현도 ‘드라우프니르’에 대한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칼리프 클랜의 심기를 긁을만한 일은 자제할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선을 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였으나,
알 라시드의 태도를 보면 선을 넘은 이후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저쪽도 저쪽대로 고생이 많네. 알 라시드가 아예 클랜을 장악해주면 나쁠 게 없을 거 같은데...그건 힘들겠지?’
알 라시드가 들었다면 대경실색했을 생각을 하던 류 현의 귀에,
“출발하자고!”
플레이어 무리에 둘러싸여 있는 알 라시드의 외침이 들려왔다.
승하가 어이없다는 듯이 한 소리 더하고 류 현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들의 뒤를 따르려던 순간,
쿠웅! 푸화학! “알 라시드 님을 둘러 싸...끄르륵...”
“알 라시드 님!”
“젠장 물러서 병신들아!”“독이다! 들이마시면 커헉...!”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무리 한 가운데에 검은 인영이 내리꽂히더니 알싸한 독안개가 터져 나왔고,
카가각! 끼우웅! 스칵!
그 안개가 퍼져나가 옅어지기도 전에 비릿한 피비린내가 추가 되었다.
“젠장!”
류 현은 그 피비린내의 주인이 알 라시드라는 것과,
그 피를 탐하고 있는 인영의 존재가 전에 보았던 검은 인영이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