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8화 〉탐식마(貪食魔) (408/429)



〈 408화 〉탐식마(貪食魔)

인도 북쪽 국경에 위치한 인간들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화이트 던전은 게이트 밖으로 피비린내가 새어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산혈해.
그 말이 아니면 제대로 표현했다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던전의 주인인 세 마리의 블랙 라미아는 도살장에 내걸린 고기들 마냥 근처에 창처럼 솟은 나무 여기저기에 걸려있었다.
하나 같이 인간형 부분이나 뱀부분이나 할  없이 머리 부분이 뜯겨져나가 따로 모여있는 사체들은,
절단면 외에는 비늘에 상처조차 없어 기괴함이 배가 되었다.

보스 몬스터였던 블랙 라미아 외에도 다른 괴수들의 갈기갈기 찢긴 시체들 또한 도처에 널려있었다.

이 참혹한 광경을 연출한 장본인,
아니 존재는, 세 마리 블랙 라미아 중 가장 크고 독했던 놈의 가장 굵은 꼬리마디에 고개를 쳐 박고 있었다.
뒤에 내팽개쳐둔 ‘파슈파타’에는 핏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으나,
놈의 몸뚱이 곳곳에는 섭식으로 인한 흔적들이 여실히 남아있었다.

딱지처럼 말라붙은 핏자국이나 아직도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내장 부스러기와 살점.
그랬다. 놈은 없던 입까지 만들어내서 토막친 괴수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렇다고 류 현처럼 아주 멀쩡하게 그 일을 행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피어오르는 허연 연기는 다른 괴수들이 가진 독기가 같은 괴수인 놈에게도 주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그 목적을 이루어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놈은 하던 짓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고통스러웠으니까.
별 소득이 없는 짓일 지라도,
이 고통을 멈추기 위한 노력이라도 해야만 했다.


블랙 라미아의 사체 위로 헤엄치려는 것처럼 안으로 파고들며 허우적거리던 놈이 고개를 든 것은,
 체고만한 굵기의 꼬리마디를 반쯤 파고들고 나서였다.


눈, 코, 입을 포함해서 안면 근육도 없이 머리 부분에 턱만 벌어진 놈이었기에 표정이 있을 수는 없었지만,
놈을 처음 보는 일반인이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 놈은 그 흉흉한 기세로 사방을 찌르며 짜증을 표현하고 있었다.
놈의 주변에 널린 사체들 중 생전에 약했던 것들에 갑자기 구멍이 뚫리며 놈의 분노가 허상이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놈은 마지막 인간 목격자인 라비 라자와 맞닥뜨렸을 때와 꽤나 달라진 상태였다.

사슬갑옷의 좌반신이 사슬갑옷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판금 갑옷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변화가 그리 깔끔하게 마무리가  건은 아니라,
멀쩡한 판금 갑옷이 아니라 한  녹아내린 판금 갑옷 같은 꼴이었다.
치렁치렁하게 무릎 위쪽까지 늘어지던 부분을 녹여 편 것인지 그리브나 사바톤까지 구현되어 있었다.

딱 몸 중앙을 기점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에 가까워질수록 일그러짐 형상이 심해지다가 사슬갑옷 본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 외견도 기괴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오른쪽 어깨부분이었다.


오른 팔꿈치 위쪽 상박부는 남아있었던 당시와는 다르게 놈은 어깨부분까지 바짝 깎여나간 상태였다.
놈이 스스로 한 짓이었다.

절단면 주변부에는 마주잡이로 쥐어뜯은 흔적이 역력했다.

문제는,
그렇게 도려낸 환부에도 부글부글 끓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놈은 차마 그 부분을 직접 쥐어뜯진 못하고 그 근처를 뜯어낼 것처럼 꽉 쥐고 ‘파슈파타’쪽으로 다가갔다.
고통에 헐떡거리는 것처럼 놈의 어깨가 불규칙하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스릉- 유니크 아티펙트는 바닥에 팽개쳐졌던 말든 여전한 날카로움을 자랑하며 공기마저 벼려냈다.

‘그것’은 검을 땅바닥에 내려찍을 것처럼 아랫방향으로 곧추세우곤,

푸스스! 라비 라자를 혼수상태에 빠뜨린  무겁고 끈적한 마력을 밀어 넣었다.

의식과 무의식을 영역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라비 라자의 마지막 생각과는 달리,
이것이 이 마력의 올바른 사용방법이었기에.


생명체를 직접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한 도구에 대한 것으로 마련된 마력은 물 만난 고기마냥 신명나게 날뛰었다.


변화는 검자루 끝의 무게추부터 시작되었다.

치지지! 뭔가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소리가 환청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무게추가 검게 타들어갔다.


단순해 보이는 겉보기 변화와는 달리,
이 자리에 상위 플레이어가 있었다면 아마 기절할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


검의 존재감이,
유니크 아티펙트라는 규격외의 물건의 존재감이 ‘그것’에게 삼켜지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이것이 필생의 사명인 마냥 마력을 쏟아 부었다.

