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7화 〉탐식마(貪食魔)
객실로 배정받은 돔형 건물에 틀어박혀 침묵하던 류 현이 가장 먼저 듣게 된 외부 소식은 코앞에 있던 알 라시드의 의향이 아닌,
인도 쪽의 소식이었다.
소식은 휴대폰을 통해 아주 간단하게 전달되었다.
알 라시드의 생각과 달리 그는 귀를 닫고 팀원들끼리 의논 삼매경에 빠진 것이 아니었던 것.
거의 가라앉았다가 다시 미쳐 날뛰고 있는 내상을 진정시키느라 화련이 아예 주변에 결계를 둘러버리고,
승하가 문 근처에서 떠나질 않았지만 면담을 신청했다면 급한 불은 끄는데 들어간 2시간여 가량이 지난 후에는 얼마든지 받아주었을 것이다.
알 라시드는 알 길이 없는 내막이었지만,
그 덕에 류 현은 우선순위를 매끄럽게 정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엑스칼리버’가 털렸다는 거잖아.”
“예. 라비 라자 본인이 연락하지 못할 정도로 꽤 심각한 상태 같습니다.”
“상대를 생각하면 산 게 용한 거지. 살아있다는 거 자체가 좀 미심쩍을 정돈데.”
“원래도 정상적인 괴수랑 거리가 먼 놈 아니었습니까. 아직까지 말을 안 한 것만 제외하면 앞서 나타난 용 두 마리랑 별 다를 것도 없다고 봅니다.”
“마스터는 그게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 보네요.”
“못 하더라도 그 정도 지능은 돌아온 놈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요. 아티펙트 사용하는 놈은 이번이 두 번째 아닙니까? ‘살바토르’나 ‘비아트리체’ 같은 경우는 논외로 두더라도, ‘페릭스’ 수준은 된다고 보는 게 맞겠죠.”
“하긴, 검술 쓰는 괴수 머리 수준이 평범하다는 건 망상도 아니고 그냥 아무 근거도 없는 바람이겠죠.”
“증언들이 다 맞다면 빠르게 성장까지 하고 있는 놈이니 그 이상이면 이상이지 낮을 리가 없지. 결국 그놈도 이름이 안 보이는 네임드 몹이려나. 대체 왜 달린 이름이 안 보이는 거야? ‘페릭스’ 같은 경우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잖아.”
“정보제한 같은 것일 수도 있죠. 당장 고려할 만한 일은 아닌 거 같으니 일단은 네임드 몹을 대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겠죠.”
“벌써 다섯 번째라니...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진짜 숨도 못 돌리게 몰아붙이네.”
“놈이 다섯 번째 라면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일이죠.”
화련이 샐쭉한 얼굴로 이유를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류 현은 기꺼이 응했다.
“갑옷 위는 일부러 피해서 어느 정도 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놈의 몸뚱이 자체는 ‘살바토르’의 비늘보다 약하더군요. ‘비아트리체’를 비교대상으로 놓으면 형편없는 수준이고요. 처음에야 그 기묘한 방어 수법 때문에 좀 당황했지만 강도 자체는 다섯 번째라고 생각하기 힘든 수준이었죠.”
육체 강도는 중요하다.
자체적인 방어력은 물론이고, 공격력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
괴수의 공격이 빌딩을 과자처럼 부숴버리고,
도시 한복판에 화산 분출구 같은 것을 조성하거나,
화기를 바보로 만드는 쉴드 구성도 모두 마력으로 인한 것이니까.
당연히 체내에 들어찬 마력을 통과시키는 파이프라인은 튼튼할수록 나쁠 게 없다.
네임드 몹들이 하나같이 정신 나간 육체 강도를 가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예외들은 하나같이 그 상대적으로 취약한 육체를 커버할 괴상한 능력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말이다.
평상시에는 모든 공격을 무시하며 일방적으로 공격해오던 ‘페릭스’,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해서 깨달음을 얻은 승하의 검격에 다소 허무하게 스러졌지만 고정된 육신이 없는 괴수의 끔찍함을 보여준 ‘업화의 아이들’,
아예 몸을 갈아타면서도 쇠하지도 않으며 다른 의미로 정신 나간 방어력을 보여준 ‘구엘 뒤 굴락’.
조금 다른 예시로,
‘비아트리체’에 비하면 유리대포 소리가 이상하진 않지만,
공격일색으로 일관하며 제 방어력을 끌어올리던 ‘살바토르’도 있었다.
위의 두 가지 경우처럼 봤을 때 대처법이 감이 안 잡히는 특수능력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무너뜨리기 힘들다고 당시에 여실히 느꼈었다.
봐주는 상황 임에도 타겟을 하나 찍을 때마다 꼼짝을 못하게 만들던 다채로운 마법의 향연은 아직도 떠올 릴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들게 하기 충분했다.
그런 놈들도 네임드 몹 기준에서나 몸이 약한 것이지 육체 강도 자체만으로 화이트 정도는 찜 쪄 먹을 수준은 되었다.
그 이질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마력을 담고 있으려면 최소한의 육체 강도는 가지고 있어야만 했으니까.
괜히 승하가 느리고 조절도 빡세서 유지력이 떨어진다는 검은 검기를 투사하는 싸움법을 아직도 포기 못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보통 마력검으로는 그녀가 아무리 달인의 기교를 발휘해도 칼날이 기적적으로 들어가도 중간에 칼이 부러지고 만다.
그렇지 않아도 마력검으로 인해서 손상이 누적되는 검을,
괴수의 쉴드와 몸뚱이 내에 흐르고 있는 마력이 실시간으로 녹여버리는 것이다.
류 현이야 가진 능력이 생명체의 하드 카운터라고 할 수 있는 것들뿐이니 그 방어력을 무시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조차 무기를 쓰는 것은 손을 놓은 지 좀 되었다.
자신의 마력검 경지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이라도 버텨내면 어떻게든 써보겠는데,
전생과 비교해서 월등히 높아진 경지와 늘어나고 밀도가 높아진 마력을 무기가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괜히 브류나크 같은 일회성 무기만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상대해야하는 네임드 몹의 쉴드나 체내 마력, 비늘이나 가죽의 방어력까지 감안하면,
끊임없이 터졌다가 재생하길 반복하는 제 몸뚱이가 그나마 위력이 제대로 전달되는 유일한 무기였다.
그런 처지에 놓인 류 현이 제 경험을 토대로 견적을 내봤을 때,
‘그것’의 육체강도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준 네임드 턱걸이도 아슬아슬 해보였다.
그 지능과 검술을 쓴다는 이질감,
그것도 그 검술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위험도 랭크가 크게 떨어지고 있진 않았지만,
부딪혔을 당시 스펙 견적을 내보면 지금의 류 현도 충분히 승부해볼만 했다.
그 때 보인 것이 전부일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제 오른팔을 잘라먹고 줄행랑 놓을 정도로 몰렸던 놈이 숨기고 있는 패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때를 놓치는 게 더욱 우스운 일.
놈의 검술이 기억을 되찾는 것 마냥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검술이 늘고 있다는 부분이 예상이하더라도 빨리 처리하는 게 낫습니다. 놈이 유니크 아티펙트에 집착하고 있는 건 사실이고, 감지능력을 가진 것도 확실하니 놈에게 적응시간을 줄 이유가 없죠.”
“...마스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토하던 거 벌써 잊었어요?”
“그러게. 류 현 너 아까 입은 내상도 다 안 가라앉았잖아. 내가 다 피부로 마력 파동을 느낄 정돈데. 너 지금 속이 부글부글 끓고 난리도 아니지?”
정답이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시험도 못 해본 방식으로 힘을 쓴 건 그가 아무리 튼튼해도 대가가 없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승하가 피부로 그의 상태를 느낄 수 있는 건 류 현이 내부의 동요를 숨기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두 여자를 믿었기에 내보일 수 있는 속사정.
그래도 칼리프 클랜의 본부에 있으니 이 문을 나가자마자 억누르기에 힘을 써야 할테지만 말이다.