그런 것치고는 진행속도는 꽤나 지지부진한 편이었다.
‘그것’이 저번의 아픈 경험을 잊지 않은 것처럼 제 오른쪽 어깨를 살펴가며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5분에 1센티를 나아가는 수준이었으나 ‘그것’은 인내심 있게 살피고 진행하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푸쉬익! 철퍽- 검자루를 넘어 크로스가드의 반을 조금 넘어가자 어깨의 환부에서 말썽이 터져 나왔다.
끓는 기름에 물을 들이부은 것 마냥 미쳐 날뛰며 ‘그것’의 신체가 뚝뚝 흘러내렸다.
통각이 없을 것처럼 보이던 놈도 그 고통을 아주 무시하진 못했다.

실제로 통각이 없었다고 한들, 이 고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존재가 뜯어 먹히는 기분은 유기물적 특성을 넘어,
의식이 있는 존재라면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이니.


[캬아아아!]

놈은 자신을 이리 상처입힌 인간 앞에서도 지르지 않았던 비명에 가까운 흉성을 내지르며 거머쥔 검을 오른쪽 어깨에 들이댔다.


승하와  현의 예상을 깨부수는 마력검의 불길이 훅 치솟았다.
마력검의 빛 때문에 검보다는 형광등을 든 것처럼 보일 때쯤 놈은 제 몸에 칼날을 들이댔다.

키기기기! 치이이! 놈은 환부에서 조금 떨어진 부분을 말 그대로 깎아냈다.
걸친 갑옷은 살아있는 생물마냥 알아서 오그라들며 칼질을 피해갔다.

 몸을 깎아내는 고통보다, 환부에서 올라오던 고통이 더 컸는지 제 몸뚱이가 툭툭 떨어져나갈 때마다 놈의 흉성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렇게 1분여동안의 고통스러운 작업이 끝나자 놈은 지체 없이 ‘파슈파타’를 ‘태우는’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캬아아아아!]
놈을 괴롭히던 검은 기운은 조금의 살점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다시금 살아났다.

‘그것’은 한참을 고통에 몸부림치다,
끓어오르는 기세가 조금 주춤해지자 남은 마력을 전부 ‘파슈파타’에 때려 부었다.


전처럼 지나간 곳이 전부 검게 변하진 않았지만,
순식간에 ‘파슈파타’의 전체적인 색감이 어둡게 변했다.

사이사이 변하지 않은 부분의 면적의 총합이 커서 검다기보다는 옅은 회색에 가깝게 변한 정도이나,
실질적인 변화는 그 이상이었다.

‘그것’의 손아귀에 있으면서도 꽤 강렬한 존재감을 홀로 뿜어내던 ‘파슈파타’의 존재감이 놈과 동화된 것이다.

마치 팔이나 다리 같이 신체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물론 그렇게 만든 대가는 컸다.
정확히는 크게 뺏겨야만 했다.

환부를 억누르던 마력이 사라지자 끓어오름 현상의 면적이 확 늘어난 것.
‘그것’의 무릎이 땅에 닿고 고꾸라지러 던 순간,
칼날을 피해 오그라들었던 사슬 갑옷이 움직였다.


양쪽 어깨부분에 박혀있던 보석에서 발한 붉은 빛이 서로 엉키더니 빛으로 이루어진 손을 이루어,

카각- 우지직! 환부를 덮으려고 모여들고도 덮지 못하고 계속 밀려나던 사슬갑옷을 환부 채로 움켜쥐어 그대로 우그러뜨렸다.

그리곤 그대로 빛도 같이 굳어져버렸다.


이 조치에도 통증이 없진 않은 지 ‘그것’의 몸이 들썩거렸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일에 불과했다.

 잠깐이 지나자 놈은 이전과 비교해서 훨씬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
사시나무  듯 떨리던 몸은  이상 떨리지 않았고,
상처 때문에 새어나오던 흉흉한 기세는 존재 자체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그라졌다.


알 라시드와 라비 라자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안정되어 완벽하게 기운을 갈무리했다.

가발과 선글라스 따위를 뒤집어씌우고 일반인 앞에 데려놓는다면 괴수라고 느끼지 못할 정도.
놈은 전보다 훨씬 매끄러운 동작으로 저가 토막쳐 놓은 괴수 사체로 휘적휘적 다가갔다.

푸걱! 찌익- 그리곤 모아놓은 블랙라미아의 머리통을 쪼개어 머리쪽 독샘을 꺼냈다.
닿은 부분에서 타들어가는 소리가 났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고통에 비하면 살짝 긁힌 수준조차 되지 못했으니까.

토막 쳐진 몸뚱이 중에서 덜 뜯어먹은 것들에서도 독샘을 꺼낸 놈은,
블랙 라미아의 가죽을 대충 벗겨내 그것을 주머니 삼아 독샘을 담아 제 허리춤에 묶더니 미련 없이 던전을 떠나갔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 뒷모습은 괴수라기보다는 중세 기사 코스프레를 한 괴짜에 가까워 보였다.


라비 라자가 피습 당하고 쓰러진 지 75시간 째.


놈이 다시금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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