“아예 전투 불능 수준까진 아닙니다. 인도 측 증언에 따르면 잘린 오른 팔이 그대로 라고 하니 기회가 될 때 빠르게 처리하는 게...”
“네임드 급이라고 생각하신다면서요. 이 상태로 붙으면 전 텔레포트 셔틀 노릇이나 겨우 할 텐데.”
“나도 지금은 그 상태 3초도 유지 못해. 그놈 기술이 보통이 아니라면서? 진짜 너 혼자 할 거야?”
“저라고 이 상태에서 싸워야 하는 게 달갑겠습니까. 워낙 이질적인 놈이니 시간을 더 주는 게 곧 리스크가 될 수 있으니...”
“알아. 안다고. 근데 니가 네임드 몹 같다니까 이러는 거지. 아니 뭔 텀이 자꾸 줄어든데? 계소사냥 난이도는 늘어만 나는데. 진짜 양심도 없나.”
“마스터 예상대로 진짜 네임드 몹이면 내빼야할 때 제가 이런 상태면 텔레포트가 제대로 안 될 가능성이 커요. 이번에는 ‘천공성’도 못 쓰니까.”
여기까지 말하자 류 현도 자기 의견만 밀어붙일 순 없었다.
두 여자는 다른 것도 아니고,
당장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인원인 자신이 혼자 싸우다가 예상 못한 위험에 빠질 것을 우려해서 이러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네임드 몹에 대한 대응을 상정 중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하게 된 걱정이기도 했고.
“거기다가 그게 ‘엑스칼리버’도 훔쳤다면서요. 승하 언니처럼 마법검은 못 쓰더라도 공격력 증강이 꽤 클 거 같은데.”
“맞아. 그거 검 자체가 끝내줘. 아티펙트 발동시킬 줄 안다는 건 그 갑옷만 봐도 뻔하니. 마력검은 안 써도 공격력은 확 늘었겠지.”
승하의 첨언에 화련이 ‘이래도 강행하실 거에요?’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류 현은 결국 두 손을 들어야만 했다.
“저도 무조건 붙자고 결론을 내려놓은 건 아닙니다.”
“거짓말. 방금 전까지 몰아가고 있었으면서. 너 전처럼 우리가 어어 하고 끄덕거렸으면 그대로 들이박을 생각이었지?”
류 현은 승하의 태클을 못 들은 척 헛기침으로 넘겼다.
“흠흠, 최종 결정은 알 라시드 씨와 얘기를 좀 나눠보고 할 겁니다. 칼리프 클랜이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리스크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겠죠. 지금까지 상황들로 유추해 볼 때 놈이 노리는 건 유니크 아티펙트. 지금은 ‘드라우프니르’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 듯 하니. 유인하는데 조금만 협조를 해주면...”
“하, 그놈들이 퍽이나.”
코웃음 치며 반박하는 승하에게 류 현은 어떤 반박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 가망성은 낮아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녀들을 설득하려고 승하가 말한 것처럼 천천히 밑밥을 뿌려온 것이니까.
말이 조금의 협조지 용잡이 팀에 ‘드라우프니르’만 맡기는 게 아니면 클랜 내에서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을 최상위 플레이어를 같이 딸려 보내야만 했다.
실력만 좋은 게 아니라 신뢰도 있는 그런 유망한 자를 죽을 지도 모르는 자리에 말이다.
지금의 칼리프 클랜에게 있어서 그건 조금의 협조라고 하긴 힘들 것이다.
거기에,
이전까지 ‘개미지옥’ 건 때문에 류 현을 향해서 뒤에서 여론조작을 행하던 이들이니,
류 현이 모르는 여유 인원이 있더라도 신뢰가 안 간다는 이유로 후자도 거부할 가능성이 높았다.
‘진짜 그냥 돌아갈까? 젠장, ‘엑스칼리버’만 안 뺏겼어도 그냥 돌아가는 건데.’
쉽사리 답이 낼 수 없는 상황에 류 현의 고민만 깊어져갔다